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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20060704 무엇이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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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a 부산강의-무엇이 현실인가?(1)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가 이 책의 [50인의 신학자들]의 마지막인데, 마지막에는 전체 전부 다를 정리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50인의 신학자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보기 전에 먼저 '현실'이 무엇이냐? 무엇을 가지고 현실이냐?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옛날에는 사람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람 바깥에 현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많은 철학자들이나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의 연구에 의하면, 현실만 있고, '나'라는 것이 사라져요. 그러니까 사라진 주체지요. 이 사라진 주체가 주체라는 게 없느냐? 사라진 거죠. 사라졌다가 불쑥불쑥 나오는 걸 가지고 점멸하는 주체. 깜빡깜빡 거리는 주체.
깜빡깜빡하는 주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한 어떤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깜빡깜빡하기 때문에. 원래 할머니들, 치매 걸린 할머니들이 깜빡깜빡하면, 할머니, 왜 그런 말했습니까? 나, 몰라. 나, 몰라. 내가 왜 그런 소리했지? 나, 잊어버렸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정신이 오락가락 깜빡깜빡할 경우에는 젊은 사람과 달리 자기 행동한 것을 일체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반면에 사라진 주체가 점멸되는 주체가 되면서 무서운 것은, 주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없어지는 건 아닌데 이게 뭐냐 하면, 온리 비주얼이라는 용어를 써요. 온리 비주얼이 뭐냐 하면, 자기 눈으로만 보는 세계가 따로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냐 하면, 편재된 시각? 원격으로, 멀리 보는 게 아니고, 깜빡깜빡 할 때마다 거기에서 나는 세상은 이렇게 본다. 라는 게 나오다가 대번에 꾸깃꾸깃 해서 치워버리고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본다. 라는 자기만의 폐쇄된 시각. 아시겠지요?
니, 왜 그렇게 편재적이고 일방적이냐? 그 이야기에요. 네가 보는 시각만 왜 안 남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사람이 공부를 적게 해서가 아니라 주체 자체가 자기 마음대로 주체를 유지할 수 없고, 현실이 나로 하여금 깜빡이고 나라는 주체를 가지고 노니까 나오는 거예요. 그때그때 대처하려고 하니까 그때그때마다 임시로, 임시변통적으로 구성된 자기 시각을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편재된 시각이라 했지요. 일방적인 시각인데 지금 여기 현실이 우리 주체를 사라진 주체가 점멸하는 주체를 만들고 이것이 점멸한 주체가 일방적인 시각, 아주 자기밖에 모르는 이런 시각인데, 여기 일방적인 시각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의 현실 속으로 이걸 전환시켜버려요. 자기 위주로. 자기도 자기 책임 못 지잖아요. 왜? 점멸하니까. 나, 몰라. 내가 그런 소리했어? 미안해. 끝나버리는 거예요. 일방적인 시각 안에다가 자기 위주의 현실을 다 집어넣어 버려요. 이것까지 포함하면서 이걸 현실로 보자는 것이, 이 50인의 신학자들을 끝내면서 오늘날의 사고방식들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남는 것은 뭐 밖에 없느냐 하면, 현실이라는 혼돈만 남고, 진리라든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하고 하느냐 하면, '거대한 충동'이라고 합니다. 용어가 아주 멋진 용어지요. 거대한 충동, 충동이라 하는 것은 항상 우발적입니다. 불쑥불쑥, 꼴린다하지요. 불쑥 튀어나온 거예요. 거대한 충동으로 남아요. 자, 이 거대한 충동으로 남는 이러한 현실이 된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왜 이렇게 이 세상은 거대한 충동으로 남는 그런 식으로 된 것을 논리적으로 과거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서 이걸 추적해 들어갑니다. 오늘 강의하는 게 이 내용이에요. 어떻게 해서 지금 이렇게 됐는가?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릴게요. 현실이 나라는 주체를 사라지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용납 안한다고요. 좀 알아줘. 해도 안 알아줘요. 내 할 일 바쁜데 니 알아 줄 일 있나. 좀 모이자 해도 안 모입니다. 미쳤나? 니 따라가게. 내 원대로 안 들어줘요. 그럼 나는 그 현실 속에서 뭐냐 하면, 항상 나라는 주관과 주인은 항상 사라질 대비가 돼있어야 돼요. 해봤자 소용도 없네. 항상 자기 자신을 사라질 대비가 없어요. 그러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느냐? 불쑥불쑥 어떤 사건이 접하게 되면 나, 여기 있다고 가끔은 한 소리 한다고.
대구에서 건설 노동자들 데모를 했다고. 월드컵 기간이라고 안 알아줘요. 안 알아줘서 알아주라고 환장을 했다고. 자살에다가 크레인 올라갔다가 월드컵 한다고 알아주지 않는 거예요. 높은 건물 하다가 기어이 알아주는 게 뭐냐 하면, 길거리에 나가 통로를 막는다고. 도로라 하는 것은 사람이 소통하는 곳입니다. 안 알아주니까 빌딩 위에 올라가 크레인 위에 올라가도 이미 그거는 한번 써먹은 거예요.
뭐든지 첫 번째 써먹을 때 알아주지. 두 번째 써먹으면 알아주지도 안 해. 크레인 올라가는 거 이런 것은 부산 하역노동자들 많이 했는데 이걸 늦게 대구 건설노동자들이 하니까 이게 써먹어집니까? 위에 쳐다보려고 하는 놈 누가 있습니까? 또 몇 놈 자살하려는가 보다, 또 데모하는가보다 관심 없어요. 관심이 없어요.
항상 주체를 그러니까 니가 노임을 받든지, 임금을 떼먹든지 관심 없다니까. 그게 현실이라니까. 현실은 우리를 사라지게 만들어요. 옛날에는 누가 이야기하면 귀 기울였다고. 요샌 귀 안 기우려요. 사라지게 만들어요. 데모하는 본인들이 평소에 그렇게 남의 사정 관계치 않고 지만 일하다가 나중에 저녁때면 술 퍼먹고 구워먹고 집에다 누워 자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인데 갑자기 부도나니까 그때부터 날 알아주라고 하는 사건이 주어지니까 주체가 점멸, 깜빡깜빡 그 순간 등장하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 안 알아주지요. 그러니까 길에 데모하잖아요.
이게 뭐냐? 길이라는 하는 것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소통하는 곳이다. 소통하는데 가로막으니까 이것은 뭐냐? 인위적으로 점멸하는 주체가 인위적으로 사건을 만들지요. 원래 길에는 차가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보행자가 자유롭게 해야 될 건데 그걸 데모한다고 가로 누워버리니까 그거는 관심을 안 기울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슈가 되고 사건이 되잖아요. 사건이 될 때 수성경찰서에서 쫓아 왔는기라. 뭐꼬? 도로 막고 왜 그래? 하니까 임금을 너무 적게 줘서 이래가지고 못 살겠다고 데모했다는 거예요.
그때 뭐냐 하면, 그거는 너의 일방적인 시각이다 이 말이죠. 지금은 건설경기가 안 좋고 부동산투기를 막는다고 해서 돈 흐름이 안 좋기 때문에 주택사장님들이 계속 돈이 안 들어오니까 노임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건 일방적인 시각이야. 라고 나올 거 아니냐 이 말이죠. 나오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일방적인 시각이고 뭐고 나는 살아야겠다. 사장이고 뭐고 건설경기 모른다. 난 못 배워서 그런 거 가방 끈 짧아서 모르니까 돈만 올려줘. 하고 자기 위주의 현실성 고수를 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사라지겠지요. 풀렸어요. 한 시간에 오천 원 더 받는다고 끝났어요. 며칠 전에 끝났어요.
사건화 되고 종결되면 주체는 뭡니까? 사라져버려요. 이제는 주체는 없는 거예요. 이것까지 포함해서 이게 뭐냐? 오늘날 현실이라고 학자들은 드디어 규명을 해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거대한 충동만 있는 거예요. 진리도 없고 가치 있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오늘 제가 이야기할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오늘날 이 시대가 충동만 남고 아무 가치도 없는 그런 시대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조사해 보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뭘 이야기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시대에 복음을 어떻게 증거 할 수 있는가? 그걸 이야기해야 되겠죠.
여기 현실에 이런 시대를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물갔어요. 포스트휴먼 세대에요. 뭐든지 끄집어낸다니까. 새로운 걸. 휴먼, 인간상이죠. 이거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고 포스트휴먼, 다른 말로 하면, 몸 이후, 인간 이후. 인간 이후인데 현재 시대를 포스트휴먼시대인데,
포스트휴먼시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스스로 자진해서 자신을 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기계적 사고방식, 스스로 기계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기계 되고 싶어 환장하는 거예요. 이 시대가. 기계가 되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고민이 없어요. 미래가 없어요. 현실이 주어진 대로 살다가 사라지면 그만 이에요. 옛날에는 포스트휴먼 이전에 포스트휴머니즘이니까 휴먼 시대지요.
휴머니즘 시대는 뭐냐 하면, 보다 행복하게가 정해져요. 잘 들으세요. 보다 행복하게 이슈였어요. 20세기에는. 보다 행복하게 하려면 보다 쾌락적으로 나가는데 쾌락은 어디서 오는가? 소비에서 오는 거예요. 자꾸 쌓아만 놓고, 소비는 결국 뭘 증가하느냐 하면, 소유의 증가죠. 주식의 증가, 돈의 증가. 이걸 행복하다 하잖아요. 근데 행복한 것도 귀찮아요. 이 시대가. 21세기 들어와서. 행복한 것도 귀찮아요.
이게 지금 목회, 교회 문 열고 들어윱?사람들이 이게 지금 변했어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속으로 목사님, 행복도 귀찮습니다. 자기 주위에서 전부다 떼 내고 싶어. 기계의 특징이 뭐냐? 내가 남한테 안 도와줘도 되고, 남이 나한테 안 기대도 되고. 마이크가 두 개 있는데 이게 이거한테 기댑니까? 안 기대지요. 그냥 마이크는 마이크고 이쪽은 이쪽인 기라. 서로 안는 바 없어요. 그냥 기계에요.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자식을 낳았다. 떼 내고 싶은 거예요. 이게 40대, 50대 아줌마들. 자식 낳았으면 빨리 떼어내고 노후는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거. 요새 20대, 30대 아가씨들은 아예 애 안 낳는 거. 기계가 무슨 애를 낳아요. 사람이 애 낳지. 20대, 30대 미혼여성들에게 결혼하라 하면, 나에게 결혼해야 될 정당한 이유를 대봐라. 그리고 내 감정은 결혼을 안 하고 싶다. 왜 그러는데? 몰라. 나도 왠지 안 하고 싶어. 말이 상당히 모호하죠. 안 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찝어 주는 게 학자들의 임무에요. 그것은 당신이 기계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스스로 자진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즐거움을 즐기고 싶은 거예요. 인간이 되려면 인간답게 돼야 되잖아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짐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짐스러워요. 인간 자체가 짐 아닙니까? 주일날 그렇게 했지만.
왜 인간답게 돼야 될 이유가, 그러니까 현재 10대 아이들은, 선생님이 야, 인간답게 살아야지. 인간답게 왜 해야 되는데 이유 대보라고. 20대 아가씨들은 결혼 왜 해야 되는지 이유 대보라는 거예요. 10대 애들은 인간답게 돼야 될 이유가 뭔데? 이유가 없어요.
기성세대는 모르지요. 그러면 왜 기성세대는 인간은 보다 행복하게 쾌락을 하던 뭘 하던 소비를 하던 행복하게 하는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왜 오늘날 점점 갈수록 포스트휴먼시대에서는 그것조차 생각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이유를 학자들은 밝혀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문자에요. 의외로 문자에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이게 아까 데모했던 일반노동자들은 이걸 몰라요. 도대체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를 전혀 이유도 모르는 체 살아가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들, 미장질하면서 이것 때문에 바쁘니까 못 하지만 적어도 50인의 신학자들을 끝내면서 현대 신학자들, 현대 철학자들, 신학자들이라 하지만 요새 신학자는 없고 전부다 철학에서 베껴오기 때문에 현대 철학자들은 정확하게 규정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의사소통이 바뀌게 되면 거기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이 다 바뀌게 되어있다 했습니다. 처음에 인간은 문자가 없었어요. 그럼 문자 없이 뭐로 사느냐? 기억으로 사는 겁니다. 이 기억으로 산다는 요거 발견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백 년 전에도 발견했어요. 그래서 백 년 전부터 나와서 기억으로 산다는 이걸 발견하고 난 뒤에 구약, 신약이 바뀌었습니다.
구약, 신약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면, 성경 위주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은 계시를 전승할 때 바리새인들은 기억으로 했다는 거죠. 기억으로 했다가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그게 문자로 바뀝니다. 기억으로 할 때에 세상을 보는 관점과 문자로 할 때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요.
어느 정도 다르냐 하면, 오늘날 50대하고 오늘날 10대하고 대화가 안 통할 정도로 달랐어요. 세대간의 격차가. 여자가 결혼해야지. 50대 이야기입니다. 결혼할 이유가 없습니다. 왠지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20대에요. 서로가 이유를 몰라요. 다만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을 학자들은 밝혀냈습니다.
현재 50대는 어떤 코드가 있어요. 어떤 인생의 규칙이라는 게 원리라는 게 있어요. 현재 20대는 원리라는 것이 수시로 변하고 날아다닌다고 봅니다. 마치 뭐와 같이? 용어에 보면, 액체 같이. 용어도 참, 잘 써. 액체는 줄줄 흐르지요. 액체의 특징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액체의 모양새가 다 바뀝니다.
사고방식이라 하는 것은 저 사람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은 저 사람의 그릇에 담긴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그릇이 저 사람에서 나라는 그릇으로 바뀌어 버리면 나라는 그릇 속에는 그 사고방식이 다른 모습으로 나한테 꽉 맞춘 새롭게 재등장하는 거예요. 이걸 아까 점멸하는 주체라고 하지요. 깜빡깜빡 거리는 거예요. 사건이 있을 때 나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사건이 사라지면 나는 없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걸 사건화 시킬 때는 혼자 끙끙 앓을 때는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사건화 시킬 때는 일을 저질러 버려야 돼요. 10대 애들이 오토바이 불 지르고 허름한 집에다 불 지르지요. 그거 원한 관계로 불 지르는 게 아닙니다. 옛날 10대들은 오토바이 사서 배기통 떼어 버리고 위이윙 밟잖아요. 요새는 그렇게 안 해요. 요새는 불 질러 버립니다. 나로 인하여 벌어진 것이 주위 사람들이 거기에서 불 끈다고 애를 쓸 때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비로소 자기가 주체라는 것을 그 순간만 느낍니다.
그래서 범죄를 하는 이유가 옛날에는 못 먹어서 범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일부러 사건화 만들기 위해서 범죄를 일으킵니다. 그 범죄의 하나가 뭐냐 하면, 판촉이에요. 놀랍게도 경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정보에서는 안 알아줘요. 다른 말로 할까요. 사건화 되지 아니하면 물건이 팔리지 않습니다. 뭐, 되도 안한 것 하나 첨가해서 새로운 기능이 들어갔습니다. 라고 사건화 시키는데 이 사건화 시키는 게 대부분 사기입니다. 범죄에요. 범죄라니까.
다단계 판매 같은 경우에는 물건 같지도 않은 걸 가지고 포장을 해서 이걸 사건화 시키는데 그 자체가 뭐냐? 범죄입니다. 돈이 그만한 가치가 없어요. 다만 당신이 이걸 함으로써 당신이 뜬다는 그 자체가 돈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게 했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가만있으면 돈이 안 들어오고, 나, 여기 있다고 뭔가 빨가벗든지 지랄발광을 하든지 뭔가 내세울 때 주위에서 돈을 뿌린다, 당신에게 돈을 준다 이 말이죠. 가만있으면 돈 갖다 주는 놈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회사하는 사람들은 특히 판촉, 특히 영업사원들에게 제발, 양심이고 신앙이고 갖다버리고 제발, 이 사회에 문제의 사람이 돼 달라. 문제가 많은 사람이 돼 달라 말이죠. 그리고 착하게 사는 것은 돈 좀 벌거든 착하게 살고. 일단 돈이 있어야 착하게 사니까. 돈 벌기 전까지는 좀 이렇게 문제아, 자진해서 좀 자발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달라는 거예요.
우리 이장우 목사님 설교 들어보면, 헌금 십일조하시면서 자진해서 헌금하라가 있잖아요. 오늘 강의 들으면 자진해서 헌금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범죄, 죄악에 해당되는 겁니다. 몰래 해야 되는데 몰래 해야 될 그걸 자발적이라는 것이 들어가 버리면 몰래 하는 것과 자진해서 하는 것과 달라요. 옛날에는 같은 의미였어요. 옛날 고린도후서 의미에서는 같은 의미입니다. 몰래 하는 것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하는 뜻에서 같은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시대가 누가 지시한다고 따르는 시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진해야 될 것은 자진해서 뭔가 튀어야 된다는 의미로서 자발적이 되는 거예요. 의미가 반대되는 거예요. 뭐 때문에? 교인들이 보는 현실성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고린도후서 8장, 9장의 말씀이라도 같은 자발적이라는 말도 그게 언어 배치, 위치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거예요. 참, 무서운 시대에요.
그러면 왜 노인네들은 왜 하는가? 노인네들은 자기의 코드 있잖아요. 한 평생 살아온 원리가 있잖아요. 원리가 있다는 말은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무엇이 선이면, 무엇이 악인지 이미 규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선과 악이 규정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당신이 뭔가 알아주기 위해서 범죄 저지르세요. 하면, 안 저질러요. 왜? 선이 강력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에 악을 저질러버리면 그동안 살아온 명예와 명성과 위신과 이 선과 자존심이 이게 손해 보거든요. 그러면 몇 푼 더 벌려고 까불다가 자기 쌓아온 명성이 자기한테 손해 보는데 미쳤다고 그 지랄합니까? 자기한테 손해인데. 그러면 이러한 기성세대에게 젊은 애들은 뭐냐 하면, 무슨 인생의 원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인생의 원리라 하는 것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는데 이게 만만치 않아요. 강의 내용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기억에서 문자로, 그 다음에 사진술로 해서 기호화 되면서 이것이 뭐냐 하면, 사이버세계, 인터넷세계, 사이버세계로 바뀌거든요. 이때 기억세대, 문자세대, 사진술세대, 사진술세대나 사이버세대 같은 단어인데 하여튼 일반적으로 하나 첨가한다면 사진술세대, 사이버시대. 이렇게 될 때 하나하나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 달라요. 완전히 달라요. 어느 정도 다르냐 하면,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다릅니다.
기억세대에서는 자기가 신입니다. 이 신은 신이지만 의미가 달라요. 쉽게 합시다. 자기 신이 진짜에요. 기억세대에서는. 오늘날 시점에서 분석해 보면, 사람이 기억을 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계시를 주기 때문에 기억되는 거예요. 쉽게 한다고 하면서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좀 풀이해야겠어요. 지금은 우리가 여러 가지 중에서 선택하잖아요.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기억케 하신 것조차 신의 손길로 본 겁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왜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경험이 기억되느냐? 이거는 내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거는 문자가 나오기 이전입니다. 신화의 세계라 하지요. 내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늘 신과 교류하지요. 늘 신과 교제하지요. 이상봉 목사님 늘 주장하는 신과의 교류, 신과의 사귐, 그게 신화의 세계입니다. 신과 사귀는 것을 만약에 문자로 나와 버리면 어떻게 돼요? 내가 글을 읽고 해석해서 그 다음에 해석된 것을 기억하잖아요. 이러면 뭘 놓쳐요? 진짜 중요한 걸 놓치는데 뭘 놓칩니까? 내가 신의 아들이 아니잖아. 그렇게 되면.
내 능력에 따라서 신의 아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요. 내가 막 술 퍼먹고 있으면 신의 아들 안 되잖아요. 술 퍼먹고 공부 안하면 안 되잖아요. 아이고, 하나님 미안.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그냥 먹든지 마시든지 구르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어느 순간에도 항상 신께서 기억하게 하는 신의 기억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는 신의 아들로서 신의 딸로서 존재하게 되지요. 이게 신화의 세계입니다. 특징이 뭐냐? 선지자들의 특징이에요. 이게 문자 이전의 세계입니다.
구약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문자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조사를 해 보니까 이렇게 살았거든요. 이렇게 살았는가를 이해되니까 비로소 이삭이 이해되고 아브라함이 이해되고 야곱과 에서가 이해되는 거예요. 요새 같으면 이삭이 꿈을 꾸는데 두 민족이 나누리라. 아이고, 개꿈이죠. 우리 이럴 수가 있다고. 그게 두 민족이 서로 싸우리라, 나누리라, 한 민족이 이기겠다. 하는 이걸 들어도 그런 개꿈을 하루에 열 번도 더 꿉니다. 저도 그런 꿈 꿀 수 있어요. ( ) 이렇게 해라. 하면 그걸 안 믿잖아요. 왜 안 믿습니까? 지금은 기억시대가 아니고 지금은 성경, 문자가 있는데 개꿈이야, 개꿈. 판정이 되잖아요. 옛날에는 문자가 없다니까요.
문자가 없으니까 우리 같으면 지금 같으면 아이고, 이삭, 그 꿈 꿔도 무시해 버려라. 야곱아, 그 뭐 사다리 봤다고? 아이고, 뭐, 나도 사다리 보겠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안 그래요. 야곱이 본 꿈이라든지, 예수가 본 꿈은 하나하나가 신의 계시입니다. 이제 구약이 좀 이해되십니까? 아브라함이 그리고 롯이 만났던 천사, 아브라함이 만났던 천사, 삼손 아버지, 어머니가 만났던 천사, 기드온이 만났던 그 천사, 그 사람은 하나하나가 계시고, 남들한테는 안 알아보게 하지만 그걸 알아보게 하신 것도 주님의 계시에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 내려갈 때에 분명히 천둥 쳤는데 우뢰가 쳤는데 사도 바울은 혼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에서 떨어져서 자기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니는 핍박 .... 혼자. 다른 사람들은 듣지도 못해. 그리고 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냥 내려가다가 나중에 떡 떼어주니까 눈 떠서 주님이 함께 계셨다. 이런 이야기 나오잖아요.
그걸 세상에, 문자시대의 신학자들이 이걸 문자세대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그동안 해석이 잘못되었다 이 말이에요. 기억시대에는 기억시대 관점에서 해석을 해줘야 되는데, 현재 이미 문자시대에 들어가서 문자시대에 있는 우리가 그 당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억시대를 하려고 하니까 그들은 사회적인 산물이고 되도 않는 해석을 해 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문자시대 되면 뭐가 없느냐 하면, 신의 세계에 들어가면, 신의 세계는 뭐가 없느냐 하면, 주체라는 게 없어요. 주체가 없을 때 좋은 점이 뭐냐? 좋은 점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남한테 지배를 안 받습니다. 주체가 없기 때문에. 지배라 하는 것은 지배하는 주체가 있는 게 아니고 지배당하는 주체가 당신은 나를 지배합니다. 라고 느낄 때 비로소 거기에 종속, 지배가 형성되거든요. 백날 지배해도 자기 자신이 주체가 없어버리면 저쪽에선 지배관계가 막 나무래도 의미가 없어요. 요새 나이 많은 세대가 젊은 애들 나무래도 끄덕도 안 하는 이유가, 개들은 주체가 없다니까.
주체가 무슨 주쳅니까? 점멸하는 주체.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만들 때 비로소 내가 만들어지는 주체. 그것만 인정하지, 남은 너는 내 아들이야. 해도 아이들 안 믿어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여 버리는데. 돈 안 준다고. 왜 자식이 돈 안 준다고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 그거는 아버지 세대에서 그게 나쁜 것이지, 아들 세대에서는 아버지라 하는 것은, 아버지는 관계없고 다만 나에게 용돈 줄 의무를 가진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세대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기억세대에서의 특징이 뭐냐? 그러면 목사님, 기억세대 해서 문자 만들어내면 되겠네요. 기억한 걸 문자로 적으면 또 문자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억세대보다 문자세대가 발달되었으면 기억세대에서 문자세대로 가겠는데 기억세대에서 문자로 간 것은 발달이 아니고 퇴보에요. 이걸 오늘날 세대가 이해해 줘야 됩니다. 퇴보입니다.
그 퇴보가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성경에 보면 선지학교라고 있지요. 선지학교가 낫습니까, 선지학교 출신이 아닌 엘리야가 낫습니까?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엘리야가 낫지요. 선지학교라 하는 것은 점차점차 문자세계로 빠지는 거예요. 하지만 항상 위에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억세대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기 이후에 우리 같으면 선지자 많이 배출했는데, 말라기 이후에 제3의, 제4의 말라기 등장시키면 되잖아요. 등장 안 시킵니다. 왜? 기억 자체가 하나의 신의 계시라니까요. 그걸 여러분 이해를 해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 오면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주체가 없어요. 기억케 하시는 것도 주께서 내 안에서 성신, 그때는 성령이 아니라 성신이니까 성신으로 역사해야 기억케 해요.
지금 이걸 문자세대가 몰라서 내가 총신에서 강의하니까 어떤 학생이 질문하기를 그럼 목사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릴 때 했던 것도 비디오로 찍으면 그건 하나님 계시 아닙니까? 계시 아니다. 하니까 삐져서 나가더라고. 뭐냐 하면 예수님 하신 것이 왜 계시 아니냐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 하신 것이 많고 사도 바울 편지가 그렇게 많더라도 성경은 고린도전후서만 그 편지지, 그 외에 다른 편지가 많아도 그건 계시가 아니에요. 요한복음 마지막에 뭡니까? 사도 요한이 본 게 많아요. 사도 요한이 본 게 많더라도 요한복음 21장만 계시에요. 그 다음에 사도 요한이 덩달아 쓰더라도 그건 계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거는 문자세대는 기억세대보다 퇴보됐기 때문에 그래요. 왜 퇴보되었는가? 죄 때문에 퇴보되었지.
참, 이런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드물어요. 정말 드물어요. 사람들은 문자가 더 발달된 걸로 간주하기 때문에 문자가 발달된 게 아니고 기억이 발달된 거예요. 우리 몸 자체가 신의 말씀인 게 낫습니까, 우리는 따로 있고 신의 말씀이 있어서 주워 먹어서 내가 골라서 따라 기억하는 게 이것이 더 확실한 겁니까? 내 몸 자체가 신의 계시, 그게 확실한 거죠.
그러나 그 시대는 끝나버렸어요. 그 시대는 언제 종결되었는가? 예수님 십자가로 끝나버렸어요. 여자로 난 아들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어요. 왜? 예수님의 몸으로써 이미 기존의 몸은 자기의 몸 역할을 다해버렸어요. 몸 자체가 계시가 되는 역할은 다 끝나버렸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천국의 작은 아이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천국에 나온 사람은 니고데모처럼 육으로써 육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육을 말라 죽이는 영에서 영으로 난 사람만이 하늘나라 갈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육이라 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로서 육의 시대는 끝나버리고 지금은 영의 시대기 때문에 주님께서 육을 죽이는 방식으로 영이 온다 말이지요.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제가 주일날 아침에 그런 설교했죠. 탄식소리를 듣고자 하는 자가 교회라고. 성령의 탄식소리. 탄식소리를 듣고자 하는 자가 교회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 크로스빌리지 질문하는 사람 보니까, 못 봤어요. 한번 보세요. 개척교회 6개월 만에 30명 됐는데, 6개월 만에 30명 되면 재미있잖아요. 유력한 집사가 노골적으로 대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우릴 책망하는 설교를 하느냐? 대들어서 문제가 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교회가 재미있는 것 보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진짜 교회는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고자 오는 거예요. 그 탄식소리가 뭐냐 하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음성으로 날마다 탄식해요. 교회도 소망이 아니지요. 보이는 것이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지 않을 것을 바랄지니 참음으로 기다릴지라. 이 나쁜 놈들아! 탄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거 기억되었지요. 그러니까 기억이라 하는 말은 오늘날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예 통째로 인간 통째가 신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아예 주체라는 걸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이걸 학자들이 밝혀냈어요. 뭐라고 밝혀냈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까지는 ‘이것이 무엇이냐?’는 말이 없었던 거예요. 철학에. 이것이 무엇이냐는 말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까지는 없었어요.
그럼 플라톤은 뭐 했냐? 이것이 무엇이 아니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허상이고 모방이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이냐 물을 필요가 뭐가 있는데. 귀신 붙들고 어디 사십니까? 물을 필요 없잖아요. 귀신이기 때문에. 귀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물을 필요 없다고요.
사사기 삼손 아버지, 엄마가 뭐라고 물었습니까? 실례지만 이름이 누구십니까? 그 귀신한테 왜 묻느냐 말이죠. 그러자 자기 이름을 안 밝히고 뭐라 합니까? 나는 기묘자라. 이게 문자시대하고 기억시대하고 혼동이 되서 그런 거예요. 삼손 아버지, 엄마가.
제가 어려운 말 할게요. 문자시대 오게 되면 문자를 통하게 되면 문자를 사용한 그 사람의 사고방식 속에 상대방이 포착되어 들어옵니다. 이건 가짜에요. 순수하질 못해요. 이미 내가 해석한대로 왜곡돼서 내 안에 배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 이게 문자의 한계에요.
고린도전서 3장, 4장에 보면 뭡니까? 문자로 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절대로 성경해석을 문자로 풀면 안돼요. 왜냐하면 문자라 하는 것은 이미 문자시대로 들어와 버리면 나름대로의 문자는 코드입니다. 코드란 말 알지요? C코드, D코드. 알잖아요. 코드란 법칙이에요. 규정집이에요. 바리새인의 규정집이에요.
여러분,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이거 알려면 히브리 대학 가서 한 몇 년간 공부를 해야 돼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은 해석이 없고 주석이 없습니다. 아, 신기하지요. 유대인들이 구약을 볼 때 해석이나 주석이 없어요. 그럴 수가 있느냐? 미드라쉬. 주석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내용이 그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만 있습니다. 이것이 재미나니까 이것 배우세요. 이게 아니고 나는 이 말씀을 보고 이런 식으로 율법을 이렇게 지켰습니다. 라고 사례집을 내 놓는 거예요. 아시겠습니다.
이게 아주 독특하죠. 왜 그러냐 하면, 참, 기독교인들은 이해가 안 돼요. 유대인들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고 살아있어요. 현재 문자시대에서 성경은 분명히 문자지만 성경을 문자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걸로 봐서 문자시대에서 뭐로 환원시킨다? 기억시대로 환원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나는 이렇게 지켰습니다. 마치 오늘날 지방교회처럼. 그런 집들이 아까 주석이나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책들이 무지하게 많은 거예요. 보게 되면 나는 이렇게 지켰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큐티집이에요.
나는 백합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지켰다. 백합처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살았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하나하나 액션, 움직이는 거예요. 정지된 게 아니고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몸으로써 신체로써 말하는 언어들. 그렇게 해서 문자시대에서 문자에 안 매이고 기억시대, 몸 자체가 신의 아들로서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씁니다.
그렇게 되는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율법은 잠언서에 나오는 말대로 율법 자체가 글자가 아니고 율법 자체가 이 세상을 지금 통치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는 그런 마음이 안 나옵니다. 대단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를 죽였잖아요.
어느 인간의 지혜도 바리새인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은 아무도 못 간다. 아무도 갈 수가 없어요. 아무도 못 간다는 말은 어떻게 해서 못갑니까? 라고 질문해서는 안 되고, 원래 못 가게 되기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우리 마음 편하게 생각합시다. 원래 우리가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괜히 시도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 사람만 뽑혀서 가게 되어 있지, 원래부터 우리는 천국에 못가는 곳이에요. 원래 안 넣어주는 곳이라니까. 그게 아들의 이름으로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들의 빽으로 아들의 공로로 들어가는 곳이지, 원래 가서도 안 되고 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남의 동네라니까, 남의 동네. 우리는 이 땅이 우리 동네에요. 이 땅은 전부 지옥 가는 거예요.
이걸 밝혀낸 학자들도 그걸 몰라요. 김성수 교수의 이야기를 언제 식사하면서 1월달 방학하면서 정말 지식자고, 이정우 교수하고 친구고, 김상봉 교수하고 절친한 친구랍니다. 누구하고 잘 아느냐 하면, 이진경 씨하고 너무 친하고. 김용옥 씨도 그 사람 불러서 칸트에 대해서 공부하고. 김용옥 씨가 전공 뭔가 개념하려 하면 그 전공자를 불러요. 김용옥 씨가. 돈 많으니까. 불러서 칸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서 전문가에게 배워서 그걸 칸트에 대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맞잖아요. 그죠? 자기가 칸트 전공가가 아니니까. 그때 이 사람이 칸트 전공했기 때문에 불려가서 묻고 이렇게 합니다. 김용옥한테 강의하고.
그렇게 철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달랑 네 사람 두고 강의하느냐? 우리 대구 사람 세 명하고 서경수 목사하고 네 사람하고 하느냐 하면, 이진경 씨처럼 서울에도 철학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어요. 이진경 씨, 이정우 씨, 진중권 씨, 이렇게 활성화 되어 있는데 대구는 촌이 되서 그런지, 대구에도 있기는 있어요. 계명대에서 목요철학모임이 있는데 그건 계명대고. 계명대는 정치권과 연관되어 있어요. 김진홍이나 정치권과 연관되어 있다고. 계명대 이 사람들은 전부다 철학했다하면 정치계로 스카웃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진홍 교수라든지, 총장으로 있지만. 그것 말고 순수한 철학은 경북대학에서 이 사람 경북대학교수인데, 경북대학에서 나와야 된다는 취지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도 거의 안 받고. 조금만 받고 하는데.
그 사람 할 때 내가 같이 공부한 사람에게 그렇게 했어요. 복음을 전하면 안 되겠니? 그런데 배우는 사람이 너무나 순수하게 헌신적으로 하기 때문에 고맙게 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려하면 나무래야 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상당히 미안스럽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이렇게 똑똑하고 많이 아는데 그린?해도 바리새인보다는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문자시대기 때문에.
문자시대가 뭐냐? 쓸데없는 이야기했습니다만 문자시대가 뭐냐? 문자시대가 되면 거기에 권력이 들어가요. 이게 바로 20세기 초부터 학자들이 밝혀낸 겁니다. 모든 문자 한 마디 한 마디에 권력이 들어갑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목사가 쓰는 문자는 목사의 권력이 담겨져 나오는데 그걸 들뢰즈는 명령법이라고 해요. 무슨 서술법, 명령법 따로 있어요. 다 명령이에요.
2*3=6이다. 이거 초등학교 누가 가르칩니까? 선생님이 가르치지요. 선생님이 뭐 갖고 가르치느냐 하면, 2라는 문자, 3이라는 문자를 가지고 가르치지요. 에디슨이 여기 기억시대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선생님, 왜 1+1이 2됩니까? 이렇게 해서 에디슨이 얻어맞았어요. 임마, 그냥 믿어. 왜 1+1이 2입니까? 에디슨이 어릴 때거든요. 어릴 때는 온 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지금 학자들이 밝히는 거는 뭐냐? 문자가 인간다움을 훼손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문자에 의해 문명이 발달했지요. 발달해서 너무 발달해서 까불기 시작해서 쫄랑대기 시작해서 뭐라 합니까? 진화했다고 했지요. 진화가 뭡니까? 진보하면서 달라지는 거예요. 달라지는데 그냥 달라지는 게 아니고 진보새서 달라졌다는 거예요.
오늘날 학자들은 뭐냐? 퇴보했다는 거예요. 온 몸으로 느껴야 되는데. 그래서 에디슨이 온 몸으로 느끼려고 그냥 계란은 암탉이 품으면 병아리가 된다. 이게 문자로 되서 우리 속에 기억화 되거든요. 문자로 인한 기억이죠. 이건 그냥 기억이 아니고.
그러나 에디슨은 이걸 문자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느끼잖아요. 달걀을 품었잖아요. 안 되잖아요. 안되면 아무리 닭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타인이거든. 자기 몸 바깥이라니까. 그 달걀이 암탉이 품어서 계란 나오잖아요. 관찰되더라도 내 몸이 닭이 아니잖아요. 내가 닭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내가 닭이 아닌 이상은 그것은 닭과 나는 주체와 객체 사이로 갈라져 버립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상대방을 이해해도 상대방 마음을 못 알아들어요. 부모 간에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리해도 못 알아들어요.
이건 아내들이 맨 날 하는 거예요. 당신, 날 요새 사랑한다고 몇 번하느냐? 남자들이 그렇게 하지요. 꼭 말로 해야 되느냐? 여자가 하루에 25,000번 말 안하면 스트레스 안 푼다 했지요. 제가. 하루에 25,000단어 날려 버려야 돼요. 남자들은 그걸 들어주려면 피곤해 죽는다고요. 그거 안 들어주려면 결혼, 뭐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나온다고. 남자가 여자가 아닌 이상은 여자를 이해 못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같은 여자끼리라도 이미 개별적으로 객체가 돼버리면 이해 못해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고유의 것이 있다. 그 고유의 것이 뭐냐? 질료에다가 형상이라는 고유의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시대에서 뭐로 본다? 이 세상은 허상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허상, 허구라 하는 것은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자기 선생, 플라톤이 이야기했거든요. 허상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 하나하나 규정하려 하면 하나하나 개념이 있어야 돼요. 개념을 할 때는 뭘 이름을 붙여야 돼요.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 문자잖아요. 어이, 어이, 이렇게 안 부르잖아요. 이름을 부르잖아요. 하나의 문자시대가 이미 도입되면 문자시대에서 그 문자는 질료와 형상이 되면, 고유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 어거스틴 신학이고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 다 나온 거예요. 오늘날 신학 다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론 여기서 다 나온 겁니다. 고유적인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고유적인 형상이 있고, 그걸 모아 놓은 집단적인 형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고유적인 형상과 집단적인 형상이 그렇게 다를 수 있느냐? 몰라. 오늘날 신학 하는 사람의 정답은 ‘몰라’에요.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왜 저렇게 나쁜 놈이 있고 어떤 사람은 왜 예수 안 믿고 예수 믿느냐 말이죠.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면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으면 다같이 예수를 믿어야 될 것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런데 왜 예수 믿는 사람 따로 있고, 안 믿는 사람 따로 있느냐? 몰라. 설명해 봐라.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 형상 따로 있다는 거예요.
자, 하나님 따로 있고 예수님 형상 따로 있으니까 그럼 예수님 형상, 하나님 형상이 다르다는 이야기거든요. 다릅니까? 골로새서에 다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형상이에요. 몰라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다는 걸 인정 안하는 거예요. 자기는 신의 계시 받았다는 거예요.
신의 계시를 받았으면 온 몸으로 느껴요. 온 몸으로.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는 것도 온 몸으로 느끼지. 우리가 신의 자녀가 되었으면 예수 안에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이에요. 니고데모처럼 육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니가 육으로 났으면 거듭나야 된다. 이 말이 이해가 돼야 돼요.
문자시대에는 문자 하나하나마다 선배들의 잘 들어보세요. 선배들의 권력이 문자에 들어갑니다. 밥 먹으러갔는데 밥 안 먹고 라면 사달라면 엄마한테 맞습니다. 왜? 이게 폭력이고 권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부터 인간의 개체는 뭐냐 하면, 선배들의 권력 속에 종속된 하나의 개체가 되서 선배들의 사상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걸 가지고 윤리라 하고 그걸 도덕이라 합니다. 그걸 뭐냐? 사회질서라 하는 거예요. 그 질서가 뭘 뜻하느냐? 새로운 선과 악의 기준점을 내 놓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세의 시대입니다.
10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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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b, c 부산강의-무엇이 현실인가?(2)
(강의:이근호 목사)
조금 참으세요. 간단한 두 번째 시간인데.
바벨탑있지요. 바벨탑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가 됐다. 이제 우리끼리 살아도 된다는 것을 근거를 뭐로 잡느냐 하면, 언어로 잡아요. 그러면 인간을 공격하면서 뭘 공격하느냐 하면, 언어를 분리시키면 언어가 다 깨지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서로가, 서로가 적이 돼요. 언어 다름이 언어 다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싸움이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언어 자체가 뭐가 담겨 있기 때문에? 권력이 담겨 있거든요. 권력은 주체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쓰는 언어가 주체가 될 때 이것은 다른 쪽을 종속해야 돼요. 이게 폭력입니다. 이것이 악마의 폭력성이 등장하는 거예요. 가인의 후예가 재판되는 거예요. 뭘 통해서? 문자와 언어를 통해서. 그래서 그걸 언어를 해놓고 언어가 아닌 걸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언약 보냅니다.
언약은 언어가 아니에요. 뭐냐? 몸이에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아요.
조금 더 이야기할게요. 아비멜렉 추장있지요. 한번 물어볼게요. 아비멜렉 추장이 아브라함 만나기 전에 애 잘 낳습니까, 못 낳습니까? 잘 낳지요. 그걸 축복이라고 보겠습니까, 안 보겠습니까? 안 봤어요. 그냥 정상적으로 애 낳는지 알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개입하니까 갑자기 태가 닫히고 애 못 낳지요. 다시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아브라함의 기도죠. 아브라함의 몸이 등장하니까 다시 태가 열리고 애 낳지요. 그럼 그전에 애 낳은 것은 무슨 언약이에요? 노아언약이에요. 아브라함이 개입하는 것은 그전에 있던 노아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흔히 사기꾼들, 나쁜 놈들, 안 죽는다고 귀신이 안 잡아가느냐고 우리 불평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왜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내리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노아언약은 개인의 잘잘못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맹세로 인하여 주어지는데 그 맹세가 뭐냐? 은혜의 주체가 등장할 때까지만 그렇습니다. 은혜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등장하고 재림할 때 하면 노아언약은 끝이고 세상은 불로 멸망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의 존재는 뭐냐 하면, 노아언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이야기해서 새언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나쁜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려 할 때 저런 나쁜 놈들도 지금 노아언약 속에 은총을 받고 있는 놈이라고 수용을 할 때 환난 중에 인내가 나오는 겁니다.
세 번째 시간.
이 문자에서 문자 하나하나가 권력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걸 제가 아까 모세시대 했거든요. 모세시대 문자는 백성을 깨고 모세 자신을 지적하는 문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몸과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뭐를 빠뜨리느냐? 은혜와 긍휼이 빠진 채로 그냥 십계명이란 문자만 그들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아, 나를 살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아니 하나님이 육 살려서 뭐 할 건데요? 육 살릴 거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죽이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있는 것처럼 모든 율법은 우리를 죽이고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우리를 심판 아래 두게 하신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삶의 입장에서 사람이 문자를 사용하니까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 살아있어야 문자가 해독되잖아요. 내가 죽어버리면 문자도 소용없잖아요. 내가 나를 살리는 문자로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그런 오해가 바리새인까지 계속 됩니다. 물론 오늘날까지 계속 되지요.
모세시대의 문자는 이게 깨어졌다는 데 의미를 두고 행하라. 이 십계명이. 십계명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십계명이 누구 때문에 깨졌다? 너희들 때문에 깨어져서 그 십계명은 캄캄한 상자 속에 갇혀서 그걸 누가 지킨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보혈의 피가 하나님의 거룩한 희생의 피가 그러니까 이게 닫아둬야 폭발 안 하지, 만약에 피가 폭발해버리면 다 죽어 버린다 이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죽어야 될 인간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이에요. 진작 죽어야 될 인간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 모세언약인데 사람들은 문자시대에 이미 돌입했기 때문에 그 당시 문자시대기 때문에, 문자라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바벨탑 이야기했지요. 바벨탑이야기의 문자는 단합하는 결집하는 인간과 인간이 의사소통해서 두 가지 생각이 하나의 생각으로 결집하는데 그냥 뭉쳐지는 게 아니고 이게 정치적 타협을 거쳐서 뭉쳐집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지요. 롯이 천사를 만날 때는 그냥 온 몸으로 알아봤어요. 그런데 장인어른 롯이 사위들에게 문자로 전하지요. 문자로 전하니까 농담으로 여겼지요. 자기 온 몸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단 말이죠. 그러면 사위들은 천사들은 직접 안 만나서 그렇다. 아닙니다. 직접 만났던 사람도 소금기둥 되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롯의 처 같은 경우에는 직접 영접했는데 만나도 그 사람의 말은 온 몸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문자로 다가오는 거예요. 근데 그 의사소통에서는 자기의 갖고 있는 몸이 거부해 버렸으니까 소통이 되지 않은 거죠. 결국 믿지 않고 가버린 겁니다.
성경 오랜만에 찾아봅시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등불과 샛별의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이 뭐냐 하면, 샛별은 우리가 떠라, 떠라 한다고 뜨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가 뜨기 전에 이미 준비된 별이죠. 다만 장막만 걷혀버리면 떠오르잖아요. 내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떠라, 떠라 내가 주문해서 떠오르는 게 아니고 옛날부터 그전까지 있었는데 비로소 밝은 별이다 의미가 샛별이에요.
그런데 의미는, 시편 18편 28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보세요. 이게 기억세대 아닙니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에요? 하나님 지 마음대로 다루는 몸이에요. 나를 뭐냐 호롱불 담아놓는 등불 켜 놓는 뭡니까? 과거로, 과거. 과거로 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지 마음대로 불 켜. 내 허락도 안 받고. 불 켜자. 아이고, 이제 밝지? 어두운데 등불을 켜버린단 말이에요.
오늘 이 시대에 베드로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에. 그냥 등불 켜버려요. 켜버리면 내 몸이 아아, 그때 시내산에서 봤던 그 영광, 주님의 영광이 있구나. 아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뭐냐 하면, "복음의 광채가 비취"인다 그러죠.
복음의 광채란 말을 할 때는 참, 이 표현 같은 것이 설교할 때 해석할 때 어려운데 복음의 광채가 비춘다 하니까 사라들이 그 느낌이 안 오는 이유가 자기가 이미 밝다고 생각하니까 밝혀봐야 안 밝잖아요. 복음의 광채가.
깜깜해야 돼요. 다른 말로 하면 비참해야 돼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비참해야 돼요. 비참할 때 비로소 광채가 빛 값을 하죠. 찬란하게 비추잖아요. 자기가 형편 무인지경이 돼야 진짜 이거는 사는 게 아니고, 거지 나사로가 대표적인 거 아닙니까? 개가 와서 핥고 다니고 자기는 거지고. 이거는 말할 수 없는데 자기는 말할 수 없이 기쁘죠. 왜냐? 주께서 스위치를 켜니까. 스데반집사도 마찬가지. 돌에 맞는 그런 형편없는 상황에서도 스위치 켜버리니까 누가 보입니까? 주님이 보이죠.
-그런데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할 때에 ‘이것’이 문자입니까? 문자로 볼 때에 등불이 또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당연히 문자지요. 왜냐? 그 문자는 오직 빛이 있는 사람만 이해되는 문자지요. 아까 했는데 왜 문자로 오느냐 하면, 문자시대기 때문에 그래요. 왜 문자로 와야 되느냐 하면, 우리 몸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덮치는 식으로 주께서는 계시하십니다.
문자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이미 벌써 맛이 갔다는 거예요. 이 땅에 산다는 자체가 맛이 간 거예요. 보세요. 에덴동산에 사는 그때보다 이 땅에 추방당했다는 나가라, 이놈아. 문 걸어 잠갔다는 것은 문제 있다는 거예요. 가인보세요. 가인이 뭘 드립니까? 제사 드리니까 안 받잖아요. 안 받는다고요. 괜히 설쳐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재미있는 것이 아벨도 안 받으면 되는데 아벨을 일부러 받아버려요. 가인이 갑자기 안색이 싹 변하면서 니 제사하고 내 제사하고 차이나나? 해서 뿔다구나서 죽여 버려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한 성깔한다는 거예요. 전부다 한 성깔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깔을 뒤집히고 성깔을 이렇게 건드리시는 분이 누구냐? 주님께서 그렇게 건드리게 해? 그래서 동생은 죽어버리고. 그냥 살다가 제사 잘 드리고 죽어버렸어요.
문자라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 안 됩니다. 문자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총신에 김지찬 교수 밖에 없어요. 거 뭐, 자랑스러워. 문자 사랑하는 거. 문자 사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되고. 세상에, 성경에 보면, 천국에는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 했어요.
이게 시편 19편에 보면 자연세계가 언어가 없다 했는데. 뭐,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받은 증거가 뭐라고요? 직립보행에다 불을 사용, 손에 도구, 언어사용. 언어사용이 하나님 형상이라고? 박윤선, 박형룡, 어느 주석자, 이상근, 전부다 이렇게 다 이야기해요. 칼 바르트는 몰라. 하나님 관계란 모호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한 거예요.
사람이 문자로 하게 되면 권력이 형성되고 권력이 모이면 주체가 됩니다. 이거 또 어려운 이야기에요. 권력이 모여서 주체가 됩니다. 군대 쫄다구들 주체 없습니다. 왜 없는 줄 알아요? 계급이 낮거든. 군대 쫄다구들 주체가 없습니다. 권력이 없거든. 교회 처음 나온 사람들, 입 다물고 가만있습니다. 목사가 무슨 짓을 해도 입 다물고 있어요. 그런데 장로 쯤 되면 그 다음부터 한 소리합니다. 왜? 권력이 있다 이거지.
그래서 주체가 있으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또는 사회는, 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씽이라 했지요. thing, 뭡니까? 그것. 이 그것이라 하는 것을 규정할 때는 질료로 하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형상이 중요한데, 왜 질료란 말을 사용하느냐 하면, 인간은 나중에 흙 되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자니까 가만히 관찰해보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지가 죽어버린다 말이죠. 뼈다귀 되더란 말이죠. 뼈다귀 보고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지 흙이 인간은 아니잖아요. 그럼 흙 밟고 다니면 인간 면상 밟고 다니는 겁니까?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다움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어디에 있다? 형상으로 결정 나는 것이다. 형상의 차이로 결정 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형상이라 하는 것은 네 형상, 내 형상, 따로 구분되어야 되니까 구분 지을 때마다 하나하나 무엇이냐 묻는 거예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는 니가 어떤 인간이냐 할 때 니가 무엇이냐 할 때는 이 기준이 있습니다. 역시 플라톤에게 배워서 선배들한테 문자를 배워서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선이에요. 선.
오래 살면 착한 사람이고 일찍 죽으면 나쁜 놈이죠. 왜냐하면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존재하잖아요. 존재가 길면 그만큼 선이 길어지는 겁니다. 이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스승으로부터 다 탈피하지는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요.
그런데 선으로 말미암은 이 형상, 존재의 가치는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함, 선함의 몇 가지 가치가 있어요. 선함이라 하는 것은 최고의 선인데 이게 뭐냐 하면, 도덕적인 가치도 있지만 그 다음에 지식의 가치도 있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아름다움. 아름다움인데 사실은 진중권 씨 같은 경우에는 도덕이나 진리보다도 아름다움.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조화라 하고 이걸 피타고라스는 비례라고 합니다. 우주, 코스모스는 모든 것이 하나의 비례, 적당한 비례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계산을 했어요. 어떤 때 미인이냐? 눈과 입의 비율은 몇 대 몇, 키가 몇 대 몇. 그렇다면 짧은 사람은 뚱뚱한 사람은 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하게 바꿔서 살을 빼줘야 보다 선한 그 본질에 가깝게 성화되는 겁니다. 만약 그냥 쌍꺼풀 수술 .... 아름다워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김용옥 같은 경우에는 도덕과 진리보다도 지식보다도 아름다움을 이건 철학가들 대부분 특징이 그래요. 상당히 시인과 예술가들을 존경합니다. 예술가들은 뮤토스라고 해서 신화적 존재들이에요. 감정을 느껴야 된다. 이거 우리가 공부 많이 했지요. 많이 빠졌지만 공부 많이 했잖아요. 그냥 감정이고.
뮤토스 말고 학자들은 뭘 따진다? 로고스. 따지는 거예요. 근데 따져봤자 따지는 게 정상이다? 따지는 게 우선입니까, 느끼는 게 우선입니까? 느끼는 게 우선이라는 하는 디오니소스. 그런 존재로 해서 니체와 오늘날 들뢰즈까지. 심지어 오늘날 모든 철학들은 다 들뢰즈 쪽에 다 빠져버려요. 니체 쪽에 다 빠져요. 역시 꼴리는 대로 사는 게 최고다. 김용옥 교수도 꼴리는 대로 사는 게 최고다. 따져봤자 피곤하다.
이게 현재 라캉, 프로이드 같은 경우에는 무의식에서 오는 리비도, 성적인 욕망을 누가 막느냐? 이 말이죠. 다만 그걸 사회적 질서 때문에, 문자적 질서 때문에 억제하다 보니까 스트레스 쌓이는데 스트레스는 노래방에 가서 술로 풀면 된다. 이렇게 돼요.
지금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했죠. 지금은 어떤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 그렇게 따지고 억제도 귀찮다 이 말이죠. 욕망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기도 싫고 나는 그냥 욕망이 없는 죽은 시체가 될래. 그걸 무슨 놀이? 시체놀이라 해요. 요새 시체놀이가 최고에요. 방콕이에요. 방콕세대. 방에 콕 들어 앉아 박히는 거. 월드컵하면 월드컵만 보고, 골프하면 골프만 보고 집에 들어앉는 게 최고에요. 하다가 기분 나쁘면 사건 일으켜서 길바닥에 나가 데모해버리고 사건 주목 받아서 또 사건 일으키고. 또 점멸. 그러니까 점멸, 사라지고.
그런데 형상을 할 때 이 형상이 주체가 등장하죠. 주체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권력이 있어야 되죠. 권력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옛날에 권력이라 하는 것은 이미 문자를 해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다 쥐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문자가 있어야 질서가 잡히거든요. 그러면 질서에 관여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귀족들과 그리고 성직자들과 그리고 기사계급이었습니다. 땅에 대해서 산다는.
따라서 그 사람들이 지금 권력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주체지요. 그래서 호스트 같은 사람은 주체를 그냥 놔두면 서로 잘났다고 싸우니까 왕초, 최고 왕초의 주체에 모든 주체를 권력을 이양해서 그 사람한테 복종하는 것이 옳다 해서 그걸 입헌군주제라 해요. 그냥 군주제 같으면 지가 대장질하니까 안 되고. 일반 사람들의 권력을 법적으로 사회계약적으로 계약을 맺어서 일단 양도해놓고 그 계약대로 안 되면 그때는 쿠데타 일으켜서 왕 자리를 꺾어버리자 하는 것이 입헌군주제고.
거기에 반대하고 우리 가진 사람들끼리 놀자 하는 것인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입니다. 존 로크는 의회주의고 그냥 입헌군주제와 차이가 있어요. 존 로크의 사회는 뭐냐 하면, 권력이라 하는 것은 생산 주체가 누가 생산할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주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왜? 돈 갖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하니까. 부자의 착함은 어디서 나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거잖아요. 가난한 주체는 부자 주체의 돈 가진 주체로 바뀌지요.
처음에는 뭐냐 하면, 그냥 있는 질서, 땅이라는 질서, 이게 봉건시대인데 봉건시대는 땅 자체가 이미 있는 것이고 다른 공장이라든지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없었어요. 그러니까 땅에서 나온 생산물로 그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땅을 갖고 있는 주인이 그게 권력이고, 다른 사람은 그 권력, 큰 주체에 작은 주체로서 문자적으로 시킨 대로 그러니까 통제죠, 지배죠, 종속이죠. 시킨 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당시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위에서 주교들이 삼위일체, 공동회의해서 법을 정하면 그걸 믿어야 돼요. 사도신경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문자로 된 하나하나가 명령이에요. 이대로 성만찬도 마찬가지고. 집사가 와서 성만찬 주지 말고 목사가 해야 사제가 해야 성만찬 효과가 있고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정말 떡에 매여 있는 성령이 어디 있습니까? 유아세례 안 받았다고 지옥 갑니까? 떡에 매여 있는 예수님이 어디 있어. 그 성만찬을 해준다 하는 자체가 권력의 나눠주는 주체와 객체가 나눠지는 겁니다. 사도 같은 경우는 사도는 진리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성경 계시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성만찬을 성례식을 내가 반대하는 게 아니고 그걸 목사 해야 된다는 자체가 그게 정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아줌마가 하면 안 됩니까?
그런데 여기서 약간 어렵습니다. 여기 좀 어려워도 참으세요. 마지막 시간이니까 참으세요.
땅으로 있을 때 그때 목사님, 시장은요? 시장이라는 게 이쪽 마을과 이쪽 마을은 각각 영주가 다르기 때문에 폐쇄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걸 자급자족이라 합니다. 시장이라 하는 것은 여기 있는 물건, 남은 물건 교류하기 위해서 시장이에요. 하고 난 뒤에 시장 없어져요. 다시 따로 돌아가요. 이게 자급자족 시대 때의 시장 형성입니다.
상인들이라 하는 것은 뭐냐? 상인들의 개입이 여기서 전달하고 먹는 것이지 상인들은 독보적으로 나올 계기가 없어요. 왜? 상인들은 땅이 없으니까. 땅이 없으면 생산물이 없다니까요. 그냥 몇 푼 팔아서 남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해외식민지 개발해버려요. 식민지를 개발하면 값싼 원료가 나오잖아요. 값싼 원료로 대량생산돼버려요. 대량생산되니까 식민지 팔아먹기 위해서 농사짓는 농민들 쫓아내버리고 거기다 양을 키워 버립니다. 엔클로저 운동인데 이게 문제가 된 게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옛날 토지는 농노시대에서는 토지를 차남에게 주지를 못하고 장남에게만 줍니다. 차남은 뭐냐? 차남은 결혼도 안하고 장남이 난 아들을 그냥 부양해야 되죠. 그럼 토지는 형 이름으로 대고 형이 한 농사에 도와줘서 거기서 얻어먹는 대로 평생토록 총각으로 사는 거예요. 단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때는 여분의 리필하면 돼요. 대타가 돼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토지는 계속해서 영주가 있더라도 영원히 임대차 계약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영주가 지주가, 지주가 아니고 지주 자본가가 돼버려요. 지주하고 지주 자본가가 달라요. 지주 자본가가 되니까 식민지개발하려 하니까 선원들 월급 줘야 되지 배 만들어야 되지, 또 보험 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식민지개발하면서 금융자본주의, 보험업이 크게 형성돼요. 배 만드는데 돈이 필요하니까 돈 일단 빌리고 나중에 장사해서 무역해서 남으면 돈 갖다 주고. 금융자본주의는 가만있어도 막대한 돈을 받고, 서로 도와주고.
국왕이 다른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식민지개발하기 위해서 군대를 모집하려 하면 그 당시 군대는 상비군이 아니거든요. 월급을 주는 용병이라고. 돈 어디 있습니까? 금융자본주한테 돈 빌려서 은행 같은데 해서 빌리고 나중에 왕한테 받아내고 왕실의 보물 담보로 해서 이런 식으로 했다고.
그래서 옛날 동화책에 보면 그런 거 많잖아요. 배를 타고 가는데 파산해서 밀가루 실었는데 이게 이래서 나중에 밀가루가 고물 되서 나오잖아요. 전부 그런 이야기에요. 이런 영주마다 개별적인 나라가 되기 때문에 이 영주의 아들을 뭐라 하냐? 왕자라 하고 영주의 딸을 공주라 합니다. 백설 공주하고 뽀뽀했던 남자가 어디 있냐 하면, 사실 옆 동네 총각이라. 일곱 난장이는 저 동네 살지만.
어쨌든 제가 이야기한 포스트 사회이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 없던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나로 묶어버렸다고. 묶어버리니까 노동자들이 어디 갑니까? 땅이 없잖아요. 땅이 없으니까 노동자들이 어디 갑니까? 도시로 가잖아요. 도시로 가니까 갑자기 도시에 임금노동자가 많아지고, 일자리가 없으니까 임금이 싸지면서, 사람이 노동을 제공하는 게 아니고 노동력을 제공해요. 노동력을 제공해 버리니까 노동력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시켜버리고 인간은 하나의 상품화되어 버려요.
인간이 상품화된다는 말은 인간은 없다 이 말이에요. 사람은 없어요. 하나의 물건이에요. 미아리에 하얀 드레스 입고 희멀건 네온사인에 그냥 앉아 있는 거예요. 돌 인형, 바비 인형 구하듯이 어이! 니. 이렇게 하면 가는 거예요. 인력시장 가보세요. 손 목사님, 가봤습니까? 어이. 도배질 할 줄 아세요. 얼마? 5만원. 오케이. 열매 따러 갈 수 있어요? 예.
인간의 고유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변동이 일어나지요. 그럼 권력은 무슨 권력입니까? 가치를 매기는 자가 권력 있잖아요. 그 가치를 매길 때 뭐로 매깁니까? 돈이지요. 돈이 뭐냐? 문자가 되지요. 옛날 문자로 했던 질서를 잡고 권력을 딱 잡던 그 문자의 기능을 돈이 그 기능을 하니까 오늘날 대학교에서 학생수 안 모이는 철학과 폐지하라 이 말입니다. 철학교수는 아이들 모집해라. 철학교수가 영업사원이라. 모집 못하면 자진해서 계약 파기해서 나가야 돼요. 요새 제일 좋은 게 고등학교 선생이라 안 합니까? 골프 치러 다니고. 교수 힘없어요.
옛날에는 한 10년 전만 해도 교수가 좋은 점은 정교수만 되면 정교수끼리 집단을 만듭니다. 그걸 뭐냐? 집단 이성, 무리 주체. 여러 주체가 하나로. 주체가 없어요. 만약에 내가 정교수다. 철학과 정교수인데 다른 정교수 있을 것 아닙니까? 만약 그들 하고 의견 안 맞으면 나는 거기서 잘려나가야 돼요. 집단 주체에 내 주체를 사라지게 만들어요. 그리고 나는 점멸되는 주체로 만들어요. 집단 이성, 집단 주체가 모든 걸 새로운 가치와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한 때 그랬어요.
지금은 뭐냐 하면, 백날 교수끼리 모이면 돈 누가 줍니까? 역시 애들이. 아이들, 학생들이 와야 저희가 밥 먹고 살아요. 옛날의 재단은 뭐냐 하면, 공납금 보고 사는 게 아니고 교육에 대한 희생적인 헌신적인 입장에서 바깥에 사업을 해서 이익금이 학교에 들어와서 운영했습니다. 원래 그랬어요. 지금은 사학은 뭐냐? 부동산 장사하는 놈들이에요. 집 지어놓고 땅 값 오르면 그거 팔아서 또 땅 사서 또 짓고. 학교는 허울 좋은 빌미고. 땅값, 그 밑에 있는 토지 값, 땅값 보고 하는 거예요.
아이들 공납금 받아서 그 공납금 가지고, 지금 공납금 운영비율이 90% 넘는다는 것은 외부에서 돈이 안 들어온다 이 말이거든요. 그 말은 애들 돈 빼먹고 산다는 뜻이에요. 공납금이 그렇게 오른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냐 하면, 학생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기성세대가 자기의 권력을 애들한테 전수가 안 됩니다. 뭐, 말발이 서야지, 말발이 안 서는데. 애들이 그걸 모릅니까? 뻔히 아는데.
교수님, 깊은 학문의 세계로 인도해주세요. 이렇게 안 합니다. 교수님, 어느 회사 회장님 잘 아십니까? 그거 물어요. 교수님, 나중에 졸업할 때 학점 줄 때 어느, 어느 회사에서 추천장 들어온 거 몇 장 갖고 있습니까? 추천장 확보 못한 교수는 백날 학문 잘 가르쳐도 소용없어요. 여간해서 안 먹혀요. 취직을 시켜주는 교수가 최고에요. 그러니까 자기 친구들 기殆?많이 아는 사람 있기 위해서 그들과 술 먹고 그들과 이미 하나의 연관을 갖게 해서 우리 학생 몇 명 있는데 좀 뽑아 주소. 인턴이라도 뽑아주소. 이렇게 뭔가 취업 세일즈를 해야 된다니까. 연줄로. 결국 뭡니까? 중간 매체가 뭐가 된다? 돈이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이야기했어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라는 게 원래 상품이 교환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는데 새로운 가치는 생산기계와 그 노동력이 투입되는데 생산기계와 노동력이 투입되었으면, 생산기계를 대여한 자본가가 얼마 먹고, 노동력을 노동자에게 얼마 돌아가야 되는데, 자본가가 미쳤다고 돌아갈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느냐? 자본가는 분명히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더 많은 이윤을 얻을 경우에만 자본을 투자하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동일한 생산품이 나왔는데 가치라는 게 뻔하잖아요.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돌려주지 않을 가치를 내 쪽에서 빼먹어야 비로소 잉여가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 잉여가치는 어디서 생기느냐? 기계는 그대로 있고. 빼먹을 거 어디서 빼먹습니까? 노동력을 착취해서 그걸로 내가 이번에 자본투자하길 잘했지. 라고 하는 겁니다.
기업이 그렇게 될 때 그 기업의 주식을 샀던 사람들에게 주식의 가치가 날마다 높아져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런 잉여가 많이 남는 삼성전자나 그런 데 많이 투자하지, 삼성전자가 맨 날 돌려 줄 게 많고 저희끼리 다 먹으면 뭐 하려고 투자합니까? 투자 안하지요. 주식을 투자한다는 자체가 하나의 작으나마 소규모나마 자본가로서 하겠다는 거예요. 영원히 노동자가 아니라 나는 자본가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옵션제도라 해서 지금은 사원 자체를 아예 자본가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제도를 하는데 그걸 보너스 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있지요. 망해버리면 다같이 망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일종의 무서운 거예요. 부동산 다단계 컨설팅하고 똑같은 거예요. 뭐냐 하면, 회사에 노동력을 제공하려고 왔는데, 어이, 김대리, 이리 와. 요새 회사에 자본이 딸리는데 자네 집 전세로 옮기고 2000만원 투자해. 옵션이야. 회사 살면 니 살고, 죽으면 다 죽는 거야. 이거는 자기는 노동력 제공하려 왔는데 갑자기 뭘 만듭니까? 주주로 만들어버려요.
주주로 만들었다는 말은 만약에 여기서 부도나면 채권자들이 돈 누구한테 받습니까? 이거는 2000만원 받는 게 아니에요. 달려들어서 2000만원 아니라 투자하지 않은 자기 마누라 친정집까지 날릴 판인데. 그래서 노동력이 아니고 동업이 돼버리죠. 동업이 된다 하면 책임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는 거예요. 끝없는 책임을 져야 돼요. 그래서 요새 회사 취직하면 보증금 내시오.
어떤 의미에선 참 공평하지요. 실컷 노동자가 누굴 공격한다? 자본가를 공격해 놓고 자본가가 니도 자본가 되 볼래. 하니까 슬슬 꽁무니 빼는 거예요. 이건 개척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저는 설교만 하겠습니다. 예. 저는 돈 대겠습니다. 잘 안되거든. 목사님, 좀 내세요. 내야 그래야 교회도 정이 붙고 이 교회가 내 교회다 생각해서 열심히 하지. 교회일 안 하면 아이고, 내 돈 한 푼도 안냈다. 미쳤다고 하나. 목사님 놀려 다니고 등산 다니고 안 됩니다. 냈어요. 이렇게 되면 공멸의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교회를 새로, 목사님 보니까 교회 지금 지하실에서 탈출하자 이렇게 하는 모양인데, 탈출할 때 그냥 자기만 탈출하는 게 아니고 같이 탈출하려고 하면, 목사님 그동안 돈 모아놓은 거 날려야 돼. 아이들 공부 다 시켰다니까. 크면 다행이고. 크면 양심이 있기 때문에 목사님, 전에 얼마 냈지. 아이고, 그때 참, 고생 했는데 목사님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까? 되는데 문제는 안 크면 조져나는 거예요. 안 크면 돈 안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줄 돈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러면 교회 지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부동산경기를 내다봐서 안 될 경우를 예상해서 팔아도 돈이 남을 걸 하든지, 안 그러면 서울처럼 주식투자를 하든지. 모든 가치가 돈의 가치가 오면서 주도권이 드디어 땅 주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자본가들의 세계로 바뀌지요.
그때 생긴 것이 뭐냐? 부르주아의 나라를 자기고 그때 처음으로 생긴 것이 뭐냐? 국가. 그전까지는 국가라는 게 없어요. 하나의 민족이지요. 국가는 없어요. 제가 아리스토텔레스 할 때 뭐라 했어요? 이것이 무엇이냐가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뭐 생기고? 문자 생기고, 이것이 무엇이냐? 생긴 것처럼 시대가 드디어 기호가 문자가 돈이 문제가 될 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국가라는 게 생기면서 여기서 애국주의 생겨요. 애국주의 자체가 뭐냐? 기업입니다. 기업. 기업이라는 말은 경제적 차원에서 국가를 보지 아니하면 국가로 보지 않는 거예요.
독도 왜 우리 땅인가? 경제적 효용 때문이에요. ?중국이 아프리카에 축구장 지어주느냐? 아프리카에서 나오는 지하자원과 석유 때문에. 중국에 아프리카에다 월드컵 경기장 한두 개 지어준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지었습니다. 마치 일본이 옛날에 아프리카에 한 것처럼. 지금 중국이 한 게 그거에요. 중국의 경제발전은 석유에너지에 달려 있어요. 확 끌어 앉으니까 석유 값 60달러, 70달러 올라가는 거예요. 큰 대국이 다 끌어가니까. 모든 가치라 하는 것이 이렇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그러면 돈이 가치가 되면 마지막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돈이 가치가 되려면 옛날에 20세기 초반에는 돈을 가지면 이자 받으면 돈 번다 했지요.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돈을 굴려야 돼요. 갖고 있으면 바보야. 왜? 은행의 이자가 낮아요. 돈 되는 이자 많은 곳에 굴려야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굴리려 할 때 사람이 의심하는 거예요. 굴리다 날아가면 손해 아니냐? 이렇게 하는데. 사람들이 뭘 깨닫느냐 하면, 어디 돈 되는 곳으로 굴리는 것이 아니고, 이건 옛날 생각이고, 굴리는 그 자체가 돈이 되는 거예요. 하아, 이게 사기잖아요.
예를 들어서 부산이나 대구나 재개발하죠. 재개발해서 아파트해서 이윤 남겨서 벌잖아요. 이거는 결과로 나온 거고. 재개발한다는 자체가 막대한 숨어있는 돈이 몰려서 돈 한 푼 없어도 돈 짓고 돈 벌게 되어 있어요. 돈은 돈 버는데 있어서 투자하는 게 아니고 그건 무식한 소리하는 것이고, 사기를 치는 거예요. 허황된 사기를 쳐서 사기범이 왕 모일 때 결과적으로 진짜 돈 버는 거예요.
교회 짓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교인수가 없더라도 출구 앞에다가 수천 명 모이는 사진을 찍어 놓으면 그게 사람 모이게 한다니까. 그걸 뭐냐 하면, 시물라시옹. 환상이 현실이 있어서 현실이 원본이고 거기에 의해서 복제판이 환상이 아니고, 환상이 원본이고 만들어진 것이 현실인 거예요.
현실은 인간이 만든 욕망과 환상에 의해서 현실이, 현실이 이어져 가고 있다는 거예요. 아, 무서운 시대. 정말 제가 말해도 엄마야. 너무 무서워. 이게. 한 마디로 막가자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됩니다. 지금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게 최고야. 다른 희망은 없어요. 이게 지금 막가자는 이야기에요.
그게 이동하지요. 이동속도가 사진술이 발달하고 난 뒤에 문자가 아니고 사이버 세계로 가버려요. 사이버 세계로 가버리면 어느 한 곳이 중심이 아니고 사이버세계가 흐르는데 그걸 내가 만약에 포착한다면 포착한 내가 내 중심이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 왜? 사이버세계는 이렇게 매트릭스세계기 때문에. 그중에 내가 이걸 잡았다, 아까 이야기한 사건화 시키지요. 길을 가로막고 뭐한다? 파업하죠. 파업하면 신문에 나요. 내가 신문에 난다고.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중심이 되는 거예요. 이게 주체가 점멸되는 주체지요.
그리고 그 사이버세계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환상이 환상을 낳는 거예요. 옛날에는 현실이 환상을 낳고 다시 현실로 바뀌는데 이제는 환상이 환상을 낳는 거예요. 그런데 환상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가 돈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왜? 환상 보고 끼어드는 돈들이 있기 때문에.
자,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이거 예 들고 마치겠습니다. 그래픽 영화하죠. 50년 전에 그 기술 써먹을 데 뭐가 있습니까? 아무 쓸데없어요. 그래픽 하는 사람이 미대 출신이니까 미대 출신 옛날 한 것이 뭐냐? 몽마르트 거리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거예요. 사람이 원본이 있지요. 초상화 그리죠. 이건 복제판이죠. 이걸 그려서 밥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래픽 기술이 발달해서 그래픽이 그래픽을 낳아요. 지금 한반도라는 영화라든지, 반지의 제왕 전부 그래픽이잖아요. 그 사람이 앉아서 컴퓨터 안에서 그래픽 할 때 그 사람이 콩나물을 심습니까, 땅을 팝니까, 뭐 합니까? 그래픽이라는 환상을 더욱더 환상답게 만드는 일만 하죠.
그런데 뭐가 들어온다? 막대한 돈이 들어오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뭘 하느냐? 사람들은, 영화가 저게 뭐고 그래픽해서 좀 환상적으로 뿅 가도록 만들어야지. 영화가 저게 뭐야? 어디 기술자 없나? 반지의 제왕, 뉴질랜드 같은 그런 영화기술 없나? 우리도 한국도 할 수 있습니다. 태풍, 한반도, 블랙버스터 영화를 만들어라. 보세요. 우리의 그래픽 기술. 야, 잘 하는구나. 돈 주고 볼게.
그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앉아서 TV보면서 그래픽 했던 사람들에게 돈이 올라오지요. 여기서 올라오면 노동의 가치가 빠르게 소통하기 때문에 어이, 그래픽 기술자, 초짜 말고 경험자 없나? 10억 줄게, 20억 줄게. 가치가 막 올라요.
그런데 만약에 50년 전에 그래픽 기술 소용없을 때 어떻게 됩니까? 저 한 5000원만 주면 하겠는데? 필요 없다 하지요. 환상이 결국은 자기한테 월급을 주는, 그게 점멸하는 깜빡거리는 주체. 내 주체란 깜빡거리는 주체. 깜빡거리다 보니까 뎬層?없고 윤리도 없고 신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시대지요.
이게 전부다 결국은 복음의 광채보다도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의 광채를 대신 믿고 싶어 하는 악마의 역사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목사님들은 이 십자가가 이미 이걸 다 알고 있고, 결국은 그렇게 환상을 쫓는 그 몸을 지금도 부지런히 죽이고 있다는 거. 아무리 환상해도 꿈꾸다 죽는다는 사실. 죽음이라는 의미가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이런 환상을 부풀게 하는 그것이 죄였다는 것을 그것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배척하고 버리고 주님께 달려들고 주님께 대항하고 이렇게 죄를 유발하는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처음부터 위험했던 시대고 인간들이 모였다는 것, 자체가 죄를 만들어내고 양산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그들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알 때 바로 우리가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우리를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을 우릴 통해서 나타나서 참된 소망을 증거 할 수 있는 천국을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