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어. 하지만,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곳은 삼촌의 사무실이 아니라 어딘지도 모를 황야였어. 끝도 없는 지평선으로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말 그대로 황야. 이해할 수 있겠어? 내가 잠시 착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을 꾼 것은 더더욱 아닐 텐데. 거기에는 그 곳이 사무실이라고 할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었지. 적어도 우리가 사무실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할 어떠한 개념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러한 개념들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상태였단 말이지. 물론 여의도 한복판의 건물 속에 그런 넓은 황야가 있다는 것 또한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해 보려고 무진장 노력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 나라는 존재가 그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최소한의 어떤 반응 같은 거라도 있었다면 내 불안감은 훨씬 줄어들었을 거야. 그 순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내 사고 마저 정지해 버린 느낌이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기를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 순간 정체 불명의 적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최악이거든."
"농담이죠? 아예 소설을 쓰시는군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그녀가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더 이상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수습을 이제 막 마친 신입기자라고는 하지만 인터뷰하는 태도가 이래서야. 그 여성 잡지사는 신입 기자에게 인터뷰하는 요령 같은 것도 가르쳐 주지 않나 보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기자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느니, 잡지사에 항의전화 한 통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이것 보라구. 시시껄렁한 연애담을 원했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세상에는 연애하다가 헤어지고 하는 일 따위가 얼마든지 널려있다구. 사랑은 누구나 하는 법이고, 아마, 모르긴 해도 히틀러도 사랑을 했을 걸. 전두환도 이순자를 사랑했을 거고. 일단 어찌됐건 나와 인터뷰하기로 했으니까 내 연애담을 털어놓고 있긴 한데, 정 시덥지 않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히틀러 전기를 읽는 게 낫지 않아? 아마 내 얘기 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어쩌면 교훈 같은 것도 조금 있을지 몰라."
"아, 정말. 내가 김대균씨한테는 두손들었습니다. 나도 몰라. 이런 걸 연애 얘기라고 써야될지……. 구들장 질 때 지더라도, 그러면 속는 셈치고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죠."
"이 아가씨, 정말 말귀 못 알아듣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쉬운 사람은 허인숙씨 당신이고, 내가 억지로 누군가에게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구."
"어쨌거나 다음 얘기 계속해 봐요. 소설을 쓰든지, 히틀러 전기를 읽든 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이야기를 그만둔다는 것도 왠지 찜찜한 것 같아서, 나는 버본 한 잔을 마시고 깍지를 낀 손으로 기지개를 켠 뒤 1분 정도 기억을 정리해 보았다.
"한참을 거기에 그렇게 박힌 듯이 서있었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파란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거야. 처음에는 커피포트 주둥이에서 나오는 것처럼 푸른빛이 도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이 있었는데, 점점 수증기의 농도가 진해지면서 어떤 형상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조금 겁을 먹긴 했지만 처음 광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지, 두려움도 약간은 사라지고. 그대로 있으면 뭔가 일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윤곽이 점차 뚜렷해지더니 마침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아니겠어. 그런데 그 노인의 얼굴에는 잉어 같이 외가닥의 기다란 수염이 나있었고, 머리 양쪽으로 사슴뿔이 달려 있는 거야. 그리고 한쪽 손에는 명아주 뿌리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던 것 같아. 손잡이 부분에 감촉 좋은 털가죽이 달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나를 향해 노인은 그 지팡이를 치켜드는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해 보았지만 노인은 정말 잽싸게 내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거 아니겠어. 사실 후려쳤다고는 하지만 단지 '콩' 하고, 굉장히 유치한 소리만 들리는 거 있지. 별로 아프지도 않고. 내가 왜 때리냐고 거칠게 항변하니까 그 노인 대뜸 하는 말이 '여자 친구 찾으러 왔구나, 여자 친구는 지금 갈(鞨)이라고 하는 소인국에 잡혀 있어'라고 얘기하더군.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 J는 단지 데이트 비용을 타내려고 삼촌을 찾아갔을 뿐인데 말이야. 그리고 세상에 갈이라는, 난쟁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한번도 없거든. 그래서 나도 맨 처음에는 그 노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을 해 보니 믿지 않는다고 해서 별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서 엘리베이터에 나를 집어넣고 13층으로 올려 보내더니, 삼촌의 사무실이 있어야 할 13층엔 사무실 대신 웬 황량한 벌판이 나오고, 괴물처럼 생긴 노인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머리까지 맞은 상태에서 내 지각이라는 것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노인에게 어떻게 하면 갈이라는 곳에 갈 수 있는지 물어 보았지.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3백 리를 가면 곤륜산이라는 외륜산이 있고 그 속에 사람의 췌장을 먹는 성성이들의 부락이 있다. 성성이 부락을 지나면 외륜산의 분화구 속으로 곧장 들어가서 지하에 있는 소광호(消光湖)라는 연못을 찾아라. 연못에는 일월수어(日月獸魚)라는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그 물고기를 잡아 부레를 떼어 내고 다시 연못 속에 집어넣어라. 두 번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않게 배에 돌 같은 것을 채워 던져 넣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충 그런 얘기를 해주더라구.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알아서 해결될 것이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노인은 다시 커피포트의 수증기처럼 변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어. 노인이 사라진 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어느 책에선가 그 물고기에 대한 내용을 읽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산해경(山海經)이었던가, 태평어람(太平御覽)? 아마 그 비슷한 책일 거야. 그런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일월수어라는 게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물고기거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태양과 달이 하나씩 있는데, 그 물고기의 입 속에 그것들이 저장되어 있다는 거야. 아침이 되면 일월수어가 태양을 뱉어내고 밤이 되면 그걸 삼키고는 달을 뱉어내는 식이지. 일월수어가 태양을 꾹 삼키고 그걸 뱉어 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밤이 되 버리는 거야. 어둠 속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외로움으로 신음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 만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꿈이 아니고 그래서 그 노인의 말이 백퍼센트 사실이라면, 어쨌거나 나는 J를 구하기 위해 나의 일월수어를 모든 빛이 영원히 소멸한다는 소광호의 깊은 수면 아래로 집어넣어야만 하는 신세가 되 버렸거든. 빛을 잃는다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3백 리를 걸어 그 기분 나쁜 성성이들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어마어마하게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어. 엄두도 못 낼 일이지. J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거예요? 김대균씨는 귀찮은 것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분 같군요.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단지 귀찮아서라니."
"이것 봐, 잘난 척 하지 말라구. 삼백리면 120킬로미터야. 마라톤을 풀 코스로 세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지. 그리고 성성이는,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코넌 도일의 단편에서 딱 한번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다지 성질 좋은 짐승 같지는 않았단 말이야. 더군다나 사람의 췌장을 먹고 산다는데 할 말 다했지."
"그래서 이게 끝이에요?"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바닥에 있는 진저 에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나는 좁쌀 크기만큼 작아진 얼음을 비워내고 버본을 스트레이트로 한 잔 더 주문했다. 창 밖으로는 금새 눈이라도 쏟아질 듯 땅거미와 함께 낮은 구름이 깔려 있었고 팝콘 같은 크리스마스 불빛들이 가로수 사이로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열장에 놓여 있는 술 병 틈 사이로 비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며칠 후면 서른이 될 것이고 그녀와 헤어진 그 날 이후 정확히 3년 만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빙 크로스비의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었군.
"그때 내가 한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당시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 어디로 가야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구.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단지 그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죽을 고생을 다해서 곤륜산이라는 곳까지 찾아갔고, 성성이의 습격을 받아 췌장의 일부를 잃었지. 그리고 정유공장의 굴뚝처럼 생긴 외륜산의 분화구를 타고 어둠의 세계로 내려갔어. 그 곳은 정말 비좁고 습한데다 하수구 비슷한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서늘한 바람이 외륜산 바깥으로부터 불어와서 의외로 상쾌한 기분이 들더군. 그러나 밤이 되어 일월수어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분화구의 입구쯤에 걸려 있었던 그 누군가의 태양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어. 다행히도 노을에 반사되어서인지, 장미 빛으로 빛나는 호수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 소광호는 예상 밖으로 은은하고 투명하기까지 한 선홍색 빛깔로 지하세계 곳곳을 부드럽게 적시고 있었고, 외로웠지만 정말 황홀한 광경이었어. 나는 호수 주위에 있는 작은 돌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웠던 것 같아. 노을 때문이라기 보다는 원래부터 그런 와인색깔을 띄고 있었을 것 같은 호수의 붉은 잔물결을 바라보며 J에 대해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져 하나의 덩어리 같은 것이었거든. 아주 사소한 일들이었을 거야. 예를 들어 선물로 사준 반지를 J가 MT가서 잃어버린 일이라든지, 내 안경을 그녀가 실수로 발로 밟아 깨드려 버린 것이라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만 떠오르는 거 있지. 어쨌든 그때까지 우린 사귀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서로의 빛을 잃어 가는 기분이 들었거든. 별로 슬픈 일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왠지 슬픈 생각이 드는 거 있지. 화장실 좀 갔다 올께."
"아니에요. 충분히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어요."
"슬픈 얘기 하다가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은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이해심이군!"
그녀는 마치 천식에 걸린 소처럼 피식하고 한번 웃더니 속기 노트를 몇 장 앞으로 넘겨 그 동안 해둔 메모를 점검했다. 내가 화장실 문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 나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화장실 손잡이에서부터 겨울은 왔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변기를 붙잡고 그 동안 마신 버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특별히 과음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구토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덕분에 정신은 말짱해졌지만, 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버본은 마치 오래된 고성의 문에 걸린 녹슨 경첩 같은 냄새를 풍기며 내 신경세포를 심하게 훑고 지나갔다. 나는 짧게 몸서리를 치고는 개수대에서 입을 헹구어냈다. 그리고는 찬물을 틀어 세수를 하고 종이 타월로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싹 달라붙은 머리, 이제 삼십 줄에 접어든 사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친 피부, 움푹 패인 눈,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 뭔가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듯이 가늘게 떨리는 목울대. 이제 3년이 지났지만 그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어 거울에서 눈을 떼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내렸다. 첫눈.
"나의 일월수어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놈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고,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한 눈에 그 놈이 내 일월수어라는 것을 알아 차렸지. 비늘이 듬성듬성 벗겨진 채로 호숫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더군. 나는 주변의 수초를 뜯어다가 놈에게 먹였지. 놈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내가 다가가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어. 내가 뜯어준 수초를 절반 정도 먹은 후에 주둥이를 물 밖으로 내밀며 슬픈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더군. 내가 자기의 부레를 제거해 물 속으로 가라앉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섭섭할 것 없다. 대신 한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일월수어는 두 번 다시 물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며, 그러면 나의 태양과 달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된다. 물론 나에게 빛은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과연 진실한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었어. 나는 망설임 대신 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물 밖으로 꺼내 배를 갈라 부레를 떼어냈어. 막 눈물이 나더라구.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 노인이 일러준 대로 물고기의 배에 돌을 몇 개 채워 넣고 물 속에 던져 넣었지. 놈은 기포 같은 눈물 몇 방울을 흘리며 호수의 심연으로 가라앉았어. 그리고는 놈이 사라진 자리에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를 띄워 표시를 해두었지. '내가 사라진 자리'라고……."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로군요. 그런데 그 외륜산에서 어떻게 탈출했죠? 어떻게 현실로 돌아 올 수 있었는지."
"노인이 말 한 대로야. 물고기가 가라앉으면서부터 내 주위로 서서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이 몰려 왔지. 내 자신의 존재감 마저 의심스럽게 할 만큼 아주 농밀한 어둠. 그것은 빛이 사라진 흔적이라기 보다는 진흙처럼 어떤 곱고 부드러운 입자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 어느 정도 절망적이고, 또 어느 정도 안락하기도 한. 나는 담배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머리 위로 미세한 공기의 감촉이 아주 느릿하게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잠자코 기다렸지. 그렇게 어둠이 내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무렵이었던 것 같아. 갑자기 무대 조명이 켜지 듯이 주위가 환해지면서 폭죽 소리와 함께 Happy Birthday To You!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군. 나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 어떻게 된 일인지 거기는 13층 삼촌의 사무실이 분명했고, 나는 아무래도 아주 짧은 동안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아. 그게 꿈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버렸는지도. 그렇지 않고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녀가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말 그대로 빛이 10미터쯤 가는데 걸리는 시간인데 말야. 아무튼 내가 밝은 빛에 적응하는 동안 주위의 사물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방안은 크리스마스 장식과 가지각색의 풍선들로 가득 차 있는 거 아니겠어. 세상에 깜짝 파티라니. 나는 그녀가 불과 45분 동안 그 많은 풍선을 불었다는 것이나 장식들을 준비한 것이나, 그 모든 게 믿겨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시간 관념에 대해서는 이미 두손든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 시간 동안 겪었던 일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인 일이었거든."
"정말, 멋진 생일 파티였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게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된 계기라는 거죠?"
"나도 잘 모르겠어. 외륜산의 분화구에서 겪었던 일이 분명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때 나는 J의 깜짝쇼에 충분히 감동했고, 태어나서 그렇게 즐거웠던 생일도 처음이었거든. 환상체험에 깜짝쇼라니, 하루만에 그 많은 이벤트를 즐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그 날 밤 우리는 유람선 선상카페에서 프랜포드 마샬리스를 몇 곡인가 들으며 와인을 마셨고, 차를 렌트해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영화까지 한편 봤다구. 분명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추억이었고, J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워 보였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구……. 적어도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말야."
나는 손톱 가장자리를 물어뜯으며, 빙 크로스비의 노래가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창 밖으로 파라핀 덩어리 같은 눈이 중량감을 더해가며 쏟아져 내리고, 마블링처럼 어지럽게 번져 가는 도시의 풍경들이 유리창 위를 떠돌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눈앞이 점점 선명한 장미 빛으로 차 오르는 게 느껴졌지, 마치 깊고 따뜻한 물 속에 잠기는 것처럼. 그 바람의 무늬들, 물결의 찰랑거림, 저물 무렵 태양의 고운 입자들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어. 그리고는 서서히 내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지. 등받이에 있는 광고판에서부터 운전기사의 셔츠 목덜미까지,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어. 나는 꼼짝없이 짙은 어둠에 갇혀버렸고, 먼 우주에 혼자 남겨진 채 먼지처럼 작아져 가는 기분이 들었지. 그리고 이미 시간은 기묘한 형태로 뒤틀려 있어서 J와 내가 함께 했던 날들이 난수표처럼 얽혀 어둠 속을 떠다녔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벚꽃 흩날리던 캠퍼스 벤치와 나트륨등 아래에서 함께 불렀던 크리스마스 캐롤과 호텔 테라스의 빨래 건조대에서 해풍에 빳빳하게 마른 흰 빨래들, 예비 신혼여행이라며 제주도로 놀러간 적이 있거든. 아름다운 기억들이지만 처음부터 거기에는 항상 뭔가가 결핍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지. 잃어버린 반지라든가, 깨진 안경알이라든가 하는 걸로 말야……. 첫눈이 내렸어. 버스에서 내리니까 양철조각처럼 차가운 알갱이들이 내 볼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거든. 눈을 맞으면서 어떻게 집까지는 걸어갔던 것 같아. 샤워를 하고 따뜻한 물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면도도 했어.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했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이없게도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더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워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너를 사랑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게 다야."
그녀는 카세트에서 테입을 꺼내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창 밖에 눈이 온다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이 오는 것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어때, 여성지에 실릴 연애담 치고는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는 테입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면서 나에게 가벼운 윙크를 해 보였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