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년 음력 9월 마지막 일요일이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산24번지에 위치한 12세 문경공과 13세 문량공 그리고 주차장을 지나서 14세손 휘 원용(諱 元用) 조상님에게 제례를 지내고 있음은 중랑장파 종친이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곳엔 장간공(시호:章簡) (휘 원용)과 정경부인 파평 윤씨가 합폄으로 모셔져 있음이 비석으로 알 수 있다.
오늘은 정경부인 파평 윤씨에 관한 일화라고 할까.
백과사전에 기술된 내용을 보니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에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 대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계유정난 당시에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
즉 우리나이로 11세에(지금 11세면 초교4학년쯤인데 겨우 학교수업 마치고 학원 두세게 돌아다닐 나이인데)공부도 많이해서 천자문만 마친게 아니고 사서오경도 음미했었을 테니 그 무시무시한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결혼을 하였고,
결혼 당시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바로 장간공과 결혼을 하였으니 상황설정상 동생이 먼저 시집간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간택을 왔던 감찰상궁의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분이 왕비가 되었을테지만 그렇다고 겸비하고 있었을 지덕이 보통가문의 여식보다는 두어단계 위에 있었기에 왕비후보로 오르게 되셨을 것이다. 당시의 세력으로 볼때 좀 쎈 집안의 여식임엔 틀림이 없었으리라. 장간공께서는 당시 임금의 손윗 동서이셨으니 그 권세도 대단하셨겠고 워낙 술과 시를 좋아하셨다니 지금 기록에도 서자(庶子)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서자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남과 차남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이어져오고 있을 뿐이다. 장간공이 1401년생이시고 정희왕후가 1418년이라면 그의 언니(장간공의 배위)와 사이에 오빠가 있었는지는 파평 윤씨 족보를 몰라 알지 못하나 개략 부부지간 나이차는 좀 있었지 않을까 추측도 해본다. 현존 기록으로는 장간공 배위의 생몰년에 대한 기록은 오직 7월7일이 기일 (忌日)이라는 것 밖에 없다.
여기에 적은 이 글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근거로한 추론에 불과함을 말해둔다. 역사공부를 깊이 하지는 못하였으니 말이다.
허나 정희왕후에 대한 일화를 보다보니 이런 추론도 가능하게 되었다.
동생인 정희왕후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에서 잠들고 계시지만 우리조상님은 지금은 경기도 연천의 민통선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장간공과 합폄으로 바로 이곳에 잠들어 두분의 사랑은 아직도 진행형 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