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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으로부터 계속)
학교 가까운 곳으로 자취를 정해 나오던 날 난 마지막으로 바에 찾아가 삼촌을 만났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많이 흔들렸고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난 속으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마지막 인사로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아름다운 손가락, 내 순결을 바친 손가락, 내 감각들을 세심하게 건드리던 그 손가락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았다.
순간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까맣고 탁한 눈동자 위로 잠깐 스쳐간 것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따뜻한 빛이었다. 그의 옆에 서서 나에게 웃음을 던지는 엄마의 얼굴은 삼촌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난 서둘러 술집을 나왔고 폭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던 거리는 더 없이 황량하게만 보였다. 굳게 닫힌 문을 뒤로 한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 동안 걸었던 것일까. 난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흩어지는 눈발 속에 술집 문은 전설의 흰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텅 빈 구멍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내가 처음 받아들인 남자는 누드 모델이었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남자 친구는 의외로 사귀기가 힘들었다. 학교에서 파트너를 찾는 건 이래저래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었다. 대개의 남자애들은 끝까지 가고 싶어했지만 그런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도 못하고 입 또한 가벼운 애송이들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 해는 정신없이 춤만 추었다. 코카콜라를 홀짝이며 클럽의 구석에서 땀을 한 0.5ℓ 가량 쏟아 내고 나면 일종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학년 1학기 첫 데생 실습이 있던 날, 벌거벗은 그의 몸을 보며 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내 몸의 감각이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던 날 난 좀 실망했다. 의외로 무덤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삼촌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 감각을 건드리던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칠었다.
많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내 안에 꽉 차는 그의 몸이 따뜻하다고 생각되었을 뿐 별다른 흥분이나 쾌감은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었다. 더군다나 그의 몸은 윤기가 흐르고 단단했다. 마치 그리스 조각처럼. 난 매일 밤 공짜로 그를 스케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했다. 내가 지금 노래 가사를 끄적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의 관계는 제법 오래 이어졌고 또 헤어질 땐 가슴 한 구석이 아프기까지 했다. 나는 첫 번째 구멍 위로 또 한 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은 곪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물었다.
그는 내 벌거벗은 등에 종이를 대고 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시는 대개 유치하고 형편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언젠가 서점에서 그의 출판된 시집을 보았다. 대개가 내 등에서 적혀진 시였다. 전직 누드모델의 시집. 겉 표지에 붙어 있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심각해 보였고 살이 많이 쪄 있었다. 활자로 인쇄된 시는 그럭저럭 잘 읽혔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내 등위에서 쓰여진 시. 이것이야말로 육체의 시가 아닌가. 나는 두 번째 구멍을 한 번 만지작거려 보았다.
그와 헤어진 후 거의 두 달 간격으로 피어싱을 새로 해 달았다. 수학강사, 지금은 해체된 ‘러브스틱‘(4) 밴드의 기타와 보컬. 그리고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내 귀에 구멍을 뚫어준 J. 많은 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다.
그러나 난 남자들과 관계를 거듭할 수록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글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아니고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H를 만나기 전 몇 달간은 다시 클럽을 순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뭐 답답하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처럼 남자를 만나면 만날 수록 욕구가 커지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엄마를 다시 찾아간 날은 그 해 들어 가장 많은 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20세기가 가는 게 무진장 안타까웠는지 하늘은 연신 더러운 빗물을 회색 도시의 끄트머리에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허옇게 빗물이 튀는 우산 속에서 술집 문의 벌건 격자무늬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비에 젖은 청바지에 척척 감긴 다리가 마냥 무겁게 여겨졌고 머리마저 지끈거렸지만 문 앞까지 와서 되돌아간다는 건 어딘지 멍청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어졌다.
빗물을 잔뜩 먹은 문은 그 무게만큼이나 강한 저항력으로 공기를 밀어냈다. 조명이라곤 모두 꺼진 텅 빈 술집의 얼룩진 카펫에서 비릿한 비 냄새에 섞여 쾨쾨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으로 올라왔다. 끈적하고 탁한 공기가 발 밑을 감쌌다. 드문드문 벽지에 빗물이 새어든 것이 보인다. 마치 바 전체가 빗물에 녹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카운터 한구석에서 위스키를 채운 잔에 진저에일을 섞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 할로겐 전등이 그녀의 손등을 비추고 있다. 그녀는 아침에 나갔다 들어오는 딸아이를 보는 양 웃을 듯 말 듯 애매한 표정으로 한 쪽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게 전부였다. 포옹을 한다거나 유난을 떨며 재회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둘 다에게 쑥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슬쩍 들어올린 손끝에 가느다란 담배가 끼워져 있다. 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녀는 위스키 잔을 새로 꺼내 내 앞에 놓아주었다. 시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치유능력을 가진 것인가. 이렇게 엄마와 딸이 마주앉아 위스키 잔을 기울일 수 있게 만들다니.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자세히 보니 그건 그림자가 아니라 옅은 선으로 눈가에 잔금을 그어놓고 있는 주름이었다. 아, 그녀도 늙는구나. 가슴 한 구석이 쓰릿쓰릿해지면서 입안이 말라왔다. 앞에 놓인 위스키를 단 숨에 들이키고는 구석에 처박힌 어항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항 안에는 서 너덧 마리의 금붕어들이 다 찢어진 비늘을 한들거리고 있었다. 뿌연 물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은 힘들어 보였다.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그녀의 눈 밑으로 퍼런 멍이 가시지 않고 기미처럼 끼어 있다. 푸석한 머리 결 사이로 담배 연기가 느리게 떠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허공에 눈길을 박은 채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학교는 재미있어?” “네” 나는 짧게 한마디 대답했다.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 거야?” “네” 하고서는 이번에는 주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시간쯤이면 삼촌이 한창 분주하게 주방 쪽을 왔다갔다 해야하건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딱히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벌건 문을 열 때만 해도 나를 가장 긴장시켰던 것은 삼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나는 굳이 그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일 뿐. 빗물에 쓸려가 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이미 검은 수챗구멍 사이로 훅훅 빠져 나간지 오래인 것이다.
그녀가 빈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는 다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동자는 까맣고 깊었다. 그것은 한없이 텅 비어 보이기도 하고 또, 꽉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색한 만남이 있고 몇 달 후, 가을 바람이 스산하게 등뒤를 떠밀던 시월,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샤넬 블랙 슈트를 차려 입고 카페의 문을 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머리 위에 얹어진 선글라스도 샤넬이다. 언제나 저렇게 우아한 모습을 가장하지만 그녀에겐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건, 그건 일종의 퇴폐적인 그림자였다. 아무리 샤넬 정장을 입고 있어도 그녀에게선 술집 마담의 몸짓이 배어 나온다. 그건 그녀가 지우려하면 할 수록 그녀 얼굴 한 구석에, 손가락을 흔드는 버릇 속에, 발목을 감싸고 있는 스타킹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헤즐넛 커피를 주문하는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깊게 보조개가 패었다. 아, 저 볼우물, 그녀가 웃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빗물에 얼굴을 들이밀기라도 한다면 아마 저 우물에 찰방찰방 물이 고이리라.
커피 잔에 스푼을 놓고 돌리는 그녀의 손놀림이 낯설다. 곱게 다듬은 손가락 위에 전에 없던 콩알만한 다이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프레소의 쓴맛이 혀끝에 감겨온다.
“엄마, 결혼한다.” 그녀는 마치 커피 맛있는데,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수십 번도 더 저었을 커피 잔을 입술에 갖다대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잔을 내려놓으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옆모습이 가장 정직하다고 했던가. 어떤 표정으로도 꾸밀 수 없기에. 엄마의 옆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행복해?’ 라고 물어보려다 나는 그만 입술을 꼭 깨물어 버린다. 어차피 우리는 각자의 레일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할 뿐 서로의 종착역이나 기착지 같은 것을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엄마는 엄마가 찾은 무엇인가에 지금 막 안착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에 어떤 의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엄마에게 그것은 베르사체 선글라스를 샤넬 선글라스로 바꾼 정도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나는 바란다. 그녀의 행복을. 지구라는 행성에 정착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 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집어치워, 그들은 죽은지 오래야. 이미 사멸 돼버린 존재라구.” 나는 H에게 소리쳤다. “비틀즈는 영원히 죽지 않아.” 이건 뭐야? 아직까지도 우상 숭배가 가능한 것인가. 이미 그런 야만의 시대는 20세기라는 꼬리표를 단 채 썩은 냄새를 풍기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메스꺼운 것이 슬금슬금 내 검은 입 구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빠진 콜라 잔을 내려다보며 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왜 존이지? 커트(5)도 있잖아?” “존이 아니라 비틀즈야. 그리고 커트는 자살한 거지 살해당한 건 아냐. 자살과 타살은 명백히 다르지. 언뜻 보기에 자살하는 게 어떤 천재적인 결단처럼 보일 수도 있어. 아, 굉장하군.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H는 손가락을 펴서 흔들어댔다. 눈을 크게 뜬 채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목에 핏대가 벌겋게 돋아 올라왔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내는 결단을 내리는. 하지만 그건 극도로 나약한 존재들이나 저지르는 일이야. 시드, 짐, 지미…, 대부분 스스로 멸종한 존재들이라구.” 묘하게 뒤틀린 H의 입가에 허연 침이 고이고 있었다. 역겨웠다.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밀려왔다. 박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재커랜더’의 드러머는 연신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질 샌더 와이셔츠를 걸쳐 입은 인디 밴드 드러머라, 그와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웃었다.
운 좋게도 이 신인 밴드는 드럭의 주말 공연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다. 낮 동안 리허설을 위해 개방된 드럭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온갖 낙서로 얼룩진 시멘트벽에서는 눅눅한 기운이 밀려왔다. 그 곳은 내 방과도 비슷했다. 언제나 축축하게, 어둠 속에 잠긴. 굶주린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늙은 창녀처럼 지하에선 어떤 냄새가 풍긴다. 그건 약간의 타락과 방종, 쾌락의 하드코어 음이 깊게 스민 우리들의 땀 냄새였다.
H의 수다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 때 K가 쭈뼛거리며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한 여름인데도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첫인상은 음울했다.
H가 내게 남긴 것이라곤 K와 눈썹 위 일 곱 번째 구멍뿐이다.
K의 ‘혹성 49’는 ‘재커랜더’와 같이 데뷔 공연을 가졌다. 물론 ‘혹성 49’의 KO 승이었다. 그 날 H의 질 샌더 와이셔츠에 누군가가 케첩을 뿌렸던 거 같다. 아니면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코피를 흘렸던 것인지. 하여간 그의 옅은 하늘 색 플란넬 남방 위로 시뻘건 얼룩이 번져 있었다.
K, 무대 위의 그녀는 유난히 길다란 손가락들을 빠르게 움직이며 기타를 더듬고 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조그만 얼굴이 보였다 사라지곤 한다.
H가 K의 손을 잡고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녀석이었다. 개방된 사고영역의 소유자. 난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내 관심은 그의 새로운 연인인 K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그 날 그녀의 아름답고 섬세한 손가락들을 보았다.
K의 밴드는 연주만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곡에 가사를 붙이고 싶어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었다. 난 졸업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낼 의향이 있었다.
K의 곡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음울한 그녀의 표정 어디에서 그렇게 폭발적인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녀의 곡 열 세 개에 가사를 붙였다. 가사를 붙인 곡을 클럽에서 연주하던 날, 정확히 H의 일 곱 번째 구멍을 뚫던 날 그녀는 무대 뒤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팔목에 닿자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그녀의 입술은 마멀레이드처럼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가락. 그것은 기타를 치듯 아주 부드럽게 또 때론 아주 힘있게 내 몸에서 리듬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잃어버렸던 내 세포 하나 하나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H의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녀가 내 가슴에 입맞춤을 하고 있을 때였다. H의 갈색 눈동자는 의심스러운 빛을 띠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K는 그를 쳐다보았지만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H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표정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어색하게 굳은 표정은 언젠가 신문 사회면에서 보았던 H의 아버지 것과 똑같은 냉정함을 품고 있었다. 차고 단단한, 한 세기 전의 표정. 그는 냉혹하고 엄숙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멍청하게 보이는 재판관의 표정을 애써 흉내내고 있었다.
H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비틀즈 흉내 내는 것을 때려치울 것이다. 환멸을 느낀 그는 유럽의 아버지에게로 달려갈 지도 모른다. 그의 질 샌더와 프라다는 리버풀 같은 소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좀 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도시가 그에게 어울릴 것이다. 그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는 빠르게 적응할 지도 모른다. 그에게 권하고 싶은 도시가 있다. K와 나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아름다운 운하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암스테르담…….
K에게 졸업 작품을 바쳤다. 여성의 외음부를 직경 1m 가량 크게 확대한 청동 주조물이다. 작품의 제목은 ‘아름다운 구멍’.
그리고 난 내 몸에 또 하나의 구멍을 뚫었다. 내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가슴 위에서 K의 혹성 49가 차갑게 달랑거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리듬을 만들어내며.
내가 그녀 안에 안착하게 될까.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K를 생각하고 또 그녀가 나를 생각한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뜨거운 심장 주위를 선회하던 혹성 49가 갑작스레 궤도를 이탈해 수십 광년 떨어진 성단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강한 자장으로 서로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망막 위로 잠깐 엄마의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붉은 할로겐 등에 반사된 엄마의 얼굴. 그녀는 분명히 웃음을 머금고 있다.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담배연기가 느릿하게 춤을 추고 있다. 느리고 평온하게 움직이는 연기. 우리를 축복하듯 그녀가 손을 슬쩍 든다.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다.
K는 나를 위해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다. 난 그녀의 곡에 가사를 붙인다. 30평 남짓한 지하에서 우리는 태아처럼 웅크리고 서로를 보듬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인의 질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아기처럼 그녀는 옹알거린다.
드럭의 문은 새벽이 올 때까지 열려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검은 구멍을 벌린 채 엄마의 자궁처럼 뜨거운 온기를 내뿜으며. < 끝 >
------------------------------------------ 1)홍익대학교에서 신촌으로 넘어 가는 언덕에 자리잡은 클럽 분위기의 소극장
2)홍대 앞 클럽에서 연주한 인디 밴드. 드럼, 베이스, 기타 세 명의 남자로 구성. 모두 양성애자이며 헤비 스모커이고 삼겹살 매니아. 1998년 결성 2001년 1월 해체됨. 그들에겐 유난히 혹독한 밀레니엄의 첫 겨울이었다.
3)1960년 비틀즈가 공연을 했던 리버풀의 카페
4)‘러브스틱’이라는 밴드 이름답게 그들은 청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 곳에나 무턱대고 한번씩 사랑의 작대기를 꽂았다. 몇몇 클럽에서 매니아층을 거느리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으나 멤버 각자의 성격 차로 결성 다섯 달만에 해체됨. ‘너의 영혼을 불살라 버려라’라는 곡에 가사를 붙였으나 그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5)커트 코베인 : 그룹 ‘너바나’의 리드 싱어, 1994년 자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