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축 이야기 |
『충효당사(忠孝堂史)』에 의하면 이애가 인량리로 들어올 때는 영해신씨가 살다가 떠난 빈터였다. 지세(地勢)에 관심을 가지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40여 칸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에 준공을 본 것으로서, 이 건물이 현재의 건물이라 한다. |
건축 구성 |
충효당은 왼쪽에 사랑채를, 오른쪽에는 안채를 앉히고 특히 사랑채의 후방 경사진 곳에는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사당 주위에는 죽림(竹林)이 둘러 있어 사철 푸르다. 내정의 좌측 사랑방 부분은 샛방에서 1칸 왼편으로 벗어나 있는데, 이것은 내정을 넓히기 위하여 확장된 것으로 초창(初創) 평면(平面)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또 안채 부분에서도 구재(舊材)가 많이 보이고 있어 이 부분도 이건 시(移建時) 다소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대청의 후면 벽 중 우측 2칸의 각 사이에 있는 두 짝 열 개 널문에 중간 설주가 서 있는데, 위 틀 하면(下面)에 별도의 오래된 장부구멍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재목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선시대 중기에 이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 상부는 보를 세 줄로 놓아 한 칸 통으로 도리를 놓고(三樑架), 두 변만이 평행된 사변형(四邊形. 梯形) 판대공 (板臺工)을 세운 간략한 가구(架構)로 되어 있다. 이외는 우물 마루방을 깐 넓은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팔작기와집이다. 구조는 자연석 초석위에 방주(方柱)를 세웠으며, 대청 상부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梁架)로 파련대공(波蓮臺工)의 윗몸에 첨차(?遮)를 지워 종도리(宗道里)를 받았으며 합각(合閣) 하부만 우물반자[小欄半字]로 처리하였다. |
현판 |
충효당(忠孝堂) |
이재(李栽)의「충효당기(忠孝堂記)」에 따르면 운악 이함이 자손의 교육을 위해 1602년에 건물을 짓고 충효당이라 명명하였으며, 또 자손의 교육을 위해 만여 권의 서적을 모으고 종이를 마련하기 위해 수십 마지기 밭에 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추측하고 있다. 을 해서 당에 걸고 밀암(密庵) 이재의 기문을 받아 함께 달았다. |
문중 이야기 |
- 문중이야기 |
재령이씨 영해파 문중은 입향조 통정공 이애의 손자인 운악 이함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자제 5형제분 중 장남은 청계 이시청, 차남은 우계 이시형, 3남은 석계 이시명, 4남은 호군 이시성, 그리고 5남 통정 이시진으로 경남에 있다. 이 중 호군공 종택은 석계 이시명의 2남인 존재 이휘일이 호군 이시성에게 입양되어 존재종가로 부르며, 또 석계공의 3자인 갈암(이현일) 선생의 종택은 갈암종가라고 한다. 종택은 석계종택이며, 석계공의 2자는 존재(입양), 3자는 갈암이며, 유현이 많이 배출된 종택도 석계종택이다. |
관련이야기 |
- 건축이야기 |
담에 오르면 멀리 남쪽으로는 나지막한 중구봉과 더 멀리 형제봉 등 높고 낮은 산들이 아늑하게 보이며 확 트인 들판이 펼쳐진 중간으로 명나라 두사충(杜思忠)의 전설이 담긴 송천(松川)이 유유히 흘러 산과 들과 냇물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처럼 보인다. 의미하는 것만 같다. 여름에는 동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이 스치고 가을에는 동산에서 떠오르는 둥근달이 묵객(墨客) 들에게 시흥(詩興)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한마디로 기관이경(奇觀異景)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자손의 집도 1,500여 호에 이르고 있다. |
관련인물 | |
- 이애(李?,1480~1561) | |
이애는 1480년(성종 11)에 성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근재(覲齋) 이맹현(李孟賢)의 여섯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때 책실(冊室)로 따라와 진성백씨 백원정(白元貞)의 따님과 혼인하여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백원정은 공조전서(工曹典書) 를 지낸 백운경(白雲卿)의 증손이다. 부임하였으며 1528년(중종 23)에는 함창현감으로 나아갔으며 1532년(중종 27)에는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거쳐 경주판관(慶州判官),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역임하였으며, 1560년(명종 15)에는 기로(耆老)의 은전(恩典)으로 통정(通政) 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 |
| |
- 이함(李涵, 1554~1644) | |
본관은 재령, 자는 양원(養原), 호는 운악(雲嶽)이다. 1588년 식년시에서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 1600년 별시문과에서 급제하여 의금부 도사, 사재감 직장, 의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운악선생문집』이 있다. |
운악 이함선생
| |||||||||||||||||||||||||||||||||||||
생애이야기 | |||||||||||||||||||||||||||||||||||||
일찍부터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세 때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다. 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교유하면서 군자가 뜻을 세우고 실천하는 방법을 듣고 본받아서 행하였다. 26세 때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묘소를 지켰다. | |||||||||||||||||||||||||||||||||||||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공급하다 | |||||||||||||||||||||||||||||||||||||
이함이 3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흉년까지 겹쳐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가재(家財)를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이 안동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보를 지나가는데 군사들이 끼니를 거르자 쌀 수십 섬을 운반하여 위급함을 대처하였다. | |||||||||||||||||||||||||||||||||||||
성주에서 명나라 군사 횡포를 막다 | |||||||||||||||||||||||||||||||||||||
명장(明將) 남유격(覽遊擊)이 성주(星州)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그 병사들의 횡포가 심하자 성주목사는 견디지 못하고 떠나고 아전과 백성도 도망쳐 숨는 자가 많았다. 이때 순찰사는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있는 이함에게 성주 고을을 겸해서 보게 하였다. 이함은 성주로 가서 그 폐단을 조사하여 남유격에게 알린 다음 “이 주의 지방관은 장군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으니, 이 뒤부터 군비(軍費)의 실제 수효와 비용은 본 주에 주어 이 수에 의해 시행하게 하시요” 하여 시행하였다. 또 주의 문서를 조사하여 관청의 물품을 사적으로 쓴 것을 모두 거둬들이고 어긴 자는 죄를 물었다. 그리고 사부(士夫)들을 불러 “국가가 매우 위급한데 대소의 신민(臣民)이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감동을 하여 서로 힘을 모아 수납하여 물력(物力)이 모여들었으며 창고가 채워졌다. 이 뒤부터 지출 명목에 의해 명군을 접대하였으며 비용은 전날에 비해 십 분의 일도 안 되었으며, 고을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 |||||||||||||||||||||||||||||||||||||
의령(宜寧) 향교를 복원, 교육에 힘쓰다 | |||||||||||||||||||||||||||||||||||||
1607년(선조 40) 의령현감으로 부임한 뒤, 왜란 때 향교가 불에 타서 성현의 위패(位牌)가 민간 집에 모셔져 있었고 젊은 생도들은 공부할 장소가 없었다. 이함은 고을 유림(儒林)을 모아 의논한 다음 향교와 부속 건물을 세우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유생들을 모아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강론하고 효도와 우애에 힘쓸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을 지향하면서 수신(修身)하는 선비들이 늘어났다. | |||||||||||||||||||||||||||||||||||||
인량리 본가에서 별세하다 | |||||||||||||||||||||||||||||||||||||
1609년(광해군 1) 두 번째 문과에 합격하여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의 혼정(昏政)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대청을 충효당(忠孝堂)이라 하고 죽리관(竹裏館:西山亭)을 짓고 후진(後進)을 이끌었다. 이때부터 영해 고을 풍속이 선비의 고장으로 바뀌었다. |
가족이야기
| ||||||||||||||||
부사직 이은보의 둘째 아들 | ||||||||||||||||
이함의 아버지는 영해 인량(仁良)에서 문음(門蔭)으로 충무위부사직(忠武衛 副司直)에 증직된 이은보(李殷輔)로 그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광옥(李光玉)과 운악(雲嶽) 이함(李涵)이다. | ||||||||||||||||
부인과 자식들 | ||||||||||||||||
이함의 부인은 진성이씨로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이희안(李希顔)의 따님이며 퇴계의 집안 손녀로 숙인(淑人)에 추봉되었다. 시명(時明), 부호군 시성(時成), 무과 급제한 시진(時震)이며, 장녀는 선비 김우(金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좌랑 박안복(朴安復)에게 시집갔다. | ||||||||||||||||
자손들에 대한 유훈(遺訓) | ||||||||||||||||
이함은 자제와 손자들에게 유계(遺戒) 하였는데 학문의 귀중함과 이욕(利慾)을 경계할 것을 강조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아들과 손자가 있다면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것으로 믿으나, 다만 그 사이에 사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므로 그 대개를 들어 구분하여 처리하니 깊이 생각하여 준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학문이야기
| ||||||||||
교유인물 | ||||||||||
김성일(金誠一), 장흥효(張興孝), 김시양(金時讓), 조정(趙靖) | ||||||||||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경향 | ||||||||||
학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함은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심성론(心性論)에도 관심을 보인 듯하다. 「논학설(論學說)」등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덕성을 바탕으로 하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해야 한다는, 즉 사서(四書)에 바탕을 두었으며 존심(存心)ㆍ도체(道體)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저작이야기
『운악선생문집(雲嶽先生文集)』 |
『운악선생문집』은 시문(詩文)?잡저(雜著) 및 부록 등 3권 1책으로써, 11대 종손 이현발(李鉉發)이 주선하여 이휘재(李彙載)의 서문과 교정을 맡아 본 김대진(金垈鎭)의 발문을 받아 목판본으로 1861년에 간행하였으며, 그 뒤 1958년 영해파보소(寧海派譜所)에서 신활자본으로 두 번째 나왔다. 다소 참고해 손질하여 내용이 조금씩 차이 나는 곳이 있다. 한다. 보이는 필사본『운악유고(雲嶽遺稿)』한 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