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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소생한 것이다
빌립 복음서 56:15 ~ 20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먼저 죽었다가 다시 일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일어났다가 그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받았으나 소생하여 살다가 노년에 이르러 자연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에 대한 사실들이 오늘날 너무나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려지게 된 데에는 후세에 예수를 신격화하거나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의로 왜곡시킨데 그 원인이 있다.
또한 복음서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이 있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전해들은 목격담이나 구전을 토대로 엮어진데다가 필사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가감을 겪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을 역사가로 오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들의 목적은 역사가들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화와 기독교 선교에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빌립 복음서 소개
빌립 복음서 빌립복음은 “제자들 중에 그녀를 가장 사랑했으며 자주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곤 했다” 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빌립복음은 인간의 고난과 사후의 삶이라는 발렌티누스적 개념의 맥락에서 성사(聖事)의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말들을 모아놓은 글이다. (발렌티누스 파는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성서를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빌립 복음 또한 신약성서의 정경복음과 마찬가지로 경구와 유추, 권고, 논쟁, 문답, 예수의 말씀, 성서 주해, 교리 등 다양한 어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빌립 복음은 신약 성서의 복음서들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간혹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을 전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약성서의 복음들처럼 서사적 틀 안에 놓이지 않는다. < 빌립 복음서 > |
예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로마의 점령 이전에는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구약시대부터 그들은 사형으로 돌로 쳐 죽이기, 화형, 참수형 그리고 교살형을 사용하였다. 굳이 십자가형과 가장 흡사한 것을 들자면, 모세율법에 준한 신성모독죄를 지은 사람은 앞서 언급한 방법 중의 하나로 죽인 다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는 방법이 있었다.
우리는 십자가형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로마제국과 연결하지만 실은 로마보다 수세기 전에 아시리아, 페르시아, 페니키아 같은 나라들은 사형방식으로 십자가형을 썼다. 기원전 1세기 경 로마는 제국이 확정되면서 외지에서 많은 노예들을 끌고 왔는데, 그 중 사납고 제어하기 어려운 노예들에게는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십자가형은 굴욕을 주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는 처형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그 주된 대상자는 반기를 든 노예나 전쟁에서 나포한 적, 또는 정치범이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존중하여, 십자가 처형방식을 쓰지 않았다. 더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교수형, 독살형 또는 참수형을 썼다. 십자가 처형방식은 로마 식민지 정권하의 팔레스티나 풍경속에 흔히 있던 광경이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 반란자나 선동자들을 잡아서 고문하고 십자가형에 처 하였다.
"어떤 때는 하루에 500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십자가를 세울 공간이 없었고 희생자를 매달기 위한 십자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십자가형은 사형 중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희생자를 나무기둥에 잡아매고 금속이나 뼈가 박혀있는 가죽채찍이나 나무 채찍으로 한참 때린 후 땅바닥에 눕혀놓은 십자가에 묶어놓고 손이나 손목 또는 팔에 못을 박은 상태로 십자가를 일으켜 세운다. 두 발은 모아 겹쳐서 십자가 수직기둥에 못질을 한다. 각목을 횡으로 덧대어 발을 올려놓게 한다. 이것은 희생자의 체중 때문에 손이나 손목이 찢어지는 것을 다소 완화시켜 준다. 발을 얹고 있는 각목이 지지를 해주기는 하지만 자기 체중에 의하여 상반신이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숨 쉬는 것이 어려워진다. 못질한 상처에서 피가 많이 많이 흐르지만 그보다는 극도의 호흡곤란이 더 치명적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혈액순환이 느려져 장기가 모두 손상되고 마침내 질식사하게 된다.
십자가형의 목적은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하며, 또한 대중에게 생생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 희생자는 극단의 고통속에서 대부분 3~4일 만에 죽지만, 1,2주일이 되어도 살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형장에 흔히 있던 장면중의 하나는 친족들이 조그마한 천에 포도주을 적셔 긴 막대에 꽂아 그것으로 사형수의 입술을 축여주는 일이다. 십자가형이라는 사형이 유난히 많았던 이 시대에 이런 관습이 허용되고 있었다. 예수의 경우 경비병중 하나가 이것을 도와준다.
형벌중 가장 잔인한 십자가 처형
요한 마가는 '쓸개즙을 탄 식초'를 해면 海綿에 적셔 갈대에 꿰어 예수 입에 갖다 댔으나 그는 이를 거절한다. 얼마 후 그가 다시 권했을 때 예수는 그것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예수는 의식을 잃는다. 그는 머리를 앞으로 떨구었고 그의 영혼은 떠나 버렸다. 예수가 마신 쓸개즙을 탄 식초는 사실은 독을 탄 식초였다. 이 독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애기똥풀 Vincetoxicum의 즙으로, 이 약초는 유대인의 약초라고도 하며 초기 기독교도들의 매장장으로 쓰인 로마 카타콤 catacomb의 벽에도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 약물을 마시면 곧 가사상태 또는 혼수상태에 들어가고 깊은 잠에 빠진다. 호흡이나 심장박동, 맥박등 삶의 징후가 모두 사라진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게 되는 그런 약물이다. 이 약물은 복용량이 과다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독약을 사용한다. 그는 줄리엣에게 이 독약을 먹여 그녀를 가사상태로 만들었다가 몇 시간 후 소생시킨다. 로미오는 이 가사상태를 진짜 죽은 걸로 잘못알고 자기도 자살하지만.
서기 33년 봄 십자가 형장은 정원식 묘지 또는 뜰이었다. 여기에 아리마대 요셉 Joseph of Adrimathea, 즉 야고보의 개인소유 정원식 묘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바로 골고다 언덕이다. '골고다 Golgotha'란 히브리어로 '묘지' 또는 '납골당'이라는 뜻으로 예수 당시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로는 굴갈타 Gulgalta이었다. 영어 캘버리 Calvary는 라틴어 캘버리아 Calvaria, 해골에서 온 것으로 한국에서는 '갈보리'라고도 한다. 흔히 영화나 소설에는 하늘과 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웅장한 장소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사형장은 개인소유의 소규모 정원식 묘지이다. 더 나아가 이 세 사람의 사형은 당시 수시로 일어나던 수 십, 수 백명이 한꺼번에 처형되는 사건과 비교할 때 결코 주목받을 수 있는 사건도 되지 못하였다.
이 장소의 특징은 히브리서 13:11~13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어서 13:11-13) "성문 밖"이나 "영문 營門 밖"은 쓰레기와 분뇨를 버리는 곳이었다. 제단에 희생으로 바치는 짐승도 그 피는 빼어 성소로 들여가 거기서 태우고 나머지 사체는 성문 밖에서 태웠다. 어쨌든 물리적으로 보나 제식의 측면에서 보나 청결하지 못한 곳이었다. 이 사형장 중앙에는 마당이 있고, 남쪽으로는 바위산이 있으며, 북쪽에 십자가 세 개가 세워졌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중심인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십자가에 의한 처형내용과 실제상황을 사실과 너무나 다르게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우선, 십자가형을 받은 세 사람을 예수와 두 행악자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로마인의 입장에서라면 유대 독립투사인 두 열심당원은 이른 바 반로마 테러리스트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스스로 유대민족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을 행악자라고 한 점에 있어서는 복음서의 기자들은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로마 점령하의 유대에서 가장 큰 죄는 당연히 유대의 독립운동이었다. 주범인 시몬 마기와 가룟 유다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목은 열심당의 두 우두머리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로마정권에 적대적 무장투쟁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예수는 민중을 현혹시키고, 종말론을 들먹이며 혹세무민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거짓 예언자였다는 것이었다. 예수와 더불어 두 행악자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치범인 유대의 독립운동가 두 사람과 더불어 사회풍속범인 예수도 형을 받은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할 만큼 비중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배치 역시 사실과 다르다. 예수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서쪽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사실은 그동안 기독교도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여태까지 예수에 대해서만 너무 집중해 왔기 때문에 정확한 그림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 독립운동 주도혐의로 십자가에 오른 「시몬 마기」 와 「가룟 유다」. 종교범으로 바라바 대타로 십자가에 오른 「예수」
서기 33년 봄에 일어난 십자가형 사건의 중심인물은 시몬 마기였다. 따라서 주범인 시몬 마기의 십자가를 중앙에 놓고, 그 다음 종범인 유다를 동쪽에 두었다. 예수는 종교범으로서 나머지 바라바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어 서쪽 십자가에 매달렸다. 처형장 서쪽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밑에는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가가 있었고, 십자가 가까이에는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남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시몬의 배우자 헬레나가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야고보와 안디바 영주가 형을 집행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다른 추종자들은 다 도망치고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극도의 고통이고 고문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세 사람은 심한 호흡곤란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린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가는 준비했던 극약을 스펀지에 적셔서 예수에게 주었고, 예수는 그것을 마시자 곧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군다. 예수는 6시간 만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의식을 잃는다. 빌라도는 그렇게 빨리 예수의 목숨이 끊어지는데 대해서 놀란다. 이때가 금요일 오후 3시로 이미 안식일이 시작된 때다.
때가 안식일에 들어섰음으로 시신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은 유대교의 종규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펴 그들 세 명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린다. 야고보는 또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그들을 매장하겠다고 요청을 하여 빌라도의 허락을 받는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21-34
복음서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두 사람이 죽지 않았으므로 다리를 꺾고,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혈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몸에서 혈액이 흐르는 것은 심장의 박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찔린 상처에서 혈액이 나오는 것은 살아있다라는 것이 의사들의 소견이다.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려놓는 부분에서도 영어로 번역되기 이전의 라틴어 성서에는 '소마 soms, 살아있는 몸'로 기록하고 있다. 죽은 몸은 '프토마 ptoma'라고 한다.
소생한 후 동굴무덤 밖으로 옮겨지는 예수
예수는 살아 있었다. 코란에서도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단지 혼절 昏絶하였을 뿐이며 혼절한 상태로 끌어내려져 살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의 교섭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져 이 세 명이 다같이 동굴에 생매장된다. 이 세 명은 매장을 위하여 야고보가 준비해 놓은 가까운 동굴 무덤으로 옮겨진다. 이 동굴 무덤은 형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야고보 소유의 땅에 있었고, 야고보와 안디바 영주가 예수와 나머지 두 명의 사형수의 매장을 위하여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보통 시체를 동굴에 매장하였다. 이러한 매장방식은 로마에 있는 카타콤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방식은 동굴의 벽면을 파내어 주검을 안치할 현실 玄室 loculus을 만들고, 시체에 수의를 입혀 현실에 주검을 놓아둔다. 흙으로 덮지 않으며, 동굴 문을 닫으면 장례가 끝난다.
이 동굴무덤은 바위산에 뚫려있는 여러 동굴 중의 하나로, 몇 개의 동굴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 끝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것에는 그 위로 구멍이 똟려 있어 하늘이 보이기도 한다. 큰 바위를 굴려 동굴입구를 막으면 그 동굴은 무덤으로 쓸 수 있게 된다. 서기 1세기 대의 유적인 이 동굴무덤은 21세기인 지금도 그 형상을 알아 볼 수 있고 일부는 사용가능하다. 로마의 형리들은 세 명의 죄수의 사체를 동굴 무덤에 넣은 후 큰 바위를 굴려 구멍을 막아 놓게 한 다음, 몇 명의 경비병을 남겨 놓고 형장을 떠난다.
밖에서 보면 예수는 매장된 것이고 나머지 두 명은 생매장 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돌문이 닫힌 동굴 속에서는 긴박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야고보와 요한 마가 그리고 시몬이 예수의 응급처지 시술에 들어간다. 야고보는 자신의 형 예수를 살리기 위하여, 안디바 영주는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는 시몬 마기를 살리기 위하여 사전에 서로 손을 잡고 작전을 짜 놓았었다. 시몬은 자기 스스로가 크게 부상당한 상태였지만 고통을 무릅쓰고 미리 준비해 놓은 다량의 알로에를 사제 瀉劑로, 몰약을 진정제로 써서, 예수가 마신 독이 온 몸에 번지기 전에 빨리 추출해 낸다.
요한 마가도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시몬이야말로 알려진 치료인이다. 이윽고 예수는 깨어난다. 예수는 서서히 소생한다. 이들 덕분에 죽음의 위기를 겨우 모면했지만 예수는 기력이 없이 누워 있다. 후에 도착한 데오다, 막달라 마리아, 헬레나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등 여인들과 에세네파 신도들의 간호와 도움으로, 예수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후 급히 동굴 밖으로 옮겨진다. 시몬도 이 여인들의 치료를 받고 동굴을 빠져나간다.
유다는 목숨을 건져 동굴을 떠나는 예수를 바라본다. 그의 눈은 실망의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어! 저런 자를 독립운동에 끌어들이려 했다니!'
유다는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동료로서 예수를 독립운동에 동참케 하려고 무척 애를 썼었다. 유다는 예수가 로마병사들에게 잡혀죽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유다의 주장에 합류하여 무력항쟁에 나설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수는 저항은 커녕 너무나도 무력하게 끌려와 십자가에 매달려 버렸다. 유대의 열혈 독립투사 유다는 동료 예수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독립운동에 대한 좌절감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이윽고 그는 동굴입구의 반대쪽에 나있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신약성서에서 가룟 유다가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하는 표현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시몬과 안나스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도는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의 가까운 친구로서 비교적 秘敎的 비밀을 예수와 공유했던 사람이다. 그는 율법학자들의 우두머리였고 시몬에 이어 유대독립을 위한 투쟁단체인 열심당의 당수였다.
그는 세례요한의 교리와 방법에 반대하여 십이 사도 협의회에도 동시에 참여했지만, 로마에 대한 예수의 대응방식에는 반대하였다. 유다는 영지주의 靈知主義, Gnosticism를 신봉하고, 인간의 구제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고 지식과 지혜로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가 아니고 무지와 무식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죽는 구세주로 보지 않았도 그를 지식과 지혜의 계시자 啓示者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가 신의 아들인 것처럼, 인간 모두가 신의 아들딸이라고 보았다.
동굴무덤 모습과 그 내부(좌) / 유대의 마지막 저항 마사다 요새의 전사들의 모습(우)
유다는 이번 십자가 사건에서 은 삼십 량과 유다의 키스로 예수를 배반한 것으로 누명을 쓰게 되었다. 예수의 뜻대로, 예수가 시키는 그대로, 악역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신약성서는 유다가 예수를 은 30냥에 팔았다고 적고 있다. 은 30냥은 당시 120 데라리온 denarius이다. 1데라리온은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수당이다. 그러므로 은 30냥은 일용직 노동자의 4개월 치 임금에 해당한다. 당시 현상 수배된 독립운동자 열심당원에 대한 현상금은 많게는 2,500냥, 보통은 270냥 (약1,100데나리온)이었다. 신약성서의 기술대로라면 예수가 몸값이 겨우 은 30냥 밖에 안되는 하찮은 존재라는 말인가? 사실 로마당국은 독립당원도 아닌 종교풍속범 예수에게는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또한 수백만 냥의 독립운동 군자금을 책임지고 다루는 유다가 겨우 푼돈 30냥이 탐이나 예수를 팔았다고 기술한 신약복음서의 기자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인이라는 연구도 있다. 유대인이라면 유대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고결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 유다를 한낱 잡범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세 기독교의 패권을 잡은 베드로파가 유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는 음모설도 오랫동안 있어왔다.
유대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예수 처형 당시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강력 부인하였던 베드로의 죄를, 유다를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희석시키려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체포로 시작하여 그가 십자가형의 고통을 당하고, 극약을 마신 후 무의식 상태에 빠졌다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소생한 것, 이 일련의 일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는 요행과 우연도 있었지만, 사실은 야고보, 요한 마가 그리고 안디바 영주가 주도하여 계획하고 계획대로 잘 집행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도움으로 백 오십 킬로미터가 넘는 갈릴리로 나귀를 타고 건너간다.거기서 지난 며칠 동안 소심과 비겁함의 극치를 보였던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또 크게 꾸지람을 한다.
의료를 병행한 선교는 예수 때부터 현재까지 교육사업과 병행하여 복음전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이번 십자가 처형사건의 주범이자 열심당의 우두머리인 시몬 마기는 예수와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서로 다른 교리와 철학을 가졌으면서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같은 편에 서서 행동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이었다. 시몬은 야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독제와 마취제로 실신한 예수를 소생시키고 치료해 준 사실을 가지고, 완전히 죽었던 예수를 자기의 신통력 神通力으로 부활시켰다고 사방에 소문을 내고 다닌다. 자기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렸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많은 신도들을 끌어들여 자기 휘하에 거느리고자 함이었다. 의사이자 마술사인 시몬은 실제로 그 후로도 거의 죽은 사람들을 여러 차례 살려내어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의술을 베풀어 인심을 모으는가 하면 마술을 매우 능란하게 활용하여 당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그의 소생을 그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이나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 수가 몇 명되지 않기 때문에, 시몬과 무관한 예수의 부활 이야기도 점차 스그러들고 또 크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게 되었다.
부활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음, 즉 인간이 죄를 대속(대신 속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그의 죽음이 사람들을 더 감동시켰고 더 큰 의미를 가졌었다. 또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그것은 육체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부활의 문제가 다시 논의되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는 당시 신생 종교였기 때문에, 그때에 존재했던 다른 여러 종교들과의 경쟁관계에서 그들보다 더 강력하고 더 매력적인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바울이 그의 선교에서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크게 부각시킨 것도 시몬 마기의 영향이 컸다. 다마스커스에서 바울과 예수가 조우할 때 시몬이 같이 있었고, 바울이 개종하고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시몬은 그를 계도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이 때 시몬은 바울에게, 새 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 육체적 부활같은 신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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