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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21)
권징이란 무엇인가?② : 교회의 권징
권징이란 말을 들을 때 즐겁게 들립니까? 아니면 무시무시하게 들립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는 교회 권징이란 말이 아주 부정적인 개념으로 생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교회 권징을 어떤 성도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에 실패했을 때, 그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 권징을 교회나 다른 성도들이 한 성도의 사생활에 참견하고, 그 사람의 생활을 판단하고, 그 성도를 지옥에 떨어뜨리려고 비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의 권징을 아주 공격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부정하게 된다.
교회의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가 교회의 권징이 결핍되어 있거나 권징을 등한히 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교회의 권징이란 말을 들을 때, 부정적인 개념에 잠식당해 있지 않는가? 교회의 권징을 인정하면서도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의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께서 선물로 주신 권징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또 이 권징을 제대로 시행하는 교회가 될지 안 될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의 권징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오늘날 교회의 권징이 벌을 내리는 것으로서, 죄가 있을 때 행해야 하는 매우 불쾌한 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 교회 권징이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권징이 그 특성상 교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선적으로 예방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두 종류의 권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먼저, 교회의 권징은 예방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교정하는 것이다. 이 두 권징은 전체 성도들이 실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 두 권징은 하나의 목적으로 시행된다. 즉 우리가 다 죄를 지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서로 권면함으로 함께 우리 모두의 구원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다. 구원을 지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권징의 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예방하는 교회 권징과 교정하는 교회 권징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I. 교회 권징의 예방적 기능
권징이란 단어는 우리 사전에 없는 기독교적인 용어다. 이 권징이란 말의 영어 Discipline[디스플린]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본적으로 심판, 징계다. 징계는 아이들이 불순종할 때 가하는 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징계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권징을 받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나 권징의 원래적인 의미는 징계가 아니다. “교회 권징”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 단어가 영어에서 사용되는 용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영영사전을 보면, 이 단어는 실제로 교훈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권징 곧 ‘Discipline[디스플린]’이란 단어는 성경적인 단어로 제자란 뜻을 가진 ‘Disciple[디사이플]’이란 라틴 단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Disciple[디사이플]’이란 단어는 제자 곧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권징이란 단어와 제자란 단어는 같은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제자는 권징을 받는 사람이다. 곧 제자는 교육받는 사람이다. 예수님께는 열두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날마다 온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일하고 랍비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예수님께는 열두 제자들 외에도 많은 다른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따라 다녔다. 예수님 주위에 따라다닌 무리들이나 열두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곧 권징을 받았다.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열 한명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마태복음 28:19-2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다. 열 한 제자들이 할 일은 제자를 삼는 일이다. 즉 모든 민족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학생들, 제자들 곧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주께서 가르쳤던 방식대로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권징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모으는 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 사방에서 죄인들을 부르셨다. 마태복음 11:28-29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워야 한다. 주님께 권징을 받고 가르침을 받음으로 제자가 되고 안식과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권징이란 단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죄가 있을 때 행해야 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우리는 모두 제자들이고, 학생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권징을 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확실하게, 우리가 받아야 하는 가르침, 권징의 내용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과 화해의 복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순히 성경 자체의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이 복음의 실제적 의미다. 이 복음이 매일의 실제적인 삶에서 무슨 의미를 주는가? 하는 현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는 일을 결코 끝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한없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방법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을지라도, 누가 감히 우리 생활의 모든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학교다. 하나님의 학교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학생이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일을 끝낼 수 없다.
권징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고, 끝이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는 우리 구주의 학생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위대한 선지자이시고 교사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심과 함께 교회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7-16).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 선물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엡 4:11). 그렇다면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는 무슨 사역을 하는가? 목사와 교사는 “우리가 다 믿음의 일치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 이를 때까지,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한다(엡 4:13). 이런 일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등장하는 직분자들이 했던 일이다. 직분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부유한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속이 날마다 생활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인지를 깨닫도록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어서 그 말씀이 역사하도록 하는 일을 한다.
이 직분자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장로들을 주셨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장로들의 사역 곧 가르치는 장로를 통한 강설과 치리하는 장로의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권징하시고 교훈하시고 격려하신다. 강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신자들이 복음의 약속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마다,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그들의 모든 죄가 정말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시고 공적으로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위한 직분적이고 공적인 교훈, 행위로의 권징이 있다. 그러나 이 권징은 직분자들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서로 관심이 없는 개별적인 개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성도의 교제를 형성하기를 원하신다.
벨직신앙고백 제28항의 언어로 말씀드리면 각각의 신자와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 연합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 왜 그러한가? 각각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재능에 따라 다른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성도들이 서로 돕고 격려하고 함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자주 교훈하고 있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먼저,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과 선행을 행할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부추기자”는 것이다. 또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러하자”고 한다. 이런 것은 성도들 전체에게 주어진 일이다. 성도들은 교제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살 수 있는지, 이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일이 하나의 권징이고 교훈이라는 생각은 골로새서 3장에서도 반복된다.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했다. 강설하는 자만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이게 성도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책임이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가? 특히 우리가 성경공부로 함께 모일 때 이런 가르침이 시행될 아주 좋은 기회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서로 격려하고, 우리 앞에 닥치는 여러 가지 생활의 문제들에 대서 서로 말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공부 모임에도 신실하게 참석해야 한다.
서로서로 권징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독자적으로 자기 혼자 살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홀로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독립된 신자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지체들이다. 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단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서로의 사적인 대화를 통하여,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함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 권징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언약적인 삶은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는 삶이다. 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사회적인 삶 속에서 다른 성도들과 서로 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이 서로의 권징, 가르침이 먼저 생기는 것은 사회의 상호작용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삶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어야 했다. 신명기 6: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다. 6절을 보면 정말로, 이스라엘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했다. 그렇다. 여호와를 사랑해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속에 새긴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신명기 6:7절을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다. 어떻게 부지런히 가르치게 되는가?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자녀들에게 이 율법을 가르쳐서 그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자녀들이 해야 할 일만은 아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은 식사를 할 때나, 산책을 할 때나, 일터에 있을 때나, 언제나 여호와와 그의 말씀과 함께 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안에서 백성들과 교제를 나누시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바울은 골로새서 3: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는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라고 했다. 이 가르침은 신약교회의 백성들의 특징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풍성히 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이 성경공부나, 주일저녁에 자녀들과 하는 강설토론(개혁 교회에서는 저녁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낮에 들은 강설을 함께 이해하기 위해서 자녀들이 묻고 부모가 답을 해 주는 시간을 갖는다)에서 제한될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일주일 내내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되고,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한 그 복음이 우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제의 시간에 농담만 하게 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책임이다.
우리 가운데 일주일 내내 복음이 풍성하게 거하였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고,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아왔다면 당연히 우리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풍성히 거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우리 각자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서로를 향한 가르침, 본래적 단어의 의미에서 권징이 이루어지는 것은 특별하고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성경에 있는 이 부유함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이 부유함은 강설과 심방 혹은 성도들 서로간의 일반적인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죄는 서로를 실망시키게 되고 거룩함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강설자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기사를 강설을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에 더 주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강설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신 거룩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숲 속을 거닐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에 대해서 토론할 때, 감히 더러운 말과 조잡한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 다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혼자서 추악한 말과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을 통하여 말하려고 하는 요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이런 권징, 이렇게 서로를 교훈하는 것은 죄를 예방해 주고, 죄를 단념시킨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교훈은 예방적 권징이다. 우리 모두가 악으로 기울어지려고 할 때, 이런 교훈은 예방적 권징은 전체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중요한 축복인 권징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노력 곧 강설을 통하여, 심방을 통하여, 성도들 내에서 서로 교훈함을 통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하게 우리는 그 죄인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예방적 권징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이 일단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 심지어 죄를 범한 후에도, 예방적 권징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거룩하게 되도록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예방적 권징은 교정하는 권징과 한 쌍을 이룬다. 왜냐하면 범죄한 자는 교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회개와 용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강설의 두 번째 요점 곧 교정하는 권징을 살펴보게 한다.
II. 교정하는 교회의 권징
이제 두 번째 요점인 교정하는 권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피차 가르치라”했을 뿐만 아니라(골 3:16), 디모데후서에서 “훈계하라”고 했다(딤후 2:25). 우리 중에 누군가가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죄를 덮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 죄인에게 훈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18: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 죄에 의해서 영향을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모든 죄가 교회 안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라 곧 꾸짖으라고 한다. 이것은 교정하는 권징을 말한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꾸짖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이런 교정하는 권징을 해야 하는 죄가 어떤 죄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큰’ 죄라고 생각되는 죄를 범할 때만 교정적인 권징을 해야 하는가, 작은 죄를 범할 때는 교정적인 권징을 안 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은 분명하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나무하러 갔던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민 15장). 아간은 여리고에서 은과 금과 외투를 훔쳤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수 7장).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소유를 판 값 얼마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셨다(행 5장).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죄와 큰 죄가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지게 된다.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인 것이 죄다. 죄라고 규정되었다. 도적질, 간음, 허풍 등과 같은 것은 분명히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 기도에 게으르고 무시하는 것, 예배에 소홀히 하는 것,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 탐욕에 빠지는 것, 함부로 더러운 말을 내 뱉는 것, 불친절, 물질주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죄인가? 중대하고 좋지 못한 습관, 성냄, 솔직하지 못함, 조작된 투표, 책임회피, 자만,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것, 뇌물 등도 죄인가? 이런 일들이 죄인가? 만일 이런 일들이 다 죄라면, 우리는 이런 죄들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태도와 행동은 분명히 죄다. 이런 죄들도 하나님께서 관용하실 수 있는 죄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표준으로 볼 때는 이런 태도와 행동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태도와 행동은 죄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회개한 죄를 씻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음이나 심각한 거짓말을 할 때뿐만 아니라, 더러운 말을 할 때나 자만하거나 물질주의에 빠지거나 성낼 때에도 서로를 훈계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교정하는 권징은 우리가 범하는 큰 범죄라고 생각되는 것에만 제한시켜서는 안 되고 날마다 범하는 수많은 작은 범죄라고 생각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교정하는 권징이 현재 우리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것 이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교정하는 권징이 우리 가운데 있는 더 일반적인 것이라면 오늘 범한 죄를 회개하는 자기 자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해 상처를 입은 형제, 자매 앞에서 회개하는 자기 자신, 자기가 가진 죄와 싸우기 위해 투쟁하는 자신에게서 시작 되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만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날마다 범하는 죄와 투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훈계를 받아들여서 죄를 회개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자신 위에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교정하는 권징은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른 형제, 자매들이 하는 말과 행동과 태도 속에 죄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훈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훈계하는 일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아주 미워하신다는 이 성경적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또한 모든 죄를 아주 미워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해 서로 말하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아마도 이렇게 서로 훈계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대화 중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망설이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예방적인 권징 곧 서로 봉사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복음의 부유함에 관해서 서로 교훈하고 날마다 생활에서 이 복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을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교정하는 권징이 약간 강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고 썩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더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서로 서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선포되고 성도들 가운데 예방적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는 그런 교회에서만, 형제, 자매들 중에 간음이나 교만이나 허풍을 떨거나 게으름 혹은 예배에 이유 없이 빠지는 것, 예배에 다 참석하지 않는 것 등의 죄에 빠진 사람이 있을 때, 그때는 다른 형제, 자매에게 그의 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해 줄 수도 있고, 모든 지혜 가운데 훈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믿음의 형제, 자매 사이에서 이런 교정하는 권징이 이루어질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신다. 마태복음 18:15b절을 보면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만일 그 형제가 다른 형제를 도구로 하여 권면하는 주의 봉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회개는 형제를 얻는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그 죄인이 주안에 있는 형제이기 때문에 이런 회개를 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인이 회개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본 그 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길을 잃어버린 양이 길을 찾아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교정하는 권징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다른 성도들이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런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우리 본성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그 사람을 전복시킬 것이다. 그 죄인이 회개하기까지 하늘로부터 진노가 내려올 것이다. 그 진노는 죄인 자신에게 임할 뿐만 아니라 죄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교회 전체, 모든 성도들에게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정하는 권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이 교정하는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 책임은 성도 각자에게 있고, 교회 전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형제가 찾아가서 훈계했는데도, 형제나 자매가 자기의 교만, 자기 아집, 중상 모략하는 죄,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죄,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자꾸 등한시 하는 죄,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 죄, 열심히 일하지 않는 죄, 습관적으로 화내는 죄, 기도 하지 않는 죄와 같은 죄악들에 대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다. 마태복음 18:16절을 보면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했다. 그래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마태복음 18:17절을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라고 했다.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죄인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당회는 간음과 같은 큰 죄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더러운 말이나 게으르거나 남을 헐뜯는 말을 하거나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 쓸데없는 농담이나 물질주의적인 사고와 아집에 빠지는 것과 같은 별일 아닌 것 같은 작은 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회가 다루어야 하는 죄는 꼭 더러운 말과 같은 사소한 죄까지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다. 더러운 말과 희롱의 말이나, 중상 모략하는 말이나, 헐뜯는 말을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을 교회가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그 죄를 당회가 교회를 대표해서 다루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당회가, 교회가 반복해서 그런 죄인에게 훈계할지라도 듣지 않는다면 그런 죄인은 성찬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끝까지 고집하면 출교시켜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교만이나 더러운 말이나 욕설이나 추악한 농담과 같은 죄로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미워하신다. 그 죄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큰 죄이든지 작은 죄이든지 다 미워하신다. 죄인이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스스로 천국의 문을 굳게 닫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권징은 벨직신앙고백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 중에 하나로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회의 참된 표지를 드러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가족 가운데서, 우리의 모임 가운데서, 우리의 만남에서, 우리의 대화에서, 우리는 정말로 덕을 세우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행동과 말과 태도를 드러내었다. 때로는 불친절하고, 자기를 감추고 개방하지 못하고,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남을 비방하고, 욕설을 하고,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좋지 못한 농담을 하였다.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이런 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서로 권징하고 훈계했는가? 회개는 교정하는 권징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서로 훈계함으로 회개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죄가 우리 가운데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죄가 제거되는 것은 예방적인 권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서로 교훈하고 설교와 심방과 성경공부를 통하여 교훈함으로 제거될 것이다.
우리가 참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겸손하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과 행동과 태도로 범하는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정말 신중해야 한다. 만일 우리 가운데서 서로를 향한 교회의 권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왜 주께서 교회 안에서 서로서로 권징을 실행하라고 교훈하셨는가? 왜 주께서 그 권징이 예방적인 것이든지, 교정적인 것이든지, 당회를 통해서든지, 성도들을 통해서든지 그 권징을 실행하라고 명령하셨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마태복음 18: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이 멸망당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 서로의 권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길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다. 즉 교회 권징의 목적은 사랑이다. 죄인에 대한 사랑이다. 한 사람도 버림당하지도 않고 모두 함께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교회가 실행하는 권징의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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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이 글은 광주화원교회에서 퍼온글을 조금 수정하였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