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4.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멸망 -------------------------------------------------------------------------------- 개요 -------------------------------------------------------------------------------- <기본서 참조> E. M. Burns, I, 제 9 장, pp. 269-286; B. Tierney, pp. 57-78, J. le Goff, 제 1 장 A. 개관 B. 주제에 관한 기본질문 1) 게르만족의 등장 2) 로마제국의 멸망과 서방의 야만화(?) 자료와 과제 -------------------------------------------------------------------------------- A. 개관 로마제국이 내부적으로 쇠약해질 무렵 알프스이북의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은 3세기(Dicletianus)와 4세기(Theodosius) 그들의 침입을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에는 그들에 의해 마지막 생명을 다 했다.(476) 로마의 舊土에는 일시 여러 개의 게르만왕국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바야흐로 흔히 말하는 "암흑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로마제국의 유산은 게르만족에게 직·간접적으로 계승되었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기독교 교회는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B. 주제에 관한 기본질문 1. 게르만족은 어떤 존재였는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알려지게 되었는가? 2. 게르만족은 로마제국과 어떤 형태로 접촉했는가? 3.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하게 된 이유와 그 이동경로는? 4.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게르만족에 의해 수립된 국가체제의 성격은? 5. 구 로마제국의 주민과 게르만정복자의 관계는? -------------------------------------------------------------------------------- 1) 게르만족의 등장 A. 게르만족의 사회 게르만족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로마인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들의 根據地는 스칸디나비아 및 북독일지방으로서 대략 기원전(B. C.) 1000년 경부터의 흔적이 고고학적 발굴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기원 전후무렵에 로마인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우리가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최초의 文獻的 傳承은 극소수의 그리스인 作家의 언급과, 로마인 Caesar와 Tacitus의 언급이다. 일찍이 Caesar는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라인강 印의 게르만인과 접촉하였다. Caesar는 이들의 낙후한 의, 식, 주생활에 대한 근소한 報告를 그의 "갈리아戰記(De Bello Gallico)"에 전했다. 로마제국은 최초의 황제 Augustus 시대(9년)에 게르만정복을 시도하였으나, 라인강 넘어 베저(Weser)江 유역에서 3 개 군단(legion: 1 개 군단은 重武裝병사 3000, 輕武裝병사 1200, 騎兵 300 으로 편성)이 전멸하는 대패를 당한 후, 더 이상의 정복을 포기하고,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 리메스(Limes)를 구축하였다. -> 중국의 만리장성을 연상하라! 리메스長城이 구축되던 기원 100 년경 로마의 역사가 Tacitus는 게르만족에 대한 보고를 작성했다. 그는 지중해연안지방의 인간과 구별되는 그들의 외관과 관습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푸른 눈, 날카로운 눈매, 금발과 강건한 신체 등등..."] Tacitus는 게르만족의 습속을 묘사하여, 세계를 정복한 뒤 사치와 향락에 젖어 나약해진 로마인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이 기록을 작성하였기에, 그의 묘사는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서술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그의 서술은 초기 게르만족의 상태에 대해 거의 유일하게 상세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Caesar와 Tacitus가 전한 게르만족은 아직도 통합된 정치조직을 이루지 못하여, 여러 개의 씨족 및 부족단위(clan, Stamm, G.)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수장은 기록상에 王(rex), 公(dux,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duke가 유래, 公이라는 말 보다 首長, 즉 우두머리라는 말이 더 타당하다. 대개의 경우 군사적 지휘관을 의미한다.) 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사실상 귀족들이 선출하는 아직 강력한 정치적 지도권을 발휘하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게르만의 사회는 한 때, 자유로운 농민들의 결합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결국 귀족이 지배하고 있던 사회로 파악하게 되었다. 부족이나 씨족의 首長을 비롯하여 이들 귀족들은 게르만의 民會(Thing) - 여기에서 王의 선출이나 和·戰과 같은 주요 사안이 의결된다 - 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었으며, 주변에 힘깨나 쓰는 下手人(Gefolge, G.)을 결집하여, 하나의 전사공동체를 결성하여 전쟁과 약탈을 지휘하고 이들에게 戰利品을 분배하였다. 물론 이들 귀족은 이와 같은 무력수단을 배경으로 토지와 예속농민을 지배하였다. 이 수장과 하수인의 관계를 흔히들 從士制度(comitatus, L; Gefolgschaft, G.)라고 하는데, 중세유럽 봉건제도의 한 기원을 이루는 사회관계로 여겨진다. B. 게르만족의 이동 2세기부터 5세기 사이에 게르만족의 정치, 사회조직이 변동하여 여러 씨족 및 부족단위의 구성이 부족연맹체tribal confederation로 발전하였다. 게르만의 부족장들은 종교적인 행위와 전사공동체 - comitatus - 를 통해서 집단적 연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comitatus는 가끔 새로운 부족연맹체를 구성하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로마제국과 접촉하면서 - 리메스長城을 경계로 交易이나 군단병사들과의 通婚등 평화적인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된 적도 있었다. - 여러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세력균형이 깨져 이들은 보다 큰 정치, 사회조직으로 재편되어갔다. 일부의 부족장들을 필두로 게르만인들은 로마제국의 용병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와 같이 교역, 통혼, 용병근무를 통해 게르만족은 로마의 선진문명과 접촉하면서, 그 혜택을 일부 입기 시작하였다. 게르만족 일부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들은 제국의 약세를 틈타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 ex) 2 세기말 Marcomanni 족이 일으킨 전쟁, 고트족의 反로마동맹. 4 세기말 동방의 훈족Huns이 고트족을 압박하자, 고트족의 이동을 필두로 허다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영토로 보호를 구하여 대이동을 개시하였다. 로마제국은 게르만인의 이동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 이동의 물결은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78년 흑해연안 Adrianople에서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을 막으려다 로마군이 대패했는데, 이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로마황제 Valens가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10년 서고트족은 마침내 이탈리아반도로 진주, 로마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사건은 당시의 로마제국과 지중해 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Augustinus의 저작 "civitas dei"가 출현했다. 즉 "인류의 구세주 Christ를 모든 로마제국의 주민에 믿게 되었는데 왜 이런 재앙이 닥쳐오는가"라는 회의와 의심에 대한 기독교측의 반론. 2) 로마제국의 멸망과 서방의 야만화(?) A. 로마제국의 멸망 로마제국의 군대는 서고트족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게르만족의 용병으로 충원되어, 그 방비력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었었다. 서고트족은 보다 완성된 정치, 사회조직을 갖춘 새로운 형태의 침입으로 이전에 있었던 게르만족의 산발적인 침입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결국 로마제국의 영토(종국에는 스페인)에 정착, 나름의 왕국을 건설.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작은 Augustus라는 戱畵的인 의미를 내포)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용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Odoacer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Odoacer는 스스로를 로마황제라고 칭하지 않고, 로마王이라는 애매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즉 정복자 게르만족으로서도 "영원한 로마(Roma aeterna)"라는 개념은 대단한 권위를 행사했었고,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사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참고 지도에서 보듯이 수많은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舊土 일부를 점령하여,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옛 로마제국의 틀을 복구할 능력은 없었다. B. 서방의 야만화(?)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서방에는 로마제국의 유산이 부분적으로 잔존하지만 - 지역에 따라 그 정도는 다양하였다. - 대개의 경우 현저한 문명의 퇴화를 겪게 되었다. -> 고대의 종말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이태리반도는 한동안 Odoacer를 제거한 동고트왕 테오도릭(Theodoric)의 지배하였고, 옛 로마제국의 영토에는 허다한 群小의 게르만 왕국이 수립되었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라인강 하류지방에 가장 강대한 게르만족의 왕국으로 프랑크왕국이 등장했다. 로마제국의 체질이 강력히 남아있던 갈리아(Gallia)에서는 로마제국의 변방사령관이었던 플라비우스 에티우스(Flavius Aetius)와 시아그리우스(Syagrius)가 세느(Seine)강과 르와르(Loire) 강 사이에 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하여 로마적인 정치체제와 문화체질이 일시 존속했다. 동고트왕 테오도릭(Theodoric)은 首都를 라벤나(Ravenna)에 두었는데 약 15만의 고트족 인구로 이태리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약 600만의 로마인을 지배, 로마王의 지위로서 이태리반도를 다스렸다. 그는 청소년기에 인질로서 동로마에 머물면서 동로마의 고도문명을 체득한 경험이 있어 로마제국의 통치술, 행정기법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 know-how를 채용하여 그의 왕국을 비교적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행정과 司法에서는 로마인 관리가 계속 활동하고 있었으며, 수공업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영업활동, 상업도 로마인이 관장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이런 경험이 부족한 전사부족임을 상기하라!) 동고트족은 로마인으로부터 토지의 약 1/3을 비롯하여 住居와 노예, 가축을 획득했다. 그 반대급부로 로마인들은 軍備를 위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테오도릭의 지배은 이탈리아 반도에 일정한 기간 평화와 보호,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그는 현명하고 용감하였으며, 이와 같은 질서와 평화의 수호자로서 로마인에게서도 환영을 받았었다. 로마의 名望家들은 테오도릭의 지배하에서 高官으로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로마적인 생활양식을 지속했다. 문화와 지식활동도 활발했다. (例: Cassiodorus, Boethius의 저작활동, 물론 Boethius는 미묘한 정치적 음모사태로 死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러나 동고트왕국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대개의 게르만족은 異敎徒에서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독교는 로마인과 같은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派의 정통 카톨릭이 아니라, 異端으로 선고된 아리우스(Arius)파의 종지를 따르고 있었다. 아리우스파는 삼위일체설을 부인하여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차이는 결국 주민들 간에 갈등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로마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처하는 동로마(비잔틴)의 황제들은 끊임없이 고트왕국, 즉 테오도릭의 세력을 약화하려고 노력했다. 테오도릭의 사후 결국 동고트왕국은 장기간의 전쟁 끝에 동로마에 의해 멸망했다. ->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로마제국 수복정책 여러 게르만족의 왕국들은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요인은 피정복민을 體制內化하는데 실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앞에 말한 종교적인 차이 - 로마카톨릭 (Roman Catholic)과 아리우스의 異端 - 외에 현저한 문화적 차이를 들 수 있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정복자를 로마인은 심중에서 무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은 내면적 갈등이 양자간의 화합에는 큰 장애로 작용.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게르만왕국의 법제는 이원적인 屬人主義의 원리를 취하고 있었다. 즉 게르만인의 事案(casus, L; case, E.)은 게르만法으로 로마인의 事案은 로마法으로 재판하는 식으로... 이와 같은 법적 불일치 역시 허다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한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나왔다. 전통적으로 이 과정을 문명의 큰 단절로 보아왔음에 대해 20세기 초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느(Henri Pirenne)는 5,6세기에도 지중해의 경제적 통일은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오히려 7세기 이슬람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석권하면서 비로소 고대에서 중세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 졌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Pirenne Thesis) -> 차후에 다시 詳論. |
5.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 개요 -------------------------------------------------------------------------------- <기본서 참조> E. M. Burns, I, pp. 281-286; II, 제 10 장, pp. 294-331 B. Tierney, 제 4·5 장, pp. 81-130 (내용상 다른 주제와 중복, 그러나 전부 독파할 것을 요망) A. 개관 B. 주제에 대한 기본질문 1) 비잔티움제국 2) 이슬람문명 자료와 연구과제 -------------------------------------------------------------------------------- A. 개관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로마의 유산이 어렴풋이 존재하던 과도기가 지난 후 서기 6,700 년경부터 대단히 이질적인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제 지중해연안 전역을 지배하는 단일한 지배체제(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舊土에는 3 개의 상호 경쟁적이며 이질적인 문명이 성립되었다. 비잔티움, 이슬람, 서방라틴기독교권 (서유럽)이 그것이다. 이들 중 서유럽 문명권이 가장 낙후하고, 조직이 덜 된 지역이었다. 상호 경쟁하는 세 문명권에서 비잔티움과 서유럽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라고 하는 공통의 정신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어, 이슬람문명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의 방어전선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서유럽은 누가 기독교문명의 최고 지도권을 갖는가 라는 문제로 서로 갈등하여 이슬람에 대한 공동방어조차 자주 교란되었었다. 이와 같은 갈등과 협조가 중세전기간을 통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중세유럽의 역사를 대단히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本章에서는 일단 지중해세계, 즉 비잔티움과 이슬람세력의 성장과 발전을 중심으로 장기간의 연대적 범위에서 고찰한다. B. 주제에 대한 기본질문 1. 비잔티움(Byzantium)과 동로마제국(East Roman Empire)의 개념, 형성계기는? 2. 비잔티움제국은 옛 로마제국의 연속체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체제인가? 3. 비잔티움제국은 어떤 점에서 옛 로마제국과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4. 비잔티움제국이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5. 비잔티움제국이 존속하던 기간에 서방세계의 관계는? 6. 이슬람세계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은? 7. 이슬람세계가 서방기독교세계에 미친 정치적, 문화적 영향은? -------------------------------------------------------------------------------- 1) 비잔티움제국 Byzantine Commonwealth (Empire) A. 개관 Constantinus의 遷都이후, 로마제국의 동방과 서방은 서서히 이질화되어 가다, 마침내 Theodosisus 1세의 死後 동·서로마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동로마의 황제나 지배귀족층은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로마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성은 Justinianus시대에 일시적으로 절정에 도달. 그는 군사적으로 로마의 舊土를 회복하는 노력을 시도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동로마의 역사는 결국 옛 로마와 다른 경로로 발전하게 되었다. 15세기중엽에 그 운명을 다 할 때까지, 비잔티움제국은 이슬람세계의 압박에 대한 서방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한편 그 교회는 남동부 및 동부유럽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B. 비잔티움 제국사의 槪觀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 황제 Zeno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동고트(Ostrogoths)을 통한 以夷制夷 정책 이상의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이후 1453년까지 약 1000년간 동서문화의 교차로에서 군림하면서, 내외적으로 왕조와 국세의 변동을 심하게 겪었다. - 비잔티움 제국사의 시대적 개관: *Constantine - 610 (Herkleios 왕조의 등장): 로마제국의 연속 *Herakleios - 1071 (Mantzikert戰鬪): 동방의 침입에 대한 항거 *Mantzikert (1071) - 멸망 1453: 쇠퇴기, Comnenos왕조의 실책 (例: 서방의 십자군 초빙) C. 황제 Justinianus(527-565): last Latin speaking Emperor 황제 Justinianus는 동로마의 명문가 출신이나 Illyrium 출신으로서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권을 우여곡절 끝에 계승받아 등장하였다. 특히 그는 Theodora와의 혼인으로 정치적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써야 했으나, 황후 Theodora는 Justin.의 在位時 특유의 결단력과 지혜로 황제의 지위를 뒷받침했다. -> 逸話: 532 Nike의 폭동을 황후의 진언으로 제압(Procopius, Secret History) Justin.는 로마제국 구토를 수복하는 강력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Belisarius장군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Persia의 세력을 축출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회복하게 했다. 이런 원정정책의 결과 Theodoric死後 허약해진 동고트 왕국이 멸망했다. 그의 최대업적은 로마법을 정리한 사업이었다. 로마법은 공화정 시대부터 허다한 法源을 축적해왔고, 세계제국의 법으로서 광범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로마법은 장구한 시간에 걸쳐 상황에 따라 발전하였기 때문에, 애매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부분을 불가피하게 안게 되었다. 그는 Tribonianus와 같은 법학자를 동원하여, 로마법에 특유한 정연한 法論理를 갖춘 대법전으로 집대성하게 했다. 528년 우선 4세기이후부터 황제의 칙령으로 형성된 新法(jus novum)이 편찬되어 Codex Justinianus(또는 Corpus iuris cilvilis)가 성립되었다. 이어 530년부터 4세기 이전의 舊法마저 정리에 착수하여, 마침내 533년 50권의 Digesta(말 자체로는 要約이라는 뜻, 舊法이외 여러 시기의 법학자가 제출한 註釋도 포함, Pandecta라고도 한다.)가 纂修되었다. 이어 방대한 로마법의 주요한 원칙을 간단히 정리한, 말하자면 官許의 법률교과서와 같은 개요집(Institutiones)이 Digesta와 동시에 완성. -> 이 모든 것을 통틀어 Corpus iuris civilis라고도 한다. Justin.의 법전은 옛 로마의 言語,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동로마의 현실에서 라틴어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는 언어로 위축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이 법전의 주요부분이 제국의 다수인구가 이해할 수 있는 희랍어 축약판이 나왔다. 이 법전은 당시 서방의 게르만족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해서, 서방에서는 결국 12세기초 재발견되어 로마법계수운동이 촉발하게 되었다. -> 서양문화권에서 法律이 갖는 특수한 역할과 기능을 주목하라! 그 밖에 그는 동방의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 소피아성당(Hagia Sophia)과 같은 기념비적 건물을 건축하게 했는데, 이 건물은 이른바 비잔티움 양식의 대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밖에 비잔티움의 예술은 각종의 모자이크에 그 특징적인 양식과 美를 남기게 되었다.(例, Ravenna의 St. Vitale성당에 전해지는 그와 Theodora의 Mosaic) 그의 치세는 결국 옛 로마제국의 盛世를 되찾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541-3년에 Pest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의 손실을 입었으며, 이어 561년 Avars족과 Sassanides Persia의 위협마저 받게 되었다. 그의 사후 Herakleios왕조가 등장하고,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독자의 행로을 걸어가 완전히 그리스화하게 되었다. D. 비잔티움제국의 체제와 문화 비잔티움제국은 존속하는 동안 지중해세계 및 전유럽에서 가장 富饒했었다. 수도 Constantinople은 이미 Justin. 시대에 인구 100만에 이르렀고, 무역과 고급의 사치품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의 비단을 모방하여 자체생산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잔티움제국의 통치조직은 고도의 관료제조직으로 특징지워진다. 한편 이 관료제에서는 行政과 軍事의 일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사방이 적으로 둘어싸여 있던 사정에서 설명이 되리라. 한편 방대한 조직의 관료제를 유지하는 人力을 공급하는 수단으로서 로마제국이래의 俗人敎育이 유지되고 발달하였다. 이는 동일한 시기 西方世界의 귀족들이 대개 문맹에 가까웠던 사정과 현저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군대의 주축은 重裝騎兵으로서 총병력의 약 반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보병의 지원 없이 독립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 그 지휘관은 역시 귀족출신이었다. 그 밖에 군역의 대가로 소자영농민이 국유지를 보유하는 屯田兵制度를 채택하였다. 해상에서도 많은 위협을 받고있던 제국은 강력한 함대를 육성했는데, 이 함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라고 하는 일종의 화염방사기에 유사한 특수한 비밀병기를 갖추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는 Caesaropapism이라고 알려진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皇帝가 敎皇의 역할을 겸하는 강력한 교회의 통제를 의미하나, 실제로 황제의 권한은 Constantinople 總主敎를 선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는 총주교의 選任을 통해 교리논쟁과 교회행정에 간여할 여지가 있었으며, 어쨌든 동시대 서방에서 황제와 교황이 서로 갈등하는 처지와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한편 황제의 교회 및 종교에 관한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경우에 따라 총주교와 대립하여 인민의 비난을 받지 말도록 주의해야할 처지이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는 그리스철학의 영향으로 사변적인 경향이 강력했다. 따라서 서방교회와 달리 純正한 思辨에 치우쳐, 偶像 - 예수나 聖者의 像도 보기에 따라서는 우상이 될 수 있다. - 을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로 비잔티움 교회(즉 帝國)는 8세기경부터 서방교회와 聖像崇拜(Iconoclasm)논쟁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9세기경에 이 논쟁은 한 때 잠잠했으나, 마침내 11세기 동방 비잔티움 교회와 서방 로마교회가 서로 결정적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1054년, 20세기에 들어 비로소 화해) E. 비잔티움 문명의 전파와 후계 비잔티움 제국과 그 교회는 지리적으로 근접한 남동부 및 동유럽의 슬라브 지역에 대한 선교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일찍이 10세기경에 비잔티움 제국은 Cyrill과 Methodius형제를 슬라브족의 거주지로 파견하여 동방식 기독교 - 그리스正敎(Greek Orthodox) - 를 전파했다. 이들은 그리스子母를 변형하여 슬라브문자(Cyril문자)를 고안해냈고,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988년 러시아의 군주 Vladimir가 정교회로 개종한 이래, 러시아는 그리스정교를 宗旨로 받드는 교회와 문화적 체질이 형성.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이 몰락한 뒤, 그 후계자로서 이른바 제 3 의 로마를 자처하게 되었다. -> Czar, Tsar라고 하는 러시아 황제의 稱號와 Caesar라고 하는 옛 로마 황제의 칭호가 갖는 연관성을 주목하라! 한편 서방과는 대체로 불화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主潮를 이루었다. 이미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후의 혼란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서방에 별다른 원조를 제공할 수가 없었는데, 특히 로마교황이 渴求하던 보호를 제공함이 없이 무익한 성상숭배논쟁만을 야기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로마교황은 카롤링왕조(Carolinger)와 연결되고, Carolus Magnus를 로마제국의 황제로 戴冠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 문제로 카롤링왕조와 기독교세계에 대한 지도권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 Otto왕조와 연합하여, Otto 2세의 황후로 비잔티움 왕가의 공주 Theophano를 출가시켜, 對이슬람연합전선의 구축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영속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中世盛期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의 압력에 못 이겨 로마교황을 통해 서방에 원조를 요청, 여러 세기를 끈 십자군원정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결국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을 약화, 특히 제 4 차 십자군은 Constantinople을 약탈하고, 국체의 보존까지 위협(일시 라틴제국이라는 국가가 수립) 비잔티움 제국은 동서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서방세계에 대하여 이슬람의 압력을 막는 방파제의 역할 수행. 한편 고대세계와 문화적 연속성을 보존함으로써, 특히 그리스의 고전문명을 보호했다. -> 서유럽의 르네상스에 간접적으로 기여. 2) 이슬람문명 A. 개관 중세의 전기간을 통하여 이슬람 문명권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갖춘 고도 문명권이었다. 이슬람 문명권은 그리스와 유대문명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사실상 로마나 게르만세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셈족이 7세기경에 창시된 독자적 종교에 의거하여 순식간에 결집된 에네르기는 단기간에 동지중해지역까지 진출하여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거쳐 8세기경에는 서유럽의 끝 이베리아 반도까지 석권하였다. 이러한 한도에서 그들은 로마제국의 구토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그 유산을 한정적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7·8세기에 지중해를 석권한 그들은 비잔티움과 서방기독교세계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중세문명의 발달과 관련지을 때 이 문명의 진정한 의미는 동서교류에 기여하고, 서양고전고대의 문화적 유산, 특히 과학과 철학을 보존·발달시키면서 이를 서방에 중계하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B. 이슬람교의 탄생과 그 정치세력의 형성 이슬람교의 창시자 Muhammad, Mahomet(571-632)는 상인가문의 후예로서 부유한 과부의 庸人이었다가 그 녀와 결혼, 부유한 상인으로서 활동했다. 610년경 독특한 종교적 체험으로 Allah의 선지자가 되고, 한 때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 Hejira: 반대파의 탄압을 받아 622년 Medina로 이주한 사건, 이슬람 원년 - 630년 Mecca를 접수, 그 시기까지 종교적, 정치적 공동체를 결속, 발전시켰다. 그는 예언자이며 정치적 수장이라는 특수한 지위와 역할을 수행. Islam이란 말은 복종(submission)을 의미하는데, Allah(God = Creator)를 숭배하는 철저한 유일신교리를 기본으로 한다. (이 것이 같은 유일신교인 기독교와 화해하기 어려운 근본요인) 그 교리에는 유태교나 기독교의 교리 일부를 포섭되어 있다. 예를 들면 Muhammad를 예언자로 취급하는데, 예수도 예언자의 하나로 생각한다. C. 예언자 Muhammad의 후계자(체제) Muhammad死後 그의 장인 Abu Bakr 632-34가 Caliph(예언자의 대리자라는 뜻)로 추대. Caliph는 300 여년동안 Muslim전체에서 최고의 종교 및 정치지도자로 군림했다. Abu Bakr시기에 아라비아 반도가 통일되고 이어 4 대의 칼리프등장, 이 시기에 정복전쟁을 통해 아랍세계는 급속히 팽창했다. 우마이야 왕조 Ummayads 661-750 * Caliph국가의 안정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Syria에 근거 (Damaskus) *서방진출에 집중, 717년 Constantinople 대공세 (실패와 쇠퇴) 압바스 왕조 Abbasides 750-945 *페르시아적 요소 강조: Baghdad에 도읍, 페르시아적 전제군주정 모방 *Harun al-Rashid 786-809 *서방과 외교: Carolus Magnus(Charlemagne)와 친선관계 수립. * 이 왕조시기를 배경으로 Arabian Nights로 알려진 중세아랍문학의 금자탑이 형성 - 영국인 Sir Richard Burton이 영역하여 전 세계에 알려짐. Abbasides의 분열 *Ummayad Spain: 711 스페인 정복, Cordova에 도읍, 서칼리프국가로 Reconqista까지 존속 *Fatimid Egypt: Cairo에 도읍, Syria와 Palestine정복, 비잔티움, 십자군과 대결 10세기이후의 이슬람세계 *Abbasid 제국은 쇠퇴, 1258년 몽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명목상의 군주로 행세. *이슬람세력자체는 인도와 투르크에 확대, 일종의 지방분권체제 * Seljuqs - Osman Turks (20세기초까지 근동을 지배) ** 중세유럽과 관련하여 이슬람세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시야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이 분야에 대해 餘地를 많이 두는 思考가 요구된다. (즉 오늘날의 이슬람세계에 대한 단편적 보도와 지식으로 이 무렵의 이슬람세계를 판단하지 마라!) 출처: http://bh.kyungpook.ac.kr/~leor/ma/matop05.htm |
첫댓글 굵직굵직한것을 같이 묶어봤어요
출처를 들어가봤는데,
이 홈페이지, 정말 대단하네요...
운영하시는 분도 엄청나시고...
fdsa 님 덕분에 굉장히 좋은 홈페이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ㅇㅇ 아주 조흔 곳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