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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시기행 10부 시성, 두보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 여정)
천년왕도 서안에서 한 시대를 흔들었던 현종과 양귀비의 가슴 아픈 사랑을 만난 저는 은자들의 땅 종남산에서 가을 산의 정취에 흠뻑 취했습니다.
오늘은 중국의 수 많은 문인들 중 대륙의 곳곳을 유량하며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세상과 시를 고뇌했던 시, ‘시성’ 두보가 남긴 시와 발자취를 따라 떠납니다.
(시성(詩聖, 두보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제게 평소 존경하는 시인들을 찾아 떠나는 한시기행은 갈 때마다 설레이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중국 한시기행 3탄, 그 마지막 여행은 황하의 남쪽 하남성인데요, 시성 두보의 고향 ‘공의’시에서 출발해 ‘용문석굴’을 거쳐 ‘석호촌’으로 향합니다.
▶ 공의(鞏義) - 하남성 정저우에 있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인 시성 두보의 출생지.
‘공의’시는 하남성 중북부 숭산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도시 곳곳 두보의 흔적이 묻어나는 두보의 땅입니다. 공의시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남구만 촌에 두보의 옛집 두보의 거리가 있습니다.
“‘두부꾸리(두보고리,杜甫故里)‘, 시성 두보의 고향입니다. 위대한 시인 시성 두보의 고향에 왔습니다. 야! 여기 두보의 동상은 엄청 크네요. 어쩌면 이런 크기가 중국 문학사에서 두보가 차지하는 지위 그 위치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와! 엄청 크네요.”
▶ 두보(杜甫. 712~770년) - 중국 당나라 때 시인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함.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는 시선 이백과 더불어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요.
“아! 가을날 햇살 참 좋다! 저게 바로 ‘필가산’이에요. 봉우리 세 개 있죠? 가운데 움푹 들어가 있잖아요. 저게 붓걸이에요. ‘필가’란 말은 ‘붓걸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저게 붓을 걸 수 있는 건데, 이 필가산 밑에서 옛날부터 큰 문인, 위대한 시인이 나온다고 그랬어요. 바로 필가산 밑에 두보의 탄생지 움집이 있는 거예요.
두보 옛집의 정원을 거닐고 있습니다. 아 저게 옛날 우물이군요. 아참 가을햇살이 따뜻하고 좋네요. 아 저게 바로 두보가 태어난 두보 탄생요 움집입니다. 동굴집. 저렇게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는데 바로 이곳이 시성 두보가 태어난 곳입니다.”
중국 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성’이 태어난 집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초라해 보입니다. 필가산 아래 정갈하게 꾸려진 그의 소박한 뜰에는 가난했지만 시 짓기를 좋아했던 두보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납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두보는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낙양에서 고모 손에 키워지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둘이 병에 걸렸어요. 심한 병에 걸렸어요. 그래가지고 이 고모가 무녀를 찾아가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무녀가 ‘집의 동남쪽에다 누이면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곳은 딱 한 명만 누울 수 있는 거예요. 그러자 고모가 자기 친 아들은 다른 곳에 눕히고 두보를 그곳에 눕힙니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죽었고 두보는 살죠. 그런 헌신적인 돌봄, 각별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두보가 살아남았고 시성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참 고마운 고모죠.”
장성할 때까지 고모에게 극진한 돌봄을 받았던 고모에게 본격적으로 시의 세계를 열어준 사람은 ‘시선’ 이백입니다.
▶ 이백과 두보<이두(李杜)> - 중국 문학 사상 빛나는 두 별로 당의 문화가 전성시대를 누리던 현종(玄宗) 시대에 활약.
“둘이 형제처럼 친했어요. 이백이 낙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 때 두보가 낙양에서 막 문단활동을 시작할 때에요. 그래서 젊은 두보와 11살 차이가 나죠. 조금 나이 많은 이백이 함께 만나서 교재를 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사실상 두보의 순수한 문학 수업은 이백과의 교제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두 사람이 굉장히 친했어요. 가을날 함께 손잡고 다니고 그리고 같이 이불 덮고 자고... 자 저도 한번 손을 딱 잡고서,,, 멋있어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또 닮은 게 있어요. 둘 다 고향을 떠나서 고향을 무척 그리워하면서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 어찌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이 두사람의 문학에 가장 깊은 뿌리, 원동력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예로부터 시는 ‘당시(唐詩’)라고 했고 ‘당시’라 하면 ‘이두(李杜)’라 나란히 칭할 정도로 이백과 두보는 중국 문학사를 이끈 양대 산맥입니다.
“두보가 사천지역을 떠돌고 있을 때 ‘안록산’ 반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던 고향 땅을 관군이 수복을 해요. 그래가지고 고향 땅을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너무 기뻐가지고 지은 시가 있어요. 그 시를 제가 노래로 불러볼테니까 들어보세요.
홀연 하남 하북을 수복했다는 소식이 들려
듣자마자 눈물이 옷깃에 가득 넘치네.
아내와 아이들 바라보니 무에 근심 있으랴
책들을 마구 흩어놓고 기뻐 날뛰네.
-‘두보’의 <문관군수하남하북(聞官軍收河南河北)> 中”
두보에게 고향은 고모의 품이었습니다. 평생 그리워했지만 두보는 끝내 고향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두보의 옛집에서 어린 두보와 조우한 저는 차로 30분을 달려 중국 7대 고도 중 하나인 낙양에 도착했습니다. 낙양은 청년 두보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자 이백 등 많은 시인들과 교류하며 예술을 꽃피웠던 고장인데요, 낙양에서 남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 마치 바위산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 놓은 듯 독특한 형태의 거대한 석굴이 장관을 이룹니다.
▶ 낙양(洛陽) - 중국 하남성 서부에 있는 도시로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
▶ 용문석굴(龍門石窟) - 중국 하남성 낙양에 위치한 석굴사원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로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용문석굴입니다. 북위의 휴문제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만들기 시작한 용문석굴은 당의 고종과 측천무후가 거액을 들여 완공하기까지 무려 4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345개의 크고 작은 석굴에 현재까지 발굴된 석상만 10만여 개. 중국 불교미술의 정점을 볼 수 있어 매년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데요. 낙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두보 역시 자주 이곳을 찾았습니다.
“자 이곳이 이곳 용문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을 모신 ‘노자나불(盧자那佛)’을 모신 ‘봉산사’라는 곳입니다. 두보가 젊은 시절에 이곳 용문에 들러서 이 봉선사에서 하루 묵으면서 시를 남겨요. 여기 이런 불상이 있고 여기에 큰 절이 있었던 거죠.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불상만 남아 있습니다.”
측천무후가 노자나불을 완공하기 위해 화장품 값을 아껴 쓸 정도로 그 애착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한 저를 석불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저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때가 사실 두보로서는 힘든 시기였죠. 과거시험에 떨어졌어요, 정말 자신 있었거든요. 주변에서 ‘너는 최고다. 너 같은 문장가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시험을 치뤘는데 낙방하고 말았어요. 얼마나 좌절이 컸겠어요. 그래서 마음을 달래려고 이곳을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이곳 절에서 잠을 자요. 잠을 자고서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깹니다. 뭐 밤새 잠을 못 잤겠죠, 뒤척이면서. 그러면서 ‘저 새벽 종소리가 나를 깊게 깊게 생각하게 하는구나! 깊은 사유를 하게 하는구나!’ 이런 시를 남기고 있어요. 시성 두보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공간입니다.”
잠깨날 무렵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
-‘두보’의 시 <유용문봉선사(遊龍門奉先寺)> 中
공명심에 불타올랐던 24살의 호기로운 청년 두보에게 첫 과거낙방은 큰 좌절이었을 겁니다. 석불 앞에서 고뇌에 찬 청년 시인의 간절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이 대불이 측천무후 때 조성이 되었으니까 두보가 여기와서 노닐 때에도 이 대불을 바라봤을 거예요? 저처럼 이렇게 그윽하게 바라봤을텐데. 마음에 생각이 많았겠죠. 왜냐하면 두보의 할아버지 두심원이 측천무후 때 굉장히 유명한 시인이었어요. ‘나도 이제 유명한 시인이 될 것이다. 나도 꿈을 이룰 것이다.!’ 이런 다짐을 했을지도 모르죠.”
안타깝게도 두보의 시련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호기롭게 외치던 청년의 외침을 이 강물은 기억하고 있을까요? 설흔이 넘도록 과거급제도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두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두보의 글을 높이 평가한 현종의 눈에 띄어 무기고를 관리하는 말직을 얻는데요, 그마저도 전쟁이 발발하면서 생활은 극단적으로 어려워져 자식마저 굶어죽게 됩니다. 마침내 간신이 판치는 부패한 조정을 떠나 백성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온 두보. 그 길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거 두보의 유명한 ‘삼리삼별’ 중에서 ‘삼리’를 적어놓은 거예요. ‘신한리’, ‘석호리’, ‘동관리’인데...”
삼리삼별은 신안리(新安吏) 동관리 석호리(石壕吏) 세 편과 신원별 무가별 수로별을 합해 부르는 말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두보의 현실주의 시의 대표작입니다.
“여기는 삼리의 내용을 동영상으로 잘 만들어 놨어요.”
▶ 삼리삼별(三吏三別) - 세 명의 관리와 세 번의 이별을 통해 민중의 생활상과 비참한 현실을 뛰어나게 묘사한 두보의 걸작
전국이 ‘안록산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사이 관군들은 병력보충을 위해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합니다. 당시 화주로 좌천된 두보는 신안과 석호 동관 등을 지나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두보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두보가 사는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시를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의 ‘시사’라고 부르는 것도 그 이유일 텐데요. \
“저기 보이는 게 신안입니다. 저게 낙양에서 장안 가자면 꼭 거쳐야 되는 길목인데, 두보가 겨울에 이 길을 가다가 군대에서 어린 소년을 징발해가지고 전쟁터에 내 보내는 그런 장면을 목도하게 되요. 그래서 가슴이 격분해가지고 쓴 글이 ‘신안리’, ‘신안의 관리’라는 뜻인데 그것이 ‘삼리삼별’의 첫 출발이죠.”
‘살찐 남아는 어머니가 전송 왔으나
야윈 남아는 홀로 외로이 서 있구나.
황혼에 흰 강물 동쪽으로 흘러
푸른산은 마치 통곡하는 듯 한데,
몸마저 상하겠소. 그만 눈물을 거두시오
뼈가 마른다해도 세상은 끝내 무정할거요.’
‘삼리삼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 석호리의 배경이 된 석호촌에 왔습니다.
“바람이 조금 쌀쌀합니다. 두보 ‘삼리삼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석호리’거든요. 그 석호리라는 작품의 창작 배경이 되는 석호촌을 찾아갑니다. 바로 이곳이 ‘석호촌’입니다. 마을 앞에 커다랗게 두보의 석호리 작품이 이렇게 준비돼 있네요.”
▶ 석호리(石壕里) - 석호의 관리를 뜻하며, 두보가 석호촌에서 직접 체험한 내용을 담은 고시.
마을 앞 두보의 시 ‘석호리’ 전문이 적힌 담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날 저물어 석호촌에 머무니...’로 시작하던 석호리의 시구처럼 그 옛날 두보가 이 마을에 묵었던 집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정말 사실일까요?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디서 오셨다고요?”
“한국이요.”
“아, 한국. 멀리서 오셨네요.”
“과거에 이곳에서 두보가 묵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두보가 묵었던 곳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1,300년 전 잇 소박한 마을에서 시인이 목격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녁에 석호촌에 투숙하였는데,
밤중에 관리가 사람들을 잡아가네
-‘두보’의 시 <모투석호리(暮投石壕吏)> 中
“두보가 저물녘에 이 석호촌에 머물렀단 말예요. 그런데 한밤중에 관리가 들이닥쳐 가지고 사람을 잡아가는 거예요. 꽝 꽝 꽝. 이 소리를 듣자마자 이 주인 영감은 깜짝 놀라가지고 담을 훌쩍 넘어 도망가 버리고 이제 할머니가 나와 가지고 관리를 응대를 하는 거예요. 잠을 자고 있던 두보가, 이 객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두보도 깜짝 놀래가지고 이게 무슨 연고가 궁금해서 문을 열고 기웃 바라다보니 ‘세상에...’ 이렇게 석호리는 시작됩니다.”
도망간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할머니가 군대로 끌려가고 두보는 다음날 아침 돌아온 할아버지와 작별을 합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그 집 할머니가 먼 길 왔다며 국수 한 그릇 말아주십니다. 그 옛날 그의 선조들이 두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두보의 시에서 이제 ‘삼리삼별’하면 현실주의 시들 중에서 명편이다. 그래서 여섯 편의 시를 손꼽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뭐냐면 두보가 임금 곁에서 벼슬을 했었어요, 그런데 좌천이 됐어요. 그래서 지방관으로 밀려나요. 임금 곁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그렇게 심각할 줄은. 그런데 지방관으로 발령되면서 밖에 나가보니까 백성들이 전쟁 통에 내몰려가지고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목도하고부터 이제 두보의 시가 현실에 대해서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누구보다 가장 낮고 허름한 곳에서 세상을 바라본 시인. ‘삼리삼별’의 창작 배경이 되었던 신안에서 석호 다시 동관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고통의 한 가운데서 비탄과 분노로 세상을 바라봤던 두보와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일하고 일해도 점점 더 궁핍해지는 민중들의 삶. 호화호식(?)하는 상류층과 사회 부패, 부조리.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1,300년 전 두보가 강하게 비판했던 사회문제는 시대를 거슬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화두를 던집니다. 계절은 어느덧 완연한 가을을 지나 겨울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두보가 ‘삼리삼별’을 창작하던 그 시기에 걸었던 이 길은 추운 겨울이었어요. 아~ 풍경도 심경도 참 참담했을 거예요.”
‘시인은 시를 담고 또 시는 시인을 담는다.’고 했던가요? 서민들의 비애가 절절하게 담긴 시를 썼던 두보의 삶 역시 궁핍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평생에 그리던 고향에 가지 못하고 천하를 떠돌다 배 위에서 죽음을 맞은 두보. 비극 속에서 태어난 그의 시가 더욱 진한 울림을 주는 까닭입니다.
두보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오른 저는 그가 젊은 시절 올랐던 태산으로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중국의 오악 중 동악인 태산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산입니다.
“일출 보려고, 태산 일출 보려고 지금 새벽 아직 2시도 안됐죠? 새벽길을 나섰습니다. 하늘에 지금 달이 떴어요. 달빛이 아주 좋습니다.
달빛을 친구삼아 산 정상까지 난 7,400여 개의 돌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릅니다.
“아주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금 3시간째, 계단만 몇 시간째 올라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남천문(南天門)’이 보일텐데. 과거시험에 낙방한 두보도 아마 태산에 올라서 일출을 보면서 새롭게 희망을 다지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아마 이 새벽에 일출을 보려고 이 길을 올라가지 않았을까...”
한 번씩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는 말이 있어 누구나 태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았는데요, 이른 새벽부터 일출을 보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렵사리 ‘남천문’에 올라왔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요. 안개가 자욱한 걸 보니까 오늘 일출보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여기 사람들 다 모여 앉아 있는데, 다 바람 피하려고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야 ‘일관봉’을 갈 수 있거든요. 아! 이거 일출보기가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 태산(泰山) - 중국의 5대 명산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역대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성스러운 산.
하늘로 올라가는 문, 남천문에 도착은 했는데 이거 영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일관봉에 도착했지만 태산은 쉽게 제 속내를 보이지 않습니다.
“아! 여기가 일관봉입니다, 일관봉. 그런데 보자했던 해는 보이지 않고 그저 안개만 자욱합니다. 아이고, 평소에 덕을 쌓아 놓을 걸...”
과거에 낙방하고 태산에 올랐던 두보의 심정이 이토록 막막했을까요?
“아~ 옛날 두보도 아침 일출을 보려고 틀림없이 올라왔을텐데. 그때 젊은 나이니까... 올라올 때 보니까 젊은이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과거시험에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새롭게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고 힘을 받자.’ 해가지고 틀림없이 올라왔을텐데... 그때 본 태양을 오늘도 볼 수 있으려나 했더니 오늘은 어렵겠네요.”
비바람에 영하까지 떨어진 기온으로 꽁꽁 언 몸을 풀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자욱한 운해를 뚫고 솟아오른 태양빛이 너무 찬란해서 ‘어래광(御來光)’이라고 부른다는데, 아쉽지만 그 빛은 다음으로 기약해야겠습니다.
역대 황제들은 하늘에게 자신의 치적을 보고하는 봉선의식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태산’이라고 했습니다.
▶ 태산극정(泰山極頂) - 해발 1,545m
"태산이 크다 높다 해서 태산이기도 하지만 그 ‘태’자에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런 뜻이 담겨져 있어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황제들이 여기에 자주 와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했던 거죠. 그래서 이 태산은 정치적인 의미가 강해요. 태산 곳곳에 이런 절벽마다 면이 나오는 곳마다 글자들로 가득 차 있어요. 옛날부터 쭉 써 온 거예요. 온갖 형태의 글씨들, 다양한 내용을 담아가지고 마치 무슨 서예 전람회 같아요. 이게 태산의 특징이기도 해요. 다른 산이 못 쫓아오는 거예요. 여기 인문 문화가 함께 하는 거예요. 자연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태산을 ‘문산(文山)’이라고 해요. ‘글월 문’라를 써서... 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고요.“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글자들이 새겨진 암벽을 지났더니 이번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한 곳으로 모이는 곳에 시선이 머뭅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오악독존(五嶽獨尊)’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네요. ‘천하제일봉’에 왔으니 흔적은 남겨야겠죠?
“저기에 ‘오악독존’ 이렇게 써있죠? 중국의 동서남북 중앙에 각각 중요한 산을 오악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동쪽에 있는 이 태산이 동악이고... 그런데 ‘그 오악 중에서 동악인 태산이 유독 존귀하다.’ 그래서 태산을 오악 중에서 으뜸으로 쳤어요. 이 곳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니까... 그래서 저 ‘독존’이란 말이 너무 좋은가 봐요. 중국인들이 많이 오는데 중국인들 전부 저기서 사진을 찍고 가요. 그건 뭐겠어요? ‘내가 홀로 존귀하게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이지요. 오악독존!”
자욱하게 끼인 안개 탓에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무서울 것이 전혀 없었던 두보에게 닥친 첫 낙방의 시련. 시인의 마음도 이랬을까요? 하지만 공자는 ‘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 올라 두보는 천고의 명시를 남깁니다.
▶ 공등암(孔登岩) - 공자가 태산 정상을 오른 것을 기념하는 바위.
“두보도 사실 이곳에 올라와가지고 천고의 명구를 남기는데 그게 바로 공자님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거예요. ‘내가 언젠가는 저 꼭대기에 올라서서 태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뭇 산들이 다 내 발아래 자잘한 것을 굽어보리라.’ 이런 멋있는 구절을 남기거든요. 근데 그때가 언제냐면 과거시험에 낙방한 뒤에요. 이거 풀이 죽어있고 낙담할텐데, 오히려 태산에 올라서가지고 근심을 다 털어놓고 ‘나는 일류가 될 것이다.’ ‘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뭇 산들이 다 내 발아래 자그마하게 엎드리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결연한 의지를 천명을 해요.
반드시 절정에 올라
못산들이 자그마한 것을 한번 굽어볼 것이다.
-‘두보’의 <망악(望嶽)> 中”
아쉽고 서운한 마음 다 산위에 내려놓고 발길을 돌립니다. 그래요 살다보면 내 마음 먹은대로 안되고 앞길 막막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어요?
“우리가 일출 보러 와서 일출을 못 봐, 뭐 한번 태산 멋있는 곳을 보자고 해도 온종일 구름으로 가리고 있어... 이렇게 불여위(?)하고 뜻대로 안될 때라도 결코 기개만큼은 잃어버려서는 안돼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소개합니다. 이태백이 예전에 이곳에 놀러 왔어요, 태산에. 그래서 이 남문에 이 남천문에 와가지고 읊은 시구가 있어요. 그 시구가 정말 멋있는 시구예요.
천문에서 한번 길게 휘파람을 부니
만리로부터 청풍이 불어온다.
-‘이백’의 <유태산(遊泰山)> 中
내가 이 천하를 향해서 한번 호령하니
천하가 다 나를 주목한다.
이런 기개가 있어야지요.”
산을 내려온 뒤에야 온 산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서서히 걷힙니다. 산은 그제야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줍니다. 짙은 구름과 강한 비바람이 없었다면 이런 감동은 없었겠지요? 두보의 고틍스러운 삶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시를 만나지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온 이번 여행. 그곳엔 시인들이 삶을 태워 빗은 주옥같은 시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