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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16> 도쿠가와 수청들기를 거부한 성녀 오타 줄리아
문 창 재
^오타 줄리아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친숙한 성녀(聖女) 이름으로 기억된다. 훌륭한 성인이나 복자여서가 아니다. 일본의 절대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 죄로 절해고도에 유배되어 고통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꺾지 않은 고결한 인간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해마다 일본 동쪽 외딴섬 고즈시마(神津島)에서 열리는 줄리아 제(祭)에 한국인 신자들이 몰려가는 이유다.
^오타(大田)는 일본식 이름이고, 줄리아는 세례명이다. 조선 여인이었지만 우리 이름을 알 길이 없어, 400년이 넘도록 그렇게 불리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비극이다. 이름만 모르는 게 아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왜 붙잡혀 갔으며, 몇 살 때였는지, 부모의 신분이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분명한 게 없다.
^역사적인 사실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 장수에게 붙잡혀 가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고, 도쿠가와 궁의 시녀 시절 금교령을 어긴 죄로 낙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이 로마 선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한 같은 기록에 나오는 짧은 언급에 기초한 것들이다.
^일본이나 조선의 역사적 문서, 근년의 두 나라 문헌 어디에도 충실한 기록이 없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제 메디나 신부의 보고서한에 실린 단편적 사실과, 전설처럼 전해지는 민화를 근거로 한 소설류가 줄리아 이야기의 원천이다.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줄리아의 신분은 일반 서민의 딸, 양반이나 귀족의 딸 등 다양하다. 심지어 왕녀로 미화된 것까지 있다.
^줄리아를 소재로 한 일본작가 모리 레이코(森禮子)의 소설 <삼채의 여인>(三彩の女)에는 경남 남강 강변에서 붙잡힌 양반의 막내딸로 나온다. 오타라는 일본이름을 갖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도공이었던 양아버지가 ‘얻어온 애’ ‘얻어왔다’ 같은 말을 반복, 왜병들이 이름으로 잘못 알아들어 ‘오타’가 되었다고 돼 있다. 붙잡힐 때 엄마의 시신 옆에 삼채의 장식이 있는 은장도가 놓여있었다는 사실이 양반의 딸이라는 근거였다. 소녀의 어머니가 왜병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은장도로 자결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딸이며 쓰시마(對馬島) 영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처 마리아에게 신병이 넘겨진 소녀는 나가사키의 수도원에서 살 때 모레혼(Morejon)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운명이 기울게 된 계기는 일본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關が原) 전투 때 서군에 가담했던 유키나가의 전사였다. 동군의 전리품이 되어 슨푸성(駿府城· 시즈오카 시)으로 물러난 도쿠가와 처소에 들어간 것이다. 쇼군(將軍) 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지만 이에야스는 변함없는 절대 권력자였다.
^줄리아가 그의 수청 들기를 거부한 일은 뮤노스 신부가 마닐라 교구장에게 보고한 서한에 간략히 나온다. 그는 “줄리아가 쇼군의 첩이라고 생각해 성체를 주지 않았다”고 밝히고, “어느 날 그녀(줄리아)가 말하기를 만약 쇼군이 불러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고 보고한 대목이다.
^<삼채의 여인>에는 침소에 불려가 몸을 더럽힐 위기에 몰리자 은장도로 자결하려 한 것이 이에야스를 위협한 것으로 몰린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불려갔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아 줄리아는 금교령 위반이란 죄목으로 낙도 유배형을 받게 된다. 그 때의 일을 1613년 1월 12일자 예수회 총장신부에게 보낸 보고서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임진년 전쟁에서 붙잡혀 온 불쌍한 외국인이지만 궁궐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습니다······그녀는 조선에서 태어난 제가 지상의 왕(이에야스)을 기쁘게 하려고 쓰노가미 도노(津守殿·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하여 일본에 와서 섬기게 된 하느님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줄리아는 계율을 수호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끝내 왕명을 따르지 듣지 않아 1612년 4월 20일 오시마(大島) 섬으로 쫓겨 갔습니다.”
^귀양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아지로(網代) 항구로 갈 때 줄리아는 처형장에 끌려간 예수가 그랬듯이, 맨발로 산길을 걸어 발이 피투성이가 되었었다고 서한에 적혀 있다. 오시마 섬에서의 귀양살이 한 달 만에 “이제라도 배교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를 거부하자 더 먼 니이지마(新島)로 보내졌고, 다시 회유를 차버리자 절해고도 고즈시마로 이송되었다. 어부 몇 가구가 사는 외딴 섬이어서 정기 선편도 없는 낙도 중의 낙도였다. 도쿄에서 180km나 떨어진 그곳에서 줄리아는 움막을 짓고 함께 유배된 신자와 서로 의지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 섬 고즈시마에 가 본 것은 1991년 5월 제22회 줄리아 마쓰리(祭) 때였다.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 권유로 도쿄 항에서 밤배를 타고 11시간을 갔었다. 천주교 도쿄교구 창설 100주년 기념을 겸한 행사여서 한일 양국 신자들이 수백 명 모여 줄리아의 고혼을 위로했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선착장에 배가 닿자 언덕 위에 설치된 커다란 십자가가 일행을 맞아주었다. 마을 한가운데 마련된 행사장은 온통 꽃과 깃발로 장식되었다. 유인묘지(流人墓地) 라는 안내판 안쪽의 묘소에서 두 나라 신자들이 줄지어 국화송이를 봉헌하고 합장하며 기도를 올리는 의식은 경건했다.
^줄리아 묘소라는 것은 어른 키 높이의 불교식 돌탑이었다. 탑 위에 조선기와 모양의 덮개돌을 얹고 탑신에 십자가 형상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 앞에 합장하고 소원을 빌면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주민들은 그 탑을 ‘호도사마’(寶塔樣)라 부른다 했다.
^그 옆에는 근래에 세운 고절 현창비가 서 있었는데, 비면에 한복 차림의 줄리아 초상화가 놓이고 그 위아래에 치마저고리를 입힌 형상이 눈길을 끌었다. 행사가 끝난 뒤 아침에 본 십자가를 찾아갔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선 십자가는 높이가 10m 쯤 돼 보였다. 그 자리에 서니까 해배(解配)를 간구하면서 기도하는 유형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틀 동안 줄리아 이야기만 듣고 뜻 깊은 축제에 참석한 탓이었으리라.
^그 섬 사토(佐藤治雄) 촌장은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61세 때 순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년 발굴된 선교사 서한에는 줄리아가 거기서 풀려나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선교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돼 있다. 1622년 2월 15일 프란시스코 빠체코 신부가 예수회에 보낸 보고서에는 “꼬레안 오타 줄리아는 신앙 때문에 박해 받았고, 지금은 오사카에 있습니다. 저는 그를 도와 왔고, 지금도 힘껏 돕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가 해배된 것은 1619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천주교의 요람인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다가 오사카로 옮겨간 것이 1622년이었다. 거기서는 콘프라디아(Confradia) 라는 신자모임에 참여, 가난한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천주교 400년사에도 그렇게 돼 있다.
^이 사실 때문에 서울 절두산 성지의 줄리아 묘소가 없어졌다고 2010년 한 종교 매체가 보도했다. “고즈시마에서 순교한 사실이 없는데 그곳에서 가져 온 흙으로 묘소를 만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 때문이었다 한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 중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던 것은 서양 선교사나 사제들의 여러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 속에는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고결하게 순교한 이름 모를 순교자들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소개돼 있다. 1869년 출간된 레온 파제스의 <일본 기리시단 종문사>에 나오는 조선 여인 이사벨라와 막센시아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나가사키에 살던 세례명 이사벨라는 기리시단(切支丹·크리스찬의 일본식 표기)이란 이유로 남편과 함께 나가사키 부교(奉行·행정관)청에 끌려갔다. 고문이 시작되자 남편은 쉽사리 투항했다. 다른 신자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달랐다. 상상할 수 없는 인내로 고문을 이겨냈다.
^후미에(踏繪·성화를 밟게 하는 것)를 거부하거나, 보기에도 끔찍한 기구를 사용하는 고문에 꺾이지 않는 신자들은 산으로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뜨거운 온천물을 퍼붓는 고문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것을 ‘야마 아가리’(山上)라 했다. 신자들은 그 고문을 ‘입산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나가사키 가까운 시마바라(島原)반도에 운젠(雲仙)이라는 유명한 화산온천이 있다. 1991년 6월 대폭발로 34명이 희생당한 뉴스로 유명했던 운젠 다케(岳)다. 그 산의 온천은 뜨겁기로 유명하다. 1629년 나가사키 부교청은 6,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그곳으로 끌고 갔다.
^대부분은 온천고문에 겁을 먹고 첫 관문에서 신앙을 포기했다.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방면이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요지부동. “남편이 개종했으니 여필종부(女必從夫)가 도리 아니냐?” “여기는 일본이니 일본법과 관습을 따라야 한다.” 이런 종용에도 끝내 묵묵부답,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관헌들은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머리에 돌을 얹었다. “돌이 떨어지면 변심한 것으로 간주하겠으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이 말에 대한 이사벨라의 응답은 놀라웠다. “제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돌이 떨어진다고 제가 배교한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이 없어진 관헌들은 다른 방법을 써서 고문을 계속했지만 끝내 그녀의 신심을 꺾을 수 없었다.
^고문을 가할 때 여러 가지 이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당시 나가사키 시정에 떠돌았다.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넣으려고 그녀를 데리고 가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끓는 온천물이 사방으로 튀어 관헌들이 달아났다”느니, “세 살 박이 사내아이가 온천물에서 걸어 나왔다”느니, “머리위에 올린 돌이 전혀 무겁지 않다고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세 살 박이의 출현이 하느님의 현신이었다고 떠들었다.
^시마바라 번주(藩主)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 성의 시녀 막센시아의 신심도 유명했다. 지하 감방 돌기둥에 묶여 8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 하는 극한상황서도 그녀는 배고픔을 몰랐다 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어느 날 밤 귀부인들이 찾아와 베풀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도 12일을 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감방에 누워있었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정 반대로 영주의 왕비가 되어 호강한 사람도 있다. 비록 측실이기는 했지만 한 성의 왕비가 되어 후손의 제사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 이름은 ‘かくせい’(가쿠세이), 즉 ‘각시’라는 우리말에서 유래된 슬픈 이름이다. 한자로는 ‘廓淸’ ‘岳淸’ ‘加久世伊’로 표기되었다. 그것은 극히 예외적으로 이름을 말하거나 쓸 때의 일이고, 평소에는 ‘おむぎさま’(보리님)로 불렸다. ‘むぎ’란 보리(麥)를 뜻한다. 그녀가 보리밭에서 붙잡혀왔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재일 언론인 윤달세(尹達世)의 기행문 <400년의 오랜 세월>에 따르면 보리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철수할 때 히라도(平戶) 성주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에게 붙잡혀 간 도공 무리의 일원이었다. 시게노부는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장수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었다. 그의 후손 마쓰우라 세이잔(松浦靜山)이 남긴 기록 <갑자야화>(甲子夜話)에는 “우리 성 아래 고마 마치(高麗町)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시게노부 할아버지가 ‘조선의 역’(임진왜란) 때 포로로 데려온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을 도로변 안내판에 적힌 유래는 좀 더 구체적이다. “1598년 정월 히라도 번주 마쓰우라 시게노부가 조선에서 귀국할 때 거관(巨關)을 비롯해 수십 명을 데리고 와 이 땅에 살게 하고 제도(製陶)에 종사케 했다. 여기가 히라도 야키(平戶燒)의 발상지이고, 고마 마치 기원이다.” 거관이란 인물은 히라도 야키 시조가 된 유명한 도공이었다.
^히라도 시내 네시코(根獅子)라는 곳에 있는 보리님 묘소 안내판에도 약간의 자료가 적혀 있다.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때 마쓰우라 공이 적지 조선에서 정찰 중 보리밭 그늘에 숨어 있던 처녀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마음씨도 얼굴도 고운 미인이어서 개선할 때 데리고 돌아왔다.” ^<나가사키 현 역사산보>라는 팸플릿을 인용한 김달수의 <조선 속의 일본문화>에는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키나가를 추종해 수도 한양을 점령한 시게노부가 어느 날 성 밖을 둘러보다가 보리밭 속에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의 몽진 행렬에서 낙오된 왕가 일족 같았다 했다. 붙잡아 데려와 보니 굉장한 미인이어서 진중에 두고 총애했다. 귀국할 때 임신 중이었던 여자는 배 안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엽색행각 비난이 두려웠던 시게노부는 아이를 이키(壹岐) 섬 해안에 버리게 하고 여자만 데리고 돌아가 측실로 삼았다. 첫 아이를 잊지 못한 그녀는 백방으로 수배해 뱃사공이 키우고 있던 아이를 찾아 시게노부의 차남(松浦藏人)으로 입적시켰다. 그 덕에 그녀는 평생 호강을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유산 3,000석을 물려받아 당당한 호족 가문을 일으킨 것이다.
^그녀는 죽어서도 호강을 했다. 유택을 두 군데나 갖게 된 것이다. 공식 묘소는 시게노부의 보리사인 히라도 사이교지(最敎寺)에 있다. 측실로서 그런 곳에 묻힌 것은 그녀를 사랑했던 시게노부의 유지였으리라. 또 하나의 유택은 안내판이 설치된 네시코의 묘소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강홍중(姜弘重)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조정에 올린 보고서 <동사록>(東槎錄)에 나오는 이야기는 좀 다르다. 1624년 8월부터 8개월간 일본에 다녀온 그의 글에는 보리님이 창원 출신이라고 돼 있다. 또 <나가사키 현 역사산책>에는 “조선 14대 소경왕(昭敬王·선조)의 공주 곽청희(廓淸姬)라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고 나와 있다.
^보리님이 선조의 딸이라는 것은 국내의 문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름을 곽청희라고 한 것은 ‘가쿠세이’라는 통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끝 글자 ‘姬’는 여자를 뜻하는 말 히메(ひめ)를 가져다 붙인 것 같은데, “왕의 몽진 길에서 낙오된 것 같았다”는 이야기가 부풀려진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히라도는 일본열도 서쪽 규슈에서도 최서단의 섬지지만, 이제는 연륙이 되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제주 올레길 열풍으로 규슈지역에 생긴 ‘히라도 올레’는 한국인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임진왜란 출진기지 나고야 성을 거쳐 가는 코스도 있고, 히라도 섬으로 바로 가는 여행상품도 있다.(2018, 4,30)
첫댓글 마치 춘향전을 읽는 듯 합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 곧 우리 문화의 문화의 힘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정유재란에서도 병자호란 때의 어려웠던 통한의 역사를 읽었습니다. 근자에 sns에서 크게 회자되고 있는 이예야스의 평화론에 속아 히데요리가의 삼대멸문의 역사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