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투쟁에서 실패한 고구려의 호동왕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소설, 희곡, 만화, 사극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친숙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보통 호동왕자는 나라를 위해 사랑을 배신한 인물로, 낙랑공주는 그런 호동왕자에게 희생당하고 버려진 비운의 인물로 묘사되어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 호동왕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서기 32년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의 아들인 호동(好童)왕자(?~32)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다. 최리왕이 호동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 북쪽 나라 신령한 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던 것으로 미루어, 두 사람이 만난 곳은 고구려 남쪽 낙랑에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국경 지역을 지나다가 다른 나라의 왕을 만났으니 국경 분쟁의 소지가 있을 법하지만, 고대에는 서로 명확한 국경선이 없던 만큼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최리왕은 그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했다.
최리왕은 당시 부여국을 물리치고 크게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미리 막고자, 자신의 딸을 호동왕자의 아내로 삼게 하여 혼인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호동은 전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가 낙랑에 간 것은 결혼 상대자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적의 빈틈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결혼 풍습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먼저 식을 올리고 나중에 여자를 남자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 전통적인 혼례 방식이었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해모수와 유화가 결혼식을 올린 곳은 신부의 집인 하백의 집이었으며, 해모수가 유화를 놔두고 떠나자 유화는 아버지인 하백의 노여움을 사서 집에서 쫓겨났다가 부여의 금와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호동 또한 해모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호동은 최리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먼저 고구려로 돌아왔다. 최씨녀가 제대로 호동의 아내가 되려면 호동이 자신의 결혼 사실을 대무신왕에게 알리고, 좋은 날을 잡아 다시 고구려로 데려와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호동은 몰래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낙랑의 무기고에 들어가서 보물인 북과 나팔을 부수어 준다면 나는 예의를 다하여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이겠소. 만약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대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할 것이오.”
호동왕자는 왜 결혼의 조건으로 북과 나팔을 부술 것을 부탁했던 것일까? 낙랑에는 신기한 북과 나팔이 있는데, 만약 적병(敵兵)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미리 철저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호동은 기습작전을 통해 낙랑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 우는 북과 나팔을 먼저 파괴해야만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호동의 말을 전해들은 최씨녀는 마침내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주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먼저 청혼을 하여 최리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로 삼은 다음, 그녀를 낙랑에 돌려보내 그 병기(兵物)를 부수게 하였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낙랑을 멸망시키기 위해 호동을 첩자로 파견했고, 최씨녀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호동은 그녀가 성공했다고 알려오자, 곧 대무신왕에게 청하여 낙랑을 기습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으므로, 적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고구려군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북과 나팔이 파괴된 것을 알게 되었다. 최리는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 자기 딸을 죽인 후, 고구려에 항복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낙랑 역시 고구려가 탐낼만한 먹잇감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낙랑을 완전히 멸망시킨 것은 호동왕자의 활약이 있은 후 5년이 지난, 서기 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동이 완전히 낙랑을 멸망시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분명 고구려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셈이다. 하지만 공을 세우면 질투하는 자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호동은 본래 대무신왕의 차비(次妃: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에게는 원비(元妃: 첫째 왕비)가 있었고, 그녀도 해우(解優)라는 아들을 낳았다. 호동이 15세 정도였던 것에 비해 해우는 서기 44년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이 즉위할 때에도 어리다는 말을 들었으니, 서기 32년경에는 3세 미만의 아기에 불과했다. 따라서 원비도 젊은 나이였다. 그녀는 차비보다 늦게 대무신왕과 결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원비가 된 것은 그녀의 외가 탓이다. 그녀의 출신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족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강력한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한 원비에 비해, 호동의 어머니 가문은 당시 힘이 약했다.
서기 22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부여의 대소왕이 죽어 부여국이 혼란해지자, 대소왕의 아우가 무리 100명을 이끌고 부여에서 도망쳤다가 갈사수변에서 해두국(海頭國)의 왕을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세운 나라가 갈사국(曷思國)이다. 갈사국은 불과 군사 100여명으로 세울 수 있었던 매우 작은 나라였다. 대무신왕과 차비의 결혼은 대소왕의 아우가 아직 부여에서 탈출하기 전인, 대무신왕이 서기 18년 왕의 자리에 오를 무렵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차비의 배경이 부여국이 아닌 작은 소국인 갈사국이 되자, 그녀의 위상은 크게 낮아졌다. 때문에 그녀가 대무신왕과 가장 먼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비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호동 역시 외가 세력이 약한 탓에, 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15세가 되면 성인으로 대접을 한다. 또한 15세 무렵에 왕자를 태자로 책봉한다. 호동이 자신과 결혼한 최리의 딸에게 낙랑을 배신하라고 시킨 것은, 그가 큰 공을 세워 태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호동은 얼굴이 매우 잘 생겨, 대무신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큰 공까지 세웠으니, 장차 대무신왕의 뒤를 이을 태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자 자신의 아들인 해우가 태자가 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원비가 대무신왕에게 호동을 참소(讒訴: 남을 헐뜯어 죄가 있는 것처럼 고함)했다.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한다.”
고구려와 결혼 풍습 등이 유사한 흉노에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부인을 범하는 증(烝)이란 풍습이 있다. 또한 호동과 원비의 나이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참소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대무신왕이 살아있고, 또한 원비의 가문이 막강한 상황에서 호동이 이러한 마음을 품었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대무신왕도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원비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대무신왕 앞에서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상황이 지속되어, 호동이 태자에 책봉되고 또 왕이 된다면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몰락할 수도 있었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죄를 받겠습니다.”
원비는 울면서 대무신왕에 고하였다. 결국 대무신왕은 호동에게 죄를 주려고 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원비 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구려의 5부 가운데 하나가 이 일로 인해 이탈하거나 반란을 일으킨다면, 왕의 지위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대무신왕이 호동의 태자 책봉을 포기할 상황이라면, 자신을 지지해 줄 강력한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호동으로서는 상황을 반전시켜 태자가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명을 썼지만, 호동은 주위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해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호동이 자결을 택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원비의 악독함이나 그의 효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권력 투쟁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다. 호동이 죽은 지 한 달 뒤에 해우는 태자로 책립된다. 해우는 서기 48년 왕위에 올라 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이 되지만, 불과 5년 만에 부여계 세력에게 살해당하였다. 호동의 죽임이 토착세력이 부여계 세력을 압도한 탓에 벌어진 반면, 해우의 죽음은 토착세력에 대한 부여계 세력의 반발로 인해 빚어졌다. 두 세력의 정치적 갈등이 왕자들의 죽음을 불러왔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최리를 낙랑왕이라고 하였지만, 그녀의 딸에 대해서는 낙랑의 공주가 아닌 최씨녀라고 하였다. 낙랑의 실체에 대해서는 한(漢)나라가 세운 낙랑군(樂浪郡)이다, 또는 낙랑군과 별개인 최씨 낙랑국이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최근에는 최리의 낙랑국이 낙랑군 내부에 속한 여러 국읍(國邑)의 하나로, 특히 낙랑군이 옥저 땅에 세운 동부도위 지역에 최리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등장했다. 최리의 나라가 군(郡)이든, 국(國)이든 간에 최씨녀는 ‘낙랑공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실체가 불분명한 자명고각(自鳴鼓角)도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설화(說話)로 보는 이들도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아직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탓에 구전으로 역사적 사실이 전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구전된 이야기가 글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자명고각 등 첨가된 부분이 있었던 것이지, 호동의 이야기가 사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호동과 낙랑공주 이야기는 1947년 유치진의 희곡 [자명고], 1978년 최인훈의 희곡 [둥둥 낙랑둥], 1992년 김진의 만화 [바람의 나라], 2009년에 방영된 TV사극 [자명고] 등을 통해 비극적 사랑이야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라를 배신했고, 호동왕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탓에 삶의 의욕을 잃어 자살을 했다는 비극적 요소가 특히 부각되었다.
하지만 최씨녀가 잘 생긴 호동왕자를 사랑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호동왕자가 그녀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처가에서 결혼한 후, 남편이 데려가지 않은 여성은 집에서 쫓겨난다. 유화부인이 해모수에게 버림을 받자, 아버지 하백이 그녀를 집에서 쫓아버린 이야기가 고구려 건국신화에 담겨 있다. 따라서 최씨녀가 호동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그녀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호동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녀에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한 냉혹한 사람이었다.
호동은 비극의 남자주인공이 아니라,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결국 실패한 인물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