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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흥 선생이 구속됐을 당시의 모습. |
골머리를 앓던 총독부는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대규모의 경찰력을 동원해 집안현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 수뇌부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는데 이 불의의 기습으로 사령관이었던 최석순 이하 29명의 참의부 간부 및 군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바로 ‘고마령 참변’(1925년 3월 15일)이다. 일제는 또한 만주의 실력자였던 장쭤린(張作霖)의 지방정부와 비밀 교섭을 벌여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운동가의 무장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을 골자로 하는 소위 미쓰야협정(三失협정)을 체결(1925년 6월
11일)했다.
미쓰야 협정으로 인한 중국관헌의 단속이 증가하고 고마령 참변으로 수뇌부마저 잃자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급속도로 위축되기
시작했고, 군사조직으로서의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참의부 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은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품고 경성으로 향한다.
■ 경찰병력 3천여 명이 동원돼 체포한 식민지 청년
이수흥은 경기 이천의 유학자이자 최익현의 제자인 선산(雪山) 이일영이 쉰을 훌쩍 넘어서 본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마각이 한반도에 드리우는 것에 울분을 느껴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이 때 역시 최익현의 제자이자 훗날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단체인 의군부 총재가 된 채상덕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비록 채상덕과 달리 이일영은 의병활동 후 고향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하지만 그 아들은 곧 19세의 나이로 만주로 망명했다.
채상덕은 옛 벗의 아들을 김좌진이 사관 양성을 위해 세운 신명학교로 보냈다. 의군부가 참의부에 흡수되자 학교를 마친 이수흥은 채상덕을 따라
참의부 소속의 군인으로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고마령 참변’은 이수흥의 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채상덕은 참변 당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수흥을 만나 지금 참의부가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음을 피력했다.
이어 권총 2 자루를 준비해 뒀으니 이럴 때일수록 안중근을 본받으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 후 곧 자결했다.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이 섬기던
채상덕의 자결에 이수흥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채상덕의 유언을 잊지 않았던 그는 1년 상을 마친 후 부대장을 만나 단독행동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혈혈단신 도보로
경성까지 잠입했다. 이때가 1927년 7월이었다.
경성에 잠입한 이수흥은 만주로 떠날 당시 총독부 급사로 일했던 친척
유남수(柳南秀)를 통해 총독 암살을 도모했으나 그가 이미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삼킨다. 이천으로 길을
나서던 중 동소문 파출소 소속 순사가 따라오자 그를 쏘고 도주했다.
경성 시내에는 곧 비상경계가 펼쳐졌지만 이수흥은 유유히 시내를 벗어나 이천에 무사히 도착했다. 경성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수흥은
유남수·유택수 형제와 상의하여 독립자금 확보로 투쟁 방향을 일단 선회한다. 이천 및 안성은 예부터 곡창지대라 부호들이 많았던 이유가
컸다.
기회를 엿보던 이수흥은 9월7일 유남수와 함께 안성 부호 박승륙을 찾아갔다.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을 만난 자리에서 이수흥은
신분을 밝히며 군자금 제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을 뿐만아니라 신변에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이에 박태병을 사살한 이수흥 등은 그 길로 안성을
떠나 잠시 누이의 집에서 몸을 피했다.
약 2주 후 여주에서 식산회사를 경영하던 이민웅을 찾아가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이민웅이 교묘한 말로 회피하면서 이에 불응했다. 그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이수흥은 식산회사를 직접 찾아갔으나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고 거사 후 퇴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근처의 이천경찰서 현방경찰관주재소를 공격했다.
재차 식산회사를 찾아갔으나 이미 모두 퇴근해 버린 관계로 일의 성사가 어렵게 되자 이수흥은 그 길로 이천군 백사면사무소로 들어가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하고 자금 확보를 도모했다.
그의 키가 5척이라는 말을 들은 이천경찰서장은 관내 5척 남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조사하기까지 했으나 이수흥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신출귀몰하고 대담하게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수흥은 때마침 아버지 이일영의 부음소식을 듣고 몰래 참석했다가 아쉽게도 현상금에 눈이
멀었던 친척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됐고 그의 신변은 곧 경성으로 압송됐다. 언론은 그의 체포소식을 호외로 다룰 정도였다.
▲ 이수흥 선생의 동상. |
■ 한 많은 식민지 청년, 서대문 형무소에 지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수흥이 사형 언도 후 밝힌 최후 진술이었다. 그리고 법정을 나오면서 공소권마저 바로 포기해 버렸다. 1심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공소권을 포기한 사람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강우규(姜宇奎), 그리고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던
허위(許蔿)뿐이어서 법원 관계자들은 놀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명상과 독서 및 감상록 집필로 일관하면서 담담히 집행을 기다렸다. 사형
판결이 난 몇 달 후 일왕의 은사령 반포로 일본과 식민지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에 대한 감형이 이뤄졌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참의부
군인에게는 허락될 리 만무했다.
1929년 2월27일 오전 문득 무엇인가를 예감한 이수흥은 한시(漢詩) 한 수를 지었다. 사형
집행의 때가 왔음을 안 그는 지금까지 작성해 온 감상록을 한시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장 요코다(橫田) 소장에게 맡겼다. 술 두 잔을 마신 후
자신이 품어왔던 말을 긴 시간 밝힌 후 교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나이 25세, 제2의 안중근을 꿈꿔왔던 한 청년의 바람이 채 결실을
보지도 못한 채 끝나는 순간이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그의 시신을 화장 처리해 그 유골을 작은 자기에 담아 보관했다. 인계할 직계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결국
매부 강긍주의 사설 가족묘가 있는 안성군 일죽면 화곡리에 매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유골에조차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동대문 경찰서 형사부장이 직접 유골을 안성까지 호송했고 그것을 인계받은 안성
경찰 역시 매장과정을 지켜보는 한편 추후 그의 묘를 감시할 사람들까지 지정해 놓았다.
비록 총독 및 고관대작 암살이라는 대의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중심지인 경성과 경기일대에서 펼친 이수흥의 활약은 무장독립투쟁사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다만 이러한
위상에도 그에 대한 우리의 낮은 인식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오늘, 이수흥에 대한 대대적인 선양사업이 필요한
이유이다.
조의행 신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