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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자경전 꽃담 날짜: 2006.8.30
교태전이나 자경전같이 여성의 공간에는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여인들을 배려해서인지 담장을
아름답게 치장하였다. 우리는 '꽃담'이라 하지만 기실 꽃담의 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
[삼국사기] 권33 '옥사(屋舍)'에 "진골(眞骨)계급 주택의 담장은 석회를 발라 꾸미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성골(聖骨) 곧 왕족은석회를 발라 집을 치장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꽃담이 멀리 삼국시대에 이미 싹텄음을 짐작할 수있다.
고려시대에 장가장(張家墻)이라는 유명한 꽃담이 있었다.
이꽃담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에서도 뛰어난 꽃담으로 손꼽혔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그꽃담을 보고는 궁궐의 꽃담보다도 월등하다고 칭송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검소한 것을 숭상하는 풍조가 생기면서 화려한 꽃담은 저절로 그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화려한 꽃담 대신에 수수하며 은은한 꽃담이 집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골 집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흙과 돌, 기와 나 그파편들이 꽃담을 꾸미는 재료가 되었다.
천연이 주는 재료를 써서 멋지게 구조해 내는 재주를 부렸고 깊은 생각과 적절한 지혜가 그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옛날에는 내가 사는 경계 곧 환경은 삼라만상이 살아서 숨쉬는 대자연이었다.
살아 있는 환경이기에 잠시도 쉼 없이 변화했다.
주기적인 변화도 있고 돌연한 변화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환경 속에서 사는 인간은
변화에 대처해야 했기에 내게 유익한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노력했다.
인지가 발달하면서 이런 생각이 더욱 적극적으로 대두되어 불리하면 피하고 부족하면 보완할 방도를 궁리하게 되었다.
불리함을 피하는 것은 곧 환경의 선택이고 부족의 보완은 곧 환경의 인공적인 조성이다.
환경 조성에는 오랜 경험과 지혜가 응용되었다. 대 자연의 조화를 경험한 끝에 지혜가 생겼고
그지혜로 신을 알 게 되어 자연과 신의 섭리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방안을 터득하게 되었다.
신을 자기 편으로 삼고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런 인간들을 질시하는 귀신을 막는 방안을 궁리하게 되었으며
한국의 꽃담 무늬에는 이런 뜻과 사상이 담겨 있다.
꽃담의 조성과 그무늬가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표현이 아니라 이런 깊은 뜻의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대나무>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강하고 유연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사계절을 통하여
색이 변치 않기 때문에 군자의 풍격을(風格)과 절개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던 식물이다.
그러나 생활 문양에서 다루어지는 대나무는 절개나 지조의 상징보다는 세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수(壽)를 상징하는 바위와 함께 등장시켜 축수(祝壽)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아래의 설화와 관련하여 벽사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담문록 (談聞錄)]에 의하면 서방 산중에 장대한 산귀(山鬼)가 살았는데 사람이 그를
만나기만 하면 반듯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전이라는 사람이 이귀신을 심히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대나무를 잘라 불 속에 던져 넣어 대나무가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놀라 귀신이 달아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세시에 폭죽을 터뜨리게 된 연원인데 이로부터 대나무가 축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꽃과나비>
나비의 상징관은 장자의 호접몽과 관련이 있다. 장자가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화궁속으로 날아 다니며
달콤한 꿀만 빨아먹으면서 나비의 즐거움을 만끽한 데서 나비는 즐거움의 상징이 되었다.
또 한 젊은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따라가다가 어는 대갓집 뜰에 뛰어들어 미인을 만났다는 이야기에 서
남녀 화합의 상징까지 겸하게 되었다. 만물이 회생하는 봄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짝을 찾아
생을 구가하는 나비가 젊은 청춘 남녀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 연애와 미호, 행복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나비와 고양이가 함께 하는 문양의 경우는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는 장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예기]에 "인생 70을 모라 하고 80을 질이라 하고 100세를 기이라고
한다는 구절에서 연유한다. 고양이묘와 '모'가 서로 유사하고 나비 접이 '질'과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모질 = 장수를 의미한 것이다.
또한 나비가 덩굴 식물과 함께 그려지는 경우는 자손 창성과 익수(益壽)를 의미한다.
참외나 호박 또는 땅콩 등은 줄기와 뿌리 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면서 마디마다 꽃과 열매를
맺기 때문에 면면(綿綿) 또는 연생(連生)을 의미하고 그주변을 나는 나비는 장생(長生)을 상징한다.
<국화>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하찮은 오두미(五斗米)에 자신의 지조를 굽힐 수 없다
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일화에 연유하여 국화는 일반인들에게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나라 주돈이가 그의 [애련설]에서 '국화는 은일(隱逸)'이라고 한 뒤부터 고결한 품격의
상징으로도 보편화 되었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의 징조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국화는 그 생태적 속성과 관련하여 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 영초(齡草), 옹초(翁草).
천대견초 (千代見草)등 고상함과 품위와 장수를 의미하는 별명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모란>
모란꽃 문양은 연꽃보다 약 천년 뒤에 나타났다.
상고 시절에는 모란을 작약(芍葯)으로 불렀으나 당 이후 목작약 (木芍葯)을 모란이라고 불렀다.
당나라 측전무후 때 장안에 모란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하며 당나라 이래 모란꽃은
번영 창성(昌盛)의 꽃으로 미호 (美好)와 행복의 상징으로 널리 애호되었다.
송나라 때 모란은 부귀화 또는 '꽃 가운데 왕자[花中之王]'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송(宋)나라 주돈이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란을 사랑하였는데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다(自唐以來 世人甚愛牧丹 牧丹 … 花之富貴者也)."라고 한 이후로 부귀 길상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다.
모란꽃 문양은 회화,자수, 공예품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애호 되었는데 장미꽃과 함께
배치하여 부귀장춘 (富貴長春),수석이나 복숭아와 더불어 장명부귀(長命富貴),
수선화와 같이 그려 신선부귀(神仙富貴)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했다.
<복숭아>
일명 '서왕모의 복숭아라고 칭하기도 하기도 한다.
전설적인 산 곤륜산에 살고 있는 신선 서왕모가 가꾸었다는 천도(天桃)는 3천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년 만에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3천갑자 동방삭도 이 복숭아를 훔쳐 먹고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무릇 수도라고 일컬을 때는 모두 장수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복숭아는
장수를 축원하는 잔치에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 되었다.
장수를 축원하는 그림 가운데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가 있는데 수성노인이 복숭아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복숭아는 십장생도 류의 그림에 주인격으로 등장하고 있다.
<매화>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시기에 핀다고 해서 보춘화 (報春花)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른 봄에 홀로 피어
봄의 소식을 전하고 맑은 향기와 우아한 신선의 운취가 있어 순결과 절개의 상징으로 널리 애호되었다.
그런가 하면 매서운 추위에도 꿋꿋이 피는 매화의 생태를 인간의 고상한 품격에 비유하기도 하며 ,
겨울이 되어 잎이 지고 나면 일견 죽은 것 같으나 다음해 다시 꽃이 피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장수의
상징물로도 여겼다. 일설에 매화는 쾌락, 행복, 장수, 순리등 오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매화 매(梅)와 누이 매(妹)가 음이 동일해서 미혼 여자를 소매(小梅)라 하기도 한다.
이때 매화는 소매(小梅)의 건강 성장을 상징한다. 때로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그려 부처(夫妻)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매화는 아내를, 대나무는 남편을 상징한다.
첫댓글 햐~~~
좋구도 좋을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