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으로 이룬 극락
진천 보련산 보탑사(寶塔寺)
山寺는
우리 조상의 사상과 신앙이 형성되고
예술이 꽃피어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수백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 왔다.
우리는 절집 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해묵은 문화재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떠올린다.
진천의 외딴곳 보련산 자락에 꽃피운 보탑사는
근래에 지어져 문화재는 많지않지만
극락같은 꽃들과 단아함으로
어느곳 하나 사소한 공간 없이
잘 어우러진 조경에
일상의 무게를 내려 놓을 수 있다.
보련산 형상은 연꽃과 같고
도덕봉,약수봉,옥녀봉 등
상서로운 열두 개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져 있다.
이런 산세의 중심에
3층목탑이 꽃술처럼 서있으니
이곳이 바로 보탑사다.
법당 앞에 세운 탑이 아닌 주불전.
보탑사가 없었다면
보련산은 꽃술 없는 연꽃이 될 뻔하였는데
보탑사가 자리하므로 완연한 연꽃이 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여쁜 절
비구니스님들만 수도하여 그런지
올망졸망한 들꽃들이 3층목탑을 감싸 안고 있는 풍광이
한없이 온화하며 그윽하다.
[보련산 연봉들에 둘러싸인 보탑사 전경]
보탑사가 있는 연곡리는 지덕(地德)이 아주 좋은 자리라 한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있듯
진천은 살아있을 때 머물기에 좋은 최고의 길지로
이곳 진천읍 연곡리(蓮谷里)는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 그대로 연꽃 계곡답다.
보탑사 3층목탑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마치 연꽃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형세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바로 연꽃골 옛절터!
고려시대 때 눈 밝은 이들이 있어
서기가 감도는 연꽃골에 작은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 한자락에 남아 있는 백비(白碑)가 그때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싶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하늘의 해를 안으려는 땅의 기운이
하늘에 닿지 않는 꽃술을 밀어낸 까닭이었나 보다.
[극락같이 꾸며진 들꽃 정원]
절집인가 정원인가?
사찰의 규모가 크지 않아 볼거리는 많지 않으나
삼층목탑 하나와
극락같이 꾸며진 들꽃 정원을 본것으로 가슴은 채워지니..
삼국시대 때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로
고려시대의 절터로만 전해오던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비립동.
그 보련산 기슭에 21세기를 앞두고
조국의 무궁한 발전과 국민의 숙원인 통일을 염원하며
전통 목조 건축문화를 재현함으로
차세대로 하여금 문화민족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하여
1991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고
비구니 스님들이 깨끗하게 모으신 시주가 성보가 되어
태창건설 박태수가 설계하고, 도감으로 한옥의 명인 목수 신영훈,
한옥의 거장 목수 김영일, 도편수 대목장 故 조희환,
단청화사 故 한석성옹 등 우리시대 각분야 최고의 명인들이 하나가 되어
1992년 5월 착공, 천년을 장담하며 1996.6.9일 완공하였으니
아! 어찌 근세의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여늬곳과는 달리 칠각과 구각으로 나란히 서있는 사모지붕의 범종각과 법고각]
보탑사의 3층목탑은 탑의 높이만 42.7m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이 있으며
이곳 보탑사 3층목탑이 그 대열에 끼게 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에 사모지붕.
이 탑이 특이한 것은 사방을 돌아가며 각 층마다 다른 이름의 현판을 걸고
사람이 직접 올라갈 수 있도록 지은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은 겉에서만 다층 형식일 뿐 안은 통층이다.
그러나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한 이 보탑은
층층이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사방불과 법보전과 미륵전 등
사찰의 구조물을 모두 탑 안에 모아 놓은 셈으로
부처님을 한 자리에 모두 모셔 사방팔방 시방세계에 불광을 비추고자 한다.
[자연석과 조경으로 심어진 소나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3층목탑]
1층은 금당(金堂)으로 중심추인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석가여래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사방불을 모시고
심주 안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둘레에는 999개의 간절한 발원이 담긴 백자 원탑(願塔)을 두었다.
이곳 동쪽, 중생들을 병고에서 구원해 주시는 약사여래불 앞에는
사월 초파일 공양으로 올려진 수많은 수박들이 동지가 되도록 상하지 않는데
동짓날 이 수박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동짓날이 되면 이 수박을 먹으러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층 법보전에 모신 경전에서 얻을 수 있다.
2층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인 8만대장경을 봉안하는 법보전(法寶殿)으로
불, 법, 승의 경전을 모셨으며 티벳불교에서 전해 온 윤장대를 두었고
4면의 벽에는 한글 법화경을 쑥돌에 새긴 석경을 전시했다.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은 3층에서 기다리신다.
3층은 석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뒤,
부처님이 안 계신 세상이 계속되다가
장차 이땅에 오시어 새로운 정법(正法) 시대를 여실
미래불을 모시는 미륵전(彌勒殿)으로 미륵3존불을 모셨다.
[연꽃의 수술위에 자리잡은 3층목탑의 웅장함]
보탑사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한 조계종 제 1교구 말사 삼선포교원에서
지광(志光), 묘순(妙洵), 능현(能賢)스님의 원력과
부처님 법문을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베풀려 다짐한 불자들이
마음의 먼지를 닦아내고 정혜 결사하듯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세운것이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보탑사 심주에 모시고
반야심경 등 사경을 봉안하였으며
1천3백여년 단절된 탑 짓는 전통을 되살려
잃어버린 꽃술을 다시 피우고 있는 것이다.
절집을 보탑사(寶塔寺)라 이름한 연유는
법화경 견보탑품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다보여래께서 증명하고 찬탄하기 위해
칠보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신 것과 관련,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보배탑을 세움으로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어주는 자비심으로 가득 채우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보탑사라 하였다.
주지는 능현스님 김점자로 부지규모 4천여 평에
삼층목탑을 금당으로 범종각,법고각,영산전,지장전,적조전,산신각,요사 등이 있으며
보물 404호인 백비와 연곡사지 3층석탑이 현존하고 있다.
[3층목탑 대웅보전 정면에서 바라본 고아한 석등과 안산의 수려한 모습]
대부분의 절집은 다리를 건너 들어가게 되는데
그 뜻은 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선정(禪定)의 세계로 향한다는 의미다.
흔히 절집에 이르면 불국토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
미혹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리처럼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고 보제루를 통과해야 비로소 주불전을 만나고
그 위로 산신각을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 보련산 보탑사는 파격적일 만큼 소담하다.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면 정갈하게 꾸며진 돌계단이 있고
호법신장인듯 버티고 선 300여년 된 느티나무를 지나면
소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일주문을 대신하고
호위하듯 서있는 쌍둥이 건물 범종각과 법고각을 지나면
통일대탑이라 명명한 3층목탑이 자태를 드러낸다.
[3층목탑의 웅장함. 기와 끝부분마다 백자로 만든 연봉을 두었는데
이런 예는 통도사대웅전과 전등사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아, 저 웅장하면서도 멋스러운 아름다움이여...!!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을 본따서 지었다던가?
과거와 현대 기법을 총망라 하여 지은 저 위용 찬 모습은
108척의 높이로 백팔번뇌를 상징한다고 한다.
연꽃의 수술위에 우뚝선 3층목탑의 저 위용!
사각의 육중한 기단 위에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처럼,
유려하면서도 활기찬 추녀의 기상!
바람과 구름과 연꽃만을 이용해 그렸다는 고아한 단청 위에
처마 끝부분의 백자연봉은 백련으로 보이나니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눈이 시리다.
보탑으로 다가서는데 바람 한줄기 불어오니
처마의 풍경에서 자연이 내는 고운 음의 향연이 나지막히 울려퍼진다.
심금을 울리는 저 소리..
이 시간,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저토록 맑은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니 묘한 감흥이 인다.
[스님 거소인 해행당(鮮行堂)과 지장전(地藏殿) 사이에 있는 연곡사지 삼층석탑.
연곡사지에서 출토된 석탑부재들을 모아 복원하였다]
3층목탑 서쪽엔 영산전이 있는데 팔각으로 된 우진각지붕이 파격적이다.
그 안엔 석가모니를 모시고 전후좌우에 10대제자 16성인 500나한이
제각각 다른 형상으로 도열하여 있으며
영축산 모형 위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듯한 자세로 모셔져 있어
이곳이 나한전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영산전 옆에는 들꽃속에 들어앉은 요사채 해행단이 있는데
지붕이 맞배지붕 형식과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건물은
단청을 하지않아 더 곱다.
해행당과 지장전 사이엔 해묵은 3층석탑이 연륜을 자랑한다.
잘 꾸며진 조경속에 어떤 설명도 없어
그저 오래된 탑이라는 것 말고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 탑이 연곡사지 3층석탑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모든 것이 새롭고 파격으로 조성된 보탑사 경내에서 대하는
낡고 오래된 석탑 한 기는
설익은 김치찌개에서 찾아낸 녹익은 김치 한 조각의 맛으로
해묵고 허름한 그것이 오히려 보탑사를 돋보이게 해준다.
[너와집의 수각 곁에 고구려 장군총을 형상화해 지은 지장전 측면]
정자같은 샘터를 지나면 지장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고구려 장군총의 모습을 재현해 지어 특이하다.
만주벌판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오늘날 그 만주벌판 너른 곳에 피라미드처럼 자리한 장군총이
장군의 무덤이 아니라 장수왕의 것이라는 이론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통일의 대 염원을 이루고 그곳까지 회복하자는 의미로 이곳 지장전을 묘사했다.
지장전에서 삼소실(三笑室) 가는 길목엔 반가사유상이 있다.
노송이 곱게 자란 신비의 정원속에 모셔놓은듯
국보를 본뜬 반가사유상 근처에 돌부처도 자리를 잡고
야경에도 신경을 쓴듯 조명시설도 있어
과연 비구니스님들의 절집 사랑이 느껴진다.
[황토로 짓고 들꽃을 심어 극락과 같은 삼소실(三笑室). 큰스님이 묶고 계시다]
지장전 옆 한적한 곳에는 삼소실(三笑室)이 자리 하고 있는데
함박같은 꽃으로 둘러져 있어 천상의 화원 같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별천지가 이런 것일까?
아니면, 불교에서 전하는 극락세계가 이런 것일까?
아기자기한 연못과 소담하게 둘러 있는 이름 모를 꽃들..
한련화, 꿩의 다리, 은방울꽃, 쪽두리꽃, 둥굴레, 해바라기 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한 이 아름다운 곳을 극락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산신각 가는 길은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높은 곳 한켠에 짜임새 특이한 건물 한채가 있는데
전통 통나무에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펜션같은 곳으로
산신각 편액이 없으면 영락없는 통나무집이다.
올라가는 계단도 얼마나 정교한지 어디에도 소홀함이 없다.
작은 돌계단 사이로 촘촘히 심어놓은 야생화가 어찌 그리 앙증맞은지..
[열반에 들어 누워계신, 적조전 금빛 와불]
3층목탑 동쪽엔 적조전이 있다.
적조전 안에는 열반에 들어 누워계신, 금빛 와불이 모셔져 있는데
문살이 아주 곱다. 내벽엔 탱화가 아닌 부처님의 열반지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또 하나의 특색을 보인다.
어느곳 하나 같은 곳이 없는 곳.
그런 당우 영산전,지장전,적조전의 현판은 칠보사 조실이신
석주(昔珠) 큰스님이 쓰시고, 경판각자의 장인 조정훈님이 각자(刻字)를 하였다.
[단청을 하지않아 더 곱게 느껴지는 요사채 해행당.
지붕이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보탑사 3층목탑은
새로운 통일국가를 이루려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운 신라의 호국 이념처럼
남북통일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은 탑이다.
태백산 춘양목(春陽木)인 홍송을 8톤 트럭으로 150대 분을 실어와
그것을 주재료로 백두산 한라산 등 팔도 지역의 홍송(紅松)들을
나무가 아플세라 쇠못하나 쓰지 않고
후손들이 어려울까 지붕에 흙 한덩이 올리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목탑중 유일하게 3층까지 올라간 세계 최대의 목탑!
이 목탑은 자연의 법칙대로 서로 보듬어 감싸안아 하나가 되는 탑이다.
바라보노라면 그 웅장함에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으니,
오! 고맙고 자랑스럽다.
군더더기 없는 저 높은 탑의 고아한 자태..
이 삼층목탑이 더 감동적인 것은
가람의 터가 좋거나 나쁘거나, 건물의 짜임새가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분위기가 산뜻하다거나 무겁거나, 종파의 관념이 있거나 없거나,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들이 공들여 지은 목조건축의 걸작품임을 떠나
저, 육중한 탑이..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전통 통나무에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펜션같은 산신각]
만뢰산은 덕성산의 한줄기가 파도치듯 서운산을 넘어 남쪽으로 뻗친 산으로
삼국통일의 위엄을 달성한 김유신장군과 유서가 깊다.
정상에는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성의 흔적과
신라의 옛 이야기를 말없이 보여주는 우물터가 있으며
그 줄기에는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령산(길상산)이 있고
산 아래 계양마을에는 장군의 생가를 복원하고 장군의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보탑사는 진천읍에서 서쪽으로 12㎞지점에 있으며
보탑사 못 미처에 연곡계곡과 연곡저수지가 있어 풍광 또한 빼어나다.
하지만 이곳을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 단 4개 뿐이라는, 보물 제 404호 백비(白碑)가 있기 때문이다.
명문(銘文)이 없으므로 비의 주인공도 건립 연대도 알 수 없는 이 백비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거북머리의 비례미와 힘찬 꼬리 등 전반적인 조성수법도 뛰어나지만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로 불려, 더 유명한 비석이다.
[보물 제 404호 연곡리 백비]
전설에 의하면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길지에 백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 중에 이 비가 제일 큰 것이다.
거북모양의 귀부는 얼굴이 많이 손상되어 말머리처럼 보이며
앞쪽의 발톱이 떨어져나갔다. 등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주고
비신을 받치는 받침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답다.
이 백비는 처음부터 비문을 새기지 않았는지,
세월의 풍파를 거치며 글씨가 닳아 없어진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귀부의 머리 형태와 얇은 비신, 방형의 이수 등이
고려 초기의 특징을 보이는 이 백비는
이수에 사실적으로 조각된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은 뛰어나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뛰어나고 단아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비는
건립연대나 양식상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월광사 월랑선사탑비와 비교되는 작품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말머리 형상인 거북 머리와 허물을 벋고 있는 귀갑]
이 비에 대해서 회자되는 것이 있다.
일각의 전문가들은 이 비의 귀부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거북이 이곳에 통일대탑을 지을때부터 허물을 벗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북의 머리가 말의 형상인 것으로 보아 천귀(天龜)라고 한다.
이 조형물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상상의 동물로
그런 부분에 근거해서 조각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 백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엔 왜 글을 새기지 않았을까?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기록하라고 남겨 둔 것이라한다.
21세기에 통일의 대 과업을 달성한 후 기록하라고..
[범종각에서 타종하시는 비구니스님의 초연하신 모습]
높은 구름 아래 단아한 절집을 천천히 걷다보면
먹장삼 승려들의 모습과 향내 담은 은은한 풍경 소리에 귀 기울여진다.
구도자의 행렬보다는
만개한 꽃이나 삼층목탑의 건축양식을 더 궁금해 하고,
황룡사 9층목탑과 장군총 등이 더 장엄하게 마음에 다가서는 곳..
보탑사를 나오는데
범종각에서 타종하시는 비구니스님의 초연하신 모습을 운 좋게도 보았다.
산사를 울리는 깊이 있는 저음..
마음을 진동하는 저 높은 울림..
뎅~ 뎅~' 두두림으로
수많은 중생들에게 맑은 소리 심어주는 저 범종은,
뭇사람들에게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와 안온함을 준다.
[연꽃이 둘러진 수술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연밥]
보탑사에는 원색의 꽃들이 알록달록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자연과 조형물이 절정의 조합을 이뤘다.
땅과 하늘이 바탕으로 어울렸고 나무와 돌들이 점과 선처럼 배경을 이뤘다.
그러나 여기에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작은 돌 하나에도
칠순을 훌쩍 넘긴 주지스님의 정성이 배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랍이 적지 않은 노스님이기에
경문을 들어 설교하시는 노고만으로도
가슴에 와 닿는 좋은 법문을 내려 주실 수 있겠지만
스님은 자연에 땀방울 쏟아주는 노고의 보시로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으신 모양이다.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작은 연못]
하여 능현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비구승들은 기화요초로 보탑사를 극락처럼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보탑사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한민족 문화의 뿌리와 흐름을 샅샅이 뒤져서 설계하고 시공한 목조건축의 꽃으로
한민족 역량을 집약시킨 성역이다.
그러하기에 잊어버렸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축술과
현대의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는 문화재가 되기를 바란다.
봄부터 피어나는 보탑사의 들꽃들..
꼬리를 물며 장엄하는 250여 종의 야생화가 연출하는 그 눈부심 뒤에는
꽃보다 아름답고, 향수보다 더 향기로운
노스님의 깊은 마음이 배어 있다.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드러난다"는
조선후기의 문인 '장혼(張混)'의 싯귀처럼
자연과 절집과 스님과 민초들의 삶이 어우러질 때
참다운 문화 공간이 가능한 것이리라.
건물 하나를 지나면 또다른 파격에 눈이 맑게 열리고
모퉁이를 지나면 새로운 정서적 미감이 마음에 깃든다.
근심을 내려 놓고 기쁨을 담는 절..
보탑사가 세워지기 전, 이곳을 찾는 이들은
국내에 흔치 않은 백비와 그 유려한 조각을 보기 위해 왔을 터이지만
이제는 보탑의 위용을 먼저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저 통과의례처럼
백비를 잠시 휘둘러 보고 가는 듯 하여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다.
이를 두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 않던가!
2006. 8. 1 -無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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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답군요. 산사의 고요함이 절로 베어나오는듯 합니다. 가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