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인지뢰를 싣고 온 트럭을 그대로 인수해 타고 18연대로 향했다.
한 대는 대인지뢰만 가득 실렸고, 다른 트럭들은 지뢰상자 위에 사병들이
몇 십 명이 앉아 타 있는 상태였다.
18연대 주둔지는 청주 근교로 은행리보다 더 올라가서 있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쌕쌕이 전투기 두 대가 날아왔다.
호주(濠洲) 비행기였다. 천안에서부터 유엔군이 참전한 때여서
우리는 반가워하며 좋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호주 전투기는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고 있는 트럭을 목표로
마구 갈겨댔다. 우리는 혼비백산했다. 나는 트럭을 멈추게 하고 은신명령을 내렸다.
황급히 튀어 내린 우리는 숨을 곳을 찾았다. 트럭을 조준하는 사격은
더욱 거세어졌으므로 나는 “트럭 밑으로 들어가지 마라!”고 고함을 치고
트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은폐할 곳을 찾았다. 약간의 비탈언덕 논바닥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우리는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비행기의 사격은 집요했다.
우리는 사격을 피해 바위를 뺑뺑 돌았다. 앞쪽에서 공격해오면 뒤쪽으로 돌았는데,
그러다보면 다른 비행기가 뒤쪽에서 공격을 해왔다.
두 대의 전투기가 양쪽에서 협공을 가한 것이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며 최대한 바위에 몸을 은폐시켰지만 호주 전투기의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바위는 사각이 없어질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대인지뢰상자가 맞아서 또 그게 펑펑 트럭과 같이 폭발했다.
호주공군의 공격으로 그때 우리는 수십 명이 전사했다.
그때 옆에서 지켜 본 박 중위라고 하는 동기생의 죽음은 처참했다.
그는 기관포에 맞아서 배가 터지고 만신창이의 주검이 되었다.
엎드려 있는 사람을 위에서 갈기니 총알이 등을 뚫고 배가 터진 것이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수많은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사격을 받은 지뢰상자가 터지며
트럭도 묵사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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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일본 이와쿠니 기지에서 호주 공군 정비사들이 글로스터 미티어 제트기를 세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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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전투기가 우리를 공격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엄청난 오판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한 것은 “한강이북은 전부 인민군이다.”라는 것이
“금강 이북은 전부 인민군이다.”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금강과 한강을 혼동한 것이다. 그러니 금강 이북인 충주근교에 있는 우리를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한 것인데, 6·25초기 아군의 지휘체계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웅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겨우 수습을 해서 살아남은 백여 명을 모아가지고 18연대까지 갔다.
연대에 도착해보니 연대 병력도 호주전투기가 날아와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고지에 있던 병사들 또한 유엔군의 오판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연대본부에 가니 중령이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전투모는 썼는데 웃통을 벗어 제친 채
있고 한 사람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만화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웃통을 벗어 제친 중령에게 “연대장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장교 몇 명, 사병 몇 명, 사단 명령에 의하여 18연대에 배속돼서 도착했습니다."
라는 식의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 중령은 ”난 연대장이 아니야.“ 라면서
”연대장은 저 마루에 앉아 계신 분이다. 거기 가서 보고해.“라고 했다.
웃통을 벗고 철모만 쓴 중령은 부연대장 한신[韓信, 1922. - 1996.] 중령이었고,
마루에 앉아 있는 연대장은 임충식[任忠植, 1922. - 1974.] 중령이었다.
나는 다시 임충식 연대장에게 가 ”사단에서 18연대 배속되니까 18연대 작전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공병대가 왔다.“고 신고했다. 임충식 연대장과 한신 부연대장은
“그렇잖아도 인원이 없어 문제인데 잘 됐다, 잘 왔다!“며 아주 반가워했다.
곧바로 한신 부연대장이 전방의 야산에 있는 고지로 올라가
“연대장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라”는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공병대가 은행리 전투에 투입되었다. 나는 장병들을 데리고 고지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