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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전주의(古典主義)문학 이론을 확립하고 집대성한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니콜라 부알로(Nicolas Boileau. 1636-1711)’의 말을 인용한다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글들 중에 자서전(自敍傳)외에 모든 글은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는 읽는 남녀노소빈부귀천(男女老少貧富貴賤)의 불특정다수(不特定多數)의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사실 글은 쓰는 당시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상식의 전체, 즉 아는 것을 통동원해 기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글을 쓸 당시 주변, 사회와 국가가 안정되고 평온하다면 더 쉽고 재미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도 필자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때가 그리 안정되고 평온한 시절은 아녔습니다.
TV와 영상매체들은 흥미를 위주로 못된 짓거리를 해대 정리되고 안정된 정신과 정서를 혼란하게 해놓고 있고, 그래도
청소년의 미래에 새로운 변화를 원하며 소중한 한 표를 던져 선출한 교육수장의 도덕성(道德性)은 입에 담기 거북한 사람으로 마치 한국 미래의 젊은이들을 한꺼번에 혼란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고, 몇 달 임기가 남지 않은 국가 최고 통수권자는 땅으로 숨었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혼란해하는 국민을 두고 보이지 않고 있는 이 지경에 글을 쓴 다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글을 재미있게 쓰는 것도 모자라 만화로 읽히려고 하는 지금에 생각해야하는 글을 쓴 다는건 마치 필요도 없는 물건을 내놓고 팔려는 덜 생긴 장사꾼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인이요 학자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선생의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이르길 ‘무릇 글을 짓는 데는 많은 말로써 헛되게 꾸미지 말 것이요, 다만 실지(實智)에 있는 말로 잘 펴서 엮어 첫머리에서 끝까지 일관(一貫)하게 한 구절 한 구절과 한 자 한 자가 정성과 간곡함이 밖으로 퍼져 나오게 된 뒤에야 인심이 감동되어 끌려 올 것입니다.’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썼습니다.
글을 잘 쓰고 못쓰고는 필자의 몫이고 글을 읽고 칭찬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이글을 받아간 이들의 권한(權限)입니다.
소송(訴訟)하는 사람의 필수조건은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물건 파는 상인은 자기 물건 이름을 소리쳐야 팔리듯이 글 중에 중국고전의 명인(名人)들을 자주 이용함은 필자의 의사(意思)가 객관성(客觀性)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필자가 얼마 전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제목의 글과 장문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글을 쓰다 보니 영향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바람은 읽은 사람 중에 한사람이도 ‘이글은 당신 닳았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1. 그대에게 맨토(mentor)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없었다면 그대는 현명하지 못했고 발전과 도약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자신감을 높이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맨토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맨토(mentor)를 두지 않은 사람은 더 많은 갈등과 방황, 불안감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맨토를 두고 안 두고는 엄연히 본인의 자유입니다.
농부가 소(牛)를 두고 키우고 안 키우고는 자유입니다. 소를 키우지 않으면 마구간도 항상 깨끗하고 소먹이를 위해 수고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긴긴 여름철에 지겨운 소 파리도 없어 좋습니다. 그런데 농사 철되어 많은 밭과 논을 경작할 때 소가 없으면 농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어쩌면 제대로 농사도 짓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논과 밭에서 살며 집에 들어오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에게는 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가족처럼 보살펴줘야 하는 것입니다.
멘토란 원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겸비한 신뢰(信賴)할 수 있는 사람이 1:1로 지도와 조언(助言)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말로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멘토라고 하며 조력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맨토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 정서적(情緖的)인 지지자(支持者. Emotional Supporter)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맨토는 맨티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내 편’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쉽게 안정감(安定感)을 느끼고 여유를 회복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회인지이론(social cognitive theory)을 최초로 연구한 스탠포드 대학의 ‘앨버트 반두라 교수(Albert Bandura, 1925-)’는 “잘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며 믿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감(自信感)의 상당 부분을 회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째, 조언자(助言者. Advisor) 역할입니다.
맨토는 맨티에게 필요한 정보와 조언(助言)을 적절히 제공해줌으로써 맨티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인지(認知)하고 대처(對處)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해 실패의 가능성을 줄여주고 보다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며 자신 있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필요한 맨토, 유용하고 필요한 것만큼 훌륭한 맨토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맨토와 맨티의 관계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人間的)이고 정서적(情緖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즉 서로간의 가치관(價値觀)이나 성격이 잘 맞아야 진정한 맨토와 맨티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곤란합니다.
‘감성 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의 저자인 ‘대니얼 골맨(Daniel Goleman)’박사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어야 두려움 없는 전진이 보다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라며 맨토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긍정적인 맨토를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공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과 토대(土臺)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종류의 경전(經典)에 이르길 ‘혼자 있는 것 보다 둘이 있는 것이 낳다. 한사람이 넘어졌을 때 곁에서 부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의 가르침이 있고 동양철학(東洋哲學)의 골격인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도 함축하면 화(和)를 의미합니다.
2. 그대는 참으로 훌륭하고 완벽한 인재(人才)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에 참으로 많은 그릇이 있습니다. 늘 밥을 담아 먹는 밥그릇, 정갈해 보이는 흰 접시, 투박한 멋을 풍기는 도자기에서 황홀한 빛을 발하는 크리스털, 집마다 다르겠지만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세계브랜드의 외국 그릇까지 많이 있습니다.
부엌 싱크대 그릇장을 열면 별의별 그릇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늘 쓰이는 그릇에서부터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한 그릇, 단지장식용으로 놓여 있는 그릇까지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이나 기구들, 그릇이 같지만 늘 사용되고 애정이 가는 물건이 있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하지만 귀하게 취급이 되지 않는 기구들이 있습니다.
그릇으로 말하면 쓰임새가 많고 사용하는 사람이 애정을 두는 그릇은 만든 사람이 목적이 뚜렷하고 디자인과 크기 등이 사용되어질 분야에 적합한 그릇은 주인에게 늘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예로 말하면 독일산 커피 잔 세트가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독일산 커피 잔은 특별하게 커피성질을 맞춰 만들어졌고 적당히 뜨거운 커피가 식지 않고 오래 갈 수 있도록 했고 커피의 본래 맛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마시는 사람의 입술에 촉감을 좋게 만들어져 커피 잔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커피 잔은 늘 사용하지 위해 가까이 놔둘 것입니다.
지인(知人)들이 방문했을 때도 이 잔을 사용할 것 이고 가족끼리 커피를 마실 때도 이 잔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척할 때도 조심히 하고 아낄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정리한다든지, 이사라도 가게 되면 버려지는 그릇들, 혹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아 깨어져 버리는 그릇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가 있는 그릇, 소중한 그릇이라면 주인은 늘 소중하게 다루어질 것이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그릇은 천대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쓸모 있는 그릇과 쓸모없는 그릇의 차이는 현저(顯著)하게 구분이 됩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대범(大凡)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은 그릇이 작다'라고 표현에서 얻은 교훈을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경전(經典)에도 ‘자신이 준비한 것만큼 소중한 그릇으로 불려 사용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자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공이 스승인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기에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의 대답은,
"너는 그릇이다."
자공이 다시 스승께 또 물었습니다.
"그릇이라면 중요한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것인데, 그릇 중 과연 어떤 그릇입니까?"
공자가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호연(瑚)이다."
호연(瑚)이란 옛 종묘제사에서 기장과 피(血)를 담는 그릇으로 옥(玉)으로 만든 제기(祭器)를 말한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기(祭器)라 함은 중요한 그릇으로 취급했으니 자공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자가 제자 자공을 호연이라 말했다 한들, 그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쓰일 리가 만무(萬無)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비유로 말하자면, 누구나 다 같이 그릇입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말할 때 자공이 특별한 능력이 있고 남다른 면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자공의 존재가치(存在價値) 자체가 소증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제사에 쓰일 정도로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그릇입니다.
이를 확실히 하는 가르침중 인간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잘 말해준 곳은 경전(經典)입니다. 경전에 이르길 ‘한 생명은 천하(天下)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기 쉽게 그릇으로 비유(比喩)를 했지만 사실 그릇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는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대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큰일을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주인이 되어 필요한 자리에 쓸모 있는 그릇을 선택하여 적절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릇은 주인이 씻어 주고, 닦아 주고, 늘 깨끗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 스스로 씻고 갈고 닦지 않으면 정작 필요가 있을 때 제 용도로 쓰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릇을 통해 비유한 사람의 본질(本質)입니다.
이를 두고 ‘니체(Nietzsche)’는 'Das noch nicht Festgestellte Tier'(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動物)이라고 결론짓고 ‘Menschsein'(사람임)이 아니고 미래 완료형인 ’Menschwerden'(사람됨)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의 말을 이용하면 그릇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많이 다듬어야하며 변화시켜야하고 교정해야하는 그릇처럼, 인간 모두는 스스로 노력하며 만들어져 가는 그릇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큰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그대의 할 일은 이제 스스로를 가꾸어 가기위해 하루하루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역사에 쓰임 받는 인재가 되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하는 숙명적
(宿命的)숙제를 가지고 태어나 피할 수 없는 과제(課題)인 사람으로 완성해야만 합니다.
3. 스스로의 선입관(先入觀)과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대를 가장 괴롭히고 방해하는 것이 이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라는 사람이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패러다임((paradigm)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끔 신문 지상이나, 혹은 책에서 '패러다임'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된 단어입니다. 또 패러다임은 원래 과학 용어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모델, 관념, 시각, 사고의 틀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패러다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눈으로 보이는 감각을 말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이해한고 해석하는 관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간단한 방법은 지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지도의 지역(땅)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지도란 단순히 영토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는 그림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시카고 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갔다고 합시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니 이 지도는 디트로이트 지도였습니다.
인쇄가 잘못되어 시카고라고 씌어져 있던 거지요. 만약 이 엉뚱한 지도를 가지고 당신이 시카고로 여행을 갔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목적지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좌절감(挫折感,Frustration)을 맛보아야 하고 비효율적인 여행이 계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잘못된 패러다임이란 이와 같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금 행동하고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이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또 두 배 정도의 속도로 노력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당신을 단지 엉뚱한 장소로 빨리 데려갈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시카고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부지런함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또한 가는 도중에 장애물을 만난다면 그때는 당신이 갖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도의 정확성'입니다.
지도가 정말 옳은 것인지 우리는 100% 확신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지도를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우리는 잘못된 패러다임 외에, 아주 낡은 사고방식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대의 패러다임이 틀리고 낡은 것이라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중요한 업적은 연구자가 기존의 낡은 전통과 낡은 사고방식, 낡은 패러다임을 파괴함으로써 실현되었다고 말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대의 도전을 가장 빠르게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지도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방식에 치우쳐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세상은 다양하지만 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욱 다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도전은 새로울 수 있고 가야할 길이 보일 것입니다.
4. 소용가치(所用價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무수히 많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요즘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면 지금까지 작성한 원고의 단어 숫자, 총 글자 수의 통계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 알고 있는 대로 컴퓨터가 원고의 교정, 맞춤법까지 다 해주는 기능을 하니 맞춤법 틀리는 것이 습관화 돼있는 필자에게는 대단히 유익한 컴퓨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문장은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단어에서부터 그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단어, 뜻을 강조하거나 정확한 전달을 위해 사용되는 단어 등, 역할과 기능에 따라 쓰임새가 각기 다른 단어의 군(群)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장,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 행복, 하게, 살아야, 한다. 무수히, 많은, 단어, 사용…등 각기 의미를 가진 단어들 이 분석되나, 이 단어들을 나열해 봤자 문장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의 완전한 조합을 위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우리말의 품사 중 조사(助詞)입니다. 조사(助詞)는 기능에 따라 격조사, 접속 조사, 보조사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조사는 혼자서는 어떤 기능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의무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아니 우리말과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조사 따위가 뭐가 중요해'라고 되물으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의 조사는 그 존재감이 불투명하지만 전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불필요한 것은 절대로 없다'라는 철학적 견해를 '조사'를 통해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글인 한자(漢字)에서 또한 언(焉), 호(乎), 야(也)'등의 어조사(語助辭)가 있습니다.
이들 어조사는 실질적인 뜻은 없고 다만 다른 글자의 보조 역할로만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글귀를 성립시키고 말을 만들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글자들이 곧 어조사(語助辭)들 입니다.
이런 면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리를 할 때도 주된 재료와 부재료가 있습니다. 김치를 담그더라도 주재료인 배추를 그대로 장독에 담근다고 해서 아무도 그 김치를 맛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배추를 적당히 잘 저며 그 속에 소금과 젓갈, 고추 등으로 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맛을 돋울 수 있는 숙성기간이 빠질 수 없습니다.
간이 안 된 음식은 아무리 모양새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맛있게 먹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양념의 힘입니다.
소홀히 여겨질 수 있는 조사와 양념을 같은 맥락에서 너무나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맹탕 소고기국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소금간이 적절하게 들어 있는 김칫국을 먹을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조사, 즉 양념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취미생활로 한국의 장마당을 소재로 촬영을 오래해온 탈랜트 겸 연극배우인 박 0선생의 작품 사진이 카페에 걸려있습니다.
그 작품 속에는 중년을 넘어선 여인 세 사람이 보이는데 한 여인은 물건을 사기위한 여인으로 뒷모습이 보이고 한 여인은 물건을 팔기위해 물건을 담고 있는, 즉 물건 주인이고 마지막 여인은 간이로 만든 평상(平床)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기위한 손님여인이나 물건을 파는 여인보다는 뒤에 앉아 두 여인의 사고파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매우 평온한 얼굴로 인상에 남습니다.
바라보는 그 여인의 눈빛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보여 아주 인상에 남았었지 그 작품의 제목은 ‘시선(視線)’이었습니다.
'시선'이란 제목이었지만, 그 사진 속에서 매우 소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평온한 시선은 질투도 없고, 흔한 심술도 없고, 주인여인의 매매행위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모습은 세상에서 그리 흔한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는 세상의 시선으로는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조사(助詞)가능을 잘하면 그대는 지금의 사회, 조직,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우주를 통틀어 필요 없는, 쓸모없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늘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성실하며 충실한 사람만이 자신의 몫을 하게 돼 소용가치가 있는 사람이 됩니다.
5. 배가 침몰(沈沒)해 그대로 죽기 보다는 살기위해 노(櫓)를 잡고 젓는 것이 현명하다.
‘율리어스 케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 동맹을 맺고 콘술이 되어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는 갈리아전쟁을 수행)
즉 ‘율리어스 케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입니다. 귀족출신이었으나 평민당에 접근하여 ‘폼페이우스’ 등과 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 로마공화정 말기에 3명의 실력자가 동맹하여 국가권력을 독점한 정치형태.)를 행한 사람으로 후에 이집트를 원조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율리어스 케사르’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가졌다는 혐의로 암살 당 했습니다.
공화제를 옹호하는 ‘부르터스’와 ‘카시우스’의 음모(陰謀)와 계략에 의해서였습니다.
암살 당하기전 어느 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거대한 폭풍우가 일면서 순탄하기만 했던 항해가 난관에 부딪치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마지막이야’ 하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심지어 평생을 배와 더불어 살아온 늙은 사공(沙工)까지도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은 살려 주소서." 하며 하늘만 우러러 볼뿐이었습니다.
‘율리어스 케사르’는 이 광경을 노기(怒氣)에 찬 얼굴로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벼락 같이 사공을 꾸짖었습니다.
"노를 잡아라! ‘율리어스 케사르’가 타고 있는 한 아무 걱정 없다. 배가 침몰했다니 말이 되는가?" 물론 배는 아직 침몰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율리어스 케사르’가 폭풍우에 휘말려 죽었다는 얘기는 그 어떤 역사책에도 전해지지 않고 후에 암살당했으니 확실히 배 사고로 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순간 ‘율리어스 케사르’의 당당한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늙은 사공은 노를 젓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까요? 벌벌 떨면서 계속 '하나님'만 찾으며 기도만 하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율리어스 케사르’는 그때 그 바다에 묻혀 후세 까지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율리어스 케사르가 타고 있는 한 아무 걱정 없다.' 라는 이 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 있는 표현이고 자신감 있는 자세였습니다. 내가 있는 한 그 어떤 두려움과 고난도 헤쳐갈수 있다고 그는 자신감과 의지였습니다.
그런 자신감과 당당함이 ‘율리어스 케사르’를 로마의 영웅이 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 속에 등장한 숱한 영웅들을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강한 신뢰(信賴)'입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실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역시 가장 큰 두려움을 경험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의 치열했던 베트남전쟁에서 입니다.
한국군 전투병중 한사람도 비열하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전통이고 한국군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사살한 적 장교가 소지하고 있는 문서에 ‘가능한 한국군은 피하라. 아군(我軍)이 유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먼저 한국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한 걸보면 한국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케 했습니다.
사실 당시 한국군은 모두 용맹스러웠습니다.
용맹스럽게 전쟁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성장해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 이억 만 리 먼 나라에 와서 억울하게 전사(戰死)당할 이유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당시 북한의 공작원, 전술교관이 파견돼 월맹군을 지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포착되고부터는 ‘결코 패전(敗戰)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義務感)과 국가의 충성감(忠誠感),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自信感)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전쟁은 두려운 것입니다.
순간에 생명을 아사가기도하고 평생 불구자로 만들어 놓기도 하는 매우 두렵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율리어스 케사르’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진대 그가 과연 엄청난 자연 재해 앞에서 조금의 두려움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어려운 때에 당황하거나 막힘이 없이 위기의 순간 "노를 잡아라!" 라고 외친 ‘율리어스 케사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다면,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조금 더 뛰어났을 뿐이고 늘 정리된 생활신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자신감은 천재지변(天災地變)도 이길 수 있다는 '오만(傲慢)'이라기보다는 고난에 맞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만이 가지는 강한 의지에서 기인(起因)된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속담에 보면 "Self trust is first secret of succes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自信)은 성공의 으뜸가는 비결이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아무나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자신감(自信感)만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으나 위의 속담에서도 말했듯이 자신감은 으뜸가는 비결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 한다는 것은 조리가 맞지 않아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즉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입니다.
‘율리어스 케사르’의 태도를 마음에 담아 두면 매우 유익합니다.
‘율리어스 케사르’가 있는 한 아무 걱정 없이 파도를 견디고 나온 배와 일행이라면, 이런 고백을 했을 겁니다.
“그대가 있는 한 헤쳐 나갈 수 없는 절망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그대는 그대의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 있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6. 선택(選擇)을 스스로 해야 하고 자신이 결정(決定)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責任)도 자신이 져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리스 신화 중 영웅인 ‘헤라클레스(Heracles)’는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아버지 ‘안피트리온’에게서 전투용 마차 타는 방법을 배웠고, ‘아우톨리코스’에게 서는 씨름을, ‘에우리토스’에게 서는 궁술(弓術)을, ‘카스토르’에게 서는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루는 ‘리오스’가 어린 ‘헤라클레스’를 꾸짖자 ‘헤라클레스’는 그를 때려 쓰러뜨렸습니다.
처음부터 이를 목격한 아버지 ‘안피트리온’은 아들의 격렬한 기상에 놀라 ‘키타론 산’으로 보내어 목장에서 소 떼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가 ‘키타론 산’에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덕(美德)과 쾌락(快樂)이 각자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쾌락이 변한 여자의 모습이 훨씬 더 유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위와 향락을 버리고 미덕(美德)을 따르며 노력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라크로스의 선택’입니다.
그 이후 그가 ‘키타론 산’을 내려왔을 때는 키가 육척이 되고 몸은 강한 근육으로 팔 힘은 따를 사람이 없고, 온 정기(旌旗)는 불길처럼 타고, 활쏘기와 창던지기에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 뛰어난 솜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단 한 가지만을 선택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모두 조금씩 누리기를 바랄 때 우리는 그 모두를 다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근간 우리주변에 학문으로 평생을 지낸 사람이 또 하나의 권력에 욕심을 내서 선택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천재(天才)도 두세 가지를 성공하는 예는 없습니다.
보이는 미래 실패자들이 TV화면을 장식하고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은 탁월한 능력자라는 거만(倨慢)과 오만(傲慢)이 머리끝까지 차고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해온 한 가지 선택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은 그 누구도 아닌 그대가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실존주의(實存主義)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하는 사람의 존재는 가능성존재(可能性存在, Möglichsein)라고 말함이 이 의미입니다.
사람은 평생 수많은 사건과 일중에 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것이든지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을 통하여 창조를 가져오며 자신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선택도 하지 못한다면 결과가 없음은 확실하고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반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슬기로운 선택’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헤라클레스’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던져진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자신에 대한 도전에서 선택을 잘했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 밑에서 유혹을 당했지만 자신을 지켰기에 성불(成佛)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40일간의 금식 중에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 선택은 그대가 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선택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고 그 결과는 바로 그대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괜찮겠지, 다음에 하고 이번엔…등의 하루하루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오늘'로 끝나지 않고, 그대의 '평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택과 결정에는 반드시 의무(義務)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무가 없는 자유란 더 무서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의무 없는 자유의 끝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공허함을 가득안고 최후를 맞이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이성(理性)의 자유(自由)가 이것입니다. 창조주(創造主)가 준 특혜이자 올가미입니다.
7. 지필지기백선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 그런데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건가?
知(알지), 明(밝을 명).
우리는 이 두 한자를 볼 때, 그저 知와 明으로 읽거나 표면적인 뜻을 이해 할 뿐입니다.
안다는 것과 밝다는 것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거나, 혹은 난해한 영어 독해를 할 때 우리는 '알려고' 노력 합니다.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뜻 그것이 해결되면 우리는 노력하고 힘들인 것만큼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을 사람의 머리가 '밝아지는'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가정(假定)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우리의 마음은 답답한 어둠속을 헤매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이런 바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조차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지를 모르고 지냅니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상대방, 다른 사람의 정황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알려고 노력을 하지만 가장 소중한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
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메난드로스(Menandros BC 342~BC 292)’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격언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알라’ 라고 하는 말이 보다 더 실용적이다." 라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를 아는 것' 이나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쉽게 단정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나만 알아서 될 일도 아니고 타인만 알아서 될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중국의 노자(老子)는 두 한자로 이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남을 아는 것은 知(지)요, 나를 아는 것은 明(명)이다’
밝다는 것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드러나는 실체를 말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것이든 자신에게 느껴지는 밝음은 확신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老子’의 말은 '자기를 아는 것은 남을 아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소크라테스’가 직설적(直說的)으로 말했다면 ‘노자’는 은근하게 돌려 동양적 어법(語法)의 특징인 간접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明(밝음)이라했습니다. 즉 자기를 등불로 하고 자기를 의지할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둡고 막막한 세상의 삶의 여정에 등불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부모님도 친구도 선생님도 등불이 되어 주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등불만 될 뿐입니다.
그 무엇도 그대의 등불로 평생을 살아 주지 못합니다.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 의할 것 하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만이 자신을 알 수 있고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밝게 모든 걸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간혹 우리는 멀고도 먼 인생의 길에서 밝은 등불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작은 책(冊)일 수도 있고, 위대한 역사 속 위인(偉人)일수도 있고, 내게 도움을 주는 옆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영향을 준 어떤 한 존재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그대를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정진(精進)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입니다.
그 노력의 과정에 그대는 잠시 다른 낯모르는 이의 등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 타인에게 불씨가 되는 작은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당신의 빛으로 누군가에게 밝음을 준수 있다면 말입니다.
8. 자기관리(自己管理)는 성공적으로 살길 원하는 사람의 필수적 과제(課題) 이고 절대적인 지혜(知慧)이다.
중국 고사에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춘다는 말로써, 무슨 일을 하든지 조건이 나은 사람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조건이 좋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출세하는 데 분명 유리합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 사례로 이사(李斯)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의 생활이나 일의 진행이 여러 가지 곡절과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함을 나타나고 순탄치만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사(李斯)는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젊어서 군에서 낮은 벼슬아치 노릇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쥐 두 마리를 보고 처세의 원리를 깨쳤습니다. 변소에 있는 쥐는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여유 있게' 지내며 사람이 나타나도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사(李斯)는 두 마리의 쥐를 보고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 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라며 출세를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다짐합니다. 곧바로 진나라로 향한 그는 당시 승상(丞相)인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즉 집사가 됐습니다. 이후는 출세가도였습니다.
‘진 시황’의 생부이기도 했던 여불위(呂不韋)가 추천해 진시황(秦始皇)을 만난 그는 막강한 진나라에 눌려 바짝 엎드려 있는 다른 6개국이 힘을 합쳐 합종(合從)하기 전에 그들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은 그를 궁궐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관리의 우두머리인 장사(長史)로 삼았습니다.
절대 권력자의 신임을 얻은 이사(李斯)는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뇌물도 주고, 협박도 하며, 이간책도 쓰는 등 갖은 계략을 동원하여 결국 객경(客卿)이 됩니다. 그 사이에 자신을 찾아온 한비자(韓非子)도 제거하는 무자비함을 서슴없이 드러냈습니다. 한비자는 그와 함께 순자(荀子)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한 동문(同文)이었습니다.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試圖)도 많았습니다. 이사(李斯)는 기존 세력들이 자신을 내쫓으려 진 시황(秦始皇)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진 시황(秦始皇)에게 올렸습니다.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라는 간축객서의 한 구절을 설명하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음으로 그 높이를 이룰 수 있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음으로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음으로 해서 그 덕망을 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국토는 사방으로 끝이 없고, 백성에게는 본국, 이국(異國)이 따로 없으며, 사시사철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귀신이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오제와 삼왕께 적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나라가 부강한 이유는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덕분이라며 비유적으로 진시황(秦始皇)을 추켜 세우고 개방인재론(開放人才論)을 설파했습니다. 간축객서(諫逐客書)이 글로 그는 오히려 권력의 주류로 급부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민간의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儒生)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가혹한 조치로 인해 사상과 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면서 진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사람의 마음대로 될 수만 있습니까? 제비나 참새가 지붕이나 처마 밑을 떠나게 되면 매나 송골매에게 잡혀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이치(理致)입니다.
나보다 강한 자는 어디든 존재하는 법입니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는 이사(李斯) 못지않은 권력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으니, 잔뜩 몸을 움츠리면서 호시탐탐(虎視眈眈) 기회를 엿보던 환관 조고(趙高)였습니다.
50세에 객사한 진시황을 이어 영원히 재상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사(李斯)의 야심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조고(趙高)는 회유와 협박이라는 전략적 카드를 쓰며 이사(李斯)를 공격해왔습니다.
결국 이사(李斯)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서위조 사건에 연루되면서 허리가 베이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사(李斯)보다 강한 자는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몽염(蒙恬)장군이 아니었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건축에 혁혁(奕奕)한 공을 세워 진시황의 총애를 받은 몽염(蒙恬)이 이사(李斯)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엉뚱하게도 평소 "궁궐에서 잡일이나 한다." 던 환관 조고(趙高)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사(李斯)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이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탄식했지만 결국 그에게 닥친 비극도 자신이 만들고 그로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 역시 자신에게서 나온 계략이었습니다.
좋은 자리, 권력이 있는 자리,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몰락(沒落)을 예견(豫見)하는 자는 매우 드뭅니다. 누구든지 권세를 가지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거기에 탐닉(耽溺)되어 오만방자(傲慢放恣)해지게 돼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겸손의 미덕을 쌓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살아가는 자기관리가 절실(切實)합니다.
9.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比較)하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무시(無視)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비교하고 있는 안 좋은 습관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으나 안 좋은 버릇을 익숙하게 합니다.
반대로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서 비교당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머리가 똑똑해’, ‘그 사람은 재주가 정말 많아’, ‘저 사람과 같이 되고 싶어’ 등등 여기 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비교가 자기 비하(卑下)로 흐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난 역시 안 돼. 나는 왜 이럴까? 난, …….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아’너무 과장되게 말한 것이라고 저항감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자기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는 왜 그리도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은지 어느 때는 깊은 절망감(絶望感)에 접시 물에 빠져 서라도 죽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대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도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바로 그대를 지켜보면서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며 그대가 느낀 실망감을 느끼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어느 한순간 절망에 빠져 그대와 똑같은 고민으로 한숨을 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자만(自滿)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가 남보다 열등(劣等)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다른 어떤 점은 남보다 뒤처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못난 사람도 다른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남보다 뛰어날 수 있고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재능(才能)은 크게 보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어느 누가 다소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은 비록 그 많은 능력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 볼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그대는 아직 그대의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때가 허다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표출(表出)되기도 하고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위인(偉人)들이 "재능이란 오랫동안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노력의 선물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과연 재능이란 선물을 받기 위해 현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전체 삶을 걸고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타인(他人)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장점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부러워할 것만이 아니라 그저 보이는 대로 인정해 주는 인격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그대는 아직 표출되지 않은 그대의 숨겨진 재능을 발굴해 낼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하여 지금까지 무관심해서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미 다른 사람은 그대의 그 재능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 입니다.
그대는 누구보다 잘난 사람입니다. 살아갈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울프(T.C. Woolf, Virginia)’라는 사람은 <거미줄과 바위>라는 글어서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사람이 재능을 갖고서도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는 인생에 실패한 것이다. 있는 재능을 절반밖에 발휘하지 못하면 부분적인 실패이다. 만일 모든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터득하였다면 그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고, 거기에서 얻는 만족과 승리감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대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항상 그대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아직 그대의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뿐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표출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0.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자신이 최고(最高)라고 자랑을 해대니 바다에 사는 자라(團魚)는 할 말이 없어 한다. 그러데 자라가 입이 없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옛날에는, 마을에서 흐르는 실개천 제일 큰 강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필자는 초등학교를 전쟁 후 집에서 6km 떨어진 로마 가톨릭 ‘풍수원 성당’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풍수원 성당’은 오래전 종교박해(宗敎迫害)를 피해 산골에 도피하여 오지에 성당을 짓고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지은 성당으로 그 당시 보기에는 매우 웅장했고 큰 성당이었습니다.
초등생 때 성당 안을 청소하려면 너무 커서 땀을 흘리며 했던 적이 있었는데 수십 년 지나 얼마 전에 가보니 어렸을 때 그렇게 컸든 성당이 초라하게 작을뿐더러 ‘이렇게 작은 성당을 왜 크게 생각했지?’ 하는 황당함도 갖게 됩니다.
깊은 산골에 살든 필자에게 붉은 벽돌의 성당과 높은 종탑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로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초등학교 1학년, 여섯 살 때 본 건물치고는 가장 큰 건물 이었습니다.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 ‘장자(莊子. BC 369-BC 289년경)’의 ‘추수(秋收) 편’을 보면 개구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구리가 동해(東海)의 자라를 보며 자랑을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즐겁단다. 나는 우물 시렁 위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우물 안에 들어가서는 부서진 벽돌 가장자리에서 쉬기도 해, 또 물에 들면 겨드랑이와 턱으로 물 위에 떠있기도 하고, 발로 진흙을 차면 발등까지 흙에 묻히기도 하지, 저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 따위야 어떻게 내 팔자에 겨누기나 하겠니? 또 나는 한 웅덩이의 물을 온통 혼자 차지해서 마음대로 노니는 즐거움이 지극하단다. 왜 자라 너는 가끔 놀러 오지 않는 거야?"
드넓은 대해(大海)를 오가는 자라가 개구리의 얘기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의 환경(環境)과 능력(能力)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크고 넓은 대해(大海)를 경험한 자라의 생활과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자랑을 한 것입니다.
‘자신감(自信感)을 갖는다는 것은’ 무턱대고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교만에 빠지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대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강은 너무나 작은 실개천(小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그대의 경험하지 못한 바다는 너무나 넓고, 어쩌면 평생에 한 번 그곳에 도착해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산 정상에 오르고 보니 더 큰 산의 언덕에 지나지 않더라."라고 한탄한 옛 조상의 말처럼 우리는 한도 끝도 없는 정상을 향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의 능력도 기회가 없다면 소용이 없다”고 프랑스의 군인이자 제1통령, 황제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말했습니다.
개구리가 바다에 가보지 않았을 뿐이지, 바다에 던져졌다면 또 어떤 삶을 살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개구리가 바다에 갈 기회가 있다면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바다에 가서 헤엄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민물에서 살던 개구리라 짠 바닷물에서 숨 쉴 수 있는 적응력(適應力)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바다고기의 사냥에서 생존을 위해 도망칠 수 있는 기술도 익혀야 하고, 작은 몸으로 거대한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체력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개구리가 바다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기서 교훈을 얻기 위해 가정(假定)을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인 ‘스탕달(Stendhal, 1783-1842)’은 "산 속에서 보물을 찾기 전에 먼저 네 두 팔에 있는 보물을 충분히 이용하라. 그대의 두 손이 부지런하다면 그 곳에서 많은 것이 샘솟듯 솟아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유교(儒敎)의 근본문헌(根本文獻)이고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논어(論語)에 보면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벼슬자리가 없음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벼슬자리에 설 능력이 없음을 근심할 것이고, 자기가 알
려지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알려질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기를 바라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대의 팔 안에 이미 보물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꺼내 크게 만드는 것은 그대 몫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동네의 실개천에 만족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바다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재의 뛰어난 능력도 노력이라는 기회가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것이고 이를 안내해줄 수 있는 선생(先生)이 필요한 것입니다.
11. 도망치는 것은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辨明)하지만 사실은 비겁(卑怯)하기 때문이다. 그는 용기(容器)를 말했지만 늘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겁한 남자를 말할 때 조롱할 때 가끔 사용하는 말인데,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연인사이로
잘 지내다가 하루는 골목길에서 불량배를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여인과 교제하는 남자가 보기 싫었던지 여자를 희롱하기 시작을 했고 이런 것이 싫은 여자는 자신의 연인 남자 뒤로 피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보호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당황하며 머뭇거리더니 별안간 여자를 두고 달음질 쳐 도망간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본 불량배는 그래도 양심이 있었던지 “야~ 저런 놈은 사귀는 너도 참 형편없는 여자다. 연약한 여자를 두고 도망가는 비겁한 놈을 따라 다니느냐.” 라고 비웃으며 가버렸고, 순간 상황에 황당한 경우를 만난 여자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도망갔던 남자연인이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 여자에게 다가오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여자에게 “경찰 부르러 달려갔는데 별일 없지? 나 혼자라도 몇 녀석은 물리칠 수 있는데 손 쓸 필요 없이 경찰을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달려갔었어! 그런 녀석들은 법으로 해결해야해.”
“자기가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서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손(不遜)하다. 그러나 자기의 가치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굴(卑屈)하다.”
이 말은 그리스의 철학자이고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앞두고 행동하지 않을 때, 혹은 그것을 피하고 도망칠 때 우리는 비겁(卑怯)하다고 합니다.
어떤 존재 앞에서 비굴해지는 자신을 느낄 때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리스도텔레스(Aristoteles)’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늘 비굴함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허다합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뭣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거대한 벽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절망(絶望)이라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 벽을 넘을 자신감은커녕 노력하기도 전에 먼저 포기(抛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일지라도 모든 문제점을 자신의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변화하지 않는데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보지 못함을 절망하고 그 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계속 절망한다면 그의 인생은 소경이기 전에 마이너스 인생입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청각을 발달시키고 촉각을 발달시켜 손가락으로 점자책을 읽는 다면 그의 인생의 방향은 플러스를 향해 돌진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 손보다 왼손이 부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자꾸자꾸 왼손을 쓰다보면 어느새 왼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개발하기에 따라 무한대로 발전한다는 것은 새삼스레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결점이나 부족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다른 능력을 발휘하여 그 부족한 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생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 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妙味)요 과학이며 철학입니다.
그대가 지금 열심히 걷고 있는 방향이 어쩌면 마이너스의 방향일지 모릅니다.
12. 가난한 것은 불편(不便)할 뿐이지 불행(不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난의 불편함은 가장 큰 고통(苦痛)이고 좌절(挫折)이다.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는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해서 몹시 가난했던 시절에도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가난하였던지 고양이조차도 피카소에게 먹이줄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먹을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고양이가 어디에선가 끌고 온 길게 이어진 소시지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피카소가 나누어 먹었다는 일화(逸話)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리아(Austria)의 음악의 명장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도 피카소 못지않게 늘 돈이 궁했습니다.
그는 돈이 한 푼도 없으면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창밖에 걸어 두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말하기 구차하고 번거로워 '나는 외출을 하지 못한다. 호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으니 나를 괴롭히지 말라'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 ‘바우에른펠트’가 극장 옆의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슈베르트도’가 들어오자마자 밀크 커피 한잔과 빵 여석 개를 먹었다. 이를 본 친구는 ‘슈베르트도’의 엄청난 식욕에 깜짝 놀랐습니다.
‘슈베르트’도 거북한 얼굴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보게, 실은 내가 오늘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그러네." 그러자 친구는 ‘슈베르트도’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습니다.
"실은 나도 자네 오기 전에 밀크 커피 한잔과 여섯 개의 빵을 먹었지."
‘슈베르트도’가 깜짝 놀라 되물었습니다.
"자네도?"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서로 가난한 웃음 교환했습니다.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인 ‘장자(莊子. BC369-BC289년경)’가 어느 날 군데군데 꿰맨 베옷을 입고 해어진 짚신을 신고 위나라의 혜왕을 찾아갔습니다.
왕은 ‘장자’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그처럼 피폐(疲弊)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장자’는 "이것은 간편한 것이지 피폐(疲弊)한 것이 아닙니다. 선비로서 도덕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피폐한 것이지만, 옷이 해어지고 신이 뚫어진 것은 가난한 것이지 피폐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서 왕이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선비가 있었는데, 신라시대의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살았고 대악(碓樂)이라는 별명을 얻은 거문고의 대가이고 방아타령을 작곡한 ‘백결(白結선생. 414년~?)’ 어찌나 가난한지 옷을 백 군데나 꿰매 입었다고 합니다.
섣달그믐에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백결 선생 집에서는 저녁거리조차 없었습니다.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 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를 부러워하는 아내에게 백결 선생은 거문고로 방아 타령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들어진 곡이 지금에 유명한 ‘방아타령’이라고 합니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2)’는 고양이가 물어온 소시지를 먹었지만 지금은 현세에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엔 그의 가난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감미로움과 부드러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장자’의 위대한 사상은 여전히 추앙받고 있습니다.
‘백결(白結)선생’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거문고로 풍류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들에게 가난은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아닌, 생활의 불편함으로 여겨졌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대는 바로 유명해지기 전의 피카소나 슈베르트도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정도의 노력이 아닌 최대한의 노력을 했습니다. 매일매일 그림 그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음악을 위해 목숨을 걸다 시피 했습니다. 그대가 그들처럼 노력하고 있다면 지금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를 그대의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대 자신의 결정이고 그대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13. 대왕(大王)을 만난 ‘디오게네스’가 유일(唯一)하게 부탁한 말은 “지금 나에게 비취는 태양의 빛을 막지 말아주소서”
필자가 철학에 심취(心醉)됐든 청년 시절에 많이 인용하는 말입니다.
기원전 400년경 그리스의 코린트라는 마을에 ‘디오게네스(Di0genes. BC 400~BC 323)’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옷 한 벌 주머니 하나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늘 빈 술통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사색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 무렵 마케도니아의 ‘大王 알렉산더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는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원정을 떠나려고 할 때였습니다. 온 나라가 페르시아 원정의 출발을 경축하기 위해 들떠 있는데 ‘디오게네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大王은 지나가는 길에 시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발견하고 멈춰 “무엇이든 필요한 게 없는가?” ‘大王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만, 지금 햇볕을 쬐고 있으니 저에게 비취는 태양의 빛을 막지 말아주소서." 이 말을 들은 ‘大王 알렉산더’는 격노(激怒)해 벌하기 이전에 오히려 감격해서 "내가 만약 ‘알렉산더’가 아니면 ‘디오게네스’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 멋있는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학자(學者)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배안에 한 학자가 타고 있었습니다. 학자는 같은 배 안에 타고 있던 상인(商人)들로부터 서로 인사하고 대화의 시작일 때 하는 통상적(通常的)인 말로 "당신은 어떤 물건을 팔고 있소?"라는 물음을 받았습니다.
학자는 "내가 파는 물건은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보관도 매우 간편한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학자의 대답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상인들은 그 학자가 잠들어 있는 틈에 그의 짐을 조사 했습니다.
그러나 책 몇 권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모두가 그를 아무것도 없이 입 만 가지고 산다고 비웃었습니다. 그 이후 오랜 항해가 계속되었는데 그만 배가 난파(難破)됐습니다.
모두가 짐을 잃고 가까스로 육지에 닿게 되었습니다. 학자는 그 마을의 촌장(村長)에게 가서 대화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촌장은 그 마을의 어느 학자보다도 그가 뛰어난 지혜와 지식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학자와 일행을 극진하게 접대했습니다.
이것을 본 상인들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선생의 말이 역시 옳았습니다. 우리들은 물건을 잃어버렸지만 선생이 파는 것은 선생이 살아 있는 한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는 것으로 역시 선생의 물건이 가장 뛰어나고 좋은 것이 사실이외다."
‘디오게네스’가 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과 이름 없는 학자가 어려울 때 귀한 대접을 받으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감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타인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숙련된 선장은 폭풍우를 만나면 쓸데없이 폭풍우에 저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절망해서 풍파에 배를 맡기지도 않습니다. 항상 확고한 자신과 성실을 가지고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 활로를 여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곤란을 돌파하는 자신감이라고 ‘맥도널드(McDonald's)’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은 -
첫째 자신감(自信感)을 갖는 것이고,
둘째 그러한 자신감에 걸 맞는 실력과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외형만 그럴듯한 선장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선장이 되어야만 인생이라는 뱃길을 순탄하게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문필가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멋진 말을 했습니다. “자신(自信)을 가지면 타인의 신뢰도 얻는다.”(If you have yourself, you get the trust of others.)
14. 개와 닭 흉내 내는 사람까지 예우(禮遇)하고 인재(人才)를 아껴 목숨을 지킨 맹상군(孟嘗君). 사람을 아끼는 것이 인애(仁愛)이고 인화(人和)이다.
맹상군(孟嘗君, ? -기원전 279년)은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서, 전국 시대의 사군자(戰國四君)의 한 사람이은 제나라 종실 대신 전영의 서출입니다.
맹상군이 어느 날 후궁들이 아름다운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고 선비(眞儒)들은 변변한 바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하도록 냉대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찾아가 비판하며 지식인을 예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맹상군 열전)며 엄청난 재물을 인재 양성에 쏟아 식객을 3000명이나 거느릴 정도였습니다. 식객 중에는 닭 울음소리를 내거나 개 짖는 소리를 내는 자들도 있었으니 세상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맹상군의 인물됨은 서쪽의 강국 진나라에도 알려졌습니다. 소왕이 맹상군을 손에 넣으려고 자신의 아우(경양군)와 맞바꾸자는 제안을 할 정도였습니다.
맹상군이 진나라로 가려고 했지만 호랑이나 이리 같은 진나라에 이용되지 말라는 소대(소진의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여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시 맹상군을 보낼 것을 요청하자 제나라 민왕은 그에게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로 만든 가죽옷 두 벌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도록 했습니다.
소왕이 즉시 맹상군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측근들이 '그는 제나라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소왕은 생각을 돌려 그를 가두고 계략을 짜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맹상군은 사람을 시켜 소왕이 아끼는 첩에게 석방시켜줄 것을 청하도록 했습니다.
소왕의 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맹상군이 가지고 있는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로 만든 가죽옷을 갖고 싶습니다."
이때 맹상군은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로 만든 가죽옷을 한 벌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값은 천금이나 되고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나라에 와서 소왕에게 이미 바쳤고 또 다른 옷은 없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맹상군은 자신의 식객들에게 대책을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맨 아랫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개 흉내를 내 좀도둑질을 하는 자가 슬며시 일어나 자신이 여우 가죽옷을 구해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는 개 흉내를 내 진나라 궁궐 창고 속으로 들어가서는 소왕에게 바쳤던 여우 가죽옷을 훔쳐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은 이것을 진나라 소왕의 첩에게 바쳤습니다.
소왕의 첩이 맹상군을 풀어달라고 소왕에게 간청하자 맹상군은 풀려나게 됐습니다.
이에 맹상군은 즉시 말을 몰아 제나라로 내달렸습니다. 국경 통행증을 위조하고 이름과 성을 바꾸어 빠져 나오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한밤중 함곡관(函谷關)에 다다랐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뒤로 진나라 소왕이 보낸 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는데 밤중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함곡관까지 왔지만 국경의 법으로는 첫닭이 울어야 객들을 내보내게 돼 있었습니다.
맹상군은 뒤쫓아 오는 자들이 닥칠까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식객 중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자가 일어나 닭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근처의 닭들이 다 같이 울었고 성문이 열렸습니다.
맹상군은 재빨리 통행증을 보이고 함곡관을 빠져 나왔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없는 법입니다. 인재(人才)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어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남의 눈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맡은 일에 충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그런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適材適所)에서 일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지혜자의 몫입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이란 말도 있듯이 무슨 재주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을 귀하게 보고 천하게 대접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15.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행복은 모두 경험한 행복이지만 모두 잊어버렸든지 미처 발견 못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행복이란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교육을 받고 경력을 많이 쌓은 다음에 좋은 직장생활을 하고 남부럽지 않은 결혼을 하고 평안한 가정을 이루어 사람들에게 신망 받는 사람이 되는 거야.' 라고 합니다.
거기에 돈이 많고 멋진 옷, 좋은 집, 멋진 승용차와 같은 것이 있다면 행복의 가치는 더 높게 매겨질 것입니다.
옛 성인(聖人)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행복이란 자신의 내면이 만족하는 것이다. 좋은 집을 가지고도 불행할 수 있고, 하루에 한 끼를 먹어도 마음이 편하면 행복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 가끔 게으름을 피우거나 불평을 하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지금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되니까 편하고 행복 한 줄 알아!'
‘헤세(Hermann Hesse)’는 행복에 대해 무어라 했을까요.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의 명작을 남긴 그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유년의 한때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열 살이었을 때, 그는 여느 때와 전혀 다름없이 눈을 떴습니다. 아침이었고, 높은 창을 통하여 이웃집의 지붕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고 합니다.
막 잠에서 깬 순간, 그는 무엇인지 새롭고 훌륭한 것이 생기기나 한 것처럼, 비로소 아름다운 생활이 그 가치와 의미를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어제의 자신도 잊어버리고 내일의 자신도 잊어버린 채 오로지 오늘의 '행복' 에만 부드럽게 둘러싸여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의 작은 침대에서는 넓은 세계가 보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름다운 하늘과 이웃집의 기다란 지붕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붕의 경사면에 여러 가지 색채가 어렴풋이 떠돌고 있었고, 단한 장의 푸릇푸릇한 유리기와가 붉은 진흙 기와 사이에서 생생해 보였다고 합니다.
마치 푸른 하늘과 갈색 지붕과 붉은 기와들이 서로 웃고 장난치듯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것들과 같이 ‘헤세’ 자신도 시작되는 아침의 여운을 즐기며, 침대에 그대로 누워 창밖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정경(情景)에 흠뻑 취해 버렸을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열 살 때 잠에서 막 깨어나 푸른 하늘을 봤던 그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그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헤르만 헤세’는 워낙 뛰어난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것 따위를 보고 행복해 하겠지.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
하지만 우리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헤르만 헤세’가 열 살 때의 그 느낌을 평생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의 가슴 한편에는 유년시절, 혹은 초등학교 시절, 혹은 지금이 순간 무언가 가슴에 강열하게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대의 뇌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행복했던 순간이 오롯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 그것을 꺼내어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그대는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라는 옛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그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감성(感性)이 활달히 살아 활동하는 사람은 늘 행복한 순간과 역사(歷史)들을 가지고 살아가며 감격하고 즐거워하곤 합니다.
그대가 이런 행복을 원한다면 순수(純粹)한 감성(感性)과 감정(感情)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의 힘들고 어려움을 '작은 행복'으로 위로하면 마침내 현실의 행복이 그대에게 비둘기처럼 날아들 것입니다.
16. 그대에게 다른 것보다도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인격(人格)과 개성(個性)이다. 이 요구는 사회와 국가가 하는 것이다.
너를 이 세상에 보낸 그날처럼
태양은 성좌(聖座)를 향해 인사하며 서 있고,
어느덧 너는 무럭무럭 자랐구나.
너를 이 세상에 보낸 그 법칙에 따라서
너는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너 자체일 수밖에 없고,
예언자들까지도 그렇게 말하였도다.
어떠한 시간이나 권력일지라도
약동하고 발전하는 낙인찍힌 이 형태를 바꿀 수는 없도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 271)’의 수제자 ‘메트로도루스(Metrodorus. BC 341-BC 270)’는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보다는 자기 자신 속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는 '인간의 세계란 무엇보다 그가 그 세계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는 것과, 각자의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시각에 따라 세계는 보잘것없고 재미없고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반면에 풍부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색다른 세계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서 부러워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정말 부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사건에 깊은 통찰력을 보이는 그 사람의 ‘이해력(利害力)’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똑같은 사건일지라도 세밀한 두뇌(頭腦)의 소유자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표현되는 반면, 천박(淺薄)하고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에게는 단지 평범한 세상사의 한 장면에 불과한 것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위의 ‘괴테’의 시(詩)를 다시 보면 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괴테’는 너무나 유명한 시인이자 문장가입니다. 그의 시는 실제로 있었던 흔한 일은 소재로 쓰인 것에 불과합니다. ‘괴테’뿐이 아니라 모든 유명한 문학가, 음악가, 화가들이 그러합니다.
세상에 널린 평범한 것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술작품을 보면서, 흔해빠진 세상사에서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해낸 예술가들의 상상력보다는 예술가들의 외적 모습이나 그들이 만난 특이한 경험과 재능만을 부러워합니다.
그 때문에 정열적인 사람은 현실 속에서 흥미진진한 갈등만을 보고,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은 무의미만을 보며, 우울한 사람은 비극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그것을 반겨두고 싶은 욕심에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의 날씨 변화, 카메라의 품질, 찍는 사람의 기술 등의 요인에 따라 ‘아름다운 경치’가 다르게 인화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름다운 경치라는 본질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보는 시각과 주변 환경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인격과 개성입니다.
‘괴테’가 노래하듯, 그대가 축복받으며 태어난 그날처럼 여전히 태양은 밝은 빛을 발하며 그대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대가 태어났을 때 기뻐하던 그대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면 그대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데에는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자연이나 모든 사물이 변화 발전하는 데에도 이유와 가치와 법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괴테’나 ‘쇼펜하우어’ 같은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지금보다 더 평안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약동하고 발전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대를 향해 힘껏 달려올 것입니다.
17. 절망(絶望)과 가난을 이기게 하는 방법은 성실(誠實)한 노력뿐 다른 방법이 없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宗敎), 학문(學問), 철학(哲學)은 모두 거짓말이다.
현실이 막막할 때 가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척 버겁게 느껴집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에서 대부분의 갈등과 문제는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필자가 아는 어느 선생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면서 생기는 고민의 90%는 돈 때문이다. 나머지 10%야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고민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돈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지금 가난하다고 평생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상황은 언제 어느 순간에 뒤바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요령(要領)과 신념(信念)에 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미래를 연구하고 노력하는 중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화가(畵家)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돈 한 푼 없이 아내와 파리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A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는 변호사 같기도 했고, 정치가 같기도 했습니다. A가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오랜만일세, 근데 무얼 하고 있나?”
“누구든 만나 백 수(sou:화폐단위)만 빌리려고 하네.”
화가는 부끄러운지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다네.”
A가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화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네가 왜?”
“아무튼 한잔 하세. 몇 잔 마시는 동안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지.”
A가 이렇게 말하며 화가와 아내를 데리고 카페테라스로 갔습니다. 세 사람은 일단 맥주 석 잔을 주문한 다음 이것저것 궁리를 짜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게 당장 돈이 생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A가 무릎을 치며 일어났습니다.
“좋은 일이 있어! 내가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게.”
그러고는 A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화가와 아내는 A를 기다리며 무슨 일일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A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카페가 문을 닫아야 할 때까지 A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화가 부부에게는 맥주 석 잔을 계산할 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이윽고 화가 부부는 카페 주인에게 호되게 욕을 먹은 뒤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몇 해 지난 어느 날, 신문을 읽고 있던 화가가 화들짝 놀라며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A라는 사람 생각나오?”
“잊을 수 있겠어요? 그때 카페에서 도망가므로 당한 망신을!”
“A가 장관이 됐다네.”
화가는 여전히 궁한 형편이라 용기를 내어 A를 찾아갔습니다. 장관이 된 A는 화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때의 맥주 값을 받으러 왔나? 이제 와서 맥주 값을 갚고 어쩌고 하자니 우습군. 우선 자네의 그림 한 폭을 사주겠네. 그리고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의 훈장 시상이 있는데 자네를 추천하겠네.”
이렇게 해서 화가는 훈장을 타게 됐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형편이 나아진 것은 물론, 작품 활동에만 매진해 이름을 떨치게 된 것도 물론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화가는 ‘모프라(Maxim Louis Maufra(1890-프랑스.)’, 장관이 된 A는 ‘브리앙(Briand, Aristide. 1862-1932. 프랑스의 정치가)이었습니다.
브리앙은 가난했던 시절 몇 푼 되지 않는 맥주 값 때문에 친구를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솔직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가난했던 시절 자신 때문에 망신을 당했을 화가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시절 누구나 가난할 수 있고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삶을 살아간다면 몇 배로 되갚을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 위선을 벗어던지고 정도(正道)를 걸어 성공한 안회(顔回), 공자가 가장 아꼈던 애제자가 되었으니 이런 상황과 현상은 지금도 같다.
강요된 시선과 사회의 편견(偏見),제도(制度)의 틀 속에 갇힌 채 하루하루 살다보면 명예나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한번쯤 종요한 시간에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면 삶의 행복과 이것을 지탱해 주는 힘이 생각 외로 놀랍게 사소(些少)한 데서 나온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안회(顔回· BC 521-490)’는 약소국인 노(魯)나라 출신입니다. 공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수제자이자 학문과 덕행의 대명사입니다. ‘장자(長子)’에게도 군자로 높이 평가받았던 ‘안회’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스승 ‘공자’의 말에 어김이 없고 우직하게 행동해 겉으로 보면 아둔할 정도인 ‘안회’는 ‘공자’가 자신의 말에 한 번도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할 정도로 무비판적(無批判的)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도 늘 자신의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보였던 제자였습니다.
‘안회’의 어리석음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이지 내면은 어느 제자보다도 가득 차 있었습니다.
《논어(論語)》에 수없이 등장하는 ‘안회’를 보면 ‘공자’가 지독하게 아꼈던 제자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3000명의 제자 가운데 핵심 인물은 77명이었고 그중에서도 ‘안회’를 대하는 ‘공자’의 모습은 때로 평정심을 잃었다 할 만큼 칭송 일관(一貫)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밥 한 소쿠리와 마실 것 한 표주박을 마시며 누추한 마을에 살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야말로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옹야(雍也)>
‘공자’는 서른 살이나 어린 제자 ‘안회’를 '현자(賢者)'라고 일컬으며 총애했습니다. 스승이 자식뻘 되는 제자를 그토록 아낀 것은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안회’는 가난이 뼛속에 스며들 정도의 힘든 역경 속에서도 여유롭게 본분에 충실했습니다. ‘공자’는 수제자로 칭송하던 ‘안회’를 두고 "어기지 않는 게 어리석은 것 같다(不違如愚)"며 다소 모자란 듯한 '불급(不及)'의 처세를 평가했습니다.
‘안회’의 이런 모습은 ‘공자’가 '구름 같은 존재'로 평가한 ‘노자(奴子)’의 모습과도 공통분모(共通分母)를 형성했습니다.
‘공자’는 그토록 갈망했던 관직을 얻지 못하고 14년 이상 북방 제후국을 떠돌아다닌 자기 처지에 회한(悔恨)이 서려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 대부분이 ‘공자’의 그런 모습을 추종했지만 ‘안회’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스승 ‘공자’에게 그런 길의 덧없음을 얘기하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안회’는 겨우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亡我)"라고 통곡하며 제자의 이른 죽음을 애달파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마천에게도 그대로 있었는데 그는 《史記》 <백이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중략) 또 ‘공자’는 제자 일흔 명 가운데서 ‘안회’는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안회’는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사마천(司馬遷)’의 푸념처럼 세상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니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니 하는 말들이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청빈(淸貧)의 자세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살다 요절한 ‘안회’는 우리에게 시사(詩詞)하는 바가 많습니다.
하늘의 도(道)가 옳으냐. 그릇됐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유효한 채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 너무 바쁘고 힘들게 뛰어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금(金)이 세 개 있으니 황금(黃金), 소금, 지금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을 음미해 보는 것은 자신의 정신건강에 필요한 에너지일 것입니다.
순수하고 풋풋했던 학창 시절에 스승의 가르침을 새겨듣고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보고 꿈에 부풀었던 추억을 되새겨보며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느껴보도록 하는 것이 행복은 늘 가까운 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9. 아직 희망(希望)은 남아 있다. 우리에게 호흡(呼吸)이 있는 한,
날은 어둡고 음산한데
인생은 춥고 어둡고 음산한데 비는 오고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내 마음 쓰러져 가는 과거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건만
바람 칠 때마다 청춘의 희망 뭉텅이로 진다.
잠잠 하라.
슬픈 마음이여! 불평을 말라.
구름 뒤에 아직도 태양이 빛나고 있거늘
네 운명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리라
사람마다 일평생엔 때때로 비 오는 날도 있을 것이려니
어둡고 음산한 날도 있을 것이려니
H. W.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궂은날
위의 시(詩)처럼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희망이 뭉텅이로 툭툭 잘라져 가고 있음을 절 감할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의 희망도 없을 것 같은 절망의 끝에 서면 '희망'을 운운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면서 절절 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삶이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고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롱펠로’의 시처럼 사람마다 때때로 비 오는 날도 있고 어둡고 음산한 날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 비가오고 늘 어둡기만 한 것 같은 현실입니다. 언제 내 삶에 태양이 뜨려나. ~
더 이상 태양을 기다리고 있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절망(絶望) 속에서는 그 어떤 말들도 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인정하든 안하든 '구름 뒤에는 태양'이 있다는 그 사실은 분명한 일입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세네카(Seneca, Lücius Annaeus. BC 4-AD 65)’라는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절망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You do not have to despairwithout hope.)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史觀(사관), 같은 意志(의지), 같은 생활방식(生活方式)을 가진 사람이 많으며 그래서 모두 그대의 동지이고 벗들이며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나그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대가 보기에 너무나 유복해 보이는 사람이든,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든, 그들의 삶에도 근심과 고통은 존재합니다. 어쩌면 그대가 지금 겪고 있는 것보다 더 크게 그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그저 막연한 바람으로 끝날 때 그것은 무의미한 환상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희망은 실현 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그대 자신입니다. 당신의 태양을 막고 있는 구름은 언젠가는 반드시 바람에 의해 물러날 것입니다.
새벽안개는 하루를 지내며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동녘에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고 맙니다. 바람이 일기만을 기다리는 어부는 일 년 내내 출항(出港)하지 못할 것입니다.
희망(希望)은 인간의 제 2의 혼(魂)이라고 말을 합니다.
20. 희망(希望)은 강한 용기(勇氣)이며 새로운 의지(意志)이다.
두 사람의 사나이가 rabbi(랍비. 유태교(猶太敎)의 율법교사에 대한 경칭)를 찾아와 의논을 했습니다.
한사람은 그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고 또 한사람은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부자가 먼저 랍비의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 부자는 방에서 나왔습니다.
가난한 사나이가 그 다음 차례여서 랍비 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랍비와 상담은 단 5분으로 끝났습니다.
가난한 사나이는 화가 났습니다. 누구는 한 시간씩 상담해 주고 자신은 겨우 5분이라니 치명적(致命的)으로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천대와 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것이었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가난한 사나이는 거칠게 랍비에게 항의했습니다.
“랍비여! 부자가 찾아왔을 때는 랍비께서는 한 시간이나 대화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5분입니다 그게 공평한 일입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적 상담이 아닙니까?”
그러자 랍비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나의 아들이여!
당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소. 그런데 그 부자의 경우에는 마음이 가난한 것을 알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단 말이오.”
빈곤(貧困)과 희망은 대립적인 개념이나 '빈곤'이란 개념이 없으면 '희망'이란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經典)에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만큼 부(富)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부자가 부정(不正)이 많기 때문에 죄가 커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전(經傳)이 가르치는 말씀은 부자(富者)는 천국이라는 가상(假想)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늘 근심과 걱정, 불안을 가지고 살기에 들어가기 어렵고 마음에 평안을 얻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혹여 그대가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가난은 경제력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다 평화의 세계에 가는 것도 아니다. 가난이 부끄러움이 될 수는 없지만 그 자체가 미덕(美德)이나 선(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메르시(Merci)에는 '인간을 찾는 자'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가령 노동자로 전락했더라도 나의 아들에게 산뜻한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나름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들의 불행을 숨기고 싶어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난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남들에게 잘난 척하고 싶고 남들이 소유한 만큼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올바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부(富)를 소유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바르게 나의 소망을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미덕(美德)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은 피곤에 지친 우리들의 꿈이며 안식처입니다.
보다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보다 적게 바라는 것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지금의 수준에 만족하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과한 욕심은 우리의 희망을 깎아먹는 악덕(惡德)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21. 인간들 때문에 고민하는 천사(天使)들의 회의(會議)
그 옛날 신(神)과 천사들이 살았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악행(惡行)이 점점 더 극심해지자 신은천사들을 시켜 인간에게 벌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에게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 고심(苦心)을 하다가 인간들에게는 '희망(希望)'을 빼앗은 것이 가장 큰 형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희망’을 빼앗아 버리면 인간들이 그 어떤 것 보다 가장 큰 고통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천사들의 판단은 정확한 것였습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극심한 좌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천사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빼앗아 어디에 감추어야 인간들이 찾을 수 없을까를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천사가 말했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숨겨 놓으면 어떨까요?"
그러자 우두머리 천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인간들은 모험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높은 산 위에 숨겨 놓아도 얼마 있지 않아 찾을 게 틀림없어 하늘에 맞단 최고 높은 산만 직업적으로 오르는 등산가들이 있을 정도니"
다른 천사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밀성(機密城, Confidentiality)을 만들어 수없는 미로(迷路)를 만들어 놓은 다음 숨겨놓으면 어떨까요?"
대장 천사는 또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인간들은 너무 영리해.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언젠가는 풀어낼 거야 정원에 미로를 만들어 놓고 연습을 하고 있어 재미로."
천사들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세상 별별 곳이 다 나왔지만, 인간들이 다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마땅히 '희망'을 숨겨놓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이제 '희망'을 숨길 곳이 없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했습니다. 이윽고 고심(苦心)하든 회장 천사가 말을 꺼냈습니다.
"아! 이제 겨우 희망을 숨길만 한 마땅한 장소가 떠올랐네."
"그 곳이 어딘가요?"
"바로 인간의 마음속일세. 제아무리 인간들이 모험정신이 강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진 자신의 희망을 찾아내진 못할 거야 인간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려다보고 생각하는데 취약하기 때문이야."
천사들은 다 같이 손뼉을 치며 회장 천사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인간에게 빼앗아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습니다.
우리는 외적(外的)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또 노력한다고해도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라고 우리는 말하곤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속에는 사랑, 미움, 자신감(自信感), 패배감(敗北感)도 있습니다. 사악한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가하면 아름다운 자비심(慈悲心)이 가득 차기도 합니다.
이 알 수 없는 마음들을 꿰뚫어 보고 절제(節制)하고 조정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희망'은 바로 그러한 그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대는 희망을 찾으려고 높은 산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미로를 헤맬 필요도 없고 방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고 꼭꼭 닫힌 그대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대는 밝은 미래로 인도해 줄 '희망'을 꺼내 손에 쥐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희망’을 찾는 방법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고민하고 노력’할 때 입니다. 이때 숨겨진 ‘희망’이 스스로 나타나 그대에게 보여 질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막연(漠然)한 것만은 아니고 진리가 있고 당연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22. ‘죽음에 이르는 병(病)’이라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일고 있는 것과 다른 뜻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ören Aabye. 1813-1855)’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사회비평가요. 실존주의 철학자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합니다.
종교적으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신학(神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1849년 창작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切望)'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절망'이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의미가 아닌 '인간이 신(神)을 떠나 신(神)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적으로 바꿔 말하면 바로 '인간의 자기 소외(自己疏外, Self-alienation)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언(附言)하면 - ‘인간이 자신을 떠나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를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 들은 모두 절망(切望)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 그저 시체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정체(停滯)의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수한 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점은 단순히 인간이 서서 걸어 다니는 동물이라는 외형적 우월성과는 전혀 다른 면에서 인간을 우월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복잡한 감정체계가 존재하고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살아가는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정신' 또는 ‘이성(理性)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절망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있는 순간마다 절망(絶望)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이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 드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망은 누가 준 징벌도 아니고 동양인이 흔히 말하는 팔자소관(八字所關)도 아닙니다.
따라서 절망은 누워 죽음과 싸우면서 그러면서도 죽을 수 없는 병에 걸린 자의 상태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글귀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최대의 위험이 세간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꽤 조용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조용하게 행해지는 상실(喪失)은 없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팔뚝 하나라도, 다리 하나라도, 몇 천원이라도, 아내라도, 그 밖의 무엇을 잃더라도 금세 정신을 차리는 주제에’
나를 잃는다는 것은 다른 어떤 소중한 것을 잃는 것보다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거나 잃어버리고 실감(實感)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이라는 병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절망에서 빠져나올 때 우리는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가능성(可能性)은 어린아이가 뭔가 새로운 놀이에 초대받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어린아이는 금세 그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느냐의 여부일 것입니다.
‘키에르게고르’는 이 부모에 해당하는 것을 필연성(必然性)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능성의 뒤를 막연하게 쫓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희망'이라는 단어에 매여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가능성(可能性)을 필연성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자신이 소망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그대에게 다가올 때 그것은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마약이나 공상(空想)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그대의 '희망'을 가능성(可能性)으로 만들면 그런 그대에게 절대로 절망이란 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보다 큰 위험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보다 작은 위험 속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갖는 것이다. 하나의 위험을 무한히 두려워할 때에는 그 밖에 온갖 위험은 전혀 생각하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23. 희망을 옆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그대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자신의 멀쩡한 발목을 잘라 보험금(保險金)을 타내려고 한 사건이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허탈함과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할 짓이 없어도 그렇지 그런 짓까지 하다니 혹은 빚을 갚지 못하거나 전세금을 올려 줄 돈이 없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봐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현실을 회피(回避)하려는 그들이 한심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은 나한테 있어선 너무나 소중하게 필요한 돈이 그 사람에게는 몇 잔의 양주 값밖에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를 바라보노라면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풍족한 생활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그 사람의 받을 당연한 몫이고 대가(代價)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하루하루가 외줄을 타는 것처럼 위태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부유함속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에게 누군가 쌀이 없어서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쌀이 없으면 그럼 피자를 시켜 먹으면 되잖아?”
이런 상황은 나이가 어리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말일뿐입니다. 그러하지만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기만의 성(城)안에서, 자기만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방식의 결론을 내리고 처신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시골의 핍절(乏絶)한 농촌생활로 멀리 집을 떠나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아침을 먹고 점심은 굶어도 저녁에 집에 가서 먹으면 되기에 견딜 수 있었고, 나 혼자 만의 가난이 아니고 다 같이 가난하니 별 흉스러움이 아니지만, 집을 떠나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방을 얻어야 하고 식사마련을 스스로 해야만 했습니다.
매일 매일 먹는 것 걱정을 하며 그런 날들을 계속해 보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먹을 것이라고는 없는 빈방에 돌아왔을 때 방구석에 처음 보는 쌀자루가 하나있고 반찬단지가 있었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달려가 물건의 당초(當初)를 궁금해 물었지만 “갖다 준 분과 약속했기 때문에 절대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것이고 쌀로 밥해 먹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는 격려(激勵)겸 충고(忠告)를 했습니다.
보내준 쌀은 한 달을 먹을 양이 됐고 고추장과 무장아찌는 어떤 반찬보다 훌륭했습니다. 필자는 보내준 분에게 고마움도 표현하지 못하고 몇 달을 지내다보니 미안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작정을 하고 주인아주머니를 붙잡고 간절히 부탁을 했습니다.
간절하게 부탁하는 어린 학생의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못내 몇 달 지켜오든 비밀을 알려줬는데 필자를 도와준 분은 조금 떨어진 골목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약방 주인이었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모른 척 하겠다는 약속한 것도 잊어버리고 바로 약국으로 달려가 약국주인에게 눈물 흘리며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국주인은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울리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福)을 받아 생활이 넉넉한 부모를 만나서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지냈단다. 부모님 덕택에 너처럼 굶지도 않고 대학까지 공부를 했고 지금까지 약국을 운영하며 잘 지내는데 너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혼자서 집을 떠나 공부하겠다고 고생하고 있는데 그런 너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니? 너의 주인집아주머니가 그러는데 밥 먹는 걸 별로 본적이 없다고 하기에 넉넉한 내가 너를 돕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잖니? 그리고 비밀로 하라는 것은 네가 나를 볼 때 마다 부담감(負擔感)을 갖는 것이 자라는 너에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기에 그랬다. 만약 나에게 고맙다고 하려거든 성장해서 너도 너보다 어려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주면 갚는 것이야”
L. 존슨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여러 사람들은 결코 ‘희망’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변엔 ‘희망’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대의 ‘희망’을 그들에게 조금만 나눠 줘도 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은 그대의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줄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약국주인 아저씨는 사용할수록 늘어나는 영원한 행복의 희망을 어린 필자에게까지 나눠준 것입니다.
24. 풍훤(馮諼)이 거액(巨額) 드려 사온 보이지 않는 물건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는 현자(賢者)이다.
중국 齊(제)나라에 풍훤(馮諼)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가난해서 맹산군(孟山郡)의 식객(食客)이 되어 밥만 먹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취미도, 특기도, 할 수 있는 일도 하나 없는 그를 맹산군은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맹산군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천하게 여겼으며 음식도 형편없이 대접을 했습니다.
얼마를 지나자 풍훤은 기둥에 기대어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협아, 돌아가자 ! 여기선 식사 때 고기 한 점 없구나!”
이 노래를 들은 다른 식객들이 맹산군에게 고하자,
“생선 좀 주어라 고기 먹는 식객(食客)대우를 해주라.” 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또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협아, 돌아가자! 여기선 타고 다닐 수레도 없구나!”
그러자 식객들이 비웃으며 맹산군에게 이를 알렸고 맹산군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수레를 주어라 수레 타는 식객과 같은 대우를 해주어라”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또다시 장검(長劍)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협아, 돌아가자! 여기선 가족(家族)을 먹여 살릴 수가 없겠구나!”
다른 식객들은 풍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탐욕스럽고 상식이 없는 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맹산군은 사람을 시켜 그의 가족들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하고 궁핍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제야 풍훤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어느 날 맹산군은 문하(門下)의 식객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 설 땅에 가서 빚을 받아올 자가 있는가?”
그러자 풍훤이 나서며 자신이 그리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식객(食客)들과 맹산군은 놀랐지만 맹산군은 수레를 준비하고 행장을 꾸려 채권 계약서를 들려 보냈습니다.
떠나기 전에 풍훤이 맹산군에게 묻기를 “빚을 다 받으면 그것을 무슨 물건을 사가지고 올까요?”
“풍훤이 보기에 우리 집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면 된다.”
풍훤은 설 땅에 도착하자마자 빚진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맹산군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채권 계약서를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만세를 부르며 맹산군을 칭송했습니다. 그 후 풍훤은 곧장 맹산군의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일찍 돌아온 풍훤을 보며 맹산군이 놀라 물었습니다.
“그래. 빚은 다 받았는가?”
“예, 다 받아왔습니다.”
“그럼 무엇을 사가지고 왔는가?”
“제가 깊이 생각하건대 상공(相公)의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금 모자란 것이라곤 의(義)라고 생각되어 그 의(義)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하고는 자신이 설 땅에 가서 한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맹산군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차마 질책은 못 하고 그 정도의 손해도 감수할 만한 재산이 있기에 문제 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맹산군은 왕에게 미움을 받고 권고사직(勸告辭職)을 당했습니다.
맹산군은 할 수 없이 자신의 봉지(封地)인 설 땅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직 백 리밖에 다다르지 않았는데 설 땅 백성들이 모두 맹산군을 영접하러 길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맹산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따라온 풍훤을 보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나를 위해 사온 의(義)를 오늘에야 보게 되는구려.”
< 戰國策 齊策扁(전국책 제책편) 史記 孟嘗君列傳(사기 맹상군열전)
戰國策11齊四140-01 齊人有馮훤者, 貧乏不能自存, 使人屬孟嘗君, 願寄食門下. 孟嘗君曰: "客何好?" 曰: "客無好也." 曰: "客何能?" 曰: "客無能也." 孟嘗君笑而受之, 曰: "諾." 左右以君賤之也, 食以草具.
策11齊四140-02 居有頃, 倚柱彈其劍, 歌曰: "長鋏歸來乎! 食無魚." 左右以告. 孟嘗君曰: "食之, 比門下之客." 居有頃, 復彈其鋏, 歌曰: "長鋏歸來乎! 出無車." 左右皆笑之, 以告. 孟嘗君曰: "爲之駕, 比門下之車客." 於是, 乘其車, 揭其劍, 過其友曰: "孟嘗君客我." 後有頃, 復彈其劍鋏, 歌曰: "長鋏歸來乎! 無以爲家." 左右皆惡之, 以爲貪而不知足. 孟嘗君問: "馮公有親乎?" 對曰: "有老母." 孟嘗君使人給其食用, 無使乏. 於是, 馮諼不復歌.>
물질로 얻을 수 없는 것,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가치를 환산 할 수 없는 매우 귀한 것인데 – 이는 의(義)와 정(情)으로 얻은 귀한 인(仁)이라는 재산입니다.
25. 관중과 습붕의 지혜는 선조로부터 배운 것으로 선조를 잊고 사는 지금에는 이런 지혜가 없다.
중국 제(齊)나라 때 환공이 고죽을 토벌할 때 일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출발할 때는 봄이었는데 돌아 올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주위 풍경이 너무나 변해서 환공과 군사들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환공은 난감해졌고 군사들도 점점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지쳐 가는 군사들을 보며 환공이 난감해할 때였습니다.
그때 관중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환공에게 말했습니다.
"이럴 때는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합니다."
환공은 시험 삼아 늙은 말을 풀어 주고 모두 그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환공은 관중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곧 산길에 들어서니 먹을 물이 없어서 모두들 갈증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지친 군사들은 하나 둘씩 쓰러지고 환공은 군사들을 이끌고 갈 힘마저 잃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습붕이라는 사람이 나서서는,
"개미란 놈은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서식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미집 아래 여덟 자를 파면 거기에는 반드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사오니, 한번 산기슭 남쪽으로 돌아 개미집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환공은 옳다구나 생각하고 습붕의 말대로 개미집을 찾아 여덟 자를 팠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물을 구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비(韓非, BC 280? - BC 233)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 사상가, 작가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의 얘기를 듣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중이나 습붕 같은 지혜 있는 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이나 개미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어리석으면서도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 속담에 '사람이 오래 되면 지혜요, 물건이 오래 되면 귀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면 지혜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위의 관중이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일 것입니다.
한비자(韓非子)의 말대로 우리는 성인(聖人)의 지혜를 스승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옛 성인이나 주변의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앎'일 것입니다.
타인의 자식과 지혜를 아무리 배운다 해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스스로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부단한 정진(精進), 그것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넓혀 가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험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視覺)이 필요하고 스승을 통해 늘 가르침을 받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미나 짐승에게도 배움을 얻지만, 어리석은 사람
은 현명한 성인(聖人)과 곁에 지자(智者)가 있어도 배우지 않습니다.
26. 맑은 눈으로 관찰하면 당초(當初)가 보인다.
사막에서 장사꾼 한 떼가 낙타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들에게 낙타 한 마리는 귀중한 재산이자 교통수단이었기에 단 한 마리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낙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사꾼들이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을 때 그 곁을 지나가는 승려 한 사람이 있기에 장사꾼들은 승려 붙잡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낙타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혹시 그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승려는 가만히 장사꾼들을 보더니 곧 말을 이었습니다.
"그 낙타는 오른쪽 눈이 안 보이고 왼쪽 앞발을 절름발이고 앞니가 부러졌지요? 또 잔등의 한쪽에는 밀가루를, 한쪽에는 꿀을 지고 가지요?"
승려의 말을 들은 장사꾼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낙타가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장사꾼들은 승려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이 승려가 낙타를 감춰두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사꾼들은 옥신각신 하다가 승려를 끌고 재판정으로 갔습니다.
"당신이 이들이 잃어버린 낙타를 감추고 있나?"
재판관의 물음에 승려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낙타에 대해서 그리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재판관의 질문에 승려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의 한쪽만 풀이 뜯어 먹힌 것을 보고 오른쪽 눈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래에 왼쪽 앞발의 자국이 다른 발자국보다 희미하게 나있으니 왼쪽 앞발이 절름발이입니다. 뜯어먹은 풀잎이 가운데가 남아 있으니 앞니가 부러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길 한편에는 밀가루가 흘려져 있어 개미가 달라붙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꿀이 떨어져 있어 파리가 붙어 있으니 밀가루와 꿀을 싣고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 낙타 앞뒤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없으니 그 낙타는 누가 훔쳐 간 것이 아니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걸 알고 말했을 뿐이니 나를 붙잡고 이럴 것이 아니고 빨리 가서 찾으시오."
후에, 이 얘기를 들은 페르시아의 철학자가 승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런 지식을 얻었습니까?"
"모든 것을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한 번 더 관찰(觀察)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고 호기심과 관찰로 얻었습니다."
27. 너그러움과 덕행(德行)은 틀림없이 보답을 받는데 이것을 복(福)이라고 한다. 그러니 복은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중국 초나라 때 장왕이 잔치를 벌여 여러 신하들을 모여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돌연히 촛불이 꺼지면서 잠시 연회장은 암흑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어느 신하가 왕의 애첩(愛妾)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애첩은 깜짝 놀라 엉겁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떼었습니다. 애첩은 자신에게 입을 맞춘 그 신하에게 꼭 벌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암흑 속에서 왕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대왕님, 지금 어느 놈이 저에게 무례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놈의 갓끈을 잡아떼었으니, 그 놈을 잡아 죽여주시옵소서."
왕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즐거운 잔치자리를 피로 물들이는 것도 싫고 애첩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괘씸한 신하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그냥 용서해 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큰 소리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갓끈을 떼지 않고 온전한 갓을 쓰고 있는 사람은 벌을 내리겠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갓끈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어겼다가 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을 켜고 보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신하의 갓끈이 다 떼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애첩은 누가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사람인지 도저히 구별해 내지 못했습니다. 애첩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하면 피로 물든 잔치가 될 뻔 했습니다만, 장왕의 슬기로 잔치는 그대로 즐겁게 이어졌습니다.
그 후 2년이 지난 뒤,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사는 연일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초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별안간 웬 장수 하나가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와 진나라를 무찔렀습니다. 그 장수는 목숨을 걸고 진나라 군사를 상대로 훌륭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장왕은 이 뜻밖의 지원군을 몰고 온 장수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 장수를 청하여 물어보았습니다.
"장수는 누군데 내가 청하지도 안았는데 스스로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왔는가."
그 장수가 대답하기를,
"신은 옛날 대왕의 애첩에게 무례한 짓을 범한 신하입니다. 그때 대왕의 너그러운 관용(寬容)에 감동하여, 그때부터 산중에 숨어 군사를 길러 어느 때고 대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결심했나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 대왕의 군사가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옵니다."
장왕은 장수의 말에 감동하여 많은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만물을 따뜻하게 살아나게 하듯이, 모든 사람을 살아나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지혜가 깊어짐에 따라 타인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관대(寬大)함 또한 깊어집니다.
28. 한 가지 일에 집착(執着)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은 실패를 위한 고집(固執)이다.
한국의 오래된 민족적 정서에 사람이 고집이 강 한 것에 대하며 긍정적(肯定的)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고집이 강한 사람을 ‘주관(主觀)’이 뚜렷한 것으로, 성격이 강한 것으로 취급을 해왔습니다.
사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고집이 강한 것은 우리민족이 알고 있는 대로 주관이 강하고 성격이 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를 ‘자아방어기재(自我防禦機制, ego defense mechanisms)’라고 합니다. 자아가 불안에 대처하기 위한 심리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손해 보거나 타인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으려는 ‘방어도구(防禦道具)’가 고집입니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무식(無識)’한 사람이 자신의 실체가 노출되어 불안해지는 것이 두려워 ‘고집’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리학적인 견해(見解)로 본다면 남녀노소불문(男女老少不問)하고 누구든, 어느 민족이든 ‘고집’이 강한 것을 긍정적(肯定的)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어리석음은 한 가지 일에 집착(執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잊은 채 오로지 자신의 판단, 결정에만 빠져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지혜(智慧)란 이렇게 어리석음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 중 정작 중요한 것을 팽개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 종교인들 중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만류하는 사람에게 적대감(敵對感)까지 표현해 스스로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까지 상실하고 있습니다.
지혜란 바로 어리석음을 꼬집어 내고 들추어내 보이도록 하며 고치고 수정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지혜가 필요 하다고하고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지혜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29. 편작(扁鵲)은 환자의 겉만 보고 아픈 곳 찾아낸 명의(名醫)였지만 그도 사람의 무지(無知)에서 오는 고집(固執)은 고치지 못했다.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입니다.
조짐(兆朕)이란 말이 있습니다. 실체(實體)가 드러나지 않은 채 느껴지는 기운(氣運)을 뜻합니다.
특히 사람의 병(病)은 그 실체가 감추어져 있으면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어 환자가 고통을 느끼고 진찰로 확인했을 때는 손쓸 겨를도 없이 목숨을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조짐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사람이 명의(名醫)입니다. 현대의학적인 용어로 ‘예방의학(豫防醫學, Preventive Medicine)’이라고 합니다.
그 중 중국의 편작(扁鵲)처럼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의사도 보기 어렵습니다.
편작은 약2500년전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명의(名醫)로 발해군(勃海郡)의 막읍 사람입니다.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입니다. 젊었을 때는 여관의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객사에 장상군(長桑君)이란 자가 와서 머물곤 했는데 편작은 그를 특이한 인물로 여겨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장상군은 객사를 드나든 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 편작을 불러 "나는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醫術)의 비방(秘方)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늙어 그대에게 전해 주고 싶다"고 은밀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편작은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자 장상군은 품안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면서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은 물에 타서 마신 뒤 30일이 지나면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말과 함께 자신의 의서(醫書)를 모두 편작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30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편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투시력으로 환자를 진찰하니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맥을 짚어 보는 척했지만 누구도 모르는 비방(秘方)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명의가 되어 제나라에 머물기도 하고 조나라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제나라로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환후(桓侯)라는 왕이 편작을 빈객으로 예우했는데 편작이 그를 보더니 대뜸 "왕께서는 피부에 병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환후는 자신에게 질병이 없다며 "의원이란 자가 이익을 탐해 병도 없는 사람을 두고 공을 세우려 한다"고 헐뜯었습니다.
닷새가 지나 편작이 다시 환후를 찾아가 "왕께서는 혈맥(血脈)에 병이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마음이 상한 환후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닷새 뒤에 편작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심각한 어조로 장과 위 사이에 병이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편작을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닷새 뒤에 편작이 찾아와 환후를 쳐다만 보고 그냥 물러나오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환후가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탕약과 고약으로 고칠 수 있고, 혈맥에 있을 때는 쇠침과 돌 침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장과 위에 있을 때는 약주(藥酒)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골수까지 들어가면 사명(司命.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고대 전설 속의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병이 골수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던 것입니다."(史記) '편작창공열전')
환후는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자리를 피해 떠난 뒤였습니다. 환후는 결국 치료도 못해보고 죽었습니다. 병입골수(病入骨髓)란 말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을 불신하는 환후를 치료하지 않고 떠나버린 편작의 태도는 의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란 자신에게 화(禍)가 다가와도 그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보듯 거대한 빙하가 물위로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변변한 대처도 못해보고 죽은 환후는 명의에 대한 신뢰 부족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판단만을 과신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화를 당한 것입니다.
30. 인류는 신(神)의 명령에 의해 가장 고귀한 지식과 지혜의 영구유지보관 방법으로 문자를 만들고 기록해 책(冊)으로 남겼다.
문자로 기록의 시작은 신(神)이 인간들에게 지켜야할 계율(戒律)을 잊지 말고 늘 보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명령한데부터 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가장 많은 것이 경전(經典)과 이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여기서 발전에 인간스스로 사회의 규정과 준수사항을 문서화했고 후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남기는데 기록방법을 사용 했습니다.
‘책(冊)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라는 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경험과 학문(學問), 사상(思想)이 글이라는 매체로 표현되어 있는 것, 그 책을 통해 우리는 과거 인류역사와 종교, 문화, 예술, 현자(賢者)들의 사상을 접하고 또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고전(古典)'이라 이름 붙여진 책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그 가치가 입증되고 그 사실성과 정직성, 효용성이 인정되고 검증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고전 읽기가 노력하지 않습니다.
고전이란 단순히 옛날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를 거쳐 그 내용은 변함이 없이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과 교양, 정서함양(情緖涵養)에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새것이라면 좋아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컬럼비아 대학의 ‘레이몬드 위버 교수’에게 요즈음 한창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제목을 말하며 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교수가 아직 읽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그 여대생은 출판된 지 석 달이나 지났으니 빨리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그 여학생에게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을 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아직 읽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교수는 그 여학생에게,
"그 책은 출간된 지가 600년이나 넘은 거야 빨리 읽게나."
요즘처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인기 그룹의 신곡이 나오면 곧장 그 노래를 외워 버립니다. 잘됐다는 영화가 나오면 그 영화를 보지 않고서는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것들을 내 것으로 소화 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은 세계 속의 잡다한 정보들을 제한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그렇지 못한 다른 친구들에게 말을 합니다.
"너는 그거 봤니?"
하루 이틀 지나면 기억하고 싶어도 아무런 기억도 없이 사라지는 허상(虛像)의 정보들에 너무 많이 시간과 정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한 여대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소녀시대’의 노래가사를 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하의실종(下衣失踪, Under disappearance)’ 스타일의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감각적인 것에 치우쳐 버려 정작 중요한 것은 외면해 버리고 그 가치조차 평가할 수 없게 돼 버리는 것입니다.
젊은이 중에는 고전(古典)이라면 마치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라 치부해 버리고 외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읽어야지 라는 마음은 먹지만 누구나 읽기 싫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혜로워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古典)은 현실을 자각(自覺)시켜 주는 것이고 미래의 지침서(指針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잠들어 있는 나 자신을 일깨워 주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둡고 내 마음이 비어있고 내가 어리석은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는 도리 킬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 후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심(傷心)하고 좌
절(挫折)을 하게 됩니다.
‘H.D. 소로(H.D Thoreau’. (불복종운동.(不服從運動), civil disobedience movement.)는 미국의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6년간 인두세(人頭稅)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1846년에 투옥되었습니다. ‘소로’는 고전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고전이란 인류 사상의 가장 고귀한 기록이 아니겠는가? 고전이야 말로 망하지 않는 유일한 신탁(信託)이다. 고전연구를 그만 두는 것은 마치 자연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어떤 것을 찾을 때 꼭 필요한 것이 밝은 전등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지혜를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고전'일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의 현실 생활의 분주하므로 시간이 없음을 강하게 변
명합니다. 자신의 무질서(無秩序)하고 무기력(無氣力)한 생활이 주는 결과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의 변명입니다.
몇 달 전 15년간 사용한 TV가 노후(老朽)돼 고장이 나기에 새로 장만하는 것을 의도적(意圖的)으로 포기하고 TV 없는 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의도적인 실험은 얼마 전 cafe.daum.net/sallysalon에 공지하고 함께 연구할 회원을 모집했던 “현대 미디어(TV. 영상매체, 스마트폰)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몸소 경험해
보고 연구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물론 공지를 하고 기다렸으나 묵묵무답(黙黙無答)이어 어쩔 수 없이 혼자 하기로 하고 연구중이
있습니다. 사실 이글은 한국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연구해 자료로 사용하게 위해 시목에게 요청한 것으로 그동안 무관심하게 바라보든 교육기관이 이제 미디어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관심 갖는 다는 것에 고무돼 쾌히 승낙한 것입니다.
몇 달 동안 TV를 시청하지 않은 결과 놀라운 것은 새로운 종교(宗敎)를 선택한 것 보다 더 많은 생활의 변화가 필자에게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많은 시간을 TV를 보는데 소모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시간을 남달리 아끼고 계획하고 효과 있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건만 하루에 많은 시간을 TV앞에 무감각(無感覺)하게, 무의미(無意味)하게, 몇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허접한 인간들의 발광에 가까운 행위를 보고 알 필요도 없는 함량미달의 연예인들의 사사로운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고, 허영과 불꽃놀이 같은 삶을 살아가는 하루살이 연예인들의 미모와 저질스런 교태(嬌態)에 돌이킬 수 없는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필자는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지혜를 사랑한다고 했건만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TV가 보여주는 의견과 결정에 나를 숙여 긍정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필자의 결정과 정보의 많은 비중이 TV에게 지배받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TV와 스마트 폰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시간이 없다고 했든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말하면, 발전한 현대과학문명이 개인에게 무조건 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과학적 용구(用具)들 가운데 진정한 이익과 손해를 구분해 선별사용 할 줄 아는 지혜가 각자에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31. 똑똑한 것보다 지혜(智慧)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준비한다면
그대는 5%에 속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참 똑똑한 사람이 많습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모든 지각이 정지되는 것 같은 물리학(物理學)이론을 줄줄 외며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매년 소위 일류라고 불리는 대학에 들어가는 수만 명의 신입생들을 봐도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연예인들 중에도 좋은 대학 출신이라면 플러스알파 점수가 주어집니다. ‘노래도 잘하고 외모도 출중한데 머리까지 좋다니 완벽하다’ 대충 이런 식입니다.
사실 똑똑하다는 것은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대우를 받습니
다. 물론 노력의 결과에 대한 대가(代價)이니 당연합니다. 제 몫을 충분히 해내는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 있을 때 사회는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게 됩니다.
언젠가 본 책 중에 '세상은 소수 몇 사람에 의해서 변화, 발전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필자가 존경하고 허물없이 대화를 하며 가르침을 받는 지인(知人)중 삼영화학주식회사 창업주인 ‘관정 이 종환 회장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6~70년간 고생하여 벌어드린 재산의 95%인 7천억 원을 장학재단에 기증해 기업인, 학계, 정치계, 미래를 꿈꾸는 젊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이분의 장학재단 운영의 목적은 국가와 세계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과학자는 수천만 명의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장학재단의 혜택을 받는 학생은 모두 세계 10대 명문대를 다니고 있고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재들입니다.
그런데 가끔 장학재단을 운영하며 안타까움과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실토(實吐)하는 것을 듣고 마음 한편이 무겁게 눌림을 받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같이 천재성이 있는 젊은이들로 세계 명문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의 많은 비중이 자신을 돕고 있는 분들에 대한 예의(禮意)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종환회장님은 ‘평생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연구밖에 모르니 예의를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렇다’라고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변명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시지만, 이들에 대한 못마땅함과 섭섭함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한 발자국만 떨어져 유심히 바라보면 단순히 똑똑한 것만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영웅(英雄)에 의해 변화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영리(怜悧, Be clever)한 사람에 의해 발전되는 것 같지만 이 또한 그렇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소수일지라도 우직(愚直, 강직(强直)할
정도로 '변함없이' 노력하는 자에 의해 조금씩 변화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다 그러하다.’ 라고 믿고 있는 진정한 행운(幸運,luck)도 영웅과 영리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우직할 정도로 변함없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 하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모두가 바라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 '이다.
버거운 세상살이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세우고 남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하며 열심히 사랑해야 하며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열심히 보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대가 누구에게 인정을 받아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공하기 위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次善)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이 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현명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말일 것입니다. 지혜는 원한다고 해서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한다면 우리는 일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그리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앎’을 모두를 위하여 ‘행(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바른 지각(知覺)을 의미합니다. 이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고민’해 보는 사람에게 싹이 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2. 川流不息 淵澄取映(천류부식 연징취영) 냇물은 쉬지 않고 흐르고, 연못은 맑아 환하게 비친다.
천자문(千字文)에 쓰여 진 글자는 모두 몇 개일까 라는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고 웃겠지만, 천자문의 글자는 모두 천 개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천자문의 글자들이 낱낱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4글자씩 묶여 하나의 시구절(詩句節)을 이룬다는 것을 아 는 사람은 한문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천자문 첫8자의 두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天地玄黃 宇宙洪荒 (천지현황 우주홍황)’
‘하늘은 이치가 깊어 알기 어렵고 땅은 황색이로다. 우주는 넓고도 멀며 거칠기도 하구나’
이렇게 천자문은 천 개의 글자가 모두 250구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 잘생긴 글씨도 아닌데 천자문이 온통 시(詩)였다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천자문 시구(詩句) 중 67번째 시구가 바로 천류불식(川流不息)입니다.
‘川流不息, 淵澄取暎(천류불식, 연징취영)’
‘냇물은 흘러서 쉬지 않고, 깊은 못의 물은 맑디맑아서 속까지 비쳐 보인다.’
공자(孔子)가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물이로다!" 하며 탄식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逸話)입니다.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흐르기를 쉬지 않다가 마침내 큰 강에 이르고 또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사람도 덕(德)을 닦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연마(練磨)함을 쉬지 않는다면 성현(聖賢)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로 공자가 “물이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사자성어(四字成語)’, 또는 ‘한자성어(漢字成語)’ 혹은 ‘고사성어(故事成語)’는 라고 합니다.
‘자강불식(自强不息)’
‘곧 스스로 굳세어서 쉬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어려우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류불식(川流不息)’은 높은 덕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정진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연징취영(淵澄取暎)’ 즉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인해 맑고 맑은 덕의 경지에까지 도달 함’을 뜻합니다.
이렇듯 고전(古典)들은 자신을 가꾸기 위해 끓임 없이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냇물이 흐르는 것이 고단하다 하여 그 흐르기를 멈춘다면 냇물은 한 곳에 고여 종내에는 썩어 들어갈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입니다.
너무나 고단하고 힘들어 질 때마다 혹은 게으름과 나태(懶怠)의 병이 불쑥불쑥 도질 때마다 흐르는 냇물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흘러 어느 세월에 바다로 갈까 의구심(疑懼心)이 들지만 쉬지 않고 흐르기만 한다면 냇물은 틀림없이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광활한 평원 같은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달팽이조차 쉬지 않고 바다로 가고 있습니다. 달팽이보다 훨씬 우월(優越)한 우리들이 바다로 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진 않은지 항상 돌아봐야 합니다.
아주오래전 6.25동란 직후 집들이 모두 소실(消失)돼 마을에서 조금 큰집에 몇 세대가 같이 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여름철 소나기가 볏짚으로 엮은 지붕을 소리 없이 후리칠 때 필자는 마루 끝에 우두커니 앉아 빗방울이 떨어지는 추녀 끝 돌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돌에 떨어지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돌에 부딪치는 곳에 나란히 구멍이 나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계속 떨어지는 물방울에 단단한 돌에 구멍이 나는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 돌에 생긴 구멍, 숙명적(宿命的)인 노력을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각납니다.
33. 많은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망치는 일을 옳은 선택이라고 확신하고 주 장을 한다.
끈기를 가지기란 포기(抛棄, give up)하는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어렵습니다.
사실 포기(拋棄)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손을 떼고 중단하면 그만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도 그 자리에서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겠으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계속 피우면 됩니다.
게으름이 안 고쳐진다면 지금껏 하는 대로 늘 상 나태(懶怠)하게 지내면 됩니다. 포기(拋棄)는 스스로를 조금만 속이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포기(拋棄)는 결심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쉬운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포기(give up)를 즐기기 까지 합니다.
이는 마치 게으른 여인이 늘 잠을 즐기면서 근거 없는 ‘미인은 잠이 많다’는 말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세계 수십억의 인구,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男女老少)모두 잠을 즐깁니다.
사실 잠이 싫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잠은 자면 잘수록 즐겁고 행복하게 생각하기 까지 합니다.
우리가 쉽게 쓰는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말은 맹자(孟子)가 한 말입니다. 이 한자어를 직역하면, '자기 몸을 스스로 해치고 망쳐서 버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쉽게 하는 그 '포기'란 말은 스스로를 망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자신을 말입니다.
‘맹자’ 「이루」 상 10장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신을 함부로 하는 자(自暴者)와는 함께 말을 섞을 수 없고, 자신을 내버리는 자(自棄者)와는 더불어 일을 행할 수 없다. 예와 의를 비난하는 자를 일컬어 자신을 함부로 한다고 하고, 이내 몸은 인(忍)에 머물고 의(義)로써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를 일컬어 자신을 내버린다고 한다. 인이란 사람의 가장 편안한 집이요, 의란 사람의 가장 바른 길이니, 안락한 집을 비워두고 거기 머물지 않고, 바른 길을 놓아둔 채 그를 말미암지 못하니 아, 슬프도다!”
자기자란, 착하게, 사람답게 사는 게 좋기야 한데 난 애초에 훌륭한 사람 되기는 글른 놈이니 그냥 되는대로 살란다고 주장하는 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요컨대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원뜻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에 절망(絶望)하여 체념(諦念)하는 것이 아니라, 구차(苟且)한 핑계를 대며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겠다(killing me)’는 말도 그렇습니다.
인내(忍耐)를 쉽게 무용지물(無用之物)로 만드는 말입니다.
‘분주해서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보기 싫어 죽겠다’, ‘먹기 싫어 죽겠다’, 심지어는 ‘좋아 죽겠다’ 등으로 이미 자신은 다 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여유나 생각해야할 여분(餘分)이 없습니다. ‘맛있어서 죽겠다’는데 미각(味覺)에 대한 예술적인 또 다른 표현도 필요 없고, 그 음식에 대한 과학적 검증도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 인식(認識)을 포기하게 만드는 말이고, 또 다른 의견을 강하게 거부하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기가 일쑤입니다.
"난 못해! 안 할래! 내 이상에 맞지 안어!"
“너나 잘해” (냉소주의(冷笑主義))
“전에 안 해본지 아나”(경험제일(經驗第一)
“시간이 약이라니까” (나태(懶怠)
나무꾼이 있습니다. 그는 도끼 하나로 수많은 나무들을 베었습니다. 그에게는 단 한 자루의 도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무꾼은 항상 도끼를 아끼고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그의 유일한 생존수단(生存手段, survival means)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에게 도끼가 없으면 그는 나무를 베지도 못하고 생활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장작을 패서 팔거나 나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져 다 주지도 못할 테니 말입니다.
어느 날 나무를 열심히 패던 그는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열심히 도끼질을 하다가 자루와 날이 이어진 부분이 약해진 탓에 빠져 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당한 엄청난 사건으로 자루만 들고 허망하게 거대한 나무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그가 쥐고 있는 도끼자루는 이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빈 도끼자루를 팽개쳐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루를 다시 다듬고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잃어버린 도끼날을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끼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친 그는 더 이상 도끼날을 찾는 일을 포기하기로 하고 오랫동안 해온 나무꾼 노릇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봐야 도끼자루만으로는 나무를 벨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칠 지나서 그는 지금까지 아끼고 보관했던 도끼자루를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도끼날이 없는 도끼자루는 필요 없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렇게 찾던 도끼날이 집 안의 장작더미 속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 도끼날을 집어 들고 뛰고 싱글거리며 좋아했지만 이제는 도끼 자루가 없었습니다. 그가 도끼 자루를 필요 없다고 던져버린 강으로 뛰어갔지만 도끼 자루는 이미 떠내려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끼날이 없어졌다고 도끼자루를 버리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그 도끼날은 그 도끼자루만이 도끼날에 맞고 지탱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대체(代替)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꾼이 포기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그대를 살아가게 만드는 생존수단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마지막까지 도끼자루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면 도끼날이 없고 자루만 남아있는 도끼자루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언젠가는 다시 도끼날을 찾아 도끼질로 생활할 수 있는 여지(餘地), 기회를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끼자루 마저 버린다면 나무꾼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을 포기(抛棄)라는 강물 속에 던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무꾼이 포기한 바로 그 다음 날, 나무꾼이 그렇게 간절히 찾았던 도끼날을 찾을 수 있는 데 말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포자기(自暴自棄), ‘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스스로 버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현(聖賢)들은 끝까지 인내(忍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도 일반인의 말이 아닌 삶의 성공을 이룬 현자(賢者)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가르치는 매우 쉬운 교훈입니다.
34. “나는 언제나 견디고 있다.”(I always endure.)
1) 푼 림(POON LIM)
중국의 선원 푼 림은 해군 상선 SS 벤 로맨드(SS Ben Lomand)의 승조원(乘組員)입니다.
사이드항을 떠나 케이프타운을 경유한 뒤 남 아메리카의 네델란드령 귀아나(Guiana:Surinam) 로 향하던 이 상선(商船)은 1942년 11월 23일 아프리카의 서해안에서 거의 600마일 떨어져서 항해하고 있을 때 일본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으면서 난관(難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뢰에 배는 급속도로 침몰했고 ‘푼 림’은 바다로 빠지고 그의 배가 침몰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본 푼 림은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자는 단 한명 자신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푼 림’은 2시간 동안 헤엄쳐서 침몰선의 잔해들 틈에서 떠다니던 나무로 된 작은 뗏목을 발견했습니다. 뗏목에는 약간의 비상식량과 작은 물통 하나, 밧줄 조금, 그리고 비상용 손전등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뗏목과 몇 가지 물품이 앞으로 헤쳐 나가며 생존을 위한 사투(死鬪)의 133일 간 ‘푼 림’의 집이 되었습니다.
133일(1942년 11월 23일-1943년 4월5일)동안을 뗏목 위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는 단 혼자서 뗏목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브라질의 ‘베림’ 근방에서 표류하다가 어선에게 구조되었습니다.
‘푼 림’은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확실히 엄청난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낮 동안의 태양과 밤의 추위로부터 피신할 그 어떤 도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지에 다다를 때까지 살아남아 야겠다는 확고한 신념(信念)이 있었습니다.
그가 낮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살아 남기위해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뗏목 근처에 상어나 다른 위험한 바다 생물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뗏목에서 뛰어내려 수영을 했습니다.
마침내 1943년 4월 5일에 ‘푼 림’의 뗏목은 브라질 연안에서 떨어져 있던 브라질 세일리노 폴리스에 국적을 둔 25세 어부의 어선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구조되었을 당시 그는 놀랍게도 165㎝체구에서 겨우 9㎏밖에 몸무게가 줄지 않았으며 그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구조된 곳은 침몰사고 현장에서 무려 1,101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극소량(極少量)의 음식과 물만으로 4개월 이상 물에 떠 있었지만, 그는 단지 9kg의 체중만 빠졌고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푼 림’은 지금까지 인간이 구명정이나 뗏목 위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살아난 어떤 전례보다도 7일이나 오래 살았습니다. 혼자서 133일을 뗏목 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의 포기하지 않는 신념과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해상 생존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고, 세계 여러나라 해군에서 해상생존교본(海上生存敎本)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라발(Pierre Laval’. 1883-1945) 수상
프랑스의 정치가 라발 수상은 조심성과 교활한 성질, 그리고 대단한 정치적 센스 이외에도 다른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끈덕진 집착성(執着性)과 강인성(强靭性)이었습니다. ‘라발’이 연설을 하고 있는 어떤 정치적 모임에서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트레 봉! 끈기 있게 견뎌라!"
그러자 ‘라발’ 수상은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견디고 있다."
참아낸다는 것, 눈이 보이지 않는 부자유에서 그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에게 하루에도 수백번씩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살아남았고 자유로워졌습니다.
인내(忍耐)란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을 참아 놓고 인내했다고 자랑삼아 합니다. 평범한 참음은 많이 있지만 초인적(超人的)인 인내는 성공한 사람만이 경험한 것입니다.
35. “인내가 어떤 한 것인지를 알려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를 지켜보 면 된다.” 모든 일을 ‘늘 처음처럼’ 하라는 말은 순수하라는 말이 아니 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심정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독일. 1900-1980)’의 저서에서 '인내'에 대한 그의 주장을 주목(注目)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공의 기술을 다루든 의학의 기술을 다루든 어떤 기술의 실용에 다루는 기술과는 전혀 상관없이 요구되는 일반적인 요청이 있다. 우선 기술의 실용(實用)에는 '훈련(訓練)'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에 의하여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재미있는 취미일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 기술에 숙달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특수한 기술의 실용을 위한 훈련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의 문제로 된다는데 있다. 우리는 현대인에게 훈련보다 더 익히기 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현대인(現代人, modern)에게 훈련보다 더 익히기 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가장 훈련된 방식으로 엄격하게 규격화된 일을 하면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 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빈둥거리고 싶어 한다. 좀 더 고상하고 완곡하게 표현하면 '긴장(緊張)을 풀고' 싶어 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반항한다. 그리고 그의 반항은 유아적(幼兒的) 자기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아울러 권위주의에 맞서는 싸움에서 현대인은 모든 훈련을 스스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생활은 파괴 되고 급기야는 혼란을 일으키고 중심을 잃게 된다.
(중략)
기술 습득을 위해 정신 집중 외에 한 가지 더 필요한 요소는 '인내(忍耐)'이다. 다시 되풀이 하지만 기술을 배우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일을 해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현대인에게 이러한 인내도 훈련이라 정신집중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어떤 기술이 최고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견습공은 이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숙련공은 될 수 있을지라도 명장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다른 기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에도 필요하다.
(중략)
인내가 어떤 한 것인지를 알려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면 된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어린아이는 계속 일어서서 조금씩 고쳐 나가서 결국에는 쓰러지지 않고 걷게 된다. 만일 어른이중요한 일을 추구할 때 어린아이와 같은 인내와 정신 집중으로 한다면 무슨 일인들 성취하지 못하겠는가?》
36. 샤타그라하(진리파지. 眞理把持)
‘간디(Mohandās Karamchand Gāndhī. 1869-1948)’는 인도(印度)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인도인들은 그를 ‘마하트마(위대한 혼. Mahatm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어 귀국한 그는 어느 회사의 고문 변호사가 되어 남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면서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불살생을 기본 사상으로 하는 이른 바 간디주의를 정착시켰습니다. 특히 1913년에 나탈 주에서 트란스발 주로 향하였던 '샤타그라하(satyagraha 행진)'이 전 세계적인 반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샤타그라하라(satyagraha)’는 인도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올바른 노력'이다. 이는 간디가 만들어 낸 말로서 문자만의 뜻 외에 '진리의 힘' 또는 '정신적인 힘' 이라 보통 번역되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비협력', '파동적인 저항' 그리고 '국민의 불복종' 이라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돌아와 1년 동안 자기 고향땅의 냄새를 맡으며 각지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여행 기간 동안 인도의 여러 가지 문제를 면밀히 살펴보고는 아마다바드 근처에 ‘샤타그라하’ 초암(草庵)을 세웠습니다. 그의 유명한 ‘샤타그라하’ 행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사탸그라하’의 원리는 적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서 진리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간디의 말입니다.
간디가 말한 ‘샤타그라하’, 즉 ‘올바른 노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폭력주의로 대영제국을 인도에서 몰아낸 그의 사상에 비춰 본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올바른 뜻을 세웠으면, 그 노력 또한 정당한 방법으로 쟁취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기어이 인도의 독립을 가져왔습니다.
인도 전반을 지배하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 때문에 아니더라도 우리는 간디가 추구한 사상에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샤타그라하’로 성공했습니다.
노력은 인내의 다른 이름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력이 없는 인내는 그저 견디는 것일 뿐 발전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아니, 그것은 인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릅니다.
시인 ‘브라우닝(Browning, Elizabeth Barrett. 1806-1861)’은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
다.
'위대한 사람은 단번에 그와 같이 높은 곳에 뛰어오른 것이 아니다. 동반자들이 밤에 단잠을 잘 적에 그는 일어나서 괴로움을 이기고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인생은 자고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속에 있다.'
발을 뻗어 걷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단 1미터도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소원과 목적은 있지만 이에 필요한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감나무 밑에 앉아서 감이 입 속으로 굴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고 꾸준히 인내하는 것보다는 그저 실패할 걱정부터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원망하기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하여 대담하게 행동해야합니다. 행동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보단 과감히 행동하고 그것을 위해 올바르게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샤타그라하’입니다.
37. 중도(中途)에서 넘어진다 해도 목적이 있는 커다란 일로 애쓰는 사람들 을 존경해야 한다.
'고개에 오르려고 하다가 꼭대기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칭찬할 만한 일인가 중도에서 넘어진다 해도 커다란 일로 애쓰는 사람들을 존경하라 자기의 현재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본성의 힘을 되돌아보고 애쓰면서 고매한 일을 시험해 본다거나 또 초인적인 정신의 소유자로서도 해치울 수 없는 일보다도 더 커다란 일을 자기의 마음에 그려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L. A. 세네카
인생이란 문제는 너무나 광대(廣大)하고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구상에 많은 종교들이 이 광대하고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겼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대가 현재 소망하고 있는 이상(理想)은 높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대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한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정상은 얼음산으로 되어 있어 아무리 오르려고 해도 미끄러지고 계속해서 헛발을 디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이러한 문제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렴풋한 감상에 휘말리지 않고 오로지 성공을 위해 앞을 향해 전진하는 일뿐입니다.
젊은 시절의 방황은 때로는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방황이며 그대의 미래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 줄 자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대가 공허함을 느낀다면 그것을 최대한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단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방황만 하거나 공허함을 느끼며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맘껏 방황하고 맘껏 공허해해도 좋지만 그대는 돌아서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대 앞에 닥친 당면과제(當面課題)이며 헤쳐 나가야 할 필연의 고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먼 꼭대기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손쉬운 일부터 그대의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험을 볼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방법 중에 제일먼저 ‘아는 것부터 답을 쓰고 어려운 것은 나중에 하라’ 매우 평범한 진리이지만 매우 소중한 진리이다. 그것이 그대를 정상에 올려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첫 계단부터 착실하게 밟아 가는 것이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가 별안간 나타나 스타로 활동해 모두의 우상이 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에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나 순서 있게 행동하고 노력 하는 일에 지루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TV의 교육적 가치는 0%이고 흥미위주이기 때문에 돌출된 스타를 만들어 시청률을 상승시키고 있는 의도된 효과입니다.
《고통은 인내를 성장시킨다. 고통이 없이는 우리는 인내라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인생이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聖書 로마서 5:3-4
그대뿐이 아니라 누구나 몇 번씩 넘어진다는 것은 신이 누구에게나 준 과제(課題)이고 의무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강한 끈기를 보이며 다시 일어나는 것 또한 그대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성공적인 사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38. 황제(皇帝)라도 정도(正道)벗어나면 면전(面前)서 직언(直言)한 ‘급암(汲 黯)’은 늘 목숨 건 원칙주의자였다. 즉 NO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관리로서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지키며 처신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급암’의 자는 장유(長孺)이며 복양 사람입니다. 그의 조상은 옛날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 ‘급암’에 이르기까지 일곱 대에 걸쳐 경이나 대부를 지낸 가문입니다.
‘급암’은 아버지의 추천으로 경제 때에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됐습니다.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어려워했습니다. 중앙 정부에서 밀려나 지방에 나가 정치를 하면서 파당을 만들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급암’이 황제를 보필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효무제가 동월을 비롯해 주변 나라들이 시끄럽게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급암’을 보내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나라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본디 그들의 습속(習俗)이므로 천자의 사자를 수고롭게 할 만한 게 못 됩니다.” 자칫하면 큰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하남 지방에 불이 나 가옥 1000여 채가 탔는데, 황제의 명을 받들고 파견 된 그는 허락도 없이 하남의 곡식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돌아와서는 황제의 명을 어긴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로 그의 소신은 뚜렷했습니다. 이를 좋게 본 무제는 ‘급암’을 중대부로 승진시켰습니다.
그러나 ‘급암’의 강한 소신은 가끔 무제를 부담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원칙을 강조하면서 어느 때나 무제에게 직언(直言)을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결국 동해군 태수로 좌천된 그는 그 지역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임(信任)을 얻고 주변 군현까지 명성이 자자하니 무제는 ‘급암’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습니다.
무제는 내심 ‘급암’이 좌천(左遷)의 쓴맛을 보았으니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본성(本性)은 바뀌지 않는 법입니다. ‘급암’은 과시욕이 있는 무제에게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푸는 위선을 그만두고 요순시대의 참 정치를 마음속 깊이 본 받으시라"고 직간하면서 세게 몰아붙였습니다.
희한한 일은 ‘급암’을 시샘하는 신하들이 의외로 드물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못하는 직언을 마음대로 하는 그를 보며 오히려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는 듯했습니다.
‘급암’의 기준은 분명했습니다. 조정의 이권(利權)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이른바 돈에 관한 것은 제쳐두고 오직 황제와 국가 안위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무제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공무를 보거나 관을 쓰지 않고 정사에 임할 때도 있었는데, 멀리서 ‘급암’이 오는 게 보이면 급히 장막 뒤로 몸을 피할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급암’이 자신보다 늦게 조정에 들어온 자들이 출세하는 것을 보고 무제를 찾아가 옳지 않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하들을 등용하는 것은 장작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뒤에 온 사람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史記. 급정열전. 汲鄭列傳)
황제의 인사권을 정면에서 충고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먼저 승진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정치를 펼쳤지만 절대 권력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냉정했습니다.
훌륭한 참모라면 때로 자신이 모시는 최고 경영자가 욕망에 사로잡혀 있거나 겉으로 위선을 일삼을 때 이처럼 과감한 직언의 카드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이권에 자신의 일생의 모든 경력을 걸고 모험하는 이들이 많은데 진심으로 안녕을 원한다면 아닌 것은 ‘아니요’, 옳은 것은 ‘옳소’라고 하는 사람이 장명(長命)하는 것입니다.
39.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의 옥중서간(獄中書簡)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ru,1889-1964)’는 인도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는 인도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설계했고, 사망 후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중인 것을 보면 네루의 정치지도자로서의 훌륭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는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아홉 번이나 교도소(矯導所)에 갇혔던 사람입니다.
그가 여섯 번째 교도소(矯導所)에 갇혔을 때 그의 어린 딸은 13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딸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조차 투옥되는 바람에 딸은 홀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교육을 시킬 수 없게 되자 2년 동안 투옥 기간 내내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편지는 13세 딸에게 강인한 정신력과 위대한 민족정신을 심어 주고 올바른 세계관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인도의 첫 수상 네루였고, 그이 13세 딸은 후에 인도의 위대한 여성 정치가로 등장하게 되는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 인도 최초의 女性總理)’입니다.
간직한 많은 편지들은 '세계사(世界史) 편력(編曆)'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딸에게 보낸 편지였지만, 그 안에는 세계사에 대한 깊은 통찰(洞察)과 역사의식(歷史意識), 위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어떤 참고 서적도 구하기 힘들었던 옥중에서 쓰인 것이라는 사실, 네루는 독립운동가 이기 전에 훌륭한 역사학자, 인문학자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도 놀랍지만 그것보다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바로 13살 어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딸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고, 눈앞에 있는 커다란 과업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팍 들어가 그 때를 씻어 버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說敎)에 있지 않고 의견 교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종교시대와 로마제국의 변천을 시작으로 독일에서 나치의 승리, 의회 정치의 실패에 이른 근대까지의 세계 역사를 놀라우리만치 세밀하게 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게 얼마나 많은 잉크와 종이를 사용해 그 산더미같이 긴 편지를 썼었느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쓰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종이에 담은 내용들이 네 마음이 풍요롭게 해주었는지 궁금하구나.
나의 옥중 생활이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서와 집필(執筆)이 그 지루한 세월을 견디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기껏 역사의 윤곽만을 네게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우리의 오랜 과거를 여기저기 급히 돌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네가 역사를 알고 싶다면 네 스스로 과거 시대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내용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바로 알려면 감정을 갖고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네가 역사(歷史)를 애정(愛情)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무의미한 골격은 갑자기 살과 피를 갖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아버지의 사상과 정신력을 그대로 이어 받은 ‘인디라 간디’는 1966년 드디어 인도의 여수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필자도 네루의 역사 이해와 분석, 나라사랑에 적잖이 충격을 받아 ‘人類의 起源과 文明의 發生및 世界歷史’라는 긴 글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혼란과 방황의 적잖은 경우들이 역사의 흐름과 진행방향, 세계 국가들의 사건들과 교훈을 모르는데서 비롯됐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의 말대로 “역사(歷史)는 시간적 반복은 없지만, 사건의 반복은 있다”를 믿고 있습니다.
40. ‘범저(范雎)’오줌 세례(洗禮)의 치욕 참으며 살아남아 재상 자리에 올랐다면, 지금 우리는 지나치게 잘못된 자존심(自尊心)으로 인내를 모르고 모든 걸 망치고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의도(意圖)와 관계없이 위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역사속의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범저(范雎)’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입니다. 그는 유세(誘說)할 제후를 물색하다가 위나라 왕에게 유세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위나라 중대부(中大夫) 수고(須賈)를 먼저 섬기게 됐습니다. 수고는 위나라 소왕(昭王)과 친해 간혹 사자로 이웃 나라에 파견됐습니다.
그가 제나라에 파견될 때 ‘범저’도 따라 나섰지만 몇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어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물(人物)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동방의 전통강국 제나라의 ‘양왕(襄王)’은 ‘범저’가 유세(誘說)와 변론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금과 쇠고기와 술을 보내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무심결에 선물을 받은 ‘범저’는 의심 많은 ‘수고’에게 이 사실을 들키게 됩니다. ‘수고’는 ‘범저’에게 쇠고기와 술만 받고 금(金)은 되돌려주도록 하면서 내심 ‘범저’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런 선물을 받게 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됩니다. 위나라의 여러 공자(功者) 가운데 한 명인 재상 ‘위제(魏齊)’에게 고자질했습니다.
그러자 ‘위제’는 불같이 역정을 내면서 사람들을 시켜 ‘범저’를 두들겨 패게 했습니다. 갈비뼈와 이가 부러져 죽을 지경이었던 ‘범저’는 대나무 발에 둘둘 말려 변소에 내팽개쳤습니다.
‘위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범저’에게 갖은 모욕을 줘 배신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퍼뜨리게 하는 동시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이렇게 다스리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변소에 버려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겠기에 자신을 지키고 있는 자에게 거금을 주겠다며 매수했습니다. 그러자 ‘범저’를 지키던 자가 ‘위제’에게 달려가 ‘범저’가 이미 죽은 것 같으니 내다버리겠다고 했고 ‘범저’는 술에 취한 ‘위제’의 눈을 속이고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鄭安平)’이 이 소문을 듣고 ‘범저’를 데리고 달아나 함께 숨어 살았습니다.
‘범저’는 성과 이름을 바꿔 ‘장록(張祿)’이라 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그는 서쪽의 신흥 강국 진나라 사신 ‘왕계’를 따라 다시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실력자 ‘양후’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뛰어난 언변(言辯)과 책략(策略)으로 진나라 ‘소왕’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범저’는 ‘소왕’을 도와 36년간이나 끌어온 외척(外戚)정치를 청산하게 만드는 계책을 내고 다시 촉과 한중을 연결하는 잔도를 1000리나 개척해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조나라 군대 40만 명을 일거에 무찔러 다른 6국이 합종을 거론할 생각도 못하게 만든 후 재상에 올랐습니다.
다른 나라 출신으로 객경(客卿)인 그가 진나라 토착 세력들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도 ‘소왕’의 그림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습니다. 과거 자신을 ‘위제’에게 고자질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든 ‘수고’였습니다. ‘수고’가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며 자신의 죄를 빌자 ‘범저’는 과거의 치욕을 되새기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네 죄목은 세 가지다. 너는 예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여겨 나를 위제에게 모함했으니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기 위해 변소에 두었을 때 너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다. ‘위제’의 빈객들이 취해 번갈아가며 나에게 소변을 보았으나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다. 그러나 나는 너를 용서하겠다." ('범저 채택열전. 蔡澤列傳')
이후 ‘범저’는 친구 ‘채택’이 찾아와 '멈춤의 지혜'(The wisdom of stopping)를 터득하라고 조언하자 재상자리에서 내려와 은둔하면서 생을 마쳤습니다. ‘범저’의 멋은 여기에 있습니다. 치욕을 참으며 최종 승리한 것도 훌륭하지만, ‘멈춤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복수(復讐)욕과 명예욕(名譽慾)이 정상적인 것처럼 탈을 쓰고 있는 지금에 ‘멈춤의 지혜’는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것이다.
41. 자신에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능력(能力)이 있는데 이를 관심 있게 개발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승리(勝利)하는 사람이다.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恒常性,(Homeostasis)'을 추구합니다. 항상성이란 생명체의 내부 환경과 외적 환경 사이의 평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성질을 뜻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항상성(恒常性)의 사실을 가까이서 발견할 수 있는데 생명체의 진화(進化)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많은 시간과 번복되는 사건,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연적(自然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이며 조화적(調和的)인 변화를 해가고 있습니다.
새는 날기 위해서 속이 빈 뼈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타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하여 환경에 따라 몸 색깔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물체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그들만의 항상성이고 진화입니다. 외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자연히 멸종하게 마련입니다. 빙하기를 맞은 공룡들이 그러했고, 고대 원시 생물들이 그러했습니다.
항상성은 외부의 제약과 관련해서 우리 기관들이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가혹한 시련을 견뎌 내면서 거기에 자신의 기관들을 적응시켜 나가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한 항상성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 우리의 세포들과 기관들이 악착같이 항상성을 추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포들은 온도가 가장 알맞고 독성 물질이 섞이지 않은 최대한의 영양 액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그 상황에 적응한다.
술꾼의 간세포는 술을 절제하는 사람들의 간세포보다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흡연자의 허파 세포는 니코틴에 저항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외부 환격이 적대적일수록 세포나 개체는 이제껏 잠자고 있던 능력들을 자꾸 개발해 나간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중에서-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기도 합니다.
『외부 환경이 적대적(敵對的)일수록 세포나 개체는 이제껏 잠자고 있던 능력들을 자꾸 개발해 나간다.』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중 대단한 기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능에 대하여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실이고 교훈이 됩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혹은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몸의 의식과 인식보다 먼저 몸속의 신경계와 세포들이 바짝 긴장하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며 능력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체는 위대하고 생명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몸 속 세포마저 외부환경에 맞서 싸우는데 지각과 이성, 인지능력과 분석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러한 본태생적(本胎生的)인 기능을 가지고 자신의 보이는 미래에 대하여 대처할 능력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모순입니다.
언제나 능력(能力)이란 꼭꼭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그 어떤 굴곡도 없이 평안하기만 하다면 그 능력은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헤쳐 나가게끔 우리의 몸은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찾아내는 데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어떤 도전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더욱 강인해지고 위대해지기 위한 한 과정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것을 헤쳐 나가는데 주력하면 새로운 방법과 대책이 있어집니다.
42. 자신의 의심(疑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적(敵)이다.
그런데 의심을 적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자신의 치밀한 과학적(科學的)이고 논리적(論理 的)인 사고(思考)로 오해를 한다.
의심하는 것은 도전에 있어 가장 큰 적(敵)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회의적인 생각은 그대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대하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그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좀처럼 의심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 1765-1815. 미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이 증기선(蒸氣船, steamship)을 1807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했을 때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돛단배나 나무배가 아니라 증기선이 바다 위에 떠서 가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증기선을 구경하러 나온 대부분의 사람은 ‘로버트’의 증기선이 가라앉거나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증기선을 처음으로 시험 운항할 때 구경꾼들 중 한 남자는 이렇게 중얼 거리길 "저 배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움직일 리가 없어 절대 없어."
그러니 많은 군중들은 맑은 날 배가 바다에 가라앉는 증기선의 모습을 보기위해 모여들었다고 봐도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배는 돌연 증기를 내뿜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 입이 벌어졌고 눈앞에 나타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깜짝 놀란 남자는 한참 동안 배를 바라보더니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움직이긴 했지만 조금 있다가 정지되던지 가라앉을 거야. 계속 떠서 갈 리가 없지, 아무렴."
이런 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좀처럼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自尊心)을 위해 되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잘못돼 자신이 생각한 대로 부정당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로버트’는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증기선이 대양을 항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하며 마침내 성공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의심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심되는 것을 더 완벽하게 하기위해 더 많은 시간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모든 것을 보이는 대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사실 우리 곁에 일어나는 일들이란 것이 모두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능성(可能性)을 의심하는 나쁜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도전(挑戰)의 시작은 자신의 속에 있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하고 확신을 신념으로 변화시키는데 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가능성(可能性)은 무한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도 인간의 전체를 경험하거나 이해한 사람이 없고 한계 끝까지 가본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나의 사전에 불가능(不可能)이란 없다.’라고 자신한 것처럼 그대도 그대의 가능성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라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고르디우스’는 기원전 800년 왕가의 후손이면서도 가난한 농부생활을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어렵게 매듭을 맨 밧줄은 보이면서 그것을 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왕은 서슴없이 칼로 그 밧줄을 베어버리면서, "천하의 ‘알렉산더’가 이런 것을 풀게 생겼느냐!"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인간에게는 항상 도전해야할 일들이 산적(山積)해 있을 것입니다. 한 밧줄을 풀고 나니 더 어려운 매듭이 나타나고 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지 그것을 풀어야만 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베어 버리기라도 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방법 또한 도전의 한 방식입니다.
44. 겉만 보고 아픈 곳 찾아내는 명의(名醫), 그러나 그도 사람의 고집(固執) 은 고치지 못했다. 고집은 평생 자기 스스로 고쳐야 하는 숙제이다.
‘조짐(兆朕, symptoms)’이란 말이 있습니다. '낌새, 기미' 등의 뜻을 지니는 '기미'는 한자어 '幾微/機微'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느껴지는 기운을 뜻합니다. 심한 괴로움이나 병으로 인하여 얼굴에 나타나는 거무스름한 얼룩점 등을 ‘기미’라고 합니다. 특히 병은 그 실체가 감추어져 있으면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실체를 알았을 때는 손쓸 겨를도 없이 목숨을 앗아가 버립니다. 이런 ‘조짐’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사람이 명의(名醫)입니다.
현대의학에서 이를 대체의학(代替醫學, alternative medicine) 또는 예방의학(豫防醫學, preventive medicine)에 속할 것입니다.
그 중 중국의 ‘편작(扁鵲)’처럼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명의(名醫)도 드물 것입니다.
‘편작’은 발해군(勃海郡) 막읍 사람입니다.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입니다. 젊었을 때는 여관의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객사에 ‘장상군(長桑君)’이란 자가 와서 머물곤 했는데 ‘편작’은 그를 특이한 인물로 여겨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장상군’은 객사(客舍)를 드나든 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 ‘편작’을 불러 "나는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醫術)의 비방(秘方)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늙어 그대에게 전해 주고 싶다"고 은밀(隱密)하게 제안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편작’은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자 ‘장상군’은 품안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면서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은 물에 타서 마신 뒤 30일이 지나면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말과 함께 자신의 의서(醫書)를 모두 ‘편작’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30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편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투시력(透視力)으로 환자를 진찰하니 오장(五臟)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맥을 짚어 보는 척했지만, 사실은 누구도 모르는 비방(秘方)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졸지(猝地)에 명의(名醫)가 되어 제나라에 머물기도 하고 조나라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제나라로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환후(桓侯)’라는 왕이 ‘편작’을 빈객(賓客)으로 예우(禮遇)했는데 ‘편작’이 그를 보더니 대뜸 "왕께서는 피부에 병(病)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환후는 자신에게 질병이 없다며 "의원(醫員)이란 자가 이익을 탐해 병도 없는 사람을 두고 공을 세우려 한다."고 헐뜯었습니다.
닷새가 지나 ‘편작’이 다시 ‘환후’를 찾아가 "왕께서는 혈맥(血脈)에 병이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마음이 상한 ‘환후’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닷새 뒤에 편작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심각한 어조(語調)로 장과 위 사이에 병이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언짢은 표정으로 ‘편작’을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닷새 뒤에 ‘편작’이 찾아와 ‘환후’를 쳐다만 보고 그냥 물러나오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환후’가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탕약과 고약으로 고칠 수 있고, 혈맥(血脈)에 있을 때는 쇠침과 돌 침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장과 위에 있을 때는 약주(藥酒)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골수(骨髓)까지 들어가면 사명(司命.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고대 전설 속의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병이 골수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史記》중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환후’는 이제야 초급(超急)함을 알고 급한 마음에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성을 떠난 뒤였습니다.
‘환후’는 결국 치료도 못해보고 죽었습니다.
‘병입골수(病入骨髓)’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본다면 자신을 불신하는 ‘환후’를 치료하지 않고 떠나버린 ‘편작’의 태도는 의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인간이란 자신에게 화가 들이닥쳐도 그 심각성(深刻性)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보듯 거대한 빙하가 물위로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변변한 대처도 못해보고 죽은 ‘환후’는 명의에 대한 신뢰 부족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판단만을 과신하고 잘못된 정보로 자신은 건강하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있을 수 없다는 어리석음 때문에 화를 당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나마 많이 변했으나 남자들이 자랑하는 것 중, 이 나이되도록 병원출입을 안했다는 과신(過信)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45. 한순간이라도 명확(明確)한 목적과 확신 없이 행동하는 것은 여유(餘裕)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든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18세기에 하늘을 나는 낭만적(浪漫的)인 열기구는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최초로 열기구를 발명한 프랑스의 ‘조제프 미셸 몽골피에(Joseph-Michel Montgolfier, 1740-
1810)’ 최초로 무동력기구로 하늘로 올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자들이나 친구들 사이에까지 큰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골피에’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은 그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미국의 정치가이며 ‘건국의 아버지’,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입니다.
어느 날 ‘프랭클린’ 앞에서 과학자 한 사람이 ‘조제프 몽골피에’의 기구 상승 실험에 악담(惡談)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설사 기구가 공중에 올라갔다고 해도, 그것으로 어떤 목적이 달성되었단 말씀입니까?”
듣고 있던 ‘프랭클린’이 과학자에게 이렇게 반문(反問)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갓난아이가 열심히 움직이는데 어떤 목적을 가졌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프랭클린’의 말에 과학자는 한 마디의 대답도 못했습니다.
‘몽골피에’가 기구를 만든 목적은 그것을 하늘로 올리는, 그것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했을 때 그 기구를 이용한 ‘여러 가지 목적’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도전의 처음은 확실한 목적입니다. 목적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국 속담에는 ‘아내 없는 처가 집 가나마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적하는 것이 없는데 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121-180)’는 "목적 없이 행동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목적이 없는 행동은 구심점(求心點)을 잃고 헤매기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들 이룰게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그대는 도전하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정확한 '목적(目的)'을 세우는 것입니다.
언제나 목적은 구체적(具體的)이어야 합니다. 추상적(抽象的)인 목적은 그대의 행동에 박차를 가하지 못합니다. 노트에 하루 전 내일 해야 할 일과 이룰 목적을 정하면 유익합니다.
혹은 일주일, 혹은 한 달 안의 그대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면 더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체크하면서, 그대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습관(習慣)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든 처음이 어렵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어떻게든 끝까지 가게 됩니다.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단계에 이르는 일입니다.
이제 그대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면 됩니다. 숨이 턱에까지 차고, 쉬고 싶겠지만 끝까지 쉬지 말고 달리면 됩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많은 실패자들이 따라갔든 그 길입니다. 그대가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도전의 끝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전의 끝은 바로 성공입니다. 우리나라 산들의 이름들 중 ‘깔딱 고개’가 동리마다 있습니다.
‘깔딱 고개’ 이름이 생긴 당초(當初)는 그 고개를 오를 때 숨이 차고 힘이 들어 기진맥진한 상태를 ‘숨이 깔딱, 깔딱 한다’하는 의미로 본다면 고개 오름이 힘들기에 ‘깔딱 고개’라 칭했다고 봅니다.
우리의 생활 중 ‘깔딱 고개’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으면 하산(下山)의 편함과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46. 목숨 내걸고 13년간 서역(西域) 탐방 '실크로드(Silk Road)' 찾아낸 모 험가 때문에 동방(東邦)의 문명이 열렸다. 어떤 경우든지 새 역사를 위 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실크로드는 비단길이라는 뜻으로 내륙(內陸)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를 말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에 보면 독특한 기록이 눈에 띕니다.
바로 '대원열전(大宛列傳)'입니다. 이 편에서는 ‘장건(張騫)’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대원(大宛 .중앙아시아의 동부. 페르가나 지방에 있던 나라)의 사적이 알려진 게 이 위대한 탐험가 ‘장건’에 의해서이었습니다.
본래 ‘장건’은 한중(漢中) 사람으로 건원 연간에 낭관(郎官)이 됐습니다.
그 무렵 ‘한무제’는 투항해 온 흉노들을 심문했습니다. 흉노는 한결같이 월지(月氏)의 왕을 죽이고는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습니다. ‘월지족’ 역시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한 무제’도 흉노를 멸망시키지 못하면 위대한 제국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월지와 군사동맹을 맺어 흉노를 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월지로 가려면 흉노 땅을 지나야 했으므로 섣불리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때 ‘장건’이 자원해 임무를 수행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장건’은 흉노족 노예 ‘감보(甘父)’와 함께 흉노의 영토 안으로 들어갔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한 무제’의 의도를 알아차린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는 ‘장건’ 일행을 10여 년 동안이나 가두었습니다. 그 사이 ‘장건’은 결혼해 자식도 두었지만 한나라 사자로서의 직책을 잊지 않고 빠져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흉노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월지로 향했습니다.
수십일 이 지난 뒤 대원으로 들어섰습니다. 대원의 지도자는 일찍부터 한나라에 물자가 풍부하다는 소식을 듣고 왕래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터에 ‘장건’ 일행을 보고 대원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장건’은 흉노에게 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것을 말하면서 자신을 인도해줄 호위병을 주면 월지로 가 사명을 완수하고 한나라로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나라 왕이 엄청난 재물을 줄 것이라고 설득해 길 안내자와 통역(通譯)하는 동행자를 얻었습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월지에 도착해보니 왕은 이미 흉노에게 살해됐고, 태자가 왕위에 올라 대하(大夏)란 나라를 정복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장건’은 월지를 떠나 대하에서 1년여 간 머물다 귀국길에 올랐는데 남산(南山),즉 천산(天山)을 따라 오다 흉노에게 다시 잡혀 1년 정도 머물렀고 이후 내란을 틈타 흉노족 아내와 ‘감보’를 데리고 한나라로 돌아왔습니다. 13년 만이었습니다.
‘무제’는 돌아온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감보’를 봉사군(奉使君)으로 삼았습니다.
‘장건’이 가본 곳은 대여섯 나라였는데, 한나라 사신이나 장수중에 서역을 탐험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의 여행 덕분에 서역의 지리와 민족, 산물 등에 관한 지식이 중국으로 들어왔고 동서 간 교역도 늘어나게 됐습니다.
장건은 이후 장군 다음가는 무관인 교위(校尉)에 임명돼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에 나섰습니다. 사막에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군대는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위위(衛尉)’가 돼 장군 ‘이광(李廣)’과 함께 우북평으로 나가 흉노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장건’ 같은 탐험가가 없었다면 동서의 교류, 아니 실크로드 존재 자체를 몰랐을 것입니다.
실크로드로 불교, 이슬람교의 전파가 되지 않았다면 동방의 정신문화는 오랫동안 황패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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