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미소로 승화시킨 두 인물-정세균,서거석
정세균 전 국회의장과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
사라진 웃음 이 사회에 전염시키는 착한 바이러스
동굴과 험준한 산악지대 혹은 사막에서, 지진과 해일이 쓸고 간 흔적에서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가 재조명된다.
인간들도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며 이들 집단들은 흐르는 강물이 되어 물자국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걸어가는 나그네의 됨됨이나 퍼 올려지는 인상에서도 앞모습,뒷모습,옆모습에서 제각각 다르게 투영되어 되돌아 온다.
실물과 사진,영상으로 만나는 감성도 확연히 달라진다.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첫 인상은 사뭇 다르게 비춰진다.
옆 모습은 그나마 거울로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자신이 직접 체감하지 못하고 순전히 누군가의 잣대로 저울질 되는 것이 뒷모습이다.
벽을 바라보고 참선을 하는 스님들이나 작은 골방에서 십자가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신부님의 기도가 자신의 뒷모습에 대한 정화시간인지 모른다.
방송에 자주 들락이는 정치인,연예인과 같은 사람들의 경우 화면에서 느낀 밝은 미소는 사라지고 고독하고 습슬한 인상마저 들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방송에서 잔잔한 미소와 진실된 웃음이 새어나오는 모습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생활에서 자주 발견하게 된다.
남에게도 솜사탕처럼 안겨주는 미소가 증발된지 오랜 현실에서 언제나 특이한 그만의 미소로 상대도 미소짓게 하는 인물이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다.
최근들어 코로나위기 현장과 대선후보로 국토를 횡단하면서는 잠시 미소가 사라지고 얼핏 어둠과 고뇌의 잔구름마저 드리운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정세균 의원의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보며 가난이나 고통 따위는 없었던 시골 갑부집 자식으로 평생 고생없이 성장한 인물로 행복의 화신인 것 같은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런 그가 어린날 가난의 굴곡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중,고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술좌석에서 들을 수 있었다.
동창들도 학창시절의 정세균은 훤한 미소에 언제나 귀공자모습이었지 그렇게 찌든 생활환경이었는지는 정의원의 저서‘질좋은 성장과 희망 한국’이란 책을 읽고 나서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출판한 책은 치기적 냄새가 나 거의 읽지 않지만 그의 책중 ‘새로운 미래를 향해’라는 주제의 글에서 가난의 질곡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전북 장수에서 가난한 집안의 7남매중 셋째로 태어나 이웃마을인 진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에 멱 감고 잠자리 잡으로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기억은 별로 없고 소한테 먹일 꼴을 베러 다니고 몸에 부치는 나뭇짐을 메고 진땀 흘리던 기억만 난다. 중학교도 없는 산골이기에 면 소재지에 있는 고등공민학교까지 왕복 16km를 걸어 다니며 중학과정과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옮겨 다니는 우여곡절 끝에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근로 장학생을 하면서 학교를 마쳤다.”라고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미소는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비록 어렵게 공부했지만 나는 산골 마을에서 그나마 혜택받은 사람이다,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모든 아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60원 정도의 수업료를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진학을 포기하고 수업료가 밀려 중도 하차하는 아이들이 많았다.(중략)마을에서 가장 친한 내 친구가 그런 경우다.(중략)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기 위해 마을을 나설 때 소를 앞세우고 들로 나거던 그 친구와 마주치면 계면쩍은 눈인사를 나누면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중략) 단지 가난 때문에 가고 싶은 학교를 가지 못한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라고 술회한다,
40년대에서 70년대 사람들에서 이같은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지만 ‘정세균 당신도 가난의 봇짐을 멘 사람인가’라며 그의 삶을 의심하게 만든 인물은 그리 많지가 없다.
정세균의원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도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학교 매점에서 중학교 근로장학생으로 학교를 마친 인물이다.
이 시대의 역사적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들 두 인물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한 학교는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에 위치한 전주신흥 중,고등학교이다.
신흥 중,고등학교는 1900년 미국 이눌서(W.D.Raynolds) 선교사가 희현당 옛터에 학교를 설립하고, 제1대 하위렴(W.B.Harrison) 교장으로 취임하면서이다.
18세기 말 희현당에서는 '희현당장판'(希顯堂藏板)이라 하여 많은 책을 출판하였으며, 무쇠를 녹여 만든 '희현당철활자'(希顯堂鐵活字)를 이용 활계선생유고(活溪先生遺稿), 한훤차록(寒暄箚錄), 난곡선생연보(蘭谷先生年譜) 등 다수의 인쇄물이 희현당에서 활인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학교는 대부분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개교했는데 1885년에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1886년에는 이화학당을 설립하면서이다. 북장로교 선교들은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일고 고종황제는 개혁 조치중 하나인 “홍범 14조‘를 반포하고 나라의 인재들을 외국의 학문과 기예를 전습하라는 방침을 세워 관비유학생들을 배출시키기도 했다.
통역관의 양성기관인 1883년 동문학을 설립하고 1891년 일어학교, 1894년 영어학교가 세워지고 1895년에는 교육입국 조서를 반포한다,
1895년에는 관립한성영어학교,한성일어학교,한성한어학교가 각각 독립되고 인천에는 인천감리서 안에 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설립된다.(현 인천고등학교전신)
1896년 이후에는 개성학교,인천상업학교,부산상업학교,덕수상업학교,대구상업학교등이 개교하게 된다.
구한말 시대의 학교들은 과거와 현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였으며 국가적 위기때마다 이들 학생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전주신흥중,고등학교도 시대의 비운을 함께 맛본 학교인데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되었으며(1937년:선교사들은 종교가 다른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강제 동원된 학생들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항명이 발생됐다) 일제 패망과 함께 다시 복교되었다.(1946년)
전주신흥중,고등학교의 교가는 1910년대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이 부르던 대표적 군가의 하나인 '용진가'와 동일하고 후렴부 가사도 비슷하다. 독립군의 군가였던 용진가는 1911년 만주 서간도에서 개교한 신흥무관학교(경희대학교의 전신)의 교가로도 변형되어 사용되었으며, 북한에서는 군가로도 사용되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방문시에 북한 군악대가 순안공항에서 연주한 곡이 전주신흥고등학교 교가와 유사하다고 하여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이 곡들의 원곡은 미국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인 1865년 헨리 클레이 워크가 지은 조지아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전통적 배경이 있는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졸업한 두인물이 정세균 전 국회의장과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이다.
사춘기 시절의 학창시절에는 동급생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펌하된 시각으로 미소를 잃어버릴 법 한데 정세균(1950년생)의원과는 3년 후배며 서거석 전 총장과는 1년 선배인 (주)이오렉스 조태현사장은 학창시절 이들의 모습에 대해“정,서 두 인물에서 가난의 뗏국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당당했고 언제나 훤한 얼굴에 귀공자같은 모습에서 매우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고교선배인 정세균의원은 고등학교 총회장을 역임하는등 매우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정세균의원은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쌍용그룹 직원,제15,16대 국회의원(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원내부총무,총재특별보좌역,예산결산특별위원장,제17,18대 국회의원(전북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열린우리당 원내대표,국회운영위원장, 제9대 산업자원부장관(2006),열린우리당 의장,통합민주당 대표최고위원,제19·20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제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제46대 국무총리,사회보장위원회 위원장,상생과 통일 포럼 상임고문,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과 현재 20대 대통령 후보로 경선중에 있다.
서거석 전 총장(54년생)은 신흥중학교,전주고,전북대 법학석,박사,일본 주오대학(법학박사)을 거쳐 모교인 전북대 교수로 재직했다.
전북대 법과대학 학장, 전북대 법학연구소장, 일본 도쿄대학 객원교수, 전주경실련 공동대표, 전주고등법원유치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 한국소년법학회 회장(현), 한국비교형사법학회 회장,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전북대 제15대 총장으로 8년간 재임하며 전북대를 국립대에 걸맞게 위상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다.
이들 두 인물은 매점에서 빵을 파는 근로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이 사회에 가난도 인생을 미소 짓게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회 곳곳에 파급시키는 전도사 역할을 충실히 한 인물이다.
(환경경영신문, 환경국제전략연구소 김동환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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