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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9 -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는 말기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 혼란에 빠지다!
프랑스인 르네 그루쎄가 지은 820 페이지에 달하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책에는 앗틸라, 칭기스칸, 티무르는
오늘날에도 우리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저 소수의 야만인들이 문화가 발달한 문명지역으로 밀려
들어와 대국인 로마와 이란 그리고 중국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의 제국을 건설했으니 바로 원나라 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은 체구도 작고 왜소했으며 고원지대에서 매서운 바람, 혹심한 추위와
타는 듯한 추위는 유목민의 얼굴을 주름진 작은 눈과 높이 솟은 광대뼈에 숱이 없는 머리털로
만들었지만 반면에 강인한데다가 힘줄이 불거진 몸은 단단하게 만들었으니 침략에 나설수 있었다고 봅니다.
기마 유목민족이 농경민족 보다 전투에서 강한 것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싸우면서 신체가 단련된데다가 초지
를 찾아 계절마다 이동하고 마을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냥하는 생활 자체가 전투와 유사하니 평소에
이렇게 형성된 전투력은 전쟁에서 유리하며 또 보병이 아닌 기병인지라 진퇴가 자유로우니.....
불리하면 도망쳤다가 내일 아니면 다음달이나 내년에 재침해 유리할때만 전투를 선택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약탈에 그치지 않고 농경민족의 땅을 차지하고 눌러 앉아서 세월이 흐르면, 인간의 본성이 편안하고 사치
하며 여자와 음식에 옷을 탐하는지라 점차 문약해 지니 자연히 기병 군대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농경
민족이 되어 보병이 되는지라 결국 허약해져 망하게 되니 북위와 요나라, 금나라, 몽골 원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쿠빌라이 칸은 1264년 수도를 몽골의 카라코룸에서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 (中都 베이징) 로 옮기기로 하고
새로운 수도 대도 (大都) 를 건설한뒤 1271년 천도하고는 국호를 중국식인 대원 (大元)
으로 정했으며 연호도 중국식인 지원(指元) 으로 새롭게 바꾸니 쿠빌라이칸의 치세는 원나라의 전성기였습니다.
역참 제도를 확장하고 대운하를 대도(북경)까지 연결하며 문화와 경제에도 힘을 쏟아 대상인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또한 지폐인 교초를 발행하여 실크로드 무역 네트워크
활성화에 기여했으니 1260년대 부터 1290년대 까지 40년간 원나라는 대내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강력한 군사력 덕분에 평화시대로 서양과 문화교류가 활발히 일어났으니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한 것도 이 시대였으니....... '몽골 아래의 평화', 즉 '팍스 몽골리카'
였는데 원나라 군대는 황제와 수도를 지키는 근위대와 지방을 방비하는 지방군으로 나뉘었습니다.
근위대에 케식은 황제와 황족들을 호위하는 최정예군으로 10,000여 명에 달했으며, 시위친군
(侍卫亲军) 은 수도의 치안을 관리했으니 원 (元) 말기에는 30 대에 달하는 시위친군이
수도를 방비했는데 추밀원 직속으로 도지휘사를 두어 관리했고 계급은 3품 만호와 같았습니다.
지방군은 주로 몽골군과 탐마치가 요새를 방비했으니 북중국, 산시성, 쓰촨성 등의 몽골군은 각 지역의 도방호부
(都万户府) 의 지휘를 받았고, 남중국의 몽골군과 한군, 신부군 등은 평시에는 행중서성 그리고
비상시에만 추밀원의 지휘를 받았는데.... 다만 평시에도 군사 이동 같은 중요한 사무들은 추밀원이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대우가 좋지 않았으며 규율도 엉망이었던지라 쿠빌라이 사후 탈영과 민간에 끼치는 피해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군사 관련 정보는 기밀로 부쳐져 오직 황제와 추밀원의 관리들만이
전국 병사들의 수와 배치를 알고 있었고, 지방의 몽골 관리만이 해당 지방의 병사와 군마 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원나라군은 대포, 폭탄, 핸드 캐논 같은 화약무기들을 사용했는데 송나라를 정벌하던 양양 공방전에서 이미 대포와
화약을 엄청 발사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핸드 캐논이 원나라의
상도 유적에서 발견됐는데 일련번호와 제조정보까지 새겨져 있으니 생산이 체계화되어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353년에는 농민 반란군인 장사성의 군대에 맞서 화통 (火筒) 을 사용했다고 하며, 14세기 중반에는 화약의 최대
폭발력을 끌어내기 위해 질산염 농도를 12% 에서 91% 로 높이고 무려 6가지 다른 제작공식을 사용해
무기를 만들었으니.... 이렇게 만든 질산염 화약을 속이 빈 포탄에 채워 폭발상 원형 산탄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몽골 제국의 초창기에는 뛰어난 행정가 야율초재가 제정한 세수를 활용한 덕에 그 항목이 명확하고
세금도 일정 금액 이하로 제한됐으니..... 원나라 초창기만 해도 쿠빌라이 칸이
발행한 중통초와 지원초 등 교초도 상당히 오랫동안 정상적으로 유통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고질적인 황위 계승 문제로 내란이 벌이지는데.... 영종이 시해당하자 반란군들은 이순테무르
를 새 황제로 옹립하니 원나라 제6대 황제인 진종으로 제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하여 반란군 일파를 모두 숙청했는데 몽골적 생활방식을 중시했고 한인들의 병장기 소지를 금지했습니다.
다울라트 샤 등 색목인과 몽골인들에게 권력을 실어줬기에 조정의 실세였던 한인 관료들의 불만이 엄청났다고하며
본격적으로 민란이 발발하기 시작하는데,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난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니 원나라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필연적으로 증세로 이어져 민심 악화의 민란의 악순환을 불러옵니다.
1328년 진종이 붕어하자 장남인 라기바흐가 8세의 나이로 원나라 제7대 황제 천순제로 즉위하니 원 (元)
조정은 천순제를 지지하는 다울라트 샤를 주축으로 하는 상도파와 킵차크계 권신 엘테무르를 주축
으로 한 대도파로 나뉘었고, 대도파는 무종의 차남인 투그테무르를 따로 제8대 황제인 문종으로 추대합니다.
상도파와 대도파 양대 세력은 양 도(兩都) 전쟁을 벌여 상도가 점령되고 천순제가 실종됨으로써 문종의
대도파가 승리하게 되나, 문종의 형인 쿠살라가 차가타이 칸국을 등에 업고 군대를 이끌고
오자 위기감을 느낀 문종은 제위를 양보하여 1329년 쿠살라가 원나라 제9대 황제인 명종으로 즉위합니다.
명종은 부황인 무종 처럼 자신이 죽으면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약조했으나, 불과 6개월뒤 명종이
붕어하자 문종이 복위하게 되는데.... 이때 명종은 황태제 문종과 연회를 가진지
4일만에 목숨을 잃었으니 사실상 엘테무르가 명종을 독살했다고 보아 이를 '천력의 변' 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에 문종이 죽으면서 황위를 명종의 둘째 아들인 어린 영종이 즉위했으나 그후
2개월만에 붕어하면서 고려 땅 대청도로 유배를 가 있었던 명종의 장남인
토곤 테무르가 1333년 원나라 제1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혜종으로 즉위합니다.
혜종이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친정할수는 없었으니 권신 엘테무르가 죽자 13살에 불과했던 황제를 대신해
메르키트 부족 출신 장군 바얀이 국정을 운영했는데.... 혜종은 장성하면서 바얀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었으니 바얀의 조카 토크토아와 합심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쫒아냈고 토크토아가 실세로 부상합니다.
이 시기인 1345년에 오랫동안 미뤄왔던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의 공식 역사서를 편찬해냈으며,
황제들이 몇개월 간격으로 교체되는 혼란기는 종식되었지만, 이미 원나라는 흑사병의
창궐, 홍건적등 한족들의 대규모 반란, 권신들간의 권력 다툼 등으로 점점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중원의 몽골인들은 점차 한족 (漢族) 에 동화되며 몽골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원나라의 영향력은 약해졌으며
황제와 조정이 권력싸움과 사치에 골몰하니 부정부패가 횡행했고 사회적 불안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으니 전국에 반란군과 도적떼들이 나라를 들쑤시고 다녔고 원나라 군대는 더이상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습니다.
몽골 귀족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졌고, 돈이 절실해진 원 조정은 세율 인상과 동시에 지정교초 (至正交鈔)
를 대량으로 발행하자 경제혼란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으며 1351년에는 황하의 제방을
쌓는다고 인근 10만명의 농민들을 강제로 징집했는데, 농민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공사현장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은데다가 배급량마저 줄자 폭동을 일으킬 흉흉한 분위기가 일어났습니다.
1340년대 후반부터 가뭄과 홍수, 연이은 기근이 일어나 조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으니, 결국 백련교를
중심으로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토크토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홍건적을 막아냈으나
그의 위세가 지나치게 커질 것을 두려워한 혜종이 토크토를 해임했으니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른 것이라?
이로 인해 혜종은 일시적으로 조정 내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원나라의 멸망은 막을 수 없게 되는데, 홍건적
중에 두각을 드러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의 건국을 선언했고, 직후 대규모 북벌를 단행하여 원의 수도
대도를 함락시키니...... 수도를 빼앗긴 혜종와 원나라 조정은 북쪽의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면서 북원을 건립합니다.
북원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명나라와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북원의
제3대 황제인 천원제로 부터 제위를 찬탈한 조리그투 칸이 원나라의 황제
위를 버리고 몽골 대칸의 지위만 잇기로 하면서 1388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해버립니다.
다만 이후에도 다얀 칸과 알탄 칸 등이 꾸준히 명나라를 압박하면서 원나라의 부활을
노린 것은 물론, 원나라의 칭호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한 칸들도 더러 있어
청나라에게 내몽골이 정복을 당한 1635년을 원나라의 최종 멸망으로 보기도 합니다.
혜종 11년인 1351년 9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니, 중국 전역에서 홍건적과 백련교
세력, 군벌들이 득세했고 개중에 곽자흥은 반란군을 모아 안후이성 펑양현
일대를 함락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펑양현 출신인 주원장 이었습니다.
주원장은 농민으로 태어났지만 곽자흥 세력에 가담해 군사적 재능을 보여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는등 2인자
로 승승장구했는데... 독자적인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주원장은 세력을 키우기 위해 펑양현을 떠나
1356년 집경(난징) 을 점령하고는 응천부 (應天府) 로 개칭한 뒤 일대를 평정해 거점을 마련하는데 성공합니다.
주원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적은 영토와 쪼들리는 식량 때문에 다른 군벌 세력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주승(朱升) 의 '성벽을 높게 쌓고, 곡물을 널리 모으며 천천히 군왕의 자리에 오르라'
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원나라에 고개를 숙이고 신하를 자처해 창끝을 피하면서 꾸준하게 힘을 쌓아 나갑니다.
주원장의 세력은 급속하게 성장했으니, 1360년에 주원장은 난징 북서쪽 용만 (龍灣) 에서 또다른 홍건적 지도자
이자 최대 라이벌인 진우량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자, 진우량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고 구주로 도망갔고
1363년에 파양호 전투에서 또다시 진우량에게 대승을 거둔뒤 4년 뒤 1367년 오왕 (吳王) 으로 칭왕 후 즉위합니다.
주원장은 1367년 연달아 또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을 공격해 본거지인 평강을 함락해 장사성 세력을 소멸시켜
버렸고, 동시에 저장성 해안에서 군벌 방국진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렇게 모든 경쟁자
들을 제거한 주원장은 1368년 정월,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300년 역사 명나라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주원장은 1367년 여름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공격해 함락했고, 1371년에는 쓰촨성의 대하를, 1382년
1월 6일에 윈난성의 양왕을 쓰러뜨렸으며 또한 1387년에 나하추를 정복함으로서 요동에
대해서 완벽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1388년에 북쪽으로 쫒겨난
북원마저도 공격하며 세를 과시하니 마침내 한족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기록에 정복활동 초기에 몽골 제국은 한족 (漢族) 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었는데... 그러자 거란족 출신 재상 야율초재는 "그런데 중국인들을 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는단 말입니까?"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니 당시 몽골 제국에는 세금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인가 합니다.
하지만 스기야마 마사아키 (杉山 正明) 같은 학자들은 이 기록이 거짓일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니
몽골족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곳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리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칭기즈 칸은 생전에 몽골족이 아닌 이민족이라도 자신을 따른다면 관대하게 받아주었으니 이는
단순히 창업군주로서의 비범함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으며...... 또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게 임관했을 때는 엄연히 남송이 건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족 (漢族) 을 다 죽이고 비옥한 농토를 목초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몽골족들은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니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입니다.
“진여록(燼餘錄)” 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 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 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 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奴)' 라 하였고 여자는 '비(婢)' 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 에 의하면 원나라 때 거의 모든
한인 (漢人) 이 노예였고 외족 (몽골/색목인 등) 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대칸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하는데,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고 합니다.
강남에서는 지주들이 자치를 했으니,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으니.... 이들 중 일부는 훗날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 수백만 명을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하며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습니다.
김호동 교수는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 (漢族) 이 차별받았음을 말합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했으니,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나갑니다.
한족 (漢族) 을 정복왕조 내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으로 편입시킨 것은 원나라가 유일하지만.... 원명
교체기 때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漢人) 사족(士族) 들도 굉장히 많았으니,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
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즉, 원나라에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니, 즉 향촌의 양반지주인 사족 (士族) 들이 사실상 동네 왕
노릇을 할수 있는 구조였던지라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막북의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으며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습니다.
몽골은 고작 병졸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 (歸附軍行聘別監) 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원 (元) 에서 양중신 (楊仲信) 을 파견하여 폐백 (幣帛) 을 가지고 와 귀부군 (歸附軍 몽골에 귀부한 남송군)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했다. 왕이 과부처녀추고별감 (寡婦處女推考別監) 인 정랑(正郞),
김응문 (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 (道) 로 파견했다. 《고려사》 <세가> ,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원나라에서는 해마다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했으니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지거나 목을 메우 죽는 처녀
가 많았는데도 기씨는 부모를 위로하고는 이왕지사 되돌릴수 없는 바에야 기회를 잡기로 결심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인 환관인 고용보( 高龍普) 를 만났으니 고 환관은 그녀를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듭니다.
곧 훗날 기황후( 奇皇后) 이니 토곤테무르 카안의 세번째 제1 카툰이 되니 이름은 울제이 쿠툭이라?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는데, 정적인 제1황후 다나슈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바얀의 반대에도 제2황후가 되었고 황후 콩기라트의 얀 쿠툭이 사망하자 정비가 되어 아들을 황태자로 옹립합니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공민왕에게 오빠 기철이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해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오아으로 앉히려고 고려에 침공했으나 원날가 망하던 중이라 실패했는데....
원 혜종은 고려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던지라 고려에 대한 향수가 있어 고려 여인을 황후로 삼은 것입니다.
정비 다나슈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하고 인두로 지질 정도로 질투가 극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고
이를 원 혜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니 혜종은 정비 다나슈리의 친정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참이라 1335년에 승상 바얀과 손잡고 다니슈리 일문을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으니.....
과거에 다나슈리의 아버지 엘 테무르는 혜종의 아버지 명종을 독살했던 인물이었던 구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족 중에 원나라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많았던 다른 이유는 원나라가 오랑캐 몽골족이 세운 나라이지만, 유교 이념은
원나라 황제는 중국의 군주였기 때문에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니,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낸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과 서달조차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비록 오랑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황상이었던 사람이다“
“중원을 오랫동안 통치해 왔다. 즉, 그는 합법적인 통치자 였다. 어찌 체면을 살려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정말 그를 붙잡는다면, 어떻게 그를 처리해야 할 것인가? 전임 황제에게 땅을 하나 떼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죽여버려야 하는가? 그를 풀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