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ver} 블로그 {형람서원} 고경태 <능동적 순종, 개혁신학적인가? VS 개혁신학적이다.>
https://blog.naver.com/ktyhbgj/222727002977
예장 합신 전종득 목사님이 ‘고경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장로교회의 믿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22)’을 비평하는 글을 거의 날마다 {페북}에 올리고 계신다. 비문非文과 오역誤譯과 비非 장로교 신학을 담은 이 책은 ‘장로교 조직신학 박사가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내 안타까움을 자아낸 책이다. 기독교 문서 선교에 힘써온 출판사 이름에 똥칠한 책, 아무 말 큰 잔치를 벌인 책으로, 폐간해야만 하는 책1)이다. 이른바 “조직신학 박사” 고경태 목사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만든 책이다. ‘고경태 목사님이 공황장애를 겪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지금부터 고경태 목사님에게 Wolf를 쓰지 않을지라도,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이름 앞에 Wolf를 쓰고 싶으나 쓰지 않는 까닭은 고경태 목사님은 ‘과격한 용어를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들 행위, 그래서 나를 무척 과격하게 만든 Wolf만옥, Wolf이철, Wolf진남, Wolf창모 행위’를 한 적이 없는 인격, 이단이긴 했지만 고매한 인품을 지녔었다는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다운 인품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위 링크 글 역시 ‘개혁 교회 정통 교리인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이단시하신 스승 서철원 목사님을 옹호하려는 마음 그 자체는 높이 살 만하지만, 장로교 조직신학 박사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내 안타까움을 자아낸 글이다. 고경태 목사 공황장애를 의심하게 만든 글이다. 아무 말 큰 잔치를 벌인 위 링크 글에서 고경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동적 순종은 신약적 근거 없는 사변의 산물일 뿐이다. 서철원 박사가 처음에 제시한 제기 문장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누는 것은 신약에 근거가 없는 사변적 산물이다. 이런 주장이 있다면 그 어휘가 사변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 박사는 영생 얻음을 예수를 믿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영생 얻음을 율법 준수로 규정한다. 그것의 원류를 베자로 보고 있다.
“서 박사는 영생 얻음을 예수를 믿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영생 얻음을 율법 준수로 규정한다.”는 주장, 이 말은 장로교 조직신학 박사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 전가를 가르치는 개혁 신학’을 두고 “이런 신학을 새관점 학파라고 하는데”라고 하신 거짓말, 스승 서철원 목사님 새빨간 거짓말2)을 잇는 거짓말이다. 바꿔 말하면, 이 주장은 고경태 목사 공황장애를 드러내는 비문非文이다. 율법주의 행함구원론을 주장하며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부정하는 새관점 신학을 반대해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믿는 우리 개혁신앙인들 역시 “하나님께 죗값은 사망이라는 선고를 받은 죄인이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일, 오직 믿음 뿐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북} 그룹 {형람서원}에서 어휘 타령으로 나에게 수차례 면박을 받았건만, “이런 주장이 있다면 그 어휘가 사변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믿는 우리 개혁신앙인들이 “많은 신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능동 순종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이것까지 따지면,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영생)을 얻는다는 신앙의 도리는 그리스도 외에 우리 같은 죄인에게 해당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3)이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人) 그리스도께서는 처참하고도 치욕의 십자가 사형틀에서 죽기까지 죄 하나 없는 의인義人이셨다. 그리고 생명의 길인 모세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인罪人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 의인義人, 마지막 아담(人)으로 성육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진 할례를 받으신 뒤 율법을 범하지 않고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신 의義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얻으신 마지막 아담(人)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의인義人으로 선포하신 중보자, 마지막 아담(人)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신앙의 도리가 성경의 가르침3)이다. 그러므로 “영생 얻음을 율법 준수로 규정한다. 그것의 원류를 베자로 보고 있다.”는 비문非文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 순종으로 영생의 의를 얻으셨다. 그것의 원류를 베자로 보고 있다.’로 고친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믿는 우리 개혁신앙인들이 “그것의 원류를 베자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칼빈 선생님으로 보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교부 어거스틴 선생님으로 보고 있는가? 위 링크 글에서 고경태 목사는 “정통신학은 교부신학이지, 개혁파 후기 신학자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어휘는 아니라고 필자4)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페북} 그룹 {형람서원}에 올렸던 내 글과 ‘행위 언약의 원조로서 어거스틴 선생님’을 다룬 내 글을 링크한다.
<‘서철원 교조주의’ 목사들은 {기독교 강요}도 수거해 불태워야 합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92
어거스틴 <‘행위언약’과 ‘마지막 아담의 표상으로서 첫째 아담’>: 불후의 확증편향 난독증 환자 Wolf진남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54
다음은 위에 링크한 고경태 목사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효력에 대한 토론이 될까? 영생의 근원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있을까?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을까? 다른 어떤 곳에 있을까? 이러한 토론에서 그리스도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고, 현대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현실화로 규정하면서 종교 다원주의가 만개하게 되었다. 영생은 현재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께 있고, 영원히 그렇다(고경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5)에 있을까? “그리스도의 이름”5)에 있을까?
“그리스도의 현재성”??????? 이른바 “조직신학 박사” 고경태 목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하신 까닭을 모르는가? 즉, 주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하신 뜻을 모르는가? 바꿔말하면, 오늘도 “나는 나였고, 나는 나고, 나는 나일 것이다.”(출 3:14)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현재성”은 “나는 나였고”라는 그리스도 과거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모르는가? 그리고 현재의 ‘그리스도 이름’은 과거의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음을 모르는가? 고경태 목사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런 글을 놓고 “삼천포로 빠진다.” 하기도 하고 “사변”이라고도 한다. 이 문제를 더 따져봐야 글이 길어지니, 내 글을 링크한다.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세대주의 누룩>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51
다음은 링크한 내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 사도께서 “그분께는 죄가 없으셨느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느니라.)”고 하셨음에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그리스도 말씀에서 “길”, “진리”, “생명”을 ‘그리스도 신성神性의 의義(본질의 의)’로 독해하는 그들은 “길”, “진리”, “생명”을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성육하신 주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모든 생애 동안 흠 하나 없이 이루신 의義’로 독해하지 못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에서 ‘마지막 아담(人)인 중보자(딤전 2:5)로서 “나”, 그리스도’로 독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ㅡ“길”, “진리”, “생명”이 성 삼위 성자 하나님 본질에 속한 신성神性의 의義이면, 굳이 성 삼위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중보자’로 성육하실 필요가 있었겠는가!ㅡ
다음은 위에 링크한 고경태 목사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창세기 2장에서 행위언약(창조언약, 자연언약, 첫언약)에 대해서 WCF는 성경을 그대로 진술하는 내용이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계명이다. 반대 명제로 “먹지 않으면 산다”는 것으로 사색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때 ‘산다’는 ‘영생’이 아니다. 그래서 한 번 사색이 증가하여 그렇게 “계속 살았다면 언제가 영생으로 갔었을 것이다”라고 확장시켰다. 이 확장된 개념이 확정적 개념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사색으로 확장된 개념은 사색이지 확정적 개념이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 그 다음의 문제에 대해서 멈추는 것이 겸손한 자세이다.
“창세기 2장에서 행위언약(창조언약, 자연언약, 첫언약)에 대해서 WCF는 성경을 그대로 진술하는 내용이다.”, 이 문장 역시 비문非文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행위언약(창조언약, 자연언약, 첫언약)에 대해서 WCF 내용은 성경을 그대로 진술하는 내용이다.’로 고친다.
그런데 “WCF는 성경을 그대로 진술하는 내용이다.” 해 놓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계명이다. 반대 명제로 “먹지 않으면 산다”는 것으로 사색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ㅉㅉㅉ!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ㅡ약어: WCFㅡ [제7장: 하나님의 언약] <2항>이다. ‘{영한대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나용화 역 (광주: 한국복음문서협회, 1979)’에서 옮긴다.
인간과 맺으신 첫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그 행위언약으로 생명이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약속됐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2항>은 이와 같이 율법의 두 기능인 ‘생명의 길로서 율법의 축복’과 ‘사망의 길로서 율법의 저주’에서 ‘생명의 길로서 율법(행위언약)의 축복’을 고백한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반대 명제, 행간 의미인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를 고백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출판사 기독교문서선교회 이름에 똥칠한 책,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장로교회의 믿음}을 펴낸 고경태 목사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계명이다. 반대 명제로 “먹지 않으면 산다”는 것으로 사색》한 고백서가 아닌가?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 그 다음 문제에 대해서 멈추는 것이 겸손한 자세이다.”??????? 그동안 펠라기우스다운 고매한 인품을 보여줬던 고경태 목사는 “겸손한 자세”가 몸에 익숙한 조직신학 박사이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생명)을 얻으리라.”는 명제에서 ‘주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반대 명제(행간 의미)를 독해하지 못하는가?
여기에서 신대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신자인 내가 조직신학 박사 고경태 목사에게 굳이 ‘{기독교 강요 제2권} [제7장] <3항: 율법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함>’에 있는 글, “율법에서 우리가 의의 완전함을 배우는 것이 사실이라면, 곧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함으로써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해 모세는 율법을 공포한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불러서, 자신이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앞에 둔 사실을 두고 증거로 삼은 것이다(신 30:19).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율법을 지키면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주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를 또 인용해야 하겠는가?
다음은 위에 링크한 고경태 목사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예수께서 율법을 준수했는가? 율법에 순종했는가? 이 문장은 롬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에 의해서 순종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순종함으로 의인이 됨’으로의 구도이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는 율법에 순종했다는 근거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단순하게 아담의 불순종에 대조되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행해서 율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율법을 준수했다면, 예수께서 준수하신 율법의 내용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율법을 준수했는가? 율법에 순종했는가?”6)??????? 내 머릿속 {국어사전}에는 ‘준수=순종’으로 저장돼 있음에도, 고경태 목사 머릿속 {국어사전}에는 ‘준수≠순종’으로 저장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문장 역시 비문非文이다.
“로마서 5장에서는 율법에 순종했다는 근거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단순하게 아담의 불순종에 대조되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어렵사리 독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그리고 병행해서 율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한다.”는 좀처럼 독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누가 “병행해서 율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인가? 바울 사도께서? 고경태 목사가?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믿는 우리 개혁신앙인들이?
“로마서 5장에서는 율법에 순종했다는 근거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단순하게 아담의 불순종에 대조되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 역시 비문非文이다. 이 비문非文을 ‘로마서 5장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로마서 5장은 단순하게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로 고친다.
아담의 불순종은 무엇을 범한 불순종이었는가? 행위언약인 하나님의 율법 ‘선악과 금령’을 범한 불순종이 아니었는가? ‘선악과 금령’은 율법의 대강령 하나인 ‘하나님 사랑’을 시험하는 시금석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또한 창조물의 머리(창 1:26~28)이자 인류의 머리(맏형님)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이 율법의 대강령 또 하나인 ‘이웃(형제) 사랑’(요일 2:3~11)을 명심해 범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그러면 “단순하게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무엇을 행하신 순종이었겠는가?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신인합일神人合一 이단 지방교회가 ‘선포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을 주장하건만, 세대주의 누룩을 제거하지 못하신 채 “칼빈도 깨닫지 못한 성화론”이라며 ‘선포(믿음 고백)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을 주장하신 서철원 목사님은 “예수에게서 율법을 예사로 범하는 일이 진행됐다.”고 하셨는데, ㅡ‘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담은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마음 내키시는 대로 예사로 범하고ㅡ 오직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율법의 저주, 사망 선고만을 당하신 순종이었는가?
그렇다면 로마서 2장 13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바울 사도 말씀에서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는 ‘오직 율법의 저주를 당하는 자’를 뜻하는가? ‘생명의 길로서 율법의 축복’은 모른 채 ‘율법의 저주’만을 아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은 종말에 율법의 저주, 사망 선고를 당하는 불신자들을 두고 대동단결해 “이 사람들은 정녕 의인義人들이었다.”고 합창할 셈인가? 예장 합신 김병훈, 노승수 목사님을 이단 제소했던 예장 합동 경성노회와 지난 예장 합동 봄 노회에서 예장 합신 합동신학원을 이단 제소한 예장 합동 꼴뚜기파 세 노회는 ‘이단들 주특기 하나는 성경 전체를 보는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듣보잡 노회들인가?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義人이었도다.” 하고, (눅 23:47)
다음은 위에 링크한 고경태 목사 글에서 옮긴다.
우리는 여호와(YHWH, Tetragrammaton)의 이름(하쉐임)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명확하게 알기 때문에 힘껏 부르며 전파해야 하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활 제일주의에 대해서 배격한 경험이 있다. 그때는 십자가를 외면하고 부활만 강조하는 경우였는데, 그때 우리의 주장은 그리스도 전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강조에서 동일한 장벽에 닥쳐 있는 것 같다.
“그때 우리의 주장은 그리스도 전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 역시 비문非文7)이다.
인터넷 {갓피아 성경} {개역개정 성경} 검색창에 ‘여호와’를 검색하면 ‘5910’ 건(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YHWH, Tetragrammaton)의 이름(하쉐임)을 부를 수 없다.”??????? ㅉㅉㅉㅉㅉㅉㅉ!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강조에서 동일한 장벽에 닥쳐 있는 것 같다.”??????? 나는 {Daum} 카페 {개혁주의 마을}에서 2015년 여름에 춘천 한마음 교회 김성로 목사 이른바 “부활 복음”을 “반쪽짜리 다른 복음”으로 정죄했다. ‘우리 신앙의 정점으로서 그리스도 부활’은 강조하고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음에도, 김성로 목사 부활 복음을 정죄한 까닭은 ‘그리스도 십자가와 그리스도 부활은 구별할 수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건만, 김성로 목사 부활 복음은 이 둘을 분리해 그리스도 십자가는 건너뛰어 부활만을 강조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명의 길로서 율법의 축복’’은 모른 채 ‘죄를 범하지 않으신 의인義人으로서 그리스도 전全 생애’(벧전 2:22. 히 4:15)를 건너뛰어 오직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십자가 순종’만을 강조하는 복음, 반쪽짜리 다른 복음을 전하는 무리, 이단의 무리는 누구인가? 스승 서철원 목사님을 맹종해 ‘개혁 교회 정통 교리인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이단시한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이 아닌가!
위에 링크한 고경태 목사 글에 적힌 ‘{기독신문} 서철원 [능동적 순종, 개혁신학적인가?]’는 내가 이미 비평한 글이다. 링크한다.
<“그리스도의 성화”를 말씀하신 칼빈 선생님도 이단이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22
Wolf이철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감사하신 미국 정통장로교회 그레샴 메이천 목사님을 두고 “말년에 노망들었나 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두고는 “쓰레기 교수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바른 믿음}에 “김병훈은 교수도 목사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이고 본질이 틀려먹은 사람입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병자입니다. 죽어도 못 고칩니다. 마귀의 자식이예요. 두고 보세요.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제 버릇 개 못 줍니다.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하려면 하라고 내버려 놓으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요.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할 거예요.“라는 글을 옮겼다.
누가 말년에 정녕 노망들었는가, 정리하자. 누가 정녕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이고 본질이 틀려먹은 미친 정신병자 쓰레기 교수인지, 정리하자. 누가 정녕 마귀의 자식인지, 정리하자.
① “구약 시대는 성부에 의한 중생, 주님 공생애 시대는 성자에 의한 중생, 오순절 성령 강림 뒤에는 성령에 의한 중생”이라는 세대주의적 중생론을 가지신 서철원 목사님이 세대주의 누룩을 제거하지 못하신 것이 이 분란의 근본 원인이다.
② <산상보훈> “옛사람에게 말한바”에서 “옛사람”은 ‘모세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한 유대교 장로들 유전, 사람의 계명’을 뜻한다. 그러함에도 세대주의 누룩을 제거하시지 못한 나머지 ‘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 (1984)’에서 서철원 목사님은 “옛사람”을 “모세 율법”으로 해석하셨다. 참고로,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신인합일 이단 지방교회가 서철원 목사님과 똑같이 해석한다.
③ 세대주의 누룩을 버리지 못하신 나머지 서철원 목사님은 ‘위 ②’와 맞아떨어지는 해석(주장), 새관점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의 이른바 “예수의 전권 주장”론을 수용해 후기 저작인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4권: 그리스도론} (2018)’에서도 ‘<산상보훈>에서 모세보다 월등한 권위로 모세 권위(모세 율법)를 뒤엎으신 예수의 전권 주장, 예수의 권위’를 주장하셨다.
④ 모세 율법을 뒤엎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면, 당연히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은 성립할 수 없다.
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나 ‘서철원 {기독론} (2000)’에서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서철원 {종말론 강의} (1993)’에서 “율법을 범하는 일이 예수에게서 예사로 진행됐다.” 하신 것이다. 또한 지난해 2월 예장 합동 이대위 세미나에서도 ‘개혁 교회 정통 교리인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교리’를 이단시하는 근거로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셨다.”를 내세우신 것이다.
⑥ 서철원 목사님 초기 저작인 {복음과 율법의 관계}나 {종말론 강의}나 {기독론}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1990)’에서 서철원 목사님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세대주의 누룩을 버리지 못하신 나머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옷차림을 한 신학,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는 새관점 신학 단추를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는 개혁 신학 단추 구멍에 끼우는, 우스꽝스러운 옷차림한 신학이었기 때문에 결국 말년에는 ‘그리스도 능동 순종’마저 부정하신 것이다.
⑦ 웃픈 것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시면서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는 신학’을 “새관점 신학”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정도면 치매를 의심해야 한다.
============
1) 아무 말 큰 잔치를 벌인 불후의 졸작이라는 점에서는 가보로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2) {바른 믿음} 서철원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
3) 그동안 수차례를 증거 성구들을 적어 이를 논증하는 글들을 썼기 때문에 굳이 증거 성구들을 적지 않는다.
4) “필자筆者: 글쓴이”는 3인칭 대명사다. 그러므로 1인칭 대명사 ‘나’로 써야 한다.
5) ‘쌍(큰) 따옴표’는 ‘드러냄표’가 아니다. ‘외(작은) 따옴표’를 써야 한다.
6) 마지막 아담으로 성육하신 예수님께서 부활로 우리 맏형님이 되셨을지라도, 우리 주님이신 성 삼위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 “했는가?”가 아닌 존댓말 ‘하셨는가?’를 써야 바른 어법(예법)이다.
7) “것이다.”가 아닌 ‘것이었다.’가 바른 시제다. 일본어 어투 “의”가 들어간 “우리의 주장은”도 ‘우리 주장은’으로 쓰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