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의 한국불교
어제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기상대는 뒤늦게 알리고 있다.
간밤 내 비가 내리더니
골짝 물소리가 산 위에까지 울려오고 있다.
잠결에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아궁이에 물이 괴기 전에 재를 쳐내야겠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생각하면서 잠을 설쳤다.
이번 장마철에 읽을 책을 몇 권 골라 놓았다.
장마철은 무덥고 습기 차고 지루하니까
가벼운 읽을거리에 기대면 더위를 잊고 집중할 수 있어 좋다.
톨스토이의 <두 노인>을 며칠 전에 다시 읽었다.
러시아 전래의 민화를 바탕으로 엮어진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두 노인이 성도(聖都)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한 사람은 부자 농부로 예핌 따라스비치 셰베로프라는 인물이고,
또 한 사람은 돈이 별로 없는 에리세이 보도로프라는 사나이다.
예핌은 고지식한 농부로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태어난 이후 남에게 욕을 한 적이 없고 매사에 엄격하고
야무진 성미였다.
그는 두 번이나 마을의 반장을 지냈지만
단돈 1원도 어김이 없었다.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 일흔이 되었는데도 등도 구부러지지 않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에리쎄이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노인으로 젊어서는 목수 일을 하러 다녔으나,
나이 먹은 뒤로는 집에 있으면서 꿀벌을 치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외지에 나가 있었고,
둘째아들이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씨 좋은 명랑한 사나이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두 노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함께 성지순례를
떠날 약속을 해놓고 있었지만, 예핌 노인 쪽이 집안일에
끄달려 차일피일 미루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에리쎄이가 말했다 "언제 성지순례를 떠날 건가?"
예핌은 얼굴을 찡그리며 집안일이 많아 어쩌고 하면서
또 물러앉으려 하는 것을 에리쎄이가 다그쳤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죽을 몸인데 남은 자식들은
우리가 없어도 다 잘해 나갈 것이네.
자네 아들도 지금부터 일을 배워서 익히도록 하게나."
그렇게 해서 그들은 길을 떠났다.
몇 주일째 계속 길을 걸어왔기에 에리쎄이는 잠시 쉬면서
물도 좀 마시고 쉬고 싶었으나 예핌은 길을 멈추지 않았다.
한 농가 앞에 이르렀을 때에 에리쎄이는 잠시 들어가
물을 얻어 마시고 올 테니 먼저 가라고 이르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때 그 집 안에서는 온 식구들이 굶주림 끝에
돌림병까지 앓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에리쎄이는 성지순례의 길을 단념하고
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했다.
한편, 먼저 길을 떠난 예핌은 한동안은
친구가 뒤따라오기를 기다렸으나,
자기가 나무그늘에서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혹시 지나치지 않았는가 싶어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성지를 향해 길을 걸으면서도 그의 머리 속은
집안일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가축일이며 논밭 일을
제대로 행하고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리고 혹여 지갑을 도둑맞지 않을까
곁에 가까이 다가서는 이들도 경계했다.
에리쎄이는 그 집 식구들이 병고에서 일어난 후
먹고 지낼 양식과 땔감을 마련해 놓고 집으로 돌아온다.
에리쎄이가 혼자서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가족들에게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주님의 인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도중에 여비를 모두 잃어버렸지. 그래서 더는 갈 수가 없었어!"
그 농가에서 있었던 일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시 그 전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보살폈다.
이때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핌은 순례자들로 혼잡한
성당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성화가 타고 있는 제단의 맨 앞에 자기의 친구인
에리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에리쎄이의 뒷모습 둘레에는 둥근 원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 친구가 언제 왔지?"
하고 친구 쪽으로 밀치고 나아가려 하는데,
친구의 모습은 홀연 사라지고 만다.
순례에서 돌아온 예핌은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몸만 갔다가 왔구나. 이 세상에서는 죽는 날까지
자기의 의무를 사랑과 선행으로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람 된 도리이다."
윤 5월이 왔다. 윤달이면 이 절 저 절에서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가 행해지고,
하루에 절을 세 곳 찾아가야 극락에 간다는 속설이 떠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어디에 종교의 본질이 있는지,
이 <두 노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1990).
법정<버리고 떠나기>중에서
출처 : 금음마을 불광선원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