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닌데
전업 주부로 살다가 IMF 당시
우연히 TV에 나왔다가 유명강사가 되었던
정덕희 씨가 자신의 학력이 가짜라고 고백(告白)했다.
처음 강의를 부탁 받을 때도
그녀는 분명히 ‘저 고졸인데요.’라고 말했고,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저는 정규과정을 밟은 적 없다’고
말했는데도 '방통대'졸업으로 나왔다고 한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말하고 다녀도
그녀를 더 부가가치 높은 사람으로 포장하려고
어느 날부터는 석사(碩士)라고 소개했다.
요즘에는 허위(虛僞)학력 커밍아웃 주간인지
아니면 고백하기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서로 다투어
잘못된 학력을 스스로 공개하고 있다.
만화가 이현세 씨, 스타영어강사 이지영 씨를 지나
연극배우 윤석화 씨까지 오더니 이제
종교계 지광 스님도
이 대열에 서고 있는데,
어디까지 이 행렬(行列)이 계속될지 궁금하다.
바로 이럴 때 김추자 씨의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들으면
가슴 뜨끔할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을 것 같다.
이쯤 되면 세상은 거짓말과의 전쟁 중이라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닐 것 같다.
특히 외국에서 학위를 받으신 분을 보면
‘혹시 저 사람도..’라는 의심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지금에 와서야 그런
고백(告白)을 하는 것일까에 모아있다.
나중에 더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으니까
여론에 떠밀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론 자기 양심과의 싸움이
가장 큰 요소가 되었을 것 같다.
모든 인간은 항상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욕심(慾心)과 반비례하여
양심과 싸우며 괴로워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본성 안에 있는 양심(良心)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끊임없이 곁에서 율법처럼 견책하기에,
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정직(正直)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안과
삶의 자유로움이 없기에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양심의 고백을 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양심이
아무리 큰 소리로 소리쳐도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사회는 음주문화와 함께
거짓말에 대해 너무 관대(寬大)하다.
‘하멜표류기’에 보면 네덜란드인들이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을 때 한국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던 일 중의 하나는
남을 속인 것을 자랑하더라는 것이다.
공산당은 생존(生存)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거짓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했을까.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는
간판을 중시하는 것이 한국정서다.
고졸이라고 하면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하여
그의 학력을 부풀렸을 것이다.
이러한 학벌지상주의는 이 사회의 병폐이며,
모든 부조리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반상제도나
인도 카스트 제도를 능가하는 신분사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을 한 때의
바람으로만 보지 말고, 고질적인 병폐를
고칠 수 있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먼저 정직(正直)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기회로 삼자.
포항에 있는 한동대에서는
영어와 한문, 컴퓨터는 규정한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졸업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사실 특별(特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채플’이 필수로 더해지면서
학생들이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싫든 좋든 패스제인 채플을 통해,
자아를 찾고 인생의 기준이 만들어지면서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먼저
외적으론 주초문제와 무감독 시험(試驗)이었다.
초등학생에게도 통하지 않을
정직(正直)에 대한 관이 달라지면서,
더 큰 변화는 기업에서 한동대 학생을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찾더라는 점이다.
정직은 가장 무가치(無價値)한 일처럼 보이지만,
인생에서 이것만큼 큰 능력도 없다는 것은
오늘도 곳곳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정직이란 최고보다는
최선(最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장거리 인생에서 정직과 성실이야말로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능력(能力)이 있다 해도
정직과 성실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인간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깨지기 마련이다.
천재는 1%의 영감(靈感)과
99%의 성실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성실만 뒷받침된다면 1% 천재성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번 사태로 표면에 떠오르는 사람들을 보라.
단 한 사람이라도 게으른 사람이 있던가.
비록 대학교 졸업장은 없다 해도
열정과 끼로 목숨까지 걸었던 열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자기 분야에서
전부 다 최고(最高)가 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들을 탓하기 전에
그렇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던 부조리한
이 사회를 먼저 탓한 후에
그들의 잘잘못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을 빌미로 학력보다는
실력(實力)을 우선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윤석화, 이현세, 이지영 씨 등은
이미 자기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실력 있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다른 분야도 아닌
문화예술 조차 실력이 아닌
학력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는 덫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이 사회가 외적인 간판 때문에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장되어 있는 가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셈이다.
오래 전에 달달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에는
분명히 ‘능력과 실질을 숭상하고’로
나와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는
‘학력과 간판을 숭상하고’가 되어
이런 수치스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단 말인가.
아무리 실력(實力)이 있어도 학력이 없으면
그 어떤 능력도 인정받을 수 없고,
반대로 실력은 없어도 학력만
좋으면 대우받는 사회가 빚어낸 부작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사태를
학력의 거품을 걷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물론 분야에 따라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곳도 있겠지만,
학력이 필수적이라 할 수 없는 분야에서는
현장에서 얻어진 경험이 외적인
자격증보다는 더 우선되어야하기에
학력과 현장 실력을 분명하게 구별 짓자는 것이다.
이 일이 꼭 필요한 것은
학벌과 상관없이 현장 능력을 더 우선해야만
전문(專門)분야에서 독보적인 사람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는 명문대를 나와도
백수(白手)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허나 고졸이지만 전문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땀 흘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도대체 연극과 학력이 무슨 상관인가.
윤석화 씨의 연극을 보고서
생을 마감하려던 사람이 새 삶을
얻었다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정덕희 씨도 실력이 지금의 자리를
만든 것이지 석사라서 그런 능력이 있었겠는가.
앙드레김 김봉남 씨는 대학 나와서 성공했던가.
대표적인 영화감독 임권택 씨도 중퇴다.
예수는 아예 학교 간 적도 없었다.
나는 위 다섯 사람들을 다 좋아한다.
학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다만 그들의 인생이 좋았고 다음으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실력이 있기에 좋아했었다.
이지영 씨도 다시
방송에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를 만들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배움이란
학교보다는 삶의 현장이 더 넓다는 것이다.
진정한 배움이란
단순한 지식(知識)이 아니라 홀로 인생을
디자인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삶에 대한 태도이기에,
장소와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한정된 학교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배움이
더 넓고 크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착함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惡)함을 보고
자신의 잘못된 성품을 찾아
뉘우칠 기회를 삼으니 착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통해서든지
배울 수가 있는 것이 학문(學問)이기에
정상적인 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편견이 이번
사태를 유발시켰기에 이참에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고쳐보자는 것이다.
존 케네디는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라는
명언(名言)을 남겼다.
이전에 어느 대통령은 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없다’라는 휘호를 자주 섰다.
그 내용과 유사한 것이 大學無門,
‘큰 배움은 문이 없다’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늘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만 있다면
외적인 형식이 아니더라도,
항상 무엇인가를 보며, 들으며 그리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된다.
그러므로 교수와 유명인사 뿐만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성실하게 꾸준히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농부, 가정주부,
요리사, 어부, 상인, 수억을 기부한 할머니 등을 통해
그들만의 방식과 고난(苦難)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배움으로 더 넓은 인생을 걸어갈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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