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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객 모습 답사객 모습 | |
웃하여 있는 분황사도 634년(선덕여왕 3)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고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남아 있다.
황룡사지와 분황사는 평소에도 즐겨 찾는
경주답사 코스이지만 선덕여왕과
관련된 내용을 부여하여 요즘 더욱 더 많은
답사객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 분황사 석탑 분황사도 선덕여왕때 건립된 사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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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 사천왕사지 사천왕사지는 현재 발굴 조사가 진행중이다. | |
낭산을 마치 수미산처럼 여겨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을 관장하는 사천왕천이 있다는
불교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 이다.
사천왕사는 현재 발굴조사 중이라 제대로 관람이 어려우나
선덕여왕릉은 봉토밑에 자연석을 돌린 형식으로 별다른
특징이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근래
주변 정비도 일부 이루어졌으나 길 정비 및 주변
주차장 시설이 부족하여 불편사항도 있다.
▲ 선덕여왕릉 가는 길 선덕여왕릉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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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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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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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촬영장소로 하여 사진 찍는 곳과 주말
선덕여왕 행차가 재현되어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많은 다양한 볼거리와 테마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덕여왕과 관련된 각종
문화상품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현장을 찾아 아이들에게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전달하고 홍보 한다면 역사 도시
경주로 더욱 거듭날 것이다.
◐ 선덕여왕..◑
.선덕여왕만 유명한 이유는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기 때문도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바로 신라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기 때문에
유명하고 잘알려져 있는것입니다.
그럼 진덕여왕 과진성여왕은 누구냐!선덕여왕을 이은2대여왕이자
28대임금인진덕여왕은 국반(진평왕의동생)의딸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의추대를 받아서 왕의 자리에
올랐고 특별한 업적은 없었으며 업적이
있다면 삼국통일을 위해
태평송 이라는 시를 비단에 지어 당나라에 보낸것 뿐입니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3대여왕이자 51대 임금으로서
남편이자 상대등인 위홍과 함께초기에는 민심을
바로잡기위해 세금을걷지않고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만들었으나 현대에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888년에위홍이 죽자 정치에 뜻을 잃은
진성여왕은 어여쁜 미소년들을뽑아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고 왕권은
이미 힘이 없어 지방귀족(군수등)들은중앙
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정도였다.
그러자 894년최치원이 시무책 10여조를 올리자
최치원에게 아찬(17품계중6품)벼슬을 내리고
시무책내용을 시행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때문에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계속되는 견훤과 궁예의 침투때문에 결국897년에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었다.결국진성여왕은 신라의 멸망을
반보 앞당겨 놓은 여왕이 된 것이다.
(개인의견임,악플달지말아주삼)
(참고로신라의17관등제입니다.)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사람을 말하며 성골만이왕위에오를
수 있었으나 진덕여왕 이후로는 성골이 없어서진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진골은 제2의자리라고 할수있으며 진덕여왕 이후로 왕위를계 승하였으나
이전에는 최고 벼슬인 이벌찬(531년이전)과 상대등(531년후)
까지 자유롭게 오를수 있었다.
그 외 아래인 6두품은 6품인 아찬까지,
5두품은 10품인 대나마 까지,
4두품은 대사 까지의 벼슬만 오를수 있었다.
이상입니다.
▶선덕여왕
이 글은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과
의자왕의 큰이모이다.
►[편집] 생애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634년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쳤으며,
이듬해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을 빼앗기자 이듬해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을 진압하는 중 승하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편집] 가계
기록에 의하면 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두었다.
생전에 후사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김용춘(金龍春): 진지왕의 차남으로
여왕의 당숙이 된다.
여왕의 여동생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제부가 되기도 한다.
흠반(欽飯): 여왕의 친척이다. 여왕의 숙부인 백반,
국반과 같은 항렬인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의
숙부뻘로 추정된다. 을제(乙祭):
신라의 대신이다.
▶진덕여왕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재위: 647년~654년)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편집] 생애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신라 진성여왕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재위 887년~897년)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편집] 생애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4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다.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삼대목》을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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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라의 세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지혜가 있고, 많은 업적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오고,
진덕여왕도, 큰 하자없이 나라를 잘 다스려왔는데,, 진성여왕에 이르러,,
많은 실책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재밌는 우리 역사이야기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날 되세요 ~!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