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미 소테르(Ptolemy Soter)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속여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이 믿는 여호와도 멍청한 신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톨레미(Ptolemy)가 알렉산더대왕 밑에서 두로(Tyre)를 공격하고 있었을때, 알렉산더는 유대의 대제사장 야두아(Jaddua)에게 편지를 보내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두아의 답신은 "자신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에게 충성맹세를 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중동지역의 왕들이 알렉산더에게 협조를 하고 있는 판국에, 작은 나라 유대의 왕이 알렉산더의 요청을 거절했으니 이제 곧 유대왕국은 파멸을 맞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알렉산더는 힘겹게 두로를 점령하고, 이윽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대제사장 야두아는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과 성전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야두아는 대제사장복장을 하고, 백성들을 데리고 알렉산더를 맞이하러 성문을 나섰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지난날 꿈속에서 페르시아를 정복하라는 예언을 했던 사람의 복장과 흡사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 야두아를 보자 너무 놀라고 기뻐서 야두아와 그의 백성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알렉산더의 이런 행동에 그를 따르던 군대는 모두 알렉산더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렉산더대왕 사후에, 프톨레미 왕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때,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성문을 열어준 유대인들,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신의 명령으로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신기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이집트로 잡아온 유대인들을 왕궁의 수비대에 배치했으며, 그들에게 헬라인과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프톨레미는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후계자들에게도 충성을 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다.
한편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집트 땅이 비옥한 것과, 프톨레미 왕의 성품이 관대한 것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이집트에 온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처럼 이집트에 끌려온 사마리아인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선조들 때부터 내려오는 삶의 방식을 보존하는 문제에서 사마리아인들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이 거룩하므로 예물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예물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맞섰다.
프톨레미 소테르가 41년간의 통치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프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가 이집트왕국을 39년간 다스렸다. 필라델푸스 왕은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왕의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 팔레리우스(Demetrius Phalerius)는 왕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 날 프톨레미 왕은 데메트리우스에게 책을 몇 만권이나 수집했냐고 물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이미 이십만권 이상의 책을 수집했으며, 얼마 안 있어 오십만권의 책을 소장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프톨레미 왕이 말했다. “내 도서관에 앞으로 꼭 소장되어야 할 책들 가운데, 연구해 볼 만한 유대인의 율법서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 책들은 유대인의 방언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헬라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고 하오. 그 문자와 발음은 수리아의 고유문자인 아람어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다고들 말한다오. 나는 우리가 그 책들을 번역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오. 이미 그 책들이 우리 도서관에 있으니 헬라어로 번역하는데 필요한 것은 다 갖추지 않았소?” 왕은 데메트리우스가 장서수집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으므로, 유대의 율법서를 번역하는 일도 맡아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데메트리우스는 유대 대제사장 엘르아살(Eleazar)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사정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 왕의 가장 친한 친구들 가운데, 겸손한 성품 때문에 특별히 왕이 가깝게 대하는 아리스테우스(Aristeus)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리스테우스는 이전부터 왕에게 청원하여 모든 유대인 포로들을 석방시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이야말로 왕께 간청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왕의 호위대장들인 타렌툼의 소시비우스(Sosibius of Tarentum)와 안드레아스(Andreas)에게, 자기가 왕에게 간청할 때 뒤에서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그들은 쾌히 응낙하였다. 아리스테우스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왕이시여! 무슨 일이든지 성급히 판단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일은 옳지 못하며, 항상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율법서를 필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번역하려는 마당에, 많은 유대인들을 이 나라의 노예로 그대로 남겨 놓고서야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나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유대인들의 율법서의 저자이심을, 저는 특별한 연구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왕의 관대하심과 선하심을 과시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유대인들과 우리는 모두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제우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멋진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기 때문에, 이렇게만 하신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 “해방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몇 만 명이나 되는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안드레아스가 대답했다. “십만명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왕은 아리스테우스에게 물었다. “아리스테우스여, 그대가 원하는 것이 겨우 그 정도인가?” 그러자 소시비우스와 여러 사람들이 왕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왕께 이집트 왕국을 주신 하나님께, 대국의 왕답게 풍성한 예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그들의 제안을 흡족하게 생각하면서 명령했다. "유대인 병사들은 급료에서 속전을 공제하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한 사람당 20드라크마씩 내게 하되, 그 돈을 국고에서 지불해 주라." 그리고 왕은 이것을 조서로 만들어 전국에 공포하겠다고 약속했다. 왕은 자기 부친에 의해 끌려온 자들이나 그전부터 있던 자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끌려온 자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겠다고 공언했다. 신하들은 속전(redemption-money)이 400달란트 이상이 될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왕은 그대로 집행하라고 말했다. 이렇듯 왕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12만명을 먼저 해방시켜준 후에, 모세의 율법책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 오니아스 1세(Onias)가 죽고, 그의 아들 시몬(Simon)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했다. 시몬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사랑도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이라고 불렸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 2세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시몬의 동생 엘르아살(Eleazar)이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은 유대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후,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에게 유대의 율법서를 번역하는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왕께서 진정으로 헬라어번역 율법서를 원하신다면 유대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서신을 보내 정확한 율법서 사본과, 각 지파에서 율법에 정통한 장로들을 각각 6명씩 보내 달라고 요청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톨레미 왕이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문안하오. 나는 내 나라에 있는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의 유대인을 위해서 유대의 율법책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내 도서관에 보관하고 싶소. 그러므로 그대는 나이가 든 장로들 가운데서 뛰어난 덕을 지닌 자들을 각 지파에서 6명씩 뽑아서 보내주시오.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해석에 능한 자들이어야 한다는 점을 그대는 명심하도록 하시오.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호위대장 안드레아스와 아리스테우스는 내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들이오. 그들 편에 성전에 드리고 싶은 나의 첫 열매를 보내겠소. 제사와 그 밖의 비용으로 은 100달란트를 보내니 기쁘게 받아 주시오. 이 밖에 그대가 보기에 필요한 것이 있거든 알아서 처리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마침내 엘르아살 대제사장은 70명의 장로들을 선발하여 양피지에 쓰여진 율법서와 함께 프톨레미 왕에게 보냈다. 왕은 유대의 장로들보다 이집트에 먼저 온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교사절들을 제쳐두고, 유대에서 온 장로들과 12일 동안이나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장로들의 대답에 흡족해 하였다. 이윽고 율법을 옮겨 적고, 이를 다시 번역하는 작업은 72일 만에 끝이 났다. 번역팀들은 누군가가 율법서 번역 내용 중에 너무 피상적인 내용이나 생략된 점을 발견하게 되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문제점을 이야기한 후, 그 다음에 정정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 좋겠다고 결의했다. 그들이 잘된 것으로 평가된 것은 될 수 있으면 고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결의한 것도 매우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왕은 자기가 의도했던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고, 큰 유익을 가져오자 몹시 기뻐하였다. 왕은 헬라어로 번역된 율법을 들으면서 즐거웠으며, 율법책의 심오한 지혜와 율법의 신비한 의미에 감탄했다. 왕은 너무 이상해서 데메트리우스에게 물었다. “유대인의 율법책이 이토록 훌륭한데, 왜 시인들과 역사가들은 그동안 이 율법책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단 말인가?" 데메트리우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대인들의 율법책은 신성하고 거룩한데, 율법책을 언급하려고 시도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은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 누구도 율법책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은 데메트리우스로부터 헬라어로 번역된 율법책을 받은 후에, 유대인 장로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데메트리우스에게는 이 책이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왕은 번역에 참여한 유대인 장로들에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시 나를 찾아와 준다면, 나는 여러분들의 지혜에 상응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드리는 예물을 엘르아살 대제사장에게 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헬라어 번역 성경은 로마시대의 지중해 세계에 퍼져서,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가톨릭교회가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 역(Septuaginta)'을 구약성경으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 역(Septuaginta)'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