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 교단 분열의 계보
- 장로교 중소교단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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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교단 분열을 중심으로 올해는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장로교는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초기부터 현재까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장로교는 수많은 분열의 역사도 함께 해야 했다. 그 분열의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의 수 증가 등의 평가 받을 만한 것도 있겠지만 연합의 힘으로 일치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을 염두해 두면서 한국장로교의 분열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 글은 주류교단의 분열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을 필두로 해서 비주류 중소교단의 분열에 주된 관심을 두고자 한다. 한국장로교의 주류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 등은 이미 많은 이들이 정리해 놓아 그 분열의 계통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군소교단의 분열은 대부분 모르거나 알아도 단편적일 정도로 연구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중소교단의 분열을 주된 테마로 삼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이 글의 한계를 미리 밝혀 둘 필요가 있다. 군소교단은 해마다 변동이 심하고, 그 정체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교단이 많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가능한 교단에 한해 정리했고, 그 외 교단의 구체적인 정리는 이후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게 됐다. 주류 교회의 분열 예장고신 고려파 교단으로 1952년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장로교 교단이다. 1946년 5월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목사 등이 진해에 모여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한 후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예장 경남노회 내부에서 부산에 세워진 이 고려신학교를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빚어졌다. 1946년 12월 학생을 추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상동 목사 등 67개 교회가 경남노회를 탈퇴했으나 양측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1947년 12월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1948년 9월 경남노회가 다시 고려신학교의 승인을 취소한다는 결의를 한 후 두 세력 간의 싸움이 재연됐다. 결국 1951년 5월 21일 한국전쟁 중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고려파 대표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고려파는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한 후 이듬해인 1952년 9월 고신파 장로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1960년대 초반 예장 통합과 분열된 합동이 예장고신과 잠시 합동했지만 다시 원위치로 분열했다. 그 후 이 교단은 1976년 제26회 총회 당시 사회 법정 소송에 대한 의견차이로 고신총회와 석원태 목사를 중심으로 한 고려총회로 분열됐다. 고려총회 대다수는 이번 9월 총회에서 고신 측으로 복귀를 선언했지만, 석원태 목사 등은 여전히 고려 측에 계속 남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고려파 분열 1년 만에 다시 예장과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조선신학교를 둘러싼 운영과 신학의 차별성 때문에 세력이 나뉘게 된 것이다. 정통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에 대해 장로교 서북파를 중심으로 학교를 폐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 따라 1953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에 대해 교역자 자격을 부여치 않기로 하는 등 강력한 제재가 취해진다. 그 이전 해인 1952년 9월 17일 조선신학교를 옹호하는 3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는 호헌대회를 열어 총회의 이러한 결의에 대해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1953년 예장의 일방적인 결의 이후 그해 6월 김재준 목사 등이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에서 개명) 강당에 모여 총회를 조직한 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이다.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 1959년 9월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찬반문제로 통합 측과 합동 측이 분열됐다. 경기노회 총대문제가 화근이었다. 이환수 목사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신앙협회(NAE) 지지 측 총대와 강신명 목사를 대표하는 WCC 지지 측 양편이 총대명단을 동시에 제출했다. 양측의 극심한 논쟁 후 WCC 지지 측은 연동교회에서 모여 통합교단을 형성했고, NAE 측은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모여 합동교단을 형성했다. 예장 대신과 호헌 예장 대신 : 설립 54년째인 올해, 분열 위기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은 1961년 6월 21일 대한예수교성경장회 창립총회를 교단의 출발로 보고 있다. 김치선 목사와 마두원 목사가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목사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6월 17일 제4회 총회에서 교단명칭을 예장 성장 측으로 변경했다가 1972년 4월 6일 현 교단명으로 개칭했다. 198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등과 한국장로교협의회(한국장로교총연합회 전신)를 창립하고, 1985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연합회 회원교단이 되었다. 소재지는 경기도 안양시에 있으며 설립목적은 평양신학의 전통에 근거를 둔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 전파이며 주요활동은 국내 복음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이다. 이 교단은 통합과 합동 측 분열 이후 김치선 목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성장한 사례여서 특별히 관심을 모은다. 즉 특정 교단에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몇몇 목회자들이 ‘대한예수교성경장회’를 구성해 세를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대신은 설립 54년 만에 최대 위기에 놓이게 됐다. 주류 그룹이 이번 정기총회에서 예장백석과 통합키로 한 상태이지만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기존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장백석과 대신은 이미 올해 9월 14일 열리는 총회를 통합총회로 공고한 상태이고, 반대그룹은 극력 반대하는 양상이다. 주류그룹은 예장백석으로 흡수되고 비주류그룹이 예장대신을 고집하여 남는 등 분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장 호헌 : 역사는 길지만 타교단 흡수로 미미한 세력 예장 호헌총회도 좀 특별한 케이스이다. 비주류 세력으로부터 분열되기 훨씬 이전에 태동한 교단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호헌 측 세력은 자신들의 교단 연원을 1960년 초반으로 잡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나 예장 통합 측 신학노선과 정반대의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지지를 고수하는 박병훈 목사 등을 중심으로 1962년 11월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197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가 합동하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호헌 측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얻기 이전부터 회원교회의 이합집산이 계속 일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지지하는 진보파에 맞서 복음동지협의회(NAE)를 지지하는 예장 합동 측이 고려파와 합동하여 교단을 형성했다. 그러나 미국장로교 등 선교부와의 관계단절을 우려한 예장 합동은 1961년 9월 부산에서 개최된 합동 측 제46차 총회에서 국제기독교연합회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계기로 ICCC를 지지하는 세력이 예장 호헌 측으로 분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이 연합회의 재정적 지원 아래 대구신학교를 육성, 호헌총회 신학교로 육성하는 한편 극우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세확장을 꾀하였으나 1963년 호헌총회 부회장을 역임하던 최성곤(崔成坤) 등이 1960년 장로교 분열 이후 중립노선을 지키고 있던 교회들을 규합하여 별도로 보수총회를 결성, 분리해나갔다. 그리고 3차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한 박병훈을 교단의 실질적인 대표로 남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신임 총회장 송재묵(宋在默)은 1966년 4월 호헌총회를 탈퇴하고 만다. 이때 국제기독교연합회가 송재묵을 지지하게 되자 호헌총회는 국제기독교연합회와의 우호를 단절하게 되었다. 연합회와의 단절로 외부원조가 없어지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예장 호헌은 1977년 1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에서 운영해오던 평양신학교와의 합동을 계기로 같은 해 3월 두 교단을 통합했고, 이때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라고 명명하였다. 1979년 제63차 총회에서 박병훈이 공로목사로 추대되고 신응균(申應均)이 총회장에 선출되자 지금까지 다른 교단에 대해 취했던 폐쇄적 태도를 시정하려는 소장파 목사들과 교단을 이끌어온 박병훈 등 노장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제64차 총회에서 또 한 차례 분열이 생겼다. 세계선교교회에서 별도로 총회를 소집한 박병훈 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라는 옛 명칭으로 다시 환원하였고, 신응균 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에 계속 남았다. 그 후 타 교단으로 흡수되거나 새로운 세력이 호헌총회 명칭을 사용하는 등의 이합집산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현재 호헌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은 극소수로 남았고, 그 교단의 정체성도 1960년대 초반의 역사성을 잇는지조차 불명확한 상태다. 예장 합동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1979년은 한국 장로교의 핵분열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예장 합동 측의 주류에서 밀려난 비주류 그룹이 이후 수십,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분열과 합동 등 이합집산 과정을 보임에 따라 이들 교단의 세력이나 명칭을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1979년 일어난 합동 측의 주류-비주류 분열은 교권싸움이 원인이다. 예장 합동-통합 분열 후 예장 합동은 박형룡 목사를 정점으로 황해도 세력(이환수, 박찬목 등)과 정규오 목사로 대표되는 전라남도 세력이 10여 년간 주도했었다. 그러나 신학대학의 부실운영을 기화로 김윤찬 목사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 세력과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세력이 커져 총회와 신학대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교권을 장악한 이영수 목사 등의 세력이 교단을 장악한 후 반 이영수 세력과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결국 1979년 9월 20일 제64회 총회가 대구 동부교회당에서 회집됐으나 주류 측이 반대파를 배제한 채 단독으로 총회를 진행함으로써 파행을 겪었다. 비주류 측은 곧바로 대구 범어동 은일교회에 모여 정규오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연 후, 총회장 등 임원을 선출했다. 이들은 이미 분열에 앞선 1979년 초 복구신학교를 서울 방배동 영광교회당에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초대 교장에는 박아론 목사가 선임됐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였고, 새로운 교장으로 정규오 목사가 취임했다. 박아론 목사를 지지했던 그룹은 비주류 계열을 이탈해 ‘예장 합동계승 측’을 설립했다. 이것이 예장 합동 비주류 측의 첫 분열이다. 비주류 그룹은 또 다시 몇 개의 분파를 형성했다. 김일남, 백동섭, 박병진 목사 등의 합동보수 측, 노진현 윤낙중 등의 중립계열, 박영환 고성일 박지석 등의 연합노회 계열, 박아론 황덕창 등의 합동계승 계열이 그것이다. 비주류의 핵분열 예장 합신 1980년, 신학교 문제로 예장 합신이 합동에서 분리해 나왔다. 1979-80년에는 합동 총회신학교 내부 문제로 갈등이 첨예했다. 신학교 이사회에서는 김희보 학장의 후임으로 박윤선 목사를 학장대리로 임명했으나 박 목사는 내부문제에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사표를 냈다. 그 뒤 38세의 정성구 목사를 학장으로 임명했으나 노장교수의 반발이 심해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박윤선 목사를 구심점으로 새로운 신학교를 만들기로 했고, 이후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가 설립됐다. 당시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박형룡, 최낙재, 박윤선 등 6명의 교수진이 합류했다. 이들 세력은 1981년 8월 총회소집을 위한 준비기도회를 개최한 후 그해 9월 22일 남서울교회당에서 예장 개혁 총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창립했다. 1984년 일부 노회와 교회가 이탈했으나 2002년 예장 장신 측의 170개 교회를 영입했다. 창립 이후 개혁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나 1998년 9월 타교단과의 구별을 위해 합신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예장 합신은 창립선언문에서 “장로교 정치원리인 양심의 자유과 교회의 자유를 따라 총신 이사회의 불법적인 교권간섭을 거부하고 합동신학원을 설립한 교수들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총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밝혔다. 예장 백석 주목할 교단으로 예장 백석을 들 수 있다. 이 교단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예장 백석은 급성장하는 중이고 현재 연합기구를 좌지우지하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총회는 1978년에 자신들의 교단이 출범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단이 총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78년 9월 장종현 목사에 의해 ‘복음총회’란 이름으로 출발한 것을 시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즉 이 교단은 1979년의 장로교 주류-비주류 분열 이후 생긴 교단이라는 것이다. 예장 백석을 제외하고는 비주류의 한 분파였던 예장 합동진리가 이 교단의 시초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1979년 분열 당시, 정치적으로는 영남과 서북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했던 ‘총회주류’와 호남과 황해도 출신을 중심으로 했던 ‘총회 비주류’로 나뉘게 되었고, ‘총회 비주류’는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의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했다. 문제는 이 신학교가 예장 백석 측이 주장하는 기독신학교, 즉 백석대의 전신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현실상 기독신학교의 장종현 목사는 총회신학교와는 무관했다. 기독신학교는 총회신학교를 뛰어넘기 위해 많은 수의 학생을 모집하였고 신학생 모집 경쟁에 불을 붙임으로써 이후 한국교회가 사분오열되는 분열의 씨앗이 됐다. 예장 백석에 따르면 예장 복음총회로 출범한 후 1980년 합동 진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80년에는 은혜 측과 1981년 12월에는 연합 측과 합동총회를 가졌으며, 1982년 12월 27일에는 ‘합동정통’으로 교단 명칭을 다시 변경했다는 것이다. 이 명칭은 다시 2009년 9월에 ‘백석’으로 교단명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교단은 현재 군소교단 흡수통합에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 작은 교단이나 교회들 흡수에 열을 올려 온 예장 백석은 이번 총회에서 한국교회 한 지형을 차지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까지 흡수할 채비를 마친 상태다. 2009년에는 교단의 교육기관 이름인 백석으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면서 또 한 차례 분열 진통을 겪었다. 이때 예장 합동 정통을 고수하던 이들은 그대로 잔존키로 했지만 대다수는 예장 백석으로 흡수되었다. 지난 2013년 여러 예장 개혁파 중 일부와 합동한 후, 올해까지 여성 목사 등 개별 영입작업을 벌이는 등 ‘공룡교단’을 지향함으로써 잡음을 빚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9월 이후 예장 대신과의 통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로 인해 예장 대신은 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예장 백석과 대신이 9월 14일 통합총회를 공고한 상태여서 54년의 역사를 가진 예장 대신이 35년의 예장백석에 흡수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 백석교단은 크리스천 개혁 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 즉 여성목사와 여성장로 안수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장 개혁 분열과 통합의 이합집산 다시 비주류 세력의 본산인 합동보수 측의 분열과정을 살펴보자. 초기 비주류의 분열은 신학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빚어졌다. 박아론 교장 해임 후 교장서리로 임명된 정규오 목사가 새로운 교장이 내정됐음에도 자신이 교장직을 계속하겠다고 고집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예정대로 이진태 목사가 신학교의 교장이 되자 정규오 목사는 광주로 내려간 이후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1981년 9월 순천 순광교회당에서 총회가 회집되어 손치호 총회장 등 임원을 선출했지만 이전의 앙금이 그대로 노출됐다.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가 총회장에서 탈락되자 정규오 목사 등 광주측은 1년 후인 1982년 독자적인 총회를 소집했다. 총회장 손치호 목사 측의 총회 소집 장소는 목포제일교회당이었으나 정규오 목사 계열인 변한규 목사의 총회소집 공고는 같은 날 광주중앙교회로 공고됐고 총회도 따로 개회되면서 분열됐다. 목포제일교회당 총회파가 예장 홍은동 측(합동보수), 광주중앙교회파가 청담동 측(광주)으로 불린다. 청담동 측 주류는 이후 예장 개혁으로서 분열과 합동을 거듭하다가 2004년 예장 합동으로 흡수된다. 1982년 정규오 목사 등의 청담동 측과 그동안 중립노선을 견지했던 서은선, 김규섭, 윤낙중 홍정길 목사 등 호남권 170여 교회가 청담동 측과 합동한 후 예장 개혁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1985년 다시 분열의 질곡에 빠진다. 박윤선 목사를 지지하는 교회들이 기존 개혁 명칭을 고수하면서 자신들만의 개혁을 형성함에 따라 두 개의 개혁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편의상 이 두 교단은 개혁 광주 측과 서울 측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외에도 총회나 신학교가 소재한 지역에 따라 홍은동, 봉천동, 냉천동, 방배동, 신림동, 응봉동 등 수많은 교단이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교단이 예장 합동개혁이다. 정서영 목사 등이 중심이 된 70여 명의 목사들은 1985년 교단을 설립하고, 이후 총회신학을 설립했는데, 1997년 정서영 목사가 이사장이 된 후 많은 수의 목사를 배출했다. 여성목회자들도 다수 배출한 이 교단의 신학교는 현재 서울 사당동에 소재해 있다. 1998년 각개로 나뉜 비주류 그룹이 하나의 교단 형성을 시도한다. 개혁 서울 측과 광주 측은 물론 홍은 봉천 냉천 방배 신림 응봉 측, 그리고 1961년 분열됐던 호헌 측까지 9개 교단이 그해 12월 15일 정주동부교회당에서 합동총회를 개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0년 9월 광주중앙교회에서 개회된 총회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때부터 역사성이나 정체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수많은 교단이 난립하기 시작한다. 교단 합동 후 김정중 목사에 이어 2대 총회장에서 선출된 고병학 목사가 개혁을 내세운 것이 분열의 화근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세력은 개혁 이면에 한 두 세력의 제거라는 의심을 하며 경계했다. 결국 2000년 9월 광주 중앙교회당에서 열린 85회 총회에서 총회장 불신임 등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이후 기존 개혁 측을 비롯해 합동됐던 교단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개혁 측이 가장 큰 교세를 이루었지만, 홍은동의 합동보수 등 기존 이름의 환원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거나 합동연횡과 분열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장 개혁은 이후 2004년 광주세력과 방배동 세력이 예장 합동으로 영입되면서 세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광주 개혁 측 주류교회들은 대거 예장 합동으로 복귀했다. 앞서 2004년 90회 총회에서 방배동 측이 이탈함에 따라 10월 7일 광주중앙교회에서 속회총회를 열었으나 그해 12월 20일 새에덴교회에서 광주 측과 방배동 측이 세력을 합쳐 예장합동으로 영입되기도 했다. 그 후 개혁 잔류세력은 2011년 류광수 다락방전도운동 세력의 영입을 계기로 또 다시 분열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 이 세력들을 크게 구분해보면 류광수 목사 세력과 합친 세력은 예장 개혁 효제동 측이고 이를 반대한 세력은 예장 개혁 송촌동파로 나눠볼 수 있다. 또한 개신대를 운영하는 세력이 지난 봄 효제동파에서 이탈해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예장 개혁총연 1998년 9개의 교단 통합 후, 2000년 분열의 과정을 거친 예장 개혁은 이후 수많은 교단으로 사분오열된다. 그중에 그나마 큰 교단으로 세력을 형성한 곳이 예장 개혁총연이다. 서울개혁 측, 광주개혁 측, 개혁연합 측으로 분열된 3개 교단 중 개혁총연은 개혁연합 측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1년 9월에 개혁연합 측은 국제 측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국제개혁 측 총회라는 이름으로 가을총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러나 국제 측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래 개혁 측에 소속되었던 개혁연합 측 일부 인사들이 교단을 이탈하여 그달 17일에 호헌 측과 합동총회를 갖고 합동호헌 총회를 출범시킨 일도 있었다. 지난 2004년 4월 19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연합과 합동개혁진리, 연합총회, 합동기선, 합동총회, 합동보수총회, 합동예술총회, 합동제일교회 등 30여개 교단이 연합하여 가칭 ‘개혁총연’을 출범하기로 했다. 그해 11월에는 23개 교단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개혁총연’이란 이름으로 통합하고 엄신형 목사를 총회장을 선출하여 교단 통합을 성사시킨 바도 있다. 이 교단은 엄신형 목사의 한기총 대표회장 진입이 주된 목표라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대회제의 느슨한 형태로 묶여져 이후 분열 또는 통합의 과정을 거듭한다. 그 외의 교단들 그 외 특이한 교단으로 예장 합동복구, 예장 한영, 예장 피어선, 독립교회연합 등을 꼽을 수 있다. 합동복구는 1967년 정대신 목사를 중심으로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예장 독노회를 재조직하여 교단으로 출범한 후 2006년 예장 합동복구로 개명했다. 예장 한영은 2007년 9월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에서 전환된 교단이다. 예장 피어선은 피어선신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1993년 세워졌으나 이후 다시 3-4개의 교단으로 분열됐다. 한국독립교회연합은 자신들을 교단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목사안수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예장 개혁 측의 9개 교단 통합 실패를 전후로 장로교 군소교단은 수도 없이 분열됐다.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교단이 한 해에도 수도 없이 생기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중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한국기독교장로회총연합회(한기총),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의 회원교단을 나열해 본다. •한장총의 회원은 예장 통합, 합동, 고신, 대신, 백석, 호헌, 합신, 기장 등 총 24개 교단이다. 이외에도 개혁국제, 합동동신, 합동복구, 합동중앙, 합동개혁, 예장개혁(기독교회관), 고려개혁, 합복, 개혁(총회장 안성삼, 미아동파), 국신, 개혁정통, 합동선목, 한영, 피어선 등의 교단을 포괄하고 있다. 대부분 정규신학교를 갖고 있는 교단이기에 그나마 틀을 갖춘 교단들로 구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기총 회원교단 72개 중 장로교 회원교단으로는 예장 개혁(효제동파, 총회장 서금석), 합동보수A(총회장 지영철), 합동보수 망원 측, 합동보수보수, 합보, 호헌 관악 측(총회장 이성민)과 의정 부측(총회장 양연길), 국제합동, 합복, 합동중앙, 중앙, 보수, 합동진리, 개혁총연, 개혁정통, 합동개신, 보수합동, 예장, 합동연합, 선교, 브니엘, 웨신, 합동동신, 합동한신, 개혁진리, 합동보수C(성북파, 총회장 김광호), 합선, 개혁합동, 성합 측, 성장, 총회 측, 근본, 피어선(평택측, 총회장 김성숙), 합동개혁, 피어선(강북파, 총회장 김홍기), 개혁(예음), 합동개혁총회, 정통보수, 합동총신, 합동장신, 합동총회(도림동), 합동개혁, 합동국제, 합동동행, 합동연대, 연합개혁, 개혁혁신, 합동한국, 예장개혁, 성경보수, 합동중앙 등이다. 뿌리나 생장과정을 분류하기 어려운 교단들이 부지기수이다. •한교연 회원 중 장로교단은 통합, 개혁(미아동측, 총회장 안성삼), 개혁종로 측, 대신, 보수개혁, 개혁국제, 연합, 백석, 개혁선교, 진리, 합동보수, 한영, 합동개혁, 총회 측, 합동복구, 합동보수중부, 합동선목, 정통보수, 피어선(용인 수지구, 총회장 이강명), 합동개혁A(대전, 총회장 한영동), 합총, 성경, 개혁연대, 해외합동, 장신, 고려개혁, 합신, 피어선(통합, 총회장 김희신), 합동보수동부, 합동보수 남부, 합동총신 측이다. 세 연합기구 중 그나마 잘 정비된 곳이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다. 한장총 회원교단 중 한교연에 속한 교단이 한기총보다 많다. 이 세 연합단체에 속한 장로교단이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교단보다 더 현실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 활동하는 교단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