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이라는 형용모순으로 불렀고, 임혁백 교수는 한국 정치를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2015)이라는 책으로 다뤘다. 블로흐가 1935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상호모순적 현상이 공존하는 현상을 분석했다면, 임혁백 교수 역시 우리 근대정치사를 이 개념으로 통찰하면서 ‘비동시성의 극복과 지양’을 권고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올해 늦여름에서 초가을을 관통한 ‘조국 정국’에서 극복과 지양은커녕 불나방처럼 비동시성으로 처박히는 무리를 목격했다. 민주적 통제를 버리고 다시 밀실로 가자는, 현명한 집단지성보다 구 ‘엘리트’로 불렸던 소집단 카르텔을 옹호하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이 카르텔은 일확천금의 금전적 탐욕을 최소치로, 최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최대치로 움직여 왔다. 최소치는 ‘전관예우’라는 기괴한 이름이 붙은, 재판 거래로 챙기는 뇌물이며, 최대치는 권력화된 공안 세력과 결탁하여 무고한 이를 간첩이나 공안 사범으로 몰아가면서 그것이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거룩한 작업이라는 허위의식에 중독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공안 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상태에서 ‘전관예우’라는 완전범죄 기회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정치, 언론과의 유착구조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된 한쪽이 이런 독버섯을 안고서 ‘평화’나 ‘통일’을 추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다. 아니, 추진해야 한다. 각성된 체제가 더 나은 평화적 안정성을 희구할 수도 있지만, 불완전한 체제가 더 나은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부조리를 떨쳐버릴 동기를 마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필연적 선행조건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 가정, 나라가 각각 웬만하면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이르지도 못할 완벽을 선결 조건으로 인식하면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상한 해석이 나온다. 또 저 말의 우선적 적용 대상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즉 정치인 자신과 그의 일가라고 할 수 있는 정당에 대한 교훈이다. 그러니 이는 어누 누구보다 뇌물과 편법으로 오염된 권력을 그리워하는 낡은 정치 세력에게 건네줄 경구다.
그러면, 우리의 비동시성은 ‘웬만해서’(decent) 남북 간 ‘평천하’를 시도할 만한가. 몇몇 위험한 구석이 남아있다. 우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라는 검찰과 공안의 범죄(국가보안법 제12조 무고, 날조)에 대해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검찰총장에게 사과를 권고한 것이 2019년 2월이었는데,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임기 만료 한 달 전인 6월, 다른 여러 사건과 묶어서 검찰 역사관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무마했다. 담당 검사를 수사하지도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검찰 조직 내에 있다. 아마 이들은 정치 권력이 수구 세력에게 들어가면 언제든 다시 등장해서 그들만의 ‘카르텔 국(國)’을 복원하려 들 것이다. 그 수구 세력들은 영화 <공작>의 실제 주인공 ‘흑금성’(암호명) 박채서 씨가 “전 휴전선에 걸쳐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면서 실제 제시한 액수는 1억 달러(약 1,280억 원)”였으나, 영화감독이 ‘국민들이 받는 충격을 고려해서 400만 달러로 축소’했다고 폭로한 것처럼 영화적 상상을 뛰어넘는 파국도 서슴지 않는 세력들이다.1
이들이 우리 사회의 통제받지 않는 권력층으로 존재하는 현실은 결코 웬만하지 않다. 이 비동시성은 진척된 평화나 통일의 노력을 치받고 퇴행시킬 독버섯이 될 것이므로 평화를 바라는 시민은 수많은 적폐 중 이것만은 평화의 선행조건으로 인식해야 한다. 국내적 정의뿐 아니라, 북한 정권 핵심의 욕망과 동반 타락하여 통일을 재앙으로 만들 수 있다.
북한과 세계의 비동시성
이 글을 타이핑하는 시각, 평양 월드컵 예선 남북 경기가 0대0 무승부로 끝났다는 뉴스에 관중 한 명도 없이 경기가 진행되는 김일성경기장 사진이 들어왔다. 기자는 이를 ‘깜깜이 중계+무관중 경기’로 이름 붙이며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실로 오랜만에 ‘기자’와 동감을 느껴본다. 매체의 발달을 논할 것도 없이, 북한이, 남북 관계가 순식간에 퇴행하여 동시대성을 무너뜨리고 ‘비동시성’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창올림픽에 육로와 직항로 왕래한 것이 2018년이다. 그런데 2019년의 선수단이 불과 몇 시간 거리를 베이징을 거치게 하고 응원단은커녕 취재진까지 받지 않은데다, 관중도 없는 기막힌 상황을 만든 것이다. 혹자는 중계료 탓이라고도 하고, 정치적 타협이 우선한다는 시위라고도 하나 어떤 이유든 피했어야 할 퇴행이고, 남북을 ‘동족’으로 보는 세계인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비동시성은 지구적 개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음을 북이 알고 있음에도 어정쩡한 태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대외원조’ 혹은 ‘해외원조’라는 개념은 ‘개발협력’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최신 트렌드는 ‘UN 지속가능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이하 SDGs)다. 이는 2000년대를 바라보며 논의됐던 ‘UN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이하 MDGs)의 21세기 버전으로, MDGs보다 더 넓은 범위 ― 저소득국뿐 아니라 고소득국까지 포괄하는 더 많은 대상 지역(국가) ― 에 적용되고, 더 실제에 가깝고 직관적인 지표들로 구성되어서, 국제 사회에서 개발의 지표와 표준으로 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 세계는 빈곤 자체만이 아니라 불평등, 기후변화, 산업 혁신, 사회정의, 커뮤니티의 건강성 등 총체적 조건들을 하나하나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관리하는 것을 ‘발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SDGs가 이전과 다른 것은 이 목표들이 북한을 포함한 저소득국(Low Income Countries)에 대한 지원과 거래는 물론 우리 사회를 포함한 고소득국가(High Income Countries)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 ⓒ복음과상황
북한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SDGs를 ‘지속가능의정’으로 명명하며 “전 세계적 범위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없애고 인간의 존엄과 창조적 능력을 마음껏 발양하며 우리 세대뿐 아니라 후대의 유족한 생활을 담보하는 세계를 건설할 것을 공약한 인류 공동의 행동강령”이라고 소개한다.2 2010년부터 북한에서 활동하는 UN 기구들과 공동으로 ‘UN Strategic Framework’을 작성하고 ①식량 및 영양 안보(임산부, 아동 영양부족, 수확 전후 손실감소 노력) ②사회개발 서비스(보건의료, 식수 위생, 수돗물 사용률 제고) ③복원력(resilience)과 지속가능성(재난위험 대비수준, 에너지, 재조림) ④데이터와 개발 관리(데이터 기반 국가정책 수립 지원, 가입기구 기준 준수) 등의 우선 목표도 정한 바 있다.
▲ ⓒ복음과상황
그러나 그뿐, 북은 이러한 목표의 진척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나오지 않는 현실이다. SDGs 이전에도 북은 UN의 개발목표에 호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외관계에서 제재라는 큰 제약이 있었고, 그런 제약 아래 북은 외부 지원계획을 수용할 만한 개방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Sustainable Development Report 2019>의 나라별 상황판에서 여전히 데이터 부족으로 글로벌 랭킹도 매겨지지 않은 북한을 만난다.
▲ ⓒ복음과상황
▲ ⓒ복음과상황
(그림1, 그림2와 같이 모든 대상국은 각 목표의 진척도가 표시돼야 한다) 이는 북을 돕거나 지금보다 나아지도록 하는 데 있어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지 않으므로 어디서부터 무얼 해야 할지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고, 본격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기대는 접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이뿐 아니라 북한의 거의 모든 현상은 현재 난항을 겪고 있는 미국과의 협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축구 문제는 그에 더하여 남쪽에 대해 섭섭함이 깔려 있을 것이다. 세계 앞에 자신들이 가진 ‘번영’의 욕구를 드러내는 쪽이 유리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다시 말하건대, 북이 상대하는 바깥 세계는 그들보다는 자유주의 정치 세계이며 여론정치가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우호적 변화를 바란다면 친밀감과 발전 의지의 진정성을 항상 드러내야 한다.
비동시성을 추격하는 동시성
직전 상황보다 나은 것은 적폐 수준이 최고 권력에서 검찰 권력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지주가 착하니 마름이 판치는 격으로 동서고금의 권력사에서 흔한 장면이다. 그 마름의 권력이 주인을 잡을 정도라는 것이 이번 사태의 심각성이다. 당연히 최고 권력의 질을 오래 유지하여 확실한 주권자의 시그널을 발하는 것이 차 하급 권력들의 퇴행을 잡는 전략이다. 이것이 평화나 통일과 무관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 역사에서 퇴행하는 것들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의 진전을 해코지해 왔다. ‘통일’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거부하기 어려울 때는 세습하는 교회, 부패한 교회의 목회자들조차 통일운동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통일은 더 큰 죄악을 감추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세습하는 목사가 상상하는 ‘북한 선교’나 이른바 ‘복음 통일’이 대체 뭐겠는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 전 근대적 권력 구조 혁파라는 과제를 안고, 계산이 복잡한 북쪽에는 세계의 자유주의 정치 현실과의 동기화를 요구하면서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 이 상황에 가마솥 뚜껑같이 무거운 모자가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와 핵 문제 해결이다. 한 가지씩 간편히 해결하면 좋을 것 같지만, 복잡한 문제는 총체적 해법을 요구할 때가 있다. 마치 독립운동이 해방과 근대국가를 세우는 무거운 목표들을 동시에 설정했듯이, 부조리하고 충돌의 위험을 내포하는 비동시성을 떨쳐버리려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 공동체인 남북 관계를 포괄하며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도 우리 세대는 촛불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시와 찬미를 즐기는 것은 주일 예배 정도의 비중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방사능 소굴로 내몰리는 일본, 대통령이 눈물을 흘려도 총기 규제를 못 하는 미국, 억지로 비동시성에 빨려 들어가는 홍콩의 슬픈 거민들을 생각한다. 그 시민들과 함께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국제연대를 만들 수 있기를 꿈꾸는데, 그들이 우리의 촛불을 부러워한다는 소식은 또 하나의 희망이다.
1 민일성, '박채서 "검은머리 공작원 386명까지 파악..유명 가수도 있다", 〈고발뉴스닷컴〉(2018.8.31.) 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70
2 〈STRATEGIC FRAMEWORK FOR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NATIONS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2017-2021〉, 2016.9.1.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