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
이향숙
백지에 다섯 장의 그림을 그렸다. 붓을 들 때마다 떨림과 설렘의 벅찬 가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신비의 열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고 지금 두 명의 손녀를 키우고 있다. 배불리 먹이고 열심히 공부시키면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믿었다.
촉망받던 젊은이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든가. 내면의 충실함보다는 외적인 기준에 맞추어진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회적 기준들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까. 나도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과외 시키며 공부만 잘하기를 바랐다. 이것이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알았다. 지인은 아들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부부의 월급을 모두 쏟아 부었다. 생활이 어려워져도 아들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이 무거운 사건 앞에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의 밝은 장래가 순간 범죄자가 되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인간의 연약함과 그 안에 숨겨진 잠재적인 어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며 고통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일어날 힘이 필요할 때다. 잘못된 판단과 행동들이 누군가의 인생에 되돌릴 수 없는 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나의 그림은 현재 진행 중이다. 복잡한 화폭을 사랑으로 덮는다. 초등학교 육 학년인 큰손녀는 학원과 학교를 전전한다. 성격이 예민하고 몸도 약해서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쉽게 배탈이 난다. 제 아빠는 주말이면 일주일 배운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을 본다. 영어단어와 수학 문제 등, 시험을 보게 하는 아빠나 시험을 치는 아이나 스트레스가 쌓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조용히 쉬면서 체력을 충전해야 하는 주말에 몸과 정신을 혹사한다. 어느 날 아빠가 눈이 침침했다. 병원에서 원인이 스트레스란다.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해도 그러지 못한다.
둘째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 아빠도 둘째에게는 관대하다. 마음을 비우고 있으니 조금만 잘해도 칭찬받는다. 둘째는 스트레스 없이 생활이 즐겁다. 집안에서도 온 가족을 즐겁게 하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까칠한 언니의 마음도 잘 이해하고 이런저런 생활을 언니에게 맞춰 준다. 세 살 차인데 성격이 관대하여 동생이 언니 같고 언니가 동생 같다. 잘 먹고 스트레스가 없으니 키가 언니와 비슷하고 몸무게도 더 나간다. 몸만 풍성한 게 아니고 마음도 넉넉하여 남을 배려해주니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우리가 바라는 건 최고이기 보다는 인간다움이 아닐까. 서로를 안아주고 같이 공감해 주는 따뜻한 마음 말이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인성이 부족하다면 모래성을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정보가 넘치는 시대인 만큼 모두가 많은 양의 정보를 접하게 된다. 인공지능이나 로봇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참다운 인성이 더 필요할 때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모든 것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나를 넘어서 서로를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이 필요한 시대인 듯하다.
아이들이 자라야 할 세상은 맑고 깨끗해야 한다. 누구도 불행하지 않을 그런 세상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지금도 손녀는 핸드폰에 빠져 할머니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밥 먹을 때도 핸드폰을 눈에서 떼지 못한다. 왜 그렇게 핸드폰을 보느냐고 물었다.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타일러도 소용없다. 전자파가 여러 면에서 해를 가져오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한다.
마침 집 앞에 도서관을 개관했다.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고 독후감을 쓰면 권당 오천 원씩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정말’ 하면서 반기는 기색이다. 자기는 도서관 갈 시간이 없으니 할머니가 가서 책을 빌려오란다. 대가의 보상을 돈으로 하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도 하나의 수단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취미가 독서로 바뀐다면 손해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의 그림에 사랑과 희망, 그리고 기쁨과 두려움도 섞일 것이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와 즐거움이 반복된다. 이러한 일상이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리라. 그 속에서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은 과연 어떤 그림일까. 빨강, 파랑, 노랑 등 무수히 많은 색 중에서 어떤 색을 찍었을까. 가끔은 돌부리를 차기도 하고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 손녀가 그린 그림이 올바른 이정표가 되어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들은 내게 이 세상 전부다. 모두가 힘을 합하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그릴 수 있으리라. 자라나는 아이들이 함께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말이다. 모두가 범죄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바르게 살아갈 그 날을 꿈꾼다.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켜갈 것이다.
희망을 그린다. 범죄자로 얼룩졌다 해도 오늘보다 더 나은 태양이 내일은 떠오를 것이다. 오늘의 고단함 속에서도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이다. 사랑과 희망이 담긴 다섯 장의 그림에 화합을 덧칠한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