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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내가 이 나이에 느닷없이 800km를 걷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은 오래 전, 누군가 스페인 북부의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가로질러
산티아고까지 걸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만 해도 그 길을 걸은 이가
존경스러웠을 뿐, 내가 걸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이 길을 걷고 나서 <느긋하게 걸어라 - Walk in a Relaxed Manner>
라는 책을 쓴 조이스 럽(Joyce Rupp)이라는 수녀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10여 년 전,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해 들었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가, 나이 60이 다 되어
우연찮게 다시 접하고 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사건과 같은 경우를 두고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는 미래의 씨앗이 심겨지지만 그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어느 날 삶의 중요한 경험이 그 씨앗을 깨우며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몇 년 전 내 마음밭에 떨어졌던 씨앗을 깨운 건 바로 1년 전에 읽은
그의 책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환갑쯤에는 갈 수 있을까 소망했는데
갑자기 동행할 사람이 생겨 2년이나 앞당겨
꿈에나 이루어질 것 같았던 일을 얼결에 실행하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자기 인생에 대해, 아니 자기 코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인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는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세계 3대 성지로 꼽힌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세시대에는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성지였다고 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많은 길 중
“까미노 데 산티아고 - Camino de Santiago”라고 불리는,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Saint-Jean-Pied-De-Port)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800km 구간은 그 길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리만큼 유서 깊고 아름다워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성지로 가는 길이니만큼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부른다.
(‘Camino’는 스페인어로 ‘길’이란 뜻인데, ‘The Camino’라고 하면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말한다.)
그러나 성지라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지여행과 자연을 좋아해서 걷기로 한 나는
감히 자신을 순례자의 대열에 세울 수는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면 큰 깨침을 얻는다고도 하는데 그 역시
내 그릇에는 안 맞는 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바란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힘든 하루하루가 모여 여정을 끝맺게 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평소 800미터도 걷기 싫어하던 내가 서울-부산 왕복거리인
800km 대장정을 준비하다 보니 자연히 낮아지고 겸허해지면서
순례자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동트기 전, 산티아고를 향해 미지의 땅에 첫걸음을 내딛으면서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마음에 지도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만
위대한 순례자이신 그분의 손을 잡고 걸을 뿐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날 날씨가 어떨지, 가는 길이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길인지
혹은 발바닥과 발목을 괴롭히는 돌길인지, 수많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지 아니면
산을 굽이굽이 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또 음식을 사 먹을 곳은 언제 나타나는지, 그날 원하는 곳에서
잠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러니 매일 매일이,
아니 순간순간이 모험인 낯선 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건강을 유지하며 5주 동안 걸으려면
자연히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게 겁나서 그분의 손을 놓칠까,
야무지게 잡으려 했지만 800km를 끝까지 걸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발가락엔 돌아가며 열두 군데나 물집이 생겨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었고,
퉁퉁 부어올라 내리막길에선 늘 비명을 참아야 했던 발목과 발등은
걷기를 끝낸 지 두 달이 넘은 지금도 다 낫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여정 첫날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던
새벽 미명에 펼쳐진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이것이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이후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매일, 내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길 위에 서 있을까 감탄하면서,
내일은 또 어떤 길을 만날까 기대가 가득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내는 드라마틱한 하늘, 순례자들의 고단한 발길을
위로하듯 끝없이 이어지는 형형색색 들꽃의 향연, 지평선을 이룰 만큼
광활하게 펼쳐지는 초록 밀밭의 물결,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
유서 깊은 마을들, 오랫동안 잊었던 기기묘묘한 새들의 목소리,
행여 밟을까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길 위의 느림보 달팽이들
그리고 청정한 바람과 공기.
그 어느 것도 쉽사리 두고 돌아설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길을 걸으니
차를 타고 갈 때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최소한의 소지품만 가지고 단순하게 살면서
많은 잃어버린 것들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자연과 하나 되니 작은 들꽃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솜씨를 발견하고 절로 탄성이 나온다. 광활한 들판을
고독하게 걷노라면 그분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걷다 보니 우리 인생이
이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해발 1,300미터 산 정상에 서니
이틀 동안 내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보였다.
되돌아가라고 하면 못 간다고 할 만큼 아득한데,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어느새 그렇게 지나왔던 것이다.
평탄하고 곧게 뻗은 길, 아름다운 강을 따라 가는 길,
유채꽃이 가득한 들판,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 가파른 언덕들,
혼자서도 걷기 힘들 만큼 좁은 숲길, 소똥 냄새로 머리가 아팠던 길,
달려드는 개들 때문에 공포에 휩싸였던 길, 끝나지 않을 것처럼
힘들고 길었던 산길, 가도 가도 음식점이 나타나지 않아 허기졌던 길.
지나온 그 길들을 되돌아보니 좋고 편한 길에서는 그게 전부인 것처럼
좋아하다가 힘든 길을 만나면 금세 불평이 나오고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다.
앞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늘 순간순간에 울고 웃으며 매어 있었다.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손을 내밀다가
편안해지면 곧 그 손을 놓고 언제 그랬던가 싶게 돌아섰던 것처럼.
그 길을 모두 걸어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성당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도 하고 울기도 한다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그런 격한 감동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이상 걸을 일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냥 그대로, 멈추지 말고 지구 끝까지 걷고 싶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연과 하나 되어 걷는 일이
어느새 내게 큰 기쁨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디언들과 신 사이에는 성직자가 필요 없고,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은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면
그 자리에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조금은 알 듯하다. 산 정상에서 보았듯,
내 앞에 다양한 길이 펼쳐질 것을 예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어떤 길이 전개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지만
나는 위대한 순례자이신 그분의 손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잡았던 손을 놓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나를 감히 순례자의 대열에 세워도 될지 모르겠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내가 너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조용하다고
전화로 메일로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어요.
오랫동안 걷는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아무런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 하나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전력을 다해 5주 동안 살아낸 후유증일까요, 떠나기 전보다 더
집에 콕 틀어박혀 꼭 필요한 일 외에 세상사는
보지도 듣지 않고 지내게 되네요. 무엇보다 답답한 하늘,
광화문의 집회, 이곳저곳의 소란한 소리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사귀환 보고도 이렇게 늦어졌어요.
집에 돌아와서야 게시판의 기도제목 속에 저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 앞에서는 뒷걸음을 치지만
자연을 찾아가는 일에는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탓에
800km를 걸은 일이 내가 해낸 일인 줄 알았는데
많은 친구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이었다는 걸 알고 감동했지요.
가기 전날까지 허리가 아파 물리치료를 받은 내가
오히려 허리가 튼튼해져서 돌아왔다는 것은,
생명이 위급하던 친구를 살려낸 그 위대한 기도가 이루어낸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사랑합니다.
프랑스 국경 마을 생장(Saint-Jean-Pied-De-Port)의 순례자 등록사무소 앞에 줄을 선 순례자들. 이곳에서 순례자 등록증을 발급받아야 순례자를 위한 값싼 숙소에서 잘 수 있고 거기서 받은 스템프로 얼마간을 걸었는지 증명하게 된다.
걷기 첫날 만나게 되는 해발 1412미터의 피레네 산맥은 산티아고 가는 길 중 가장 험난한 코스여서 순례자들을 긴장시키지만 그 명성에 걸맞지 않는 목가적인 풍경의 아름다움은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피레네 정상에 가기까지 펼쳐진 들꽃의 향연은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상 가까이에서. 피레네를 넘는 일은 날씨의 축복이 아니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와 안개 그리고 강풍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늘이 아름다웠지만 바람이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어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렇게 맑은 날은 일년에 몇 번 없다고 한다. 출발부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이후 길에서 수많은 십자가와 마리아상을 보면서 국교가 가톨릭인 스페인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생각했다.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의 첫 마을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 가기까지는 27Km. 표지판에 론세스바예스까지 3.6Km라고 적혀 있다. 산맥을 넘는 일이라 10시간 이상을 걸었다.
스페인의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비리(Zubiri)로 향하는 아침. 매일 아침 이렇게 새로운 길을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다.
페르돈 고개를 향해 가는 길에 처음 만난 밀밭. 그 아름다움에 어쩔 줄 몰랐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피레네 산맥,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와 함께 산티아고 가는 길의 3대 난코스 중의 하나인 페르돈 고개. 나에게는 피레네 산맥보다 힘든 길이었다. 순례자들을 형상화한 철조각으로 유명하다. 철조각 사이로 보이는 산마루의 풍력발전기는 스페인의 많은 산 위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포도밭과 밀밭 너머 꿈처럼 드러난 마을. 그 아름다움에 말을 잊고 한참 바라보던, 잊을 수 없는 마을이다.
이제 그림같이 아름다운 밀밭이 이어진다. 밀밭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했다.
메세타, 고원지대에 펼쳐진 밀밭의 바다에 빠졌다. 눈이 닿는 곳까지, 지평선 끝까지 바다처럼 광활한 밀밭. 내 작은 디카는 그 풍경의 몇십분의 일도 잡지 못했다.
순례자의 배낭을 주목. 입은 옷 외에 달랑 한 가지씩밖에는 갖지 않은 순례자들은 미처 마르지 않은 양말과 수건을 옷핀으로 매달고 길 가면서 말려야 한다. 저렇게 큰 바게트를 준비했으니 점심 식사는 걱정 업을 듯.
프랑스에서 온 할머니. 중년 이상의 순례자들이 의외로 많다. 때론 저렇게 끌수레에 짐을 싣고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수레가 지나기 힘든 구간도 많은데 그럴 땐 어찌하나 모르겠다.
카메라만 대면 그대로 영화 화면이 되는 아름다운 길들.
그러나 좋은 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걷기엔 좋지 않은 아스팔트 길.
하루 종일 찻길을 따라 걸은 날도 있고
낙농을 하는 갈리시아 지방엔 유난히 비가 많아 늘 소똥이 범벅이 된 진창길을 걸어야 한다. 일 주일 동안 소똥 냄새에 어지럼증까지 일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자갈길. 산티아고 구간의 대부분이 자갈길이다.
불쌍한 내 발. 사진엔 다섯 군데 반창고가 붙었지만 걷기를 끝내기까지 발가락은 10개인데 12군데에 물집이 잡혔으니 이미 상처 난 곳에 또 물집이 잡혔던 것. 복숭아뼈는 튀어나온 채 벌겋게 부어 있다.
강을 따라 가는 길. 생장에서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을 만난 이후 800Km구간 내내 강이 끊이지 않았다. 밀 농사가 잘 될 수밖에 없다.
명화 같은 풍경.
내가 좋아하는 사진. 산티아고까지 자전거로 가는 순례자들도 많다.
오 세브레이로로 가는 길
산티아고까지 19.5Km 남았다. 시작할 땐 두렵고 아득하기만 했는데 어느새...
드디어 산티아고 대성당. 성당이 너무 웅장해서 카메라에 다 잡히지 않는다. 다음번에 첨탑까지 나온 세로사진을 싣기로 함.
산티아고에서 90여Km 떨어진스페인의 땅끝, 휘니스테레. 이정표에 0.00Km라고 새겨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까지 다시 걷는다.
고통 없는 영광은 없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묻는다. 좋았느냐고. 하루도 쉬지 않고 평균 25km씩,
많이 걸은 날은 40km 가까이 5주를 걸어야 했던 사람에게는 너무 단순한 질문이지만
그래도 나는 무조건, “좋았어요, 강추예요, 꼭 한번 해보세요” 하고 대답한다.
좋았느냐는 물음 뒤에 오는 말은 “대단하다”는 감탄사. 그러면,
“일단 마음먹으면 해낼 수 있고, 그러면 당신도 대단해집니다”라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 그 길을 걷고 싶다면 해낼 수 있고,
그러면 당신이 말했듯, 대단해질 수 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수있다.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원리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런 내 말 때문에 주변에 나도 한번 가봐야지 하는 사람이 여럿 생겼지만
800km를 걷는 일은 스포츠도 아니고 남이 하니까 나도 할 수 있겠지 하고
따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겠다.
까미노를 걷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게 “하고 싶다는 열망”인 것 같다.
사실 산티아고에 가겠다는 내 본래 계획은 1~2년 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러잖아도 부실한 허리가 탈이 나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발목이 잡힌 건 40주년 홈커밍행사였다.
해외 동문들까지 초대해놓고 명색이 추진위원으로서
용평 현장에 있을 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또 한 가지는 눈이었다. 떠나는 날을 3주 앞두고 전에 망막 수술을 받았던
눈을 검사하러 갔을 때, 이번엔 다른 쪽 눈에 망막변성이 생긴 게 발견되었고,
주치의 곽형우씨가 그 다음날로 수술일정을 잡는 게 아닌가.
김인식 위원장이 홈커밍행사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산티아고에 가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다며 허락을 해주어 마음이 찔리면서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일까?
일단 수술을 하면 2주 동안은 가벼운 일상생활만 해야 하고 그 후에도 조심해야 한다.
그 당시 걷기는 물론 무게운동까지, 나름대로 맹훈련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걸 모두 멈추고 그림처럼 집에 있다가 준비 없이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 게 분명해보였다.
그러나 나는 생각 끝에 수술 날짜를 2개월 후로 미루고 가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날로
수술 일정을 잡은 걸 보면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것인데도 지난번처럼 위급한건
아니라기에, 망막 손상은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어 은근히 겁나고 마음이 무거웠지만
만일에 대비해 치료비 지원이 큰 여행자보험을 들고 결행하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요컨대 나는 그만큼 가고 싶었다. 가기 전날까지 허리 물리치료와 운동을 병행하며,
그리고 올림픽 출전 선수처럼 홍삼으로 힘을 기르며^_^,
“하고 싶다는 열망, 할 수 있다는 확신, 해내겠다는 각오”로 불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기에 스스로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을 걸은 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언젠가 나처럼 꼭
그 길 위에 서고 싶다면 까미노의 구호, “No Pain, No Glory!”를 소개하고 싶다.
정말 그렇다.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외침이 말하듯,
까미노를 걸으면 행복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낸 후의 성취감도 있지만,
그것은 무시 못할 고통을 넘어서고 난 후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정 첫날, 해발 1,410m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까지
27km를 열 시간 넘게 걷고 나니 내리막길이 너무 가팔라서인지 내 발목과 무릎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둘째 날부터 생기기 시작한 발가락 물집은 끝나는 날까지
나를 괴롭혔고. 또 얼마 후부터는 온몸과 얼굴에 수포가 생겨 고생하다가
결국 병원에 가서 원인 모를 알레르기라는 진단으로 치료를 받고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불리는 순례자들의 숙소 풍경은 흡사 병동 같다.
여기저기서 발 물집을 터뜨리고 약을 바르는 사람, 몸 이곳저곳 통증을 치료하는 사람,
감기로 콜록거리는 사람, 배탈로 토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늘 약 냄새, 파스 냄새가 진동한다.
통상 800km로 알려져 있는(내 계산은 817km였는데 어떤 이는 훨씬 길다고도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거리가 멀다는 것 뿐 아니라 걷기에도 쉽지 않은 길이다.
반드시 경등산화 이상의 신을 신어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풍광이 아름답다고 해서 가벼운 신을 신고 늘쩡거리며 걸을 수 있는 길은 없다.
평지라 해도 거의 다 돌길이어서 늘 발바닥과 발목을 괴롭히고,
비가 오면 발이 푹푹 빠지는 황톳길은 순례자의 발목을 붙들고 놓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데 애를 먹는다. 황톳길이 아니더라도
서울의 여름비처럼 양이 많은 빗길을 우비만으로 걷는 일은 쉽지 않다
그나마 메세타 지역 말고는 평지가 그리 많지도 않다. 나머지는 대부분 언덕길인데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언덕을 넘었다. 1,100~1,500m 산도 네 번을 넘었고.
나는 스스로 언덕공주라고 불렀을 만큼 올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 인생이 그렇듯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남들은 언덕이 힘겨워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했지만 나는 늘 내리막길에서 발목과 발등의 통증으로 비명을
참느라 괴로웠다. 복숭아뼈 주변이 부어올라 한동안 무 다리였던 내 발을 볼 때마다
나만 보면 발목이 끊어질 것 같이 가늘다고 야단하던 영오기 생각이 났다.
정말이지 하루 이틀 사흘 정도는 이삼십 킬로씩 걸을 수 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5주를 걷는 일, 그건 내 상상 너머의 일이었다
고생이 어디 그것뿐일까? 한마디로 말해 까미노의 삶은
하루 20~25유로로 살아가는 가난한 삶이다. 유럽에서 우리 돈 3~4만 원으로
잠자리와 세끼 식사를 해결한다면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유로 안팎으로
하루를 지내는 숙소의 침대는 시트를 갈아주지 않기 때문에 늘 불결하다.
거의 모든 곳이 남녀 혼숙이고, 80% 정도는 화장실과 샤워장까지도
구분 없이 같이 쓰니 그 불편함은 상상해보면 알 수 있는 일. 수십 명, 또는
백 명이 넘게 함께 잘 때도 있기 때문에 실내는 땀에 전 등산화 냄새, 코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습하고 퀴퀴하다. 코고는 소리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해가 갈수록 시설이 좋아지고 있어서 지낼 만하기는 하지만,
나 같은 깔끔쟁이들은 그날 어떤 숙소를 만날지 늘 긴장하곤 한다.
또 밀농사와 목축을 업으로 하는 농촌 길을 지나다 보니 먹을 것이 한정돼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식당은 서너 군데 큰 도시 말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한낮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새벽 6시부터 걷기 시작하는데
8시쯤에야 겨우 문을 여는 바에 들어가 봐야 빵과 커피 그리고
계란과 감자를 섞어 부친 또르띠야(Tortilla) 말고는 먹을 게 별로 없다.
본래 그곳 바(bar)의 기능이 동네 아저씨들이 대낮부터 술 마시는 곳이니까.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것도 역시 바에서 파는 샌드위치뿐인데 딱딱한 빵에 야채도 없이
햄, 소시지, 살라미 등을 끼운 것이다. 그러니 나처럼 육류를 싫어하는 사람은
맨 빵으로 허기를 달래기 일쑤. 그날 걷기를 끝내고 식당을 찾아봐도
오후는 낮잠을 자는 시간이라 모두 셔터까지 내리고 고요하다.
매끼 밥을 사먹어야 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특별히 싼값에 제공하는
동네 식당의 저녁메뉴도 가는 곳마다 그게 그거여서 대여섯 번만 먹으면 질린다.
어떻게든 먹고 에너지를 보충해야 걸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네 가게에서 평소 잘 먹지 않던
요구르트, 치즈, 바나나, 단 과자와 초콜릿 등을 사서 주식 대용으로 삼았을 정도이다.
순례자들이 몸에 지닌 것 역시 노숙자보다 조금 낳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은 옷 말고는 갈아입을 옷 한 벌에다 비옷, 침낭, 슬리퍼, 세면도구,
꼭 필요한 의약품, 작은 공책과 필기구와 같은 기본적인 것 몇 가지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소지품을 줄였어도 내 배낭은 그날 길 가면서 먹을 간단한 요기꺼리와
물 두 병까지 합쳐 8kg 가까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최소한의 소지품으로 몇 주를
지내고 난 후,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물건은 극히 적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TV와 인터넷은 물론 책도, 음악도, 휴대전화도 없이 사는 원초적인 생활,
거기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 배낭을 메고 어떤 땐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골프인 듯 여유만 생기면 골프장으로 향하는데,
휴가를 얻어서까지 이 힘든 길을 걷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는 일이 힘들다고 해서 ‘고통’이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샌들에 나무 지팡이, 표주박의 물만 가지고 그 먼 길을 걷다가
도중에 목숨을 잃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중세의 순례자들을 생각하면 호사스러울 정도니까.
더구나 생장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피터라는 시각장애인도 나와 함께 피레네를 넘어
버스 한번 타지 않고 산티아고까지 걸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에게서 받은 감동은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고통’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고통 너머에
까미노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까미노의 행복”
그것은 소박한 삶, 단순한 삶, 고통스런 삶 가운데 얻게 되는 자족으로부터 출발한다.
여벌옷이 하나뿐인 순례자들은 햇빛에 빨래만 뽀송뽀송 말라줘도 행복이다.
모처럼 이층이 아닌 일층 침대에서만 잘 수 있어도 운이 좋은 날.
어쩌다 입에 맞는 음식 한 가지만 먹어도 더 바랄 게 없다. 꼭 한 번 새 홑청을 씌운
베개를 벤 날은 깨끗한 호텔 침대에라도 누운 듯 기분이 좋았다.
몇 가지 안 되는 나의 소지품들은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기에
서울에 두고 온 어떤 귀한 것들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 된다.
하루 종일 비를 맞던 날, 숙소를 정하고 나서 비에 쿨쩍거리는 등산화를 벗고
마른 양말과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의 그 안도감과 상쾌함.
나는 그런 사소한 행복감을 좋아한다. 그것은 산티아고 길의 청정한 바람에 씻기고
푸른 하늘 빛깔에 마음이 물든 순례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그것이 고통을 껴안고 기쁜 마음으로 길을 걷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통 없는 “영광” 대신 “행복”으로 그 단어를 바꾸고 싶다.
“고통 없는 행복은 없다 - No Pain, No Happiness !"
유난히 날씨가 맑고 아름다웠던 5월 어느 날, 나는 길 위에서 58번째 생일을 맞았다.
케잌도 없고,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스스로 내 생애 최고의 생일이라고 선포했다.
적잖은 나이에 용감하게 힘든 일에 도전해 내 한계를 높이고 지경을 넓혔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생일선물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은혜로 주어졌다. 그것은 괜스레 작은 일에도 감사가 일고
사소한 일에 바보처럼 행복해지는 까미노에서의 삶이 바로 천국의 삶이며,
나의 현재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길,” 많은 분들이 그 길을 걸으면서 이 세상에서 천국을 앞당겨
이 세상과 하늘나라를 동시에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난번 <지구를 걷고 싶다>의 답글 중 권태억씨가 궁금해하던 부분, 걸은 날짜, 짐 무게와
비용에 대한 답은 이 글 속에 들어 있다고 봅니다. 대단하다, 장하다, 과분한 칭찬을
해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산티아고행을 준비하면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
김남희의 <걷기 여행2 /산티아고>, 김효선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유럽을 만나다>
권현정 & 구지현의 <산티아고 길의 두 여자> 등 다섯 권의 책을 읽었는데, 정작 필요한
정보를 얻기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 <산티아고 길의 두 여자>의 작가들을 만나
까미노길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었지만, 막상 가보니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산티아고에 가기 위해 정말 필요한 Tip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혹시 궁금한 것 있는 분들은 답글이나 메일로 알려주시면 성실히 안내하겠습니다.
디카가 나오기 전까지 저는 여행길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을 찍다 보면 여행 자체에 몰입할 수 없고 돌아와 마음에 안 드는 사진
버리는 것도 그렇고 해서요. 그런데 우연히 디카가 생겨 오지여행에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지 한 3년 된 것 같네요. 사진에 관심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는데다
길을 걷는 사이사이 후딱 사진을 찍고 돌아서야 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렇지만, 진경씨처럼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은 여유를 갖고 걸으면서 사진만 담아 와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유서 깊은 마을들, 성당과 길 위의 다양한 십자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묵시아와 휘니스테레의 풍경 등도 실어보고 싶은데
사진 올리기가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인지 매양 뜸을 드리게 되네요.
새삼 영오기 향수기가 존경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충남씨가 말한 El Camino Real은 “왕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인터넷 검색에 의하면
옛날 스페인의 식민지로 가는 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California에도 그 이름의
고속도로가 있다네요. Alfred Reed 작곡의 관악곡, El Camino Real도 같은 뜻 아닐까요?
우리나라에는 까미노만한 걷고 싶은 길이 없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다음에 하지요.
티셔츠, 기념품 등에서 만나는 No Pain, No Glory!!! 이 그림 하나가 모든 걸 말해준다.
피레네의 내리막길. 처음부터 끝까지, 45도는 되는 급한 경사 때문에 몸이 앞으로 쏟아질 듯하고, 무릎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오르기를 끝내고 휴~ 하고 안심하던 사람들에겐 생각지 않던 복병이었다.
순례자등록사무소 맞은편 건물 앞을 장식한 닳고 닳은 등산화와 배낭, 그리고 중세의 순례자들이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던 표주박과 나무 지팡이는 산티아고를 향해 첫걸음을 떼려는 사람들을 설레게도 하고, 두렵게도 한다.
순례자숙소 입구 벽에 그려진 중세의 순례자상. 조그만 봇짐을 메고 샌들에 나무지팡이, 그리고 표주박의 물에 의지해 길을 가다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길 가던 순례자들이 멈춰서 사진을 찍고 가는 어느 집의 벽화.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그 의미도 가슴 깊이 새겨본다. 소유, 집착, 미련, 욕심, 절대적일 것 같은 사랑, 그 모두 잠시나마 떠나온 곳의 높은 선반 위에 얹어두고, 인생의 무게를 새털처럼 가볍게 해서 걷지 않으면 끝까지 갈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인천공항에서. 스페인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산티아고 가는 길에 유럽을 만나다>의 작가 김효선씨가 내 뒷모습에서 아직도 씩씩한 기운을 발견한다며 찍어주었다. 가방에 달린 가리비 껍질은 산티아고의 전설적 인물인 성 야고보와 관련된 것으로, 산티아고 길에서 순례자임을 상징하는 징표가 된다. 등록사무소에서 순례자증을 받을 때 하나씩 나눠준다. 작은 인형은 중세의 순례자. 사진에선 잘 안 보이지만 모자엔 가리비조개가 달렸고 나무지팡이에는 표주박이 달려 있다.
35리터짜리 내 배낭 속의 살림살이 -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 한 벌씩, 양말 세 켤레, 바람처럼 가벼운 윈드자켓, 방수가 되는 얇은 점퍼, 우비, 방수 바지, 여벌 모자(중간에 현지 기념품을 선물 받음), 얇은 머플러, 선글라스, 오리털 무게 350그램짜리 침낭, 석완 표 스포츠타월 2장, 40일 쓸 만큼 작은 용기에 덜어 담은 기초화장품, 세면도구, 빨래집게 대용 옷핀 10개, 홍삼엑기스 1병과 의약품류, 만일을 대비한 허리와 무릎보호대, 헤드 랜턴, 카메라 충전기, 슬리퍼,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자료 그리고 작은 노트와 볼펜이 전부. 보잘것없는 살림살이지만 모두 내겐 보물이었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은 산티아고행을 결심해 볼 만하다. 800km를 다 걷고 나면 체중이 넉넉히 나가는 남자의 경우 7~8kg 이상 빠지고 허리가 1인치 이상 확실히 줄어든다고 한다. 체중이 많지 않은 나는 한 4kg정도 빠진 것 같은데 일주일 후부터 바지허리가 헐렁해지더니 20일 정도 후에는 허리색의 끊을 조이고 조여야 힘이 생겼다. 덕분에 이 나이에 잠시나마 비비안리 허리로 불렸다. 그러나 놀라운 중년 아줌마들의 중부지방 복원력에 밀려 이제 비비안리 허리는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고, 두 달 만에 완전히 떠난 줄만 알았던 살들도 돌아와 착실히 내 몸에서 안주하고 있다. ㅋㅋㅋ
땅끝마을, 휘니스테레의 순례자상.
6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 부부순례자. 오래 산 탓인가, 거리를 두었지만 힘든 일에 도전해 한 곳을 바라보며 걷는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갈리시아 지방의 날씨는 정말 변덕스럽다. 비의 양이 많을 뿐 아니라 하루에도 수없이 비옷을 입었다 벗었다 해야 한다. 이런 날은 배낭 커버를 계속 씌워두는 게 낫다. 서울에 와서 장마를 지내면서 비 맞고 걷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걷기 둘째 날, 길에서 만난 일본인 순례자 추모비. 가끔 이런 추모비를 만날 수 있는데 길에서 유명을 달리한 순례자들을 위해 스페인 정부에서 세워준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Shingo Yamashita라는 이 일본인은 2002년 8월, 64세의 나이에 변을 당했는데 피레네를 넘었다면 나처럼 걷기 둘째 날이고, 피레네를 넘지 않고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했다면 걷기 첫날이었다. 까미노길을 걷는 일본인은 드문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보통 새벽 6시경부터 걷기 시작하면 30분정도는 헤드랜턴으로 앞길을 밝혀야 한다. 날씨가 맑으면 한 시간쯤 후 이런 장엄한 일출과 마주하기도 한다. 7시 7분에 찍은 사진.
때론 이렇게 새벽부터 안개 속을 걷기도 하고.
외계인이 다녀간 흔적처럼 보이는 이 서클은 길 가는 순례자들이 돌을 하나씩 얹어 만들어진 것. 계속진행형이라 나도 맨 끝에 돌 하나를 얹었다.
까미노길은 그 자체가 아름답지만 이처럼 드라마틱한 하늘 풍경이 있기에 더 황홀해진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미이라처럼 죽은 얼굴을 한 하늘을 보니 갑자기 감옥에 갇힌 듯 가슴이 막혔다. 하늘이 청명한 해외에 갔다 온 게 처음이 아닌데 이번에는 유독 서울의 하늘이 견디기 어려웠다. 구름이 토끼도 그리고 노루도 그리던 그 어릴 적의 하늘을 다시 만나 매일 그 변화와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오랫동안 걸었기 때문인가 보다. 계속되는 잿빛의 무표정한 서울 하늘이 답답해서 다시 까미노길 위에 서야 할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처럼 “나 다시 돌아갈래~!” 소리치고 싶었다.
하늘 때문에 더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지고...
나의 첫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등록이 늦어서 잠자리가 없다며 사설 알베르게를 소개해줬는데 전 구간 중 가장 허술하고 지저분한 곳이었다. 그래도 프랑스에 속해서인지 숙박비가 10유로로 가장 비쌌다. 첫날 이런 곳에서 자니 각오가 단단했는데 오히려 스페인의 알베르게들은 시설이 훨씬 좋고 값도 쌌다. 휴~.
스페인에서의 첫날 밤.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침대 수 100개. 흡사 2차대전 영화에서 보는 야전병원 같은데 그래도 천정이 높아서 공기는 희박하지 않았다. 숙박비 6유로.
내 잠자리. 도착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받거나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걷기를 일찍 끝내면 이렇게 일층침대를 맡을 수 있다. 우리 나이에 어떤 땐 사다리도 갖춰지지 않은 이층침대를 오르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실제로 떨어지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래도 자지 않을 때는 등도 못 펴고 구부리고 앉아야 하고, 간혹 2층에서 심하게 몸을 뒤척이는 사람을 만나면 흔들림과 진동 때문에 깊은 잠 자기가 힘들다. 여정이 끝나가면서 몸놀림이 재빠르고 운동신경이 둔하지 않은 나는 차라리 이층침대를 선호하게 되었다.
비 쫄딱 맞은 날. 온갖 젖은 옷가지를 말리느라 난민수용소 같다. 이런 날은 실내 공기도 퀴퀴하고 축축하다.
침대 수 20개 정도의 작은 알베르게. 옆에 큰 방이 하나 더 있다.
숙박비 8유로로 스페인에서 가장 비쌌던 포르토 마린의 신축 알베르게. 유일하게 깨끗하게 다림질 된 새 베갯잇을 제공해 기분 좋았던 곳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창밖의 강 풍경도 그림 같다.
걷기를 끝낸 오후, 순례자들의 최대 과제이며 관심사는 빨래다. 날씨가 좋을 때 재빨리 빨래를 해 널어 말려야 하는데 빨래터가 늘 붐비기 때문이다.
간혹 시설이 좋은 알베르게에서는 실내에서 등산화를 벗게 한다. 하루 종일 땀에 젖은 등산화는 깔창을 꺼내서 바람을 쏘여야 한다. 많은 신발 중에서도 운동화 같은 간편한 신발은 보이지 않는다.
저녁은 대개 동네 식당에서 사 먹거나 부엌이 달린 알베르게에서 해먹기도 한다. 그리고 드물지만 이렇게 숙소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이곳은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잠자리는 별로였지만, 숙소나 식사 값은 모두 임의 기부형식이었다(이건 하나도 안 내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나는 다른 날에 기준해서 도네이션을 했지만.) 음식과 설거지는 순례자들이 함께 하는데 그날은 2년째 지구를 걷고 있는 요리사출신의 한 순례자가 맛있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만들어주었다. 스페인 식탁에서 와인은 언제나 기본. 이날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제일 먼저 나서서 설거지 자원봉사를 했다. 국위선양 차원에서^-^. 여기 모인 순례자들의 나이에 주목하고 많은 사람이 산티아고행에 용기를 갖기를...
다양한 알베르게들.
이렇게 정원과 수영장이 있는 알베르게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이날은 날씨도 좋아서 서양사람들은 선탠을 즐겼다. 멀리 보이는 젊은 세 여자들은 한국 처녀들. 각자 따로 왔으나 어디선가부터 친해져 줄곧 같이 다니고 있다. 대학 재학 중의 학생, 사진학과를 휴학 중인 장래 사진작가, 건축설계사직을 1년간 휴직하고 여행 중이라는 서른을 넘긴 큰언니. 나이도 다른데 잘들 어울렸다. 출발날짜가 비슷하면 길을 가면서 몇 번씩 마주치게 된다. 모처럼 부엌이 달린 알베르게에서 만났을 때 점심에 해산물 찌개와 밥을 해서 세 아가씨들을 먹였더니 기특하게도 지들끼리 장을 봐서 저녁에 볶음밥으로 답례를 했다.
알베르게는 보통 밤 10시경에 문을 닫고 아침 8시에는 침대를 비워줘야 한다. 그리고 오후 1~2시경에 다시 문을 연다.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알베르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팜플로나의 알베르게. 침대 수가 20여 개밖에 되지 않아 일찍 도착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이곳엔 침대 수 100개짜리 큰 알베르게도 있지만 독일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친절한 운영으로 유명하다.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한 손길 때문에 어느 가정에 초대된 것 같이 기분 좋았던 곳이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남녀가 바로 산티아고를 완주한 시각장애인 피터와 안내인 모렉(Morag).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불평이 사라졌고 감동이 왔다.
드물게 보는 알베르게 풍경이다. 순례자가 점점 늘어나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요란한 풍경은 처음이다. 사설운영이라서 더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산티아고에는 거의 오지 않는 일본사람들의 일장기는 걸어놓고, 아시아에서는 가장 많이 걷는 한국사람들의 태극기는 걸지 않다니... 몰라서 그러는 걸 테니 다시 가게 되면 태극기 하나 들고 가야겠다.
사진 속의 초록색 겉옷을 입은 분은 사대부고 9회 졸업 신승애 이대 명예교수이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인데 우연히 걷다가 만났다. 이분은 피레네로부터 3일 거리에 있는 도시 팜플로나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했고 산티아고까지 빠짐없이 완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연배를 생각하면 그분의 용기와 지구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순례자를 위한 카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긴 웬일인지 태극기가 두 개나 걸려 있다. 비록 바르게 걸리진 않았지만.
산티아고까지 걷기를 마치고 묵시아 바닷가에 갔다가 땅끝 마을 휘니스테레에 가는 날, 비가 억수 같이 내려 버스를 탔다. 더 이상 걸어야 할 부담감은 가질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중간에 내려 하루 자고 거기서부터는 걸어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도무지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생쥐처럼 비를 맞으며 세 시간 가까이 걸은 후 겨우 이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묵시아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고 재워줄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물론 걷지 않으면 알베르게에서 잘 수 없다는 규칙이 있지만 비를 맞으며 너무 고생이 심했던 터라 한숨이 나왔다. 막 쫓겨나려던 참에 내가 너무 불쌍해보였는지 특별히 재워주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거실에서 집 떠난 후 처음 듣는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어 그걸 두고 떠나야하는 게 너무 아쉬웠기에 나는 “그라시아스”를 연발했다. 그런데 이날도 주인 부부가 정말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고 게다가 아침식사까지 제공했다. 숙박비와 식비도 도네이션. 그러기에 언제든 힘들다고 절망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많은 순례자들이 4km를 남겨두고 몬테 도 고조에서 여장을 푼다. 산티아고에는 알베르게도 부족한데다 하룻밤밖에 재워주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산티아고를 돌아보기 위해 적어도 이틀 정도는 머무는 순례자들은 이곳에 묵는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위해 세운 이 알베르게는 침대 수 800개. 하루 4유로로 날 수 제한 없이 묵을 수 있는데 부대시설이 좋고 깨끗하다.
내 생일이 되면 라일락(리라꽃)이 한창이라고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리라라고 지어주셨다는데 요즘은 온난화 때문인지 내 생일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핀다. 새벽엔 손이 시릴 만큼 일교차가 심한 산티아고길에는 이곳저곳 라일락이 만발해 있었다. 평생 골프 같은 건 모르시고 오직 산책과 등산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이 길을 걸으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라일락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