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군은 계속되었다. 정글을 지나가는 행군은 아지다하카를 바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당히 곤란하다. 마룡이라 불리는 아지다하카이지만,
실제로 연속해서 날 수 있는 거리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컸다. 성체의
경우에는 최고 2-3일까지도 쉬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지만, 그렇지 않
은 경우에는 몇 시간 정도 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시반슈미터가
다룰 수 있는 아지다하카 중 완전한 성체는 10 마리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지다하카의 기동전술은 전차나 마장기 상대로는 유효하나 해
적과 같이 분산된 보병 세력의 상대로는 그다지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
다. 만약 적 중에 바시바조크 같은 기관총병이 있을 경우엔 더욱 그렇
다. 때문에, 이번의 출병은 우리에게는 자주 없는 유형의 전체 출병이었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작전이 바뀌는 법은 없다. 인원수로는 어
떤 부대에게도 이기기 힘들 시반슈미터의 전승(全勝)비결은 오로지 상
대의 허를 찌르는 것. 때문에, 보통의 부대였다면 일주일이 넘어도 지나
갈 수 없었을 정글을 우리는 단 4일 만에 주파해 낸 것이다.
군사 이동의 소문이 퍼지기 전에 먼저 친다. 그것이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지상 과제였다.
며칠의 행군을 마친 뒤 우리는 티비앙의 북쪽에 있는 오카와리라는 마을
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의외로 기대했던 해적이나 토호의 병력들과는
부딪히지 않았지만, 대신 많은 수의 몬스터들과 부딪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도, 그간 갑작스럽게 늘어난 몬스터의 수는 상당한
화제거리이자 걱정거리인 듯 했다.
"대장! 마을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을 근교에 친 막사에서 모두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정찰에 나
갔던 마르자나가 돌아오면서 말했다. 발라, 이븐 시나와 함께 티비앙에
의 정찰조를 편성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상한 소문?"
"혹시 그 향기에 대해서 말이야? 그건 나도 들은 것 같은데."
모닥불용 땔감을 베어 온 무카파는, 우리가 모여있는 옆쪽에 그것들을
우르르 쏟아놓으며 끼어들었다. 나는 마르자나에게 다시 물었다.
"향기라니?"
"최근 마을 근방 산에서 이상한 향기가 진동한다고 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향기가 나기 시작한 이후로 각종 몬스터나 야생동물들이 이 근
방에 갑자기 많아졌다고 하네요."
그러자, 그 때까지 조용히 막사의 옆에 앉아있던 셰라자드가 벌떡 일어
나며 말했다.
"설마... 가베라..."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세라자드님은 뭔가 짚이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대륙 남부에는 예전부터 100여년에 한번씩 '가베라'라는 꽃이 핀다
는 전설이 있어요. 이 꽃은 100년마다 한번씩 펴서 불과 며칠이면 없어
지는데... 이 꽃의 정기를 받는다면 어떤 병도 치료되고, 건강한 사람이
라면 보다 강한 신체로 환태탈골 할 수 있다고 해요."
그야말로 전설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실제로 몬스터들이 모여드는 원인일 수 있겠군요."
그러나, 셰라자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그 향기가 가베라 때문이라면, 저는 꼭 가봐야겠어요."
올 것이 왔군. 나와 발라는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븐 시나는 고개를 숙
였으며, 무카파는 갑자기 고민스럽게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
진한 마르자나만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셰라자드님은 건강하지 않으신가요?"
"가베라의 꽃잎을 희석시킨다면 수백 명의 인명을 구할 수 있는 약의 재
료가 될 수 있을 거에요. 100년에 한 번 오는 이런 기회를 결코 놓칠 수
는 없어요."
마르자나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납득
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말을 하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발
라가 - 고맙게도 - 나서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셰라자드님, 저희들은 서둘러야 합니다."
그녀는 우리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 하나 그녀에게 찬성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언제나 평소에 그녀 편을 들던 무카파나 마
르자나 조차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작전의 성패는 얼마나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티
비앙을 공략하는 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반슈미터 중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성녀의 그것에서 고집장이 왕녀의 그것
으로 탈바꿈했다. 어라, 언젠가 전에 저런 표정을 본 것 같은데 라고 생
각 하는 찰라, 그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요."
"셰라자드님?!"
"어차피 도시 공격에는 전 쓸모도 없잖아요!"
아아, 그래. 카디스의 그 감옥 안에서 봤었지. 마르자나가 놀라서 말리
려 했지만, 셰라자드는 당장 뒤로 돌아 자신의 막사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무카파는 어쩔 줄 몰라 나를 쳐다보았고, 그것은 이븐 시나 역시 마찬가
지였다. 눈썹을 굵게 찌푸리던 발라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을 때, 나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셰라자드는 나를 휙 돌아보았다. 반쯤은 화가 난 듯한, 반쯤은 애원이
담긴 듯한 눈동자를 하고.
"....그렇다고, 칼리프님도 못 꺾으신 셰라자드님의 고집을 저희가 어떻
게 할 수도 없지요. 오늘 밤에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모두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셰라자
드도 마찬가지였다.
"살라딘님....."
"밤에 움직이려면 우선은 쉬어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저녁식사 후에
뵙지요."
나는 단정적으로, 그러나 부드러운 말투로 결론지어 말했다. 내 말에 셰
라자드는 망설이는 듯 하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로 돌아갔다.
그녀가 막사로 들어가자, 발라가 곧바로 나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할 수 없지."
내 대답에, 계속 고민을 하고 있던 이븐 시나가 말했다.
"차라리 아두스 베이를 대동시키시는 것이 어떨까요. 살라딘님께서 직접
셰라자드님을 호위할 것 까지는..."
"아두스 베이는 티비앙 정찰조로 이미 결정 되었다. 그가 날 대신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내가 그의 어새신 능력을 대신할 수야 없는 것 아닌
가?"
"그거야..."
"게다가 빨리 산을 탔다가 내려오려면 수가 적은 게 좋아. 몬스터의 출
몰도 있으니, 이 경우엔 확실히 내가 적임이겠지. 걱정들 말고, 자네들
이나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내일 출발에 지장이 없도록 해 두게."
그렇게 말하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사실 시반슈미터 중
누구의 전력도 지금은 빠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가장 좋다는 건 객관적으로 봐도 명백했다. 개인 전투력에
있어서 시반슈미터 안에서 나를 따라올 것은, 발라 정도 외엔 없었으니
까.
"알겠습니다."
"저녁을 좀 서두르도록 하죠."
"마을에 가서, 좀 더 그 향기에 대한 정보를 알아가지고 오겠습니다."
발라와 무카파, 마르자나가 각각 사방으로 흩어지자 이븐 시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즐거우신 것 같군요."
"내가? 설마."
"저도 설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븐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안경을 끌어올리며 실없이 웃었다.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찰조 파견을 서두르라'고 명령하고, 나 역시 저
녁 식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도 긴 밤이 될 듯 하니까.
◈◈◈◈◈◈
마르자나가 수집해 온 정보에 의하면, 향기의 근원지는 오카와리의 동북
쪽에 있는 산기슭인 듯 했다.
"괜찮으십니까?"
정글을 지나 평원, 그리고 마을에 이젠 숲이 가득한 산기슭. 게다가 산
기슭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꽤나 가파르게 이루어져 있는 등
선. 정글이나 평원에선 잘 따라다니던 셰라자드도, 역시 숲 속에선 긴
치마가 방해가 되는지 계속 속도가 늦춰지고 있었다.
"예, 괜찮아요.. 아, 저 위쪽으로 올라가면 되나보네요?"
그래도 그녀는 꿋꿋이 내 부축을 사양해 가며 산기슭을 거슬러 올랐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중턱에 있는 동굴 쪽이라고 했으니... 동굴
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저것이겠군요."
"!?"
그녀가 내 뒤쪽을 보며 비명을 올리려는 순간, 나무를 잡고 경사에 기대
있던 나는 훌쩍 위로 뛰어올랐다. 콰악!! 나뭇가지가 둥치째로 부러지는
순간 두 자루의 시미터는 이미 몬스터의 목 줄기에 박혀있었다. 기우뚱
하고 시체가 쓰러지자 나는 한쪽 시미터를 이용해 그것이 셰라자드를 피
한 쪽으로 굴러 떨어지도록 유도했고, 내 다리가 땅을 밟을 때는 이미
몬스터의 육중한 시체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다시 다른
나무에 의지한 채 그녀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 위쪽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아까부터 우리가 밟고 있는 패턴이었
다.
약 두시간 가량의 악전고투 끝에, 우리는 겨우 목표하고 있던 동굴근처
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셰라자드도 포기하고 내가 끌어
당겨 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올라왔기 때문에 훨씬 수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 미안한지,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필요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네?"
불쑥 물은 내 말에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 성인 남자라고 해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행군입니다. 여태까지만
으로도 충분히 잘 따라오신 겁니다. 그리고, 분명히 티비앙에 가면 셰라
자드님의 활동이 큰 빛을 발휘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가베라도 구하러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걱정마세요. 꼭 가베라를 구해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녀는 망설이듯 미소를 지었다.
위로...
사실이다. 그녀를 향한 내 말은 모두 입바른 위로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그런 행동에 대해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
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물론 몇 번이나 그녀 앞에서 방심한 상태가 되
어버린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 의도에 대해 그녀가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그녀는 내 말이 그저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
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 아마 이븐 시나의 그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
다. 바로 얼마 전까지의 기분에 비하면, 지금 내 기분은 훨씬 쾌청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이제 어렴풋이 그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고 느꼈
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원동력은,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것에서 나오
는 듯 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의 사피 알 딘 밑에서, 그녀의 존재 가치는 그렇게
쉽게 인정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
서도 어떻게든 눈에 띄길 바랬을 것이고, 그에 의해서 '남이 필요로 해
주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며칠 동안 그녀와 함께 행군하면서,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서 삐뚤어진 즐거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자업자득이라고 스스로 말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도 언제까지나 천사의 미소만 짓고 있을 수 없
을 거라는 점이 즐겁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그녀에 대해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여유가 없어질 때에 본모습이 나온다고 하던가. 여태까
지 전혀 이해할 수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그녀의 행동원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그녀가 가베라를 찾겠다고 말하며 했던 행동들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는 티비앙의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우리를 따라온 것이었다. 하
지만 그 이유때문만이었다면, 그녀가 도시 전투에 도움이 안된다고 - 아
주 당연한 일인데 -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쓸모없는 사람이라
고 느끼는 것이 힘들었으리라. 계속되는 행군을 열심히 쫓아간다 해도,
누구 하나 그 때문에 그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솔직히,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내 예측에서 벗어나는 인간이라는 사실
은 무엇보다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신경쓰이게 만드는 점이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이용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그녀에 대해 알아
야만 했다. 그녀만큼의 이용가치를 가진 인간은 이 투르에서 둘을 찾아
도 없을 정도이니까.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이 나에게 불가해(不可解)한 것이 아니라는 게 판
명되자 더할 나위 없이 안심이 되고 있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고, 나는 그런 인간들을 다루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
신이 있었으니까.
"이곳인가 봐요. 향기가 정말 진해졌네요."
그녀는 동굴 입구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가베라는 어떻게 찾으면 되죠?"
"흰색으로... 눈에 쉽게 띄는 꽃이라고 들었어요. 찾는 데 어렵진 않을
거에요. 다만..."
"...?"
"각종 몬스터들이 가베라 때문에 모여 있을 거에요. 이 안은 바깥보다
더 심하게..."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몬스터는 제가 없앨 테니, 셰라자드님은 가베
라를 찾는 데에만 전념해 주세요."
"네..."
그녀는 유달리 친절해진 내 행동이 마음에 걸린 것인지, 아까부터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친절하고 믿음직스럽게 행동할 테니까. 적어도 때가 오기까지는 말이다.
횃불을 밝혀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동굴 특유의 축축하면
서도 신선한 느낌을 가득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몬스터들의 집
합소가 된 것처럼, 모퉁이 모퉁이 마다 어슬렁거리고 있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곧바로 눈에 띄었다.
"이런... 셰라자드님, 저에게 꼭 붙어서 떨어지지 마세요."
"네."
우리는 동굴 내부로 진입했다.
몬스터들을 몇 마리 물리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 동굴은 생각보다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입구 근처의 약간 좁은 길을 지난 뒤에는 그
다지 골목도 없었고, 더 안쪽은 커다란 공동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공동의 안쪽으로 접어들자, 중심쪽에 마치 낮은 절벽처럼
솟아, 위쪽에서 뚫린 구멍인지 홀로 초연히 달빛을 받고 있는 부분이 있
었다.
"......."
우리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숨을 죽였다.
몬스터들은 마치 제단을 향한 것처럼 그 주변을 둘러 싸고, 심지어는 지
능 없는 슬라임이나 도마뱀 종류까지 모두 그곳을 중심으로 어슬렁 거리
고 있었다. 불청객인 우리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가 그 절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바로 그곳에 흰 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꽃이 피어
있었다.
"저것이 바로 가베라군요."
구별하기 쉬울 거라더니, 저정도면 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써 붙인 셈
이다.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건 당연하잖소, 왕녀님. 당신이 100
살이 넘게 살았다면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따야 하죠?"
멍하니 가베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셰라자드는, 내 질문에 퍼뜩 정
신이 돌아온 듯 대답했다.
"아, 그건... 아마 그냥 가까이 가서 자르면 될 거에요. 하지만, 저래서
야 꽃에 접근하기가..."
"그렇군요. 그럼 제가 따오겠습니다. 위험하니까, 셰라자드님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 한뒤, 심호흡을 한번 했다. 어차피 꽃을 따오기 위해서
는 저기에 모여있는 몬스터들을 다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리하지
않고 꽃을 따서는 뜯어낸 꽃을 노리는 몬스터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게 될 테니까.
나는 양 손에 시미터를 움켜 쥐고는 뒤쪽으로부터 쳐들어갔다. 어차피
내 장기가 바로 그것 아닌가. 기습과 측면공격.
셰라자드의 지원 마법 공격에도 힘입어, 몇 십분 정도의 난투극 끝에 동
굴 내부의 몬스터는 모조리 전멸시킬 수 있었다. 조금 놀란 것은, 그녀
의 마법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었다. 특히 칼로 상대
하기 껄끄러운 슬라임이나 전갈 종류는 그녀의 마법 한 방에 손쉽게 날
아가 버렸다. 하지만, 전에 무타나비에서 그녀를 구해줄 때 보았던 마법
의 위력은 이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어새신들에
게 날리던 마법...
설마, 그 때는 최소한으로 피해력을 줄였었다는 뜻인가?
안전한 입구쪽에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셰라자드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정도의 마법력이면 군대를 따라다니는 바라몬에
게 맞먹을 정도이다. 고위급 바라몬 한 명은 1개 중대에 맞먹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마법은 전장 전체를 휩쓸어,
아군에게는 치유의 능력을, 적군에게는 파멸의 능력을 발휘한다.
다만, 워낙 높은 법력과 소질을 요구하는 데에다가 부단한 수련을 필요
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바라몬의 칭호를 받은 자는 열명도 채 되지 않
는다고 한다. 전사로서 비교하자면, 예니체리에 해당하는 지위라고나 할
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의 능력은 바라몬으로 인정 받아도 조금도 이
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황을 읽는 센스는 아직 떨어지나, 필요할 때
에 지원을 해주는 능력이나 놀라울 정도로 강한 법력만으로 따지자면,
내가 여태까지 본 바라몬들 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아직도 그저 무슬림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녀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용병대
나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겠다고 목숨 걸고 나설 필요가 없을 텐
데. 이미 그녀의 마법력 만으로도, 그녀는 칼리프 군의 가장 소중한 재
원이 되고도 남을 텐데.
이상했다. 그렇다면 내가 내린 결론이 틀리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의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살라딘님, 괜찮으세요?"
그녀의 외침에 나는 뺨에 튄 피를 닦으며 손을 들었다. 나는 몇 개의 긁
힌 상처만 났을 뿐 전혀 멀쩡했고, 튄 피는 오로지 몬스터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혼란했다. 문득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뇨, 저는 그저 무슬림의 의무를 실천하고 있을 뿐인 걸요.'
슬픈 표정으로 셰라자드는 그렇게 말했었다.
무엇 때문에?
인정받지 못해서?
어째서 슬픈 표정이었던 건가? 그녀는 누군가 필요로 해주는 걸 원하고
있던게 아닌가? 아니면 그런 자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던 건가?
......어째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고 어리석다고 하던 거였지...?
"살라딘님...?"
"가베라를 따오지요. 거기 가만히 계십시오."
나는 시미터를 집어 넣고, 훌쩍 뛰어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절벽이라
기 보단 마치 제단같은 모습이었고, 그러고보니 무언가 흙으로 덮인 밑
에 석상 같은 것들이 새겨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베라는 양 손을 합친 것만큼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꽃이었다. 마치 은
색을 뿌려놓은 것 같은 꽃가루와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흰색의
꽃잎은, 이 꽃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
었다.
"......"
나는 허리춤의 단도를 뽑아 가베라의 줄기를 잘라냈다.
콰직!!!!
순간,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격통이 옆구리에 느껴졌다.
"살라딘님!!!!"
나를 때린 것이 무엇인지 보기도 전에, 나는 가베라를 한 손에 쥔 채
절벽으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쳐박혔고, 다음 순간 나는 시미터 두 개를 뽑아들며 일어섰다.
울컥.
무릎이 꺾이면서 피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가슴과 옆구리 근처에서 느껴졌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마치 절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듯한 크기의 골렘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디언...인가..."
갈비뼈 두 세개. 아무래도 내장에 찔린 것 같다. 아니면 아까의 충격에
이미 내장이 출혈하고 있던가.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오른쪽 팔은 들어
올리기만 해도 가슴을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등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겠지.
내 바로 앞에 선 골렘의 팔이 바람을 가르며 내려쳐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시미터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날아온 커
다란 화구(火求)가 골렘을 향해 연속해서 폭발했다. 셰라자드? 그 충격
에 골렘이 주춤거리는 사이,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골렘은 생명이 없는 존재.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선, 마력의 중추가
되는 - 즉, 골렘의 생명이 되는 - 열쇠를 부수어야 한다.
골렘의 머리 한 가운데 박혀있는 빛나는 보석. 흙에 뒤덮여 제대로 보이
지도 않았던 그것을 향해, 나는 내 양 시미터 모두를 때려 박았다.
칼로 마력석을 부순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그저 있는
힘을 다 해서 그것을 부수려 했다.
그리고, 마치 내 검은 바위가 아닌 그냥 흙에 꽂혀지듯이, 아무런 저항
없이 보석을 향해 박혀 들어갔다.
무언가 푸르스름한 것이 검에 맺혀있었다.
검기(劍氣).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검사들만이 낼 수 있다는 최고의 기술.
그와 동시에, 골렘의 머리통은, 아니 골렘의 몸 전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보석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이것...이었나.
스승님이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궁극의 오의(奧儀). 자신의 모든 기운
을 검에 모아, 그것을 검기의 형태로 바꾸어 그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
시켜 버리는 것.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를 통해 검기가 전달되는
내부에 있는 모든 적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서져 버린 시미터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하지만 끈적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멀리서 무언가가 들려왔다. 비명 같은... 셰라자드의... 소리 일까.
눈 앞에 놓인 하얀 색과 붉은 색.
나의 피에 물든 가베라.
나의 피에 물든... 하얀..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