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9월 7일 목요일 맑음
새벽부터 살포기를 등에 메고 두 산을 헤맸더니 정신이 몽롱하다.
살포기 무게가 10kg, 농약이 20kg. 30kg를 등에 지고 40분 간을 정신없이 돌아댔더니 흘러내리는 땀으로 눈을 뜰 수도 없고, 숨까지 헉헉대진다.
‘오늘 하루에 끝내자’ 단단히 맘을 먹고 허리띠를 졸라맷지만, 7시가 지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상승기류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던 농약이 바람따라 흩어지고 만다. 어쩔 수 없다. 남은 곳은 내일 새벽을 기약해야지.
하던 일을 마치지 못하면 뒷맛이 씁쓸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리야 없지. “고생 혔네”하시는 장모님 말씀으로 위안 받고 말아야지.
오늘부터 밤줍기가 시작됐다.
작년보다 1주일이 늦어졌다. 윤달이 있는 해라 철이 늦어진단다.
광생리 밤수매장에서도 오늘부터 수매를 시작한다는 연락과 함께 특이 kg당 3500원, 대가 2500원 중이 1500원, 소가 800원이란 소식이 와 있다.
작년보다 1000원씩 떨어진 가격이다. 소만 그대로다.
농민들 사기를 떨어트리는 소식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을 사서 밤을 주어야 하는 농가에서는 수확을 포기하기 쉽겠다.
나야 내 몸으로 때우니 일당이나 벌어야지. 농부 마음에 그냥 버릴 수 있나.
앞침마와 자루를 챙기고 운동화 끈을 매는데 엄마의 전화다.
“방은 보일러 줄을 다 깔었구, 일하는 사람들이 오늘은 아직 안 왔어. 너는 언제 올겨 ? 와서 봐야 되잖여” “엄마 오늘부터 밤을 주어야 해요. 공사는 그 사람들한테 믿고 맡겨도 돼요. 시간이 되면 갈 게요.” “거기 공사두 시작했대매” “예 어제부터 시작했어요” “아이구 이것저것 바뻐서 어쩐다냐. 얘, 인생 별거 읎어. 금방 지나가. 너무 힘들게 하지 말어” 항상 하시는 말씀이다.
“예, 알았어요. 엄마. 걱정 마세요” 입맛이 씁쓸했다.
조생종 밤나무가 어디 있는지는 눈에 훤하다.
서당골 조생종 단지부터 더듬는 게 순서다. 한 해 만에 만나보는 밤 알들. 그 예쁜 모습을 생각하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저기가 움푹 패여있고, 씹다 뱉은 밤껍질이 널려있다.
‘멧돼지다. 이놈이 이제 밤까지 건드리네.’ 이 거 정말 큰일이다.
발자욱을 보니 지난 번에 본 그 발자욱이다. 이 놈이 우리 산에 아주 정착했나 보다. 서당골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산이라 마음에 들었나 보지. 밤 줍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 놈이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주위가 둘러봐지고....
앞으로 단 둘이서 마주쳤을 때 대처할 방법도 생각해야 하겠다.
‘별 수 있나 ? 같이 먹고 살아야지. 저 놈이 먹어치우기 전에 내가 한 톨이라도 더 건져야지’ 밤줍기를 시작하기 전에 허리를 펴고 산 위를 향해 큰 소리를 외쳐댔다. “멧돼지. 이놈아. 너 어디있냐 ? 까불다간 다친다”
‘까짓 거. 무시하는 거지. 뭐’ 마음을 편히 하고 밤을 줍기 시작했다.
멧돼지가 건드리고 남긴 밤을 줍다 보니 속이 많이 상한다.
첫 번째 밤 한 톨을 집어 올렸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예쁜 자태다
‘이 한 톨 속에 얼마나 많은 햇빛과 바람, 빗방울이 들어있고, 내 땀과 거친 숨소리가 스며 들었나 ? 그 많은 것들이 이 밤 한 톨을 완성했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소중한 밤 한 알을 지긋이 내려다 보며 몇 번을 쓰다듬었다.
올 밤은 나무 수도 적고 많이 열리지도 않는다. 그 걸 멧돼지에 뺏기고 나니 작년 수확량의 절반이나 될까 ?
오후에는 불당골로 가서 밥줍기를 마치고 다시 서당골로 향했다.
‘어라, 아까는 없었던 발자욱인데.... ’ 금방 찍힌 새 발자욱이 보인다.
지금까지 여기 있다가 차가 올라오는 소리가 나자 도망친 것 같다. 섬뜻하기까지 한다. ‘그럼 낮에도 산을 활보한다는 얘긴가 ?’ 얘기가 점점 심각해진다.
밤 떨어진 자리를 둘러보니 밤이 있는 곳에 반드시 그놈의 발자욱이 있고, 먹다 버린 밤껍질이 널려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너한테 질 내가 아니지’ 어디선가 숨어서 나를 보고 있을 그 놈이 들으라고 고함을 한 번 치고 태연히 밤을 주웠다.
‘내가 네까짓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시위고, 과시하는 거야 임마.’
어스름할 때까지 주웠더니 70kg 정도나 될까 ?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하루 종일 심난했다.
내일 아침 광생리 수매장에 가서 달려야지.
첫댓글 더위가 언제였나 밤에는 기온이 꽤 쌀쌀해요..건강 조심히 다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