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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성지(소식) 스크랩 124위 순교지를 가다 <8>여주 관아 남문 밖 순교지
안 엘리지오 추천 0 조회 46 16.02.24 06: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멸의 순교신심 빗돌 깊이 새긴 순교자의 땅

 

▲ 지난 2006년 3월 당시 여주 순교터 추정지에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 관계자들이 시복을 위한 현장조사를 하면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사진제공=수원교회사연구소


여주는 우리나라 복음화 여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못자리다. 1779년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주도로 이뤄진 한역서학서 강학이 이뤄진 ‘주어사 터’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24위 중 5위가 피를 흘린 순교의 땅이어서다.

특히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하품리 주어사 터는 최근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교구신도회가 천주교 강학이 이뤄진 역사의 터전으로 복원에 나서 ‘종교 간 화합의 본보기’가 될 전망이다.

시복을 앞둔 124위 중 여주 출신 순교자는 9위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 영입에 크게 기여한 ‘한국천주교회 밀사’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이 첫 손가락에 꼽히고, 동생 윤유오(야고보, ?∼1801)도 있다.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ㆍ조이(바르바라, 1790∼1840) 부녀, 정광수(바르나바, ?∼1802)ㆍ순매(바르바라, 1777∼1801) 남매, 교회 설립시기에 활동한 이현(안토니오, ?∼1801), 사촌 사이인 이중배(마르티노, ?∼1801)와 원경도(요한, 1774∼1801)도 여주 출신이다.

 

이 가운데 여주 출신으로 여주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최창주ㆍ이중배ㆍ원경도ㆍ정광수ㆍ정순매 등 5위다. 윤유일은 포도청에서, 윤유오는 양근(오늘의 양평)에서, 이현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최조이는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다.

순교신심이 깃든 도시


지금도 그리 크지 않은, 인구가 11만 명이 채 못되는 소도시 여주에서 이렇게 많은 순교자를 낸 건 어째서일까? 한역서학서 강학에서 비롯된 연면한 신앙의 전통이 오늘날 순교의 땅 여주를 있게 한 듯하다.

 

 여주 출신 순교자는 124위에 포함된 9위를 포함해 모두 19위에 이르고, 인근 양근 출신 조용삼(베드로, ?∼1801)까지 포함하면 20위에 이른다.

이들을 기려 여주본당과 여주시는 2009년 6월 현재 여주시 여흥로 105번길(홍문동 48-7)에 가로 150㎝에 세로 220㎝, 폭 70㎝ 크기의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를 세웠다.

 

최종철(스테파노, 여주대 건축학과) 교수의 작품으로, ‘순교자 찬가’와 여주 출신 순교자 20위 명단을 한글로 새겨 넣었다.

 

화강석 상단부에 오석을 배치, 죄수 목에 씌우던 칼 형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다만 현재 비석이 세워진 곳은 물론 정확한 순교터가 아니다.

 

정확한 순교터는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에서 “여주 관아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에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들을 법률에 따라 참수했다”고 기록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옛 비각거리 인근 대로변 이다.

▲ 여주본당과 여주시가 2009년 여주시 여흥로 105번길 일대에 세운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

▲ 2004년 9월 순교자성월에 여주성당 경내에 세워진 여주 순교자 현양비.



우연히 장터에서 만나 순교치명기념비까지 함께한 임종화(에드워드, 61, 북여주본당)씨는 “지금은 비각이 남한강변 여주대교 건너 영월루로 옮겨갔지만,

 

이들 순교자들은 당시 옛 비각거리 대로변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방도로를 내면서 길도 넓히고 비각도 이전하면서 전보다 길을 넓혔다”고 귀띔했다.

얼마쯤 빗돌을 바라보다가 뙤약볕이 하도 뜨거워 여주성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2004년 9월 순교자성월에 세웠다는 성당 경내 순교자현양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중앙로 상가를 따라 걸으니 성당은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5분도 걸리지 않아 다다른 여주성당의 도로명 주소는 여주시 우암로 5(하동 215-5).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교회건축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늘부터 찾았다. 성당 오른쪽 성모동산 쪽으로 피해 들어가니 곧바로 자그마한 ‘여주 순교자 현양비’가 나온다. 뒷면에는 여주 순교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살아 숨쉬는 순교자의 삶

빗돌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이들의 삶을 떠올렸다.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인 이중배와 원경도는 양반의 특권을 포기하고 ‘신앙의 길’을 걸은 인물들. 소론(少論) 출신 이중배의 신앙생활이 길었던 것도 아니다.

 

이중배가 노론(老論) 출신 천주교 신자인 김건순(요사팟, 1776∼1801)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 1797년이니, 신앙을 접한 지 불과 4년 만에 순교한 셈이다.

 

원경도 또한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황사영 백서」 8행에 나오는 이중배와 원경도에 관한 기록은 유명하다.

 

1800년 경신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두메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날이 저물도록 큰 소리로 희락경(喜樂經, 부활삼종기도의 옛말)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며 부활의 기쁨을 누렸던 것. 이 사건으로 이중배와 원경도, 그 일행, 최창주 등이 체포돼 여주에서 순교했다.

여주 부곡(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양반 집안 출신인 정광수는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인물로, 입교 이후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살던 윤운혜와 혼인한 뒤 서울로 이주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 공동체 내에서 교회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으며,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 상본이나 묵주를 제작해 신자들에게 판매하거나 나눠줬다. 가까운 교우들과는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됐으며, 고향 여주로 끌려가 순교했다. 초기 조선교회에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이던 정순매 또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가혹한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뛰어난 용덕을 보여주고 여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 여주 관아 남문 밖 순교지를 관할하는 여주성당.



시복 현양 사업 계획 중인 여주본당


여주본당에선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념해 다양한 현양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우선 시복 직후인 오는 9월 ‘순교자 성월의 밤’을 개최, 시복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다.

 

또 내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이들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행사와 함께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할 계획이다.

 

학술심포지엄 개최일을 내년 부활 대축일로 잡은 이유는 최창주와 이중배, 원경도가 잡혀간 게 1800년 부활 대축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장차는 정확한 순교터, 현재의 여주시청과 여주초등학교 사이에 있던 옥사터, 최창주 등이 부활 대축일 잔치를 가졌던 남한강 일대 양섬 등 세 곳에 표석을 세워 순교자를 기린다. 문의 : 031-885-2031(여주본당)

여주본당 주임 조한영 신부는 “성지 전담이 아니라 본당이다 보니 계획을 세우기에 무리가 있지만, 내년 부활 대축일 때 심포지엄을 열어 성지 개발의 기초를 놓겠다”며 “순교터와 옥사터, 양섬 등에 표석을 세우면 순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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