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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불교의 개척자들
이 글은 발틱연구소 소장
프롤로그
법보신문에서는 지난 2000년 2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유럽불교는 지금’을 연재함으로써 서구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유럽에서 불교의 연구뿐만 아니라 일상의 종교나 삶의 철학으로 뿌리 내리는데 기여한 주요 인물 중심으로 유럽 불교에서 불교의 현황과 역할을 살펴본다.
최초의 동서양의 충돌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쳐들어온 기원전 4세기경이었다.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동방원정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문화 교류의 목적으로 대동했다. 아마 당시에 그리스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불교를 포함한 인도문화에 대한 지식을 본국으로 가져갔으리라. 그리고 이런 문화교류를 통해 불교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으니, 카톨릭의 수도원도 불교의 사원제도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불교도들이 인류 역사상 출가하여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것을 최초로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편견-왜곡에서 대안사상으로
수세기 동안의 침묵 뒤에, 유럽인들은 다시 불교를 알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가 바로 16세기 초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와서 불교를 접했으나, 지나친 편견과 왜곡으로 일관된 불교를 서구에 소개했다.
"나는 내가 들었던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서 티베트의 구게(Guge)제국의 왕과 신하들이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의 진실된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내가 온 것은 만일 그들이 사실과 달리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믿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부족한가를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유럽에서 불교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본격 시작된 때는 19세기 초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불교를 통해 철학적인 세계관을 서구에 제대로 알린 첫 번째 사람이었다. 당시까지만해도 인도학을 연구했던 극소수의 학자들이 유럽의 언어로 불경을 번역했고 이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기 집에 금빛 불상을 봉안하고 일상의 삶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의 철학적인 사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불교 연구와 소개를 주도한 사람은 프랑스의 동양학 연구자인 으젠느 뷔르누(Eugene Burnouf, 1801∼1852)이다. 1826년 그의 개척자적인 저서 [팔리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 Pali)]를 독일 학자 라쎈(Lassen)과 함께 출간했으며, 1844년 [인도불교사입문], 1852년 [법화경 역주] 등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선구자적인 불교 연구와 그 영향을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유럽불교 연구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그 뒤를 이어 실벵 레비(Sylvain Levi, 1863∼1935)의 공헌도 잊을 수 없다. 희귀한 대승불교 경전의 발굴과 프랑스어로의 번역, 출판을 통해 불교철학과 역사 연구의 새 지평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뷔르누와 레비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훌륭한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고 있다.
그의 벨기에 제자인 루이 드 라 발레 뿌쌩(Louis de La vallee Poussin)은 불교백과사전 수준의 불교 철학 전반을 다룬 연구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런 불교 연구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게 된다. 덴마크의 빅토르 파우스볼(Victor Fausboll)은 1855년 법구경을 라틴어로 번역, 주석까지 달아 출판했다. 이것은 유럽에서 최초로 팔리 경전을 로마자로 완역한 것이었다. 또 다른 덴마크의 팔리어 학자로는 트레크너(V. Treckner)가 있는데, 팔리어 대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본부는 코펜하겐에 있으며, 스웨덴 출신의 유명한 팔리어 학자인 헬머 스미스(Helmer Smith)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케른(H. Kern)이 수많은 산스크리트로 된 불교 경전을 편집·번역했으며, 1896년 출판된 그의 명저 [인디아 불교매뉴얼]은 여전히 오늘날까지 서구의 많은 불교 학도들의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 불교 연구의 전통은 오늘날 드 용(J. W. Jong)과 후학들에 이어져 오고 있다.
독일에서는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1920)가 있었는데, 영국과 독일에서 불교 연구를 주로 활발히 연구했다. 그는 팔리 율장을 편집했으며, 리즈 데이비즈와 밀접한 교류하기도 했다.
경전번역-포교활동 등 다양
하지만 독일어권에서 불경의 번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이다. 일생동안 외로운 역경작업으로 그는 건강과 재산을 잃었으나, 독일어권 유럽국가에서는 그의 헌신적인 노고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시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노이만의 번역 이전이나 이후의 그 어떤 번역도 노이만의 그것과 대등하지 않다. 부드럽고 자비스러우며 존경스런 부처님의 말씀이 이 독일어번역에서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의사였던 파울 달케(Paul Dahlke 1865∼1928)박사도 간과해선 안될 인물이다. 그는 역경, 불교 잡지 발간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1924년 독일 최초의 불교 사찰을 건립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독일 남부의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1868∼1945)의 현저한 노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리 경전 번역뿐 아니라 원시불교에 관한 관심과 연구도 그에게는주요 연구과제의 하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투치(Giuseppe Tucci, 1894∼1984)) 박사가 수십년 동안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된 경전을 번역 출판함으로써 이탈리아에 불교를 소개하고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유럽에서의 불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는 아마도 영국인들일 것이다. 리즈 데이비즈(T. W. Rhys Davids, 1843∼1922)는 스리랑카에서의 오랜 팔리어 공부를 하고 귀국해 유럽의 다른 동양학자들과 교류하면서 1881년 역사적인 팔리 경전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했다. ‘초기 불교 문헌의 이해를 목적’으로 창립했는데, 그의 부인의 내조와 공동 연구는 동서양의 학자들을 한데 묶고 공동연구를 가능케 했다. 많은 불교학자들에게 있어 불교는 주로 학술적인 관심이었다. 그러나 지드 데이비즈에게는 고대사나 고고학 같은 새로운 분야의 연구가 아니라 생활종교 또는 삶의 철학, 원동력으로 늘 함께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에 따르니 내 삶이 만족스럽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 영국불교의 기초는 크리스마스 험프리(Christmas Humphreys,1901∼1983)의 권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출가자-불교학자 갈수록 증가
프랑스에서는 대승불교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으나, 이와 달리 영국과 독일에서는 남방 상좌불교(Theravada)의 연구가 앞서 시작된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초기 경전 중심으로 연구해서, 그 본래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강을 연구하는데 하류에서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발원지부터 직접 보고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유럽 불교인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다양성 인정 가장 큰 매력
오늘날 유럽대륙에서는 불교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듯, 아니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 듯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불교 신자들의 수(약 700만에서 1000만명으로 추정됨)는 유럽인들 스스로 얘기했듯이 ‘20세기에 유럽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의 증거로 일견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문명국가인 유럽 최대 국가인 독일에서는 매년 10만명 이상이 기독교 교회를 탈퇴하고 있으며,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종교가 없다고 한다. 유럽연합으로의 통합에 박차를 가하는 유럽인들은 ‘다양성 속의 단일성’을 항상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런 생활은 일찍이 기원전 3세기경 불교를 신봉한 인도의 아쇼카 대왕이 선언한 말이 다시금 새롭게 들린다.
"단지 자기 종교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종교를 멸시해서는 안 되며,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종교의 성장을 돕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도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중략… 모든 것을 경청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라." <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만일 나의 철학의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고 그의 유명한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년)에서 역설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뛰어나고 비범한 인물중의 한 사람으로 서재에는 칸트의 반신초상과 청동불상을 모셔 놓고, 규칙적으로 ‘아트만’이라 이름 붙힌 개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파니샤드를 읽었으나, 침대의 베개 밑에는 장전한 권총을 두고 밤손님을 대비하기도 했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주목할 점은 불교와 힌두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그의 철학적 사고체계와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역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칸트주의적인 관념론과 불교의 사성제의 유일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랄만한 일은 쇼펜하우어는 동양사상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불교적 사고를 했던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서양철학의 전통안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했지만, 2300여 년전 완전히 다른 지적 전통에서 행한 부처님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결론과 유사한 이론을 펼쳤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유명 철학자들 중에서 쇼펜하우어만큼 불교를 깊이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사고의 많은 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저를 두고 있다. 1814년, 당시 유명한 동양학자인 프리드리히 마에르(Friedrich Majer)와의 학적 교류를 통해 ‘우프네카트(Oupnekhat)’를 접하게 된다. 우프네카트는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페르시아 번역본을 라틴어로 다시 번역한 것을 말한다. 그는 평생 이 책을 읽고 연구했으며, 이것은 그의 세계관의 굳건한 토대의 한 부분이 됐다. 그가 노년인 된 1851년 이 책을 평하기를, “이 책은 가장 값지고, 수준 높은 것이다. 지구상에서 내 삶의 위안이었고 내 죽음의 그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이를 극찬했다.
시대적 배경
그의 명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세상에 나온 1818년 당시는 신성동맹의 시대로, 유럽 전체는 완전히 지쳐 쓰러져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무질서, 불결함, 농촌의 극심한 궁핍, 거리의 불안과 참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나폴레옹군과 반(反) 나폴레옹군은 그들이 통과하는 모든 국민의 얼굴에 파괴의 상흔을 남겨 놓았으며, 유럽은 온통 잿더미의 회색빛이 가득했다.
이 전쟁의 자랑스런 승리자인 영국도 보리 가격의 하락으로 농부들은 궁핍했고, 산업 노동자들은 초기 산업혁명의 열악한 공장생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잇따른 해고는 실업을 더욱 증대시켰다. 유럽에서 일찍이 이토록 무의미하고 처참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의지는 자취를 감추고 유럽의 정신도 생기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의 쇼펜하우어는 암울한 시대를 경험했던 것이다.
성장과 교육
불교와 그의 철학
불교의 사성제를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이해해 자신의 철학에서 소화했을까. 부처님은 생노병사의 인간사 모두가 고통이라고 했는데,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의지는 바로 이런 고통과 욕망에 의해서 지배되는 우주를 말한다. 그리고 그는 경험세계란 완전하지 않고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표상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고뇌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불교이론에 대해 그는 고통의 원인은 의지이며, 이 세계는 의지로써 이해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상과 고뇌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 희망은 팔정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환상에서 구원되는 길은 미학적인 명상(그는 장엄한 자연을 바라본다든지, 명화를 감상할 것을 권장했다)과 그러한 유미주의의 실천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먼저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 날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바로 열반(涅槃, Nirvana)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소멸이라고 설명했다. 그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그것이 확실한 종류의 것이라면 유용한 것이 된다.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구별이 있는 것이 현상계의 특징이다. 그러나 일단 세계가 참으로 보여지면, 그런 구별을 사라진다. 달관한 사람에게는 마야(Maya幻)의 막, 즉 환각은 투명해지며, 구별은 단지 외관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비를 통해서만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된다. 또 그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연민하고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깊이가 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공헌
첫째, 유럽의 철학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불교를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이해했으며, 지식인 사회에 소개했다. 특이한 점은 우파니샤드 등 인도 철학을 접하기 이전에 벌써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된다는 것이다.
둘째, 유럽 불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유명한 불교 경전 번역가인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판사이자 동시에 고불교회를 창립한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독일 최초의 비구승인 나냐틸로카(Nyanatiloka) 등 많은 유럽인들이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만큼 유럽 불교를 얘기할 때 쇼펜하우어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유럽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정리해 소개한 선구자임이 분명하다.
쇼펜하우어 약력 - 천재철학자 … 만년에야 인정받음
△1788년, 단치히(Danzig)에서 은행가인 아버지와 여류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다섯 살 때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 △1805년, 아버지 사망(자살로 추정) △1809년, 괴팅겐대학 입학 △1813년 [충족이유의 원리에 대한 네 가지 근본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음. △1816년,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을 완성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함,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나 헤겔의 압도적인 명성에 눌려 이듬해에 사직함.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를 완성함 △1851년, [수필과 이삭줍기]가 발표된 뒤 일반대중들의 환영을 받기 시작, 학(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인생의 근원적 고뇌를 해소하려는 그의 태도에 많은 동조자가 나타남. △1860년, 9월 21일 폐마비로 사망. <
으젠느 뷔르누(1801∼1852)
으젠느 뷔르누는
최초의 서양 불교학자
2년동안 드 쉐지 교수 밑에서 연구한 후, 뷔르누는 그의 동료인 크리스티안 라쎈(Christian Lassen)과 함께, 1826년 팔리(Pali)어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인 연구업적이라 여겨지는 것을 출판했다(물론 당시 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벤자민 클로우(Benjamin Clough)가 2년 먼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학술 연구서를 출판했다). 1926년부터 처음으로 불교 문헌학(Philologie Bouddhique) 강좌가 설립됐다. 6년 뒤 뷔르누프는 드 쉐지 교수의 뒤를 이어 ‘꼴레주 드 프랑스’의 산스크리트어 교수가 됐다.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 관한 해박한 그의 지식은 정확한 문헌학적 재능과 결합해, 새로운 미지의 분야인 불교 연구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처음 접하는 여러 불교에 관한 자료들을 탁월하게 해석해 불교에 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을 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유럽 불교학의 기본 틀을 이루는 중요한 초석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뷔르누는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에 관한, 아니면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그런 과학적인 열정과 기대에 차서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이런 자세는 1833년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 취임 첫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범어-팔리어 등 언어학적 천재
"우리는 이미 동양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르는 가장 찬란한 빛에 우리의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이 굉장한 사건을 이해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사여러분, 이는 바로 인도 그 이상이며, 이 세계의 기원의 한 페이지이며, 바로 인류의 근본적인 정신사의 한 장입니다. 우리는 함께 이 것을 해독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에게는 위와 같은 연구 동기가 그렇게 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산스크리트어와 불교에 대한 지식은 단지 그들이 통치하고 있던 인도에 관한 지식을 더 강화해주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 관한 식민지배욕망을 방해받은 프랑스인들은 단순히 영토를 소유하는것보다는 좀 더 고상한 성취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뷔르누는 홋지슨(Hodgson)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중국인, 티베트인, 몽골인들이 불경 번역의 기본으로 삼았음을 인지하고 이 산스크리트어본이 바로 진짜 원전임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팔리어 실력을 바탕으로 스리랑카어 번역본도 마찬가지의 권위가 있는 중요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얼마 뒤 아마 홋지슨이 수집하고 그의 동료 헝가리인 초마(Csoma)가 분류,색인한 티베트본 불교 경전에 관한 완결판이 파리에 도착했다. 초마가 편찬한 티베트어 문법책과 티베트-영어 사전을 추가로 무장하여, 뷔르누는 이제 인도에서 불교의 시작에 관해 뭔가 분명히 확립할 수 있게 됐으며, 부처님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와 불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법화경] 등 유럽언어로 첫 번역
홋지슨으로부터 티베트판 불경을 받고 나서 몇 주안에 그는 법화경번역에 착수했다. 그러나 곧 그는 종합적인 입문서가 없이 바로 번역한 불교경전은 심지어 학술적인 연구가들에게도 큰 의미가 없을 것 임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결국 1844년, 방대한 분량의 저작 『인도 불교사 입문(L’Introduction a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를 출판하게 된다.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이 책은 바로 그가 최초로 유럽, 유럽인들에게 인도 불교 역사, 불교 교리, 경전에 관한 상세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를 선물한 것이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 쓰여진 자료에 전적으로 의지한 뷔르누의 책은 가히 놀랄만했다.
그는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곳에서 새로이 합리적인 질서를 발견하여 구축하는데 최초로 성공했으며, 그 기본 형식은 오늘날까지 학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뷔르누는 이 입문서에 두 가지 연구를 덧붙여 완성하려고 했다. 하나는 팔리어 경전의 해석과 다른 하나는 산스크리트어본과 팔리어 본의 비교연구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 계획은
불교를 합리적인 지식체계로 구성
그의 저서나 논문등에서 뷔르누는 불교에 관한 그의 느낌이나 감정을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으며, 철학적,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의미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교유했던 지인, 동료, 제자들의 몇몇 회고는 이러한 그이 모습을 잘 얘기해 준다. 그와 동시대의 산스크리트어 연구가인 막스 뮐러(Max Mueller)는 1845년 뷔르누를 방문한 후 산스크리트어로 쓴 그의 일기에서 뷔르누를 위대한 문헌학자이자 불교인으로 극찬하고 있다.
뮐러의 뷔르누프에 대한 좋은 인상은 그의 제자들의 회고와 겹쳐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인 계산으로 훗날 명성을 얻은 에르네스뜨 르낭(Ernest Renan)과 쥘 바르뗄레미-생-힐레르(Jules Barthelemy-Saint-Hilaire)는 ‘우리시대에 죽은 모든 문헌학자 중에 뷔르누만큼 큰 명성을 남긴 학자는 아무도 없다’고 칭송했다. 이러한 칭송은 수십 년 뒤의 저명한 프랑스 동양학자였던 실벵 레비(Sylvain Levi)도 뷔르누의 문헌학적 천재성과 연구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뷔르누의 가장 큰 업적은 불교를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식 체계로 구성한 점이었다. 뷔르누는 홋지슨의 경전을 불교 연구에 진실되고 가장 확고한 기초자료로 평가했다. 그리고 당시 예수회는 본래 가지고 있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불교 수행 문화의 생생한 면을 인정했다.
뷔르누의 저작은 단지 동양학자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인들도 감동시켰다. 프랑스 역사가 미셀렛(Michelet),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Wagner), 그리고 미국의 선험론자 쏘로(Thoreau)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불교에 관한 주제로 학문적으로 인기 있는 저술들이 홍수처럼 발표하게 하는 출발이 됐다. 뷔르누가 크게 윤곽을 한번 잡아주니, 수많은 문헌학자, 언어학자, 작가, 시인들이 상세하게 그것을 열심히 채워가게 됐던 것이다.
으젠느 뷔르누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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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1823 소르본느대에서 수학
△1824~1826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산스크리트어 수학
△1833 꼴레쥬 드 프랑스 산스크리트어 교수 취임
△1844 주저 『인도불교사입문』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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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10 그가 번역한 『묘법연화경』 사후 출판됨. <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1904)
유럽 불교의 전래에 있어 영국인들의 기여는 대단히 크다. 당시 아시아로 진출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식민지로 경영하고 있었던 영국은 불교 연구 및 불교의 서구 전래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서구 불교의 해석자’라고 일컬어지는 에드윈 아놀드 경이다.
5년간 인도에서 직접 생활
아놀드는 1832년 영국 켄트지방의 그레이브센드(Gravesend)에서 태어났으며, 로체스터(Rochester)의 킹즈 스쿨과 런던의 킹즈 대학(King's College),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대학(University College)에서 공부했다. 1852년 그는 옥스퍼드대 재학중에 ‘뉴다이게이트(Newdigate)상’을 수상하고, 1856년에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푸나(Poona)의 데칸 대학(Deccan College) 교장으로 임명됐다. 5년 뒤인 1861년 그는 인도에서 돌아와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의 편집기자가 되었으며, 1873년에는 편집인의 위치에 올랐다. 이 신문사에서 약 4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그 성과와 명성을 쌓아 갔다. 물론 편집인으로서 많은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스탠리(H.M. Stanley)의 리빙스턴(Livingstone) 찾기 사업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1904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채식주의자 모임도 결성
그는 언론인인 동시에 훌륭한 시인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879년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유명한 시집을 낸 이후에 『세계의 빛(The Light of World)』 제목의 시집만을 내었을 뿐,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 활동이 없었다. 그는 1885년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황폐함을 보도했으며, 이와 관련해 인도 정부에 관심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실천적 행동은 1891년 ‘마하 보리회(Maha Bodhi Society)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단체는 후에 부다가야에 불교 대학 건립을 시도했다. 그는 또한 런던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채식주의자 모임을 결성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놀드의 대표작인 『아시아의 빛』은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대기를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알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아시아의 빛』은 독특한 형식, 이상한 이름들, 그리고 산스크리트 용어가 등장하여 곧 화제가 될 법도 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얘기가 당시 유럽에는 이미 크게 회자되고 있었음을 반증해 준다. 그럼에도 이 시집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도덕적 가르침은 서구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당시 인도에 관한 신비로움은 독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부처님의 일대기는 서구인들에게 완전 선을 행한 인물로 뿌리내리게 했다.
이 시집은 곧 유럽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됐으며, 영국에서는 60판, 미국에서는 80판에 이르게 된다. 대략 100만권이 팔려 나가 거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 비치되었을 정도로 부처님의 일대기로는 가장 잘 표현한 영어권 저술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그는 『아시아의 빛』서문에서 부처님에게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인류의 삼분의 일 이상은 여기 묘사하는 인도의 왕자에 대해 도덕적, 종교적 믿음으로 경외한다. 존재하는 자료에 비록 불완전하게 드러나지만 그의 인격은 인류 사상사에 있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최고로 숭고하고 점잖으며 성스럽고 가장 은혜롭게 보인다”.
이 시집이 쓰여질 무렵, 서구에서 일반인들이 부처님에 대해, 그리고 불교에 관해 알고 있는 정도가 극히 미비했으며 심지어 동양에 관한 학술지에서조차도 드물었다. 하지만 이 시집이 나온 이후 부처님과 불교에 관한 산문형태의 시도들이 크게 증가됐던 것이다.
아놀드는 이 시집을 준비하면서 모든 가능한 자료들을 이용했는데, 특히 스펜서 하디(Spence Hardy)나 뷔르누(Burnouf)의 저서를 주로 참고했다. 그리고 그땐 이미 1875년에 영국에는 팔리어 사전이 로버트 시저 차일더즈(Robert Caesar Childers)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으며, 1881년에는 리즈 데이비즈(T.W. Rhys Davids)가 팔리 경전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했다. 바야흐로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시기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의 시집은 다양한 학문적인 배경에 힘입어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놀드는 인도 푸나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산스크리트를 익혔으며, 그의 탁월한 외국어 능력으로 인도의 이름과 각종 고유 명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츠 제럴드(Fitz Gerald) 등 일부 작가들과 함께 영어권 시인 중에서는 드물게 동양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게 됐다.
『아시아의 빛』 이외에도 그는 아시아 각국, 특히 그가 경험한 인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저술을 시도했다.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도의 민요와 시들을 번역, 편집해 출판하기도 했으며, 『죽음과 그 후』(1889), 『연꽃과 보석』(1887) 『죽음의 비밀』(1885) 등 불교에 관한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이와 함께 일본에 관한 에세이와 4막으로 구성된 연극 『아주마-일본 부인』 (1893)의 대본을 쓰기도 했으며, 불교와 현대 과학과도 깊은 관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강조했다.
‘대승 이해 부족’ 아쉬워
『아시아의 빛』에서 아놀드는 왕자 고타마가 부처가 되는 것에 앞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탄생과 유년 △결혼 △세 가지 징표 △부정(否定) △깨달음을 찾아 △깨달음 △귀의 △열반 등 크게 8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데 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사성제 및 팔정도의 의미와 열반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난해한 작업을 시도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인해 서구인들이 동양을 어느 정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으며, 유럽 최초의 비구 스님이 된 아난다 메테야(Allan Bennett)를 비롯해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대중적으로 이해시켰던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불교에 정통하지 못했던 그의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에드윈 아놀드 연보
△1832 영국 켄트 지방 그레이브센드에서 출생.
△1857 인도 뿌나 데칸 칼리지 교장
△1861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 지 편집기자.
△1873 동 일간지 편집인
△1879 『아시아의 빛』 출판, 큰 호응
△1885 『아시아의 빛』 수정판
△1891 『세계의 빛』 출판, 반응 미비
△1904 사망. <
리즈 데이비즈 부부 토마스(1843~1922)-카롤린(1857~1942)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Thomas William Rhys Davids)는 어느 날 한 비구 스님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야기된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가만히 사태를 파악해보니 그 후임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의 제자와 다른 스님이 그 자리를 다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리즈 데이비즈가 이를 종합해 내린 결론은 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바로 ‘비나야(Vinaya)’라 불리는 율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오직 팔리어로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리즈 데이비즈는 우난세 야트라물레(Unnanse Yatramulle) 스님으로부터 팔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종려 나뭇잎에 쓰여진 불교 경전을 수집하는데 몰두했다.
그가 스리랑카에서 판사로 재직하던 20대 후반의 이 사건은 그가 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도록 하는 동시에 한평생을 불교신자로서 살아가도록 했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스님들의 분쟁해결 요청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그런 까닭에 이 시기는 바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영국인들이 인도로 향하고 있었던 때였다. 리즈 데이비즈도 대학 졸업 후, 인도 동남쪽에 위치한 스리랑카로 가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 1866년에서 1872년까지 지방 순회 판사, 고고학위원회 위원 등 식민 지배에서의 법 집행을 하는 동시에 문화재 발굴과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을 옹호·방관하며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앞의 일화에서 나타나듯 이 사건을 계기로 열렬한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그 후 1877년에는 억울한 소송 당사자들을 위해서 잠시 법정 변호사로도 활약한다.
스리랑카에서의 이런 활동이 계기가 돼 1882년 런던의 유니버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팔리어 및 불교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12년까지 계속 교수직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1904년에서 1915년까지 맨체스터대학 비교종교학 교수로도 활동하면서 영국에서의 불교연구 지평을 더욱 넓히게 된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4년, 그의 나이 51세 때, 당시 37살의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와 뒤늦게 결혼했다. 평생 독신의 성실한 생활을 하며 마치 부처님의 수행시절 고행을 연상하듯이 실로 꿋꿋이 불교신자 및 불교학자로서 살아온 토마스 리즈 데이비즈의 일생에 있어서 두 번째의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카롤린은 경제학회지 편집진의 한 사람으로 여성 및 아동 복지와 관련된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토마스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의 대자대비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평생 팔리성전협회 운영과 불교연구에 헌신했다.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당시 영국 최고의 불교 전문가로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1881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해 1922년까지 회장으로 기초를 다지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에는 ‘인도경전 시리즈(Indian Text Series)’를 잇따라 출간했으며, 1901년에는 ‘브리티시 아카데미(British Academy)’를 창립했다.
평생 동지 카롤린과의 만남
또 1885년에서 1904년까지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사무총장 및 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70이 넘어 은퇴할 무렵부터는 ‘맨체스터 가디안’이라는 신문에 불교와 인도에 관한 칼럼을 자주 기고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팔리-영어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도반이며 부인인 카롤린의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
리즈 데이비즈와 비슷한 무렵 스리랑카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로버트 차일더즈(Robert Caesar Childers, 1838~1876)는 팔리어를 약 8년간 배워서 런던으로 돌아와 1872년에서 1875년에 걸쳐 624쪽에 달하는 「팔리어사전(A dictionary of the Pali language)」을 발간하게 된다. 이 사전은 리즈 데이비즈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으며, 좀 더 체계적인 연구 조직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1881년 리즈 데이비즈는 ‘초기 영어 원전학회(the Early English Text Society)’의 사례를 본받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하게 된다.
그의 동반자로서 불교를 연구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 리즈 데이비즈(Caroline Augusta Foley Rhys Davids)는
이후 1918년에서 1933년까지는 런던대학의 동방·아프리카대학(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불교사를 강의했으며, 남편 토마스 리즈 데이비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팔리성전협회 회장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봉사했다.
유럽대학에서 불교지도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는 수많은 불교 관계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1878년 출판된 「불교」, 1896년 「불교의 역사와 문헌」, 1903년 「불교국 인도」를 비롯해 팔리 경전 중 자신이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 1899년, 1910년 1921년에 각각 출간한 「부처님의 대화록」(전3권)을 펴냈으며,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11판에 불교란을 대표 집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번역과 논문들이 있으며, 그의 말년에 집필하기 시작한 「팔리어-영어 사전」은 윌리엄 스티드(William Stede)의 편찬 작업이 더해져서, 1921년 출간을 시작으로 1925년에 모두 완간됐다. 뿐만아니라 그의 저서중 가장 유명한 「불교의 역사와 문헌(The History and Literature of Buddhism)」은 1896년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서구인들에게 읽히고 있는 베스트 셀러다.
초기영어원전학회 창립도
이들이 창립한 팔리성전협회는 ‘팔리 경전 연구를 촉진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시작돼 팔리 경전을 로마자로 출판하고 영어로 번역하며 사전, 용어 색인, 팔리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교본, 그리고 학회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현재 옥스퍼드의 헤딩톤(Headington)에 자리하고 있다.
창설부터 1922년까지는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즈가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부인인 카롤린 어거스타 폴라이 리즈 데이비즈가 남편의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
서구에서 불교를 이해하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중에서도 언어의 문제는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대부분 다른 문화를 토대로 출발한 내용과 형식을 수용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의 벽이 되고 있다.
서구의 초기 불교전래와 수용에서의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중국어, 일본어, 티베트어로 된 불교 경전의 역경작업은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전과의 비교를 통해 철학적인 논쟁거리가 많아지면서 원전으로 된 경전을 중시하는 쪽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사르트르를 비교하기 위하여 누구나 고대 철학과 로만어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듯이 불교를 공부하는데 모두가 인도철학, 중국철학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없애준 이가 칼 오이켄 노이만(1865∼1915)으로 그의 평생에 걸친 험난한 역경 작업은 초창기 서구불교의 탄탄한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팔리 경전 독일어 최초 번역
팔리경전을 독일어로 최초로 번역한 노이만은
그러는 동안 불교에 관한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다양한 글을 접하면서 스스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불교 경전의 좀 더 편리한 접근을 위해 팔리어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한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노이만은 그때의 심경을 훗날 친구인 드 로렌쪼에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884년 당시 나에게 갑자기 밝은 해가 떠올랐다. 바로 쇼펜하우어였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내적인 삶이 부서졌다. 하루종일 은행일에 지쳐 돌아와서
하루 12시간 이상 역경 작업
베를린에서 학업을 마친 노이만은 불교 경전 번역을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고향 빈으로 돌아와 역경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그의 첫 번째 불교 선집이 출판됐다. 이때 그 선집의 서문을 쇼펜하우어의 출생지인 라이덴(Leiden)에서 그의 104번째 생일날을 기념하며 적었다. 이렇듯 그와 쇼펜하우어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 1893년 『법구경』을 번역해 간행했으며, 1893년에서 1894년까지 약 1년간 영국 런던에서 일하고 난 뒤 1894년 자신이 마련한 여행, 체류 경비로 인도와 스리랑카로 긴 학술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을 통해 인도의 삶과 철학을 근본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으며 여행에 관해서는 그의 일기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894년 겨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양연구소(Orientinstitut)의 뷜러 교수(Prof. Buehler)의 조수로서 약 4년간 연구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개인적으로 일과 후에는 집에서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어려운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탄생한 그의 역경집은 여섯 권으로 묶여져 출간됐다.
이런 가운데 1906년 그의 주거래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그의 모든 금융자산의 참담한 손실을 보고 개인적으로 수년동안 극도의 곤궁함에 처하게 됐다. 부득이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4000여 권이 넘게 소장하고 있는 그의 전문 불교도서관을 매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역경작업에 매진했는데, 하루 12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할 때도 많았다. 그의 역경집은 그의 사후 일년 뒤 대부분 간행돼 많은 유럽인들에게 읽혀졌다. 그의 지독한 역경 작업은 육체적 건강을 해치게 되었으며, 1915년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는 세계 제1차 대전중이었음에도 징집되지 않고 돌아 왔지만, 그의 50번째 생일날 결국 폐렴으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야 했다.
사후 일년 뒤 역경집 대부분 발행
그의 필생의 역경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세계적인 대문호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노이만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불경 번역도 노이만의 역경에 견줄 수 없다. 그 부드럽고, 축제 같고, 경건한 부처님의 설법을 독일어 문체로 탁월하게 묘사함으로써 마치 곁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듯 하다"고 경탄했다. 노이만의 이러한 탁월한 역경작업으로 인해 그때까지 독일에서 마치 사교의 하나로 한쪽 구석의 좁은 곳에 머물러 있던 것을 독일어권의 모든 지역으로 알리게 되었다.
지금도 독일어권의 사상가나 문학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할 때면 대부분 노이만의 역경집을 출처로 밝히고 있다. 노이만이 표현한 독일어는 주로 쇼펜하우어의 용어를 많이 따랐으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뮤지컬의 짧고 간결한 시어적인 표현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원전에 가까운 아름다운 표현은 독창적인 예술어를 낳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독자들은 그 생소함을 두고 인도식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래서 그의 번역체에 대해서 노이만 당대의 인도학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찬반이 분분했다. 독일어의 거울에 비추어 잘 반영된 번역이라는 찬사에서 문맹자를 위한 형편없는 번역으로 폄하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찬사를 보내는 학자와 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원전과 흡사" 찬사 잇따라
그중 한스 루드비히 헬트(hans Ludwig Held)는 "노이만의 역어체는 한편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다른 한편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향을 받은 결실이며, 루터가 번역한 성경과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와 견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결론적으로 "노이만의 부처님은 루터의 예수와 비견된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리하여 노이만의 역경집은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 즉 '책 중의 책'과 대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강조했다. 물론 노이만이 불교의 세계를 알려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대부분의 중요한 개념들을 도입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으로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의 일치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이지만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그의 역경전집에 대한 수많은 지식인과 저명인사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 중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슈바이처 박사,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영국의 버나드 쇼, 독일 현상학자 에드문트 훗설, 프랑스의 로맹 롤랑 등도 포함돼 있다. 특히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이며 문명 비평가인 토마스 만이 이 전집의 재발간 추천사에서 남긴 글은 유럽인들이 노이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역경집은 나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내 감동으로 읽도록 했고, 그 분의 가르침은 내 전생애의 여정에서 참다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키가 되어 주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역경전집은 나의 키르히베르그의 도서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에게 가장 귀중한 소장품의 하나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