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난쟁이란 조롱과 야유가 없었다면
솔향 남상선/수필가.
“저기 난쟁이 지나간다. 어찌, 대학생이란 게 초등 1학년생보다 더 작아!”
내가 대학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귀가 아프게 들었던 조롱과 야유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키를 작게 낳아주신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럽고 세상 살기가 싫었다. 남 다 크는 키도 나는 150㎝밖에 안 되는 단신으로 낳아 주시어 이 모양 이 꼴로 조롱과 멸시 속에 살아야 되다니!
이런 생각에서 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하루하루 염세주의자로 변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인지 가난하여 대학생활 내내 돈 헌 푼 갖다 쓰지 못하고 고학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생활이었다. 하루 4파트 아르바이트에 3시간 정도 수면으로 코피를 흘리고 쓰러질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솔로몬의‘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명언이 헛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힘든 대학 4년간의 인고의 세월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교생실습 얘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대학생활 종반부로 치닫는 게 분명했다. 나는 공주고등학교, 공주사범대 부속고등학교 두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기로 신청했다. 교생실습 나가기 1주일 내내 고민을 했다. 사범대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으면 나보다 덩치 큰 학생들이 말도 안 듣고, 맞먹으려 하면 어떡하나? 오매불망 그 생각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묘안이 떠올랐다. 내가 순탄한 교직생활을 하기 위해선 실력 있고 성실한 교사로 인정받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여느 선생님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반 여느 교사들이 하지 못하는 걸 나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다. 시, 시조, 고전 시가들을 닥치는 대로 암기하고 참고서 문제집을 수험생처럼 친히 했다. 거기다 일반 선생님들은 교안을 써서 하는 수업을 나는 교안 없이 모두 암기하여 교과서만 가지고 수업을 했다. 공주고등학교 교생실습 때에 시연을 해 보았다. 학생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 내가 살 길은 바로 이거란 생각으로 교안을 써서 밤새 욌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교안 없이 교과서만 들고 들어갔다. 다른 선생님들 교안 쓸 때, 나는 다양한 배경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많은 문제집과 참고서를 섭렵했다.
72년도 초임지 발령받은 학교가 덕산고등학교였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내가 수업 들어가는 3학년 교실에 처음 부임한 선생님들을 울려먹는다는 학생이 있다고 귀띔해 주는 거였다. 말하자면 처음 부임한 선생님께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여 선생님을 당혹하게 만든다는 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조바심이 되는데 겁이 나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종이 울렸다. 교실에 들어갔다. 교무실서 예기를 들었던 그 학생이 질문을 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할 때 지도했던 그 문제집에 나온 문제라 어렵지 않게 답변했다. 내가 질문 답변에 막히지 않자, 질문했던 학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순간 창가에 앉았던 다른 학생이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아마도 학생들이 짜고서 날 골탕 먹이려고 별렀던 것 같았다. 그 질문 역시 해결해 주었다. 학생지도에는 산전수전 다 겪었던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거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는 학생들에게 뽄때를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암기해서 준비한 자료를 보지 않고 내리 다섯 칠판을 판서했다. 키가 작아 높이 달린 고정 칠판은 활용이 어려웠다. 학생이 앉는 의자를 내오라 해서 의자에 올라가 판서로 시작해서 판서로 끝났다. 연이어 3일을 그렇게 했더니 아무 질문도 없었다. 암기해서 하는 판서가 막힐 줄 알았던 모양인데 막히지 않고 연속 3시간씩이나 줄줄 나오니 학생들이 기가 죽은 거 같았다. 그 후로는 허튼 수작을 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수업 반성을 해 보니, 일단 학생들 기죽이기에는 성공한 것 같았으나 좋은 수업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초임지 고등학교에서 소위‘교과서를 다 암기하는 교사’‘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알려지게 됐고‘걸어다니는 사전’이란 닉네임까지 붙었다.
거기다 남상선은 3번 놀라는 사람(첫째는 키가 작아 놀라고, 둘째는 실력 때문에 놀라고, 세 번째는 어떤 학생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해서 놀란다.)이란 평판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선배를 만났다. 이용만 형님이었다. 선배 덕분에 내 숭승장구하는 교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저 대전여자고등학교를 먼저 들어간 이용만 형님이 다리를 놔 줘서 77년도 전국의 명문 대전여자고등학교에 어렵지 않게 들어가게 되었다. 종이쪽지 하나로 할애 요청을 받아 발탁이 돼 간 거였다. 3학년 담임이었다. 이게 꼬리표로 붙게 돼, 가는 학교마다 고3담임을 하게 되었다.교직경력 39년 가운데 고3담임이 자그마치 29년이었다.
나는‘난쟁이’란 조롱, 가난 덕분에 분발하고 의지의 투쟁으로 살아‘작은 거인’‘인간 승리자’로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키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었다. 키가 작아 난쟁이란 조롱과 멸시 야유가 견디기 어려워서 인생을 포기하고 죽으려 금강다리를 몇 번이나 갔다왔다. ‘키 노이로제’에 걸려 장가가라고 혼담이 오고 갈 때에도 상대방이‘키’자만 꺼내도 혼담이 없었던 걸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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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나처럼 신체적 결함으로 고민하고 열등의식에 갇혀 있는 분들이여!
아니, 가난에 허덕이고, 하던 일의 사업 실패로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여 !
꿈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분발할지어다.
의지의 투쟁으로 갈고 닦으면
광명한 태양은 내 것이 될 것이니 힘을 낼 지어다.
‘나에게 난쟁이란 조롱과 야유가 없었다면’
내 난쟁이란 조롱과 야유가 없었다면, 의지의 투쟁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조롱받는 단신으로 태어났기에 그걸 보완키 위해 분발하면서 성실하게 살았다.
난쟁이란 조롱이 어떤 때는 죽고 싶고 부모님을 원망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 난쟁이란 조롱은 내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격려의 선물이었다.
나에게 난쟁이란 조롱과 야유가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이다.
난쟁이란 조롱을 받고 살았기에 신체장애자의 고통에 동병상련할 줄 알았고,
사랑도 용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난쟁이란 조롱과 멸시, 야유, 이것이 분발의 촉진제가 돼 형역과도 같은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난쟁이란 야유가 날 괴롭히지 않았다면, 분발하여 노력하고 갈고 닦지 않았을 거다.
생각해보니 난쟁이린 조롱은 내 존경받고 사랑받는 교사가 되게 한 밑거름이었다.
삶의 역정을 회고해 보니, 난쟁이란 조롱은 나에게 기쁨을 선사한 다이아몬드 같은 선물이었다.
내가 존경받고 사랑받는‘작은 거인’이란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조롱, 멸시, 야유로, 불렀던 난쟁이란 별명 덕분이었다.
내‘작은 거인’‘인간승리자’로 통하는 것은 난쟁이란 조롱 야유 덕분이었다.
원망했던 부모님께 사죄하며 작은 키로 낳아주신 부모님께 느꺼운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