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주권을 자신들의 패권주의에 기초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으로 영토주권에 편입시키는 역사왜곡을 감행하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의 망언을 시도때도 없이 부풀려 가고 있는데 구국우익의 허울을 둘러쓴 일부 불순분자들의 망언이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고 있습니다.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될 사안들이 뜻있는 일부 시민과 인식있는 역사학자들만의 관심으로는 그 힘이 너무도 미약합니다. 국민적 공감대의 확산이 시급한 일입니다.
동북공정과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고찰은 자게판에 올렸지만 초라하게 무서리만 맞고 있더군요,,
술 한 잔 마시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쓸말 못쓸말 답글만 달았는데,,적어도 한민족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정한다면 우리 역사의 올바른 사관정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되찾아야될 우리 땅 대마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려고 합니다.
조금 깁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우리가 우리 영토에 대한 주장을 펼 수 있다고 봅니다.
자신만 읽지 말고 이웃에게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 지키기는 나 자신 부터 시작되는 작은 파문이지만, 남북이 하나되는 그날까지 우리의 정체성의 발현이고 그 완성입니다.
면적이 709km² 이고 해안선 길이는 14.5㎞인 대마도 부산에서 불과 50㎞ 밖에 떨어져 있지않아 맑은 날이면 잡힐듯이 다가오는 한국해에 우뚝솟은 자그마한 섬 대마도,,,, 그곳으로 역사 여행을 시작합니다.
대마도(對馬島)는 누구의 영토인가?
◀대마도 엔쓰지(圓通寺) 내의 조선범종 : 15세기 대마도를 통치한 관청이었던 ‘엔쓰지’(圓通寺) 내의 조선범종. 태극의 팔괘와 비천상 무늬가 확연해 우리나라 종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출전] 동아일보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對馬島)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 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 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 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 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9 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 만 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祭)’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 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 년부터 1811 년까지 200 여년 동안 12 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韓服)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대마도의 벼슬임명장 고신(告身) : 조선 왕실이 대마도의 수직왜인(受職倭人)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준 임명장 ‘고신’(告身). 대마도가 조선의 정치체제에 편입돼 있었음을 보여준다.[출전] 동아일보
明宗때에 對馬島主에게 내려진 교지(敎旨)인 告身은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있다.
● 대마도의 원주인은 백제계 유민?
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倭寇)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다. 朝鮮 太宗 때 이종무(李從茂 : 1360∼1425)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다.
이 일대에는 667 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 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姓氏)이다.
● 다시 거세게 이는 대마도의 한국 붐
대마도에 다시 한국 바람이 거세다.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진다.
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다.
● 주민증만 내보이면 땅도 살 수 있어
미쓰(美津)지역에서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흥미로운 벽보를 발견하게 된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 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 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한다.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 만∼500 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 만명에 불과하다.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대마도에 별장을!’.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대마도 곳곳에는 ‘한국사람도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땅이라고 해서 한국이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지 여행 가이더의 의견이다.
대마도의 한국관련 유적 및 행사
조선통신사 행렬도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 이즈하라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보관.
아리랑 마쯔리 매년 8월 첫째 토-일요일에 개최되는 대마도 최대의 축제. 조선통신사의 행렬 재현. 노젓기 대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
바이린지(梅林寺)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됐던 연고지에 건립됐다고 전해지는 고찰. 1436년 조선에 예속된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선박에 대해 문인(도항증명서)을 발급해주는 사무를 보던 곳.
가나다(金田)성터 일본 최고(最古)의 성터. 높이 2∼5m의 성벽이 5.4km에 걸쳐 남아 있는 백제식 산성. 667년 백제유민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짐.
신라사신 순국비 왜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신라의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잡혀 처형당했던 신라 사신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 1988년 한국과 대마도의 학자와 유지가 힘을 모아 건립.
코즈나(小綱)의 고려불 칸온지(觀音寺)에 본존불로 안치돼 있다. 불상 속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1330년 주조돼 고려 부석사에 봉납한다고 쓰여 있으나, 어떤 경로로 대마도에 유입됐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동아닷컴에서 발췌)
< 대마도의 金田城 >
대마도에 남아있는 백제유민들이 쌓은 산성으로 金田城이라
불리우며 이곳에서 직선으로는 거제도가 보인다.
현재 성문이 동쪽의 바다가쪽으로 남아있으며 치도 남아있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 에도 막부(江戶幕府)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 년 통신사 이경직(李景稷 : 1577∼1640)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 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서기 1419 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 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康勸善) 이 世宗에게 보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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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對馬島의 高麗에 대한 진봉관계(進封關係)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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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 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 )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신공황후가 섭정) 이 풍포궁(豊浦宮)에서 나와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新羅(당시 對馬島에 있던 佐護加羅 중심의 新羅임)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 1723 년 對馬島人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무릇 對馬島는 옛날에는 新羅國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壹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高麗時代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屬領: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 태상왕(太上王)이었던 太宗이 世宗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敎諭文)에서
대마(對馬島)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貴國:朝鮮)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康勸善) 에게 壹岐島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전도(八道全圖)』에는, 獨島 뿐 아니라 對馬島도 朝鮮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조선시대 고지도들
경상도(慶尙道輿地圖)
고지도(古地圖)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대한여지도(大韓輿地圖)
동국대총도(東國大摠圖)
조선내란지도(朝鮮內亂地圖)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
조선전도(朝鮮全圖)
조선전도(朝鮮全圖)
조선팔로지도(朝鮮八路地圖)
조선총도(朝鮮總圖)
해좌전도(海座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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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종씨(宗氏)의 유래 전설
울산과 대마도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의 울산에는 기이하게도 대마도에 관한 전설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왕동의 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에 관한 전설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의 두왕동은 대마도주의 시조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두왕동이라는 지명도 대마도주의 탄생과 관련 있는 말이라고 향토사학자 이유수씨는 설명하고 있다. 즉 대마도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여 처음에는 '도왕동(島王洞)' 또는 "도왕동(道王洞)'이라 했다가 임금왕 자를 쓰는 것은 왕을 거역한다 하여 왕성할 '왕(旺)'자로 고치고 섬 '도(島)'자 또는 길 '도(道)'자 대신에 말 '두(斗)'자를 사용하여 오늘의 '두왕동(斗旺洞)'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10 년경에 일본사람들이 "배미골이 있는냐?"며 이 근처를 찾아온 일이 있고, 또 어떤 때는 비석도 만들어 찾아오곤 했으나 묘지를 찾지 못하고 물 속으로 던지고는 되돌아 갔다고도 한다. 그리고 향토사가 강길부씨의 말을 빌리면, 그 대마도주의 시조 분묘에는 팔괘형(八卦形)의 석조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묘석을 1945 년 해방 후 청량지서의 돌담을 쌓을 때 빼어 써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팔괘현의 석조물이 없고 단지 평장묘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강길부, 『향토와 지명』, 정음사, 1985년)
이러한 전설이 어찌하여 우리 울산에 전하여 오는 것일까? 실제로 대마도주의 성씨인 종씨(宗氏: 소우씨)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외자 성씨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성씨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편이다. 과연 이 소우씨의 뿌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설에 의하면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하였던 종씨 일가는 일본천황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라기도 하고, 또 원씨일족(源氏一族)들에 의해 멸망당한 평씨일족(平氏一族)의 후손이라고 전하여 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마도주인 종씨에게는 후자인 평씨 일족의 후예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다. 그 단적인 예로서 1643 년(인조21년)에 일본으로 갔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우리측의 사신이 대마도주에게 묻기를 "종씨가 대대로 대마도를 지켰으니 태수의 본성이 원래 종씨입니까? 그리고 지금 몇 대나 되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도주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의 성은 본래 평씨(平氏)였는데 남의 부하로 있을 때 그 주장(主將)의 성이 종씨여서 이 때문에 종(宗)자를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대마도를 지킨 것은 이제 23대가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신이 또 묻기를 "당신의 아버지 의지(宗義智)가 보검을 가졌다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하니 도주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보검을 가지고 있어서 가보로 삼았는데 지난해에 엄만(嚴萬)에게 전했습니다."라 했다는 것이다(『계미동사일기』7월7일자 참조)
이상의 대화의 내용을 쫓아서 정리하여 간다면, 당시 우리측의 통신사와 대화를 나눈 대마도주가 의지(宗義智)의 아들이라면 그의 이름은 의성(義成)임에 틀림없다. 그가 23대째 대마도주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그의 선조 종중상(宗重尙)이 1245 년 대마도의 실력자 아비류(阿比留)씨족을 토벌한 것까지 넣어서 계산한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씨족 뿌리는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종씨는 원래는 고대에 있어서 대표적인 귀족의 집안이었던 평씨(平氏)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훗날 자신이 섬겼던 주군으로부터 종씨라는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결과는 그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종씨의 시조가 1245 년 대마도의 권력자 아비류씨족을 토벌한 종중상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성씨의 뿌리가 평씨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종씨의 시조 종중상의 본명은 코레무네 시게히사(惟宗重尙)였다고 보고 있다. 즉 그의 본래 성은 평씨가 아니라 '코레무네(惟宗)라는 것이다. 초대 시조인 시게히사는 규슈의 행정관이었던 '대재부(大宰府)의 관료를 역임하면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종씨(宗氏)라 함은 '코레무네(惟宗)'의 첫 글자인 유(惟)자를 생략한 결과 생겨난 씨족의 명칭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일단 대마도의 도주 종씨는 그의 선조가 울산의 두왕동에서 유래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과는 관계없이 대마도주인 종씨의 시조가 울산의 두왕동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왜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현대의 나로서는 앞으로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 알려진 바대로 宗氏의 시조가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작업인 동시에,민중의 의식 속에 융해되어 있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규명해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의 울산에 대마도주의 시조탄생 설화가 전하여 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노성환『일본 속의 한국』에서 발췌)
너무 길게 썼습니다. 보시는데 많이 지루 하셨겠지만 저도 이것 준비 하느라 날밤 새웠습니다. 모쪼록 잃어버린 역사 찾기와 친일잔재의 청산은 민족적 당위성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이승만 정부때(1948 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요구"와 '대마도 속령에 대한 성명') 까지는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박정희 정부 들어와서 한일협정 이후에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꼬리를 감추게 됩니다. 당시 저는 한일협정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에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포기의 대가로 무상,유상의 차관이 들어오지 않았었나 생각했었는데, 요사이 그에 대한 해답을 얻게되어 그 의문은 살아졌지만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는 국민적 공감대와 역사학계의 연구와 정부의 강력한 의사천명을 기대하게 됩니다.
거리상으로도 일본본토와의 거리는 150 km나 떨어진 대마도가 부산과는 불과 50 km밖에 안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날이 쾌청하면 부산에서도 대마도가 보이는데 일본 본토에서는 아무리 날이 맑아도 대마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땅임이 확실한 것인데 왜놈밑에서 친일,부일했던 조상들의 땅찾기에는 손을 들어 주면서 정작 찾아야할 땅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대마도도 조선땅' 中 고지도 발견
1400년대 제작, 日도 1717년 필사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16일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안을 제정해 사회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임을 보여주는 중국의 고지도가 발견됐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이날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황제(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인 `조선부(朝鮮賦)'의 4-5페이지에 나와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를 공개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于山島)뿐만 아니라 대마도(對馬)가 조선의 영토로 자세히 표기돼 있다.
특히 김 교수가 최근 일본 모 대학의 고문서실에서 발견한 `조선부'는 1717년 일본이 한자에 일본음을 달아 제작한 필사본으로 밝혀졌다.
김 교수는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땅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고문서가 발견됐는데 일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나라가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