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태순 / 김보성 (2023. 3.)
그녀에 대해서 쓸만한 이야깃거리가 미흡하다. 그녀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았지만 한번 써보아야 겠다고 작심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들의 인생은 한결같이 질곡하며 희생적이어서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이러한 삶은 나에게 한 편의 영화와 같다. 화면이나 문자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과 달리 그녀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생활의 결이 다르다.
그녀, 태순 씨는 언제나 주인공이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모노드라마의 감독이자 주연이다. 키가 늘씬하지도 얼굴이 예쁘지도 몸매가 매혹적이지도 목소리가 분위기 있지도 않다. 158cm 키에 56kg의 몸무게, 다소 얌전한 외모에 하얀 피부가 매력의 강점이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고 세련된 표준어를 사용한다. 화가 나도 고음을 내지 않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끊임없이 불만의 대사를 읊조릴 뿐이다. 기억력도 비상해 상처받은 사건 사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무한 재생이 가능하다. 관객의 기분이나 정서는 상관없이 방백의 대가다.
시골 마을 패셔니스트다. 촌부의 필수인 머릿수건에 나일론 셔츠와 몸빼바지를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남과 같은 옷차림은 조연으로 강등되는 것 같은 슬픈 사건이다. 흰색이나 풀빛 상의에 물색 주름치마를 즐겨 입는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구루프를 감아 뒷머리의 볼륨을 살리고 꽃무늬 양산을 받쳐 들고 자존심을 높여줄 뾰족구두까지 신으면 외출 준비가 끝난다. 그녀의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어르신들이나 동년배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종묘상이나 푸줏간을 지나고 냉동 생선 난전도 건너뛴다. 국화 모양의 풀빵을 사서 먹고 좋아하는 명태대가리전도 포장한다.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신발가게에서 자신의 구두를 고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왕따다. 도시에서 시골 집성촌으로 시집온 그녀는 늘 혼자다. 친척들도 데면데면 회피하지만 일가들과 애써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는다. 초록은 동색이고 그녀는 이색이다. 말투도 차림새도 튀어 입방아에 올리기 좋은 단골 소재거리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상추나 깻잎과 잔파 등 푸성귀를 키워 찬으로 올리지만, 그녀의 앞마당은 흐드러진 꽃동산이다. 작약, 봉선화, 달리아, 백일홍,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 과꽃이 달력 따라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다. 노란 병아리들은 애완계로 안방살이를 시켰으며, 토끼는 관상용으로 길렀고 강아지 메리에게는 붉은 털옷을 짜서 입혔다. 동네 대소사에 참석해서도 그림자처럼 겉돌았다. 할 일을 찾지 못해 뻘쭘하게 서 있기 일쑤였고 행여 전이라도 맡기면 제대로 된 부침개 한 장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러다 재료를 다듬는 일로 밀려났고 나중에는 설거지 담당이 제자리가 되었다.
동네 관람객이다. 싸움 소리가 들리면 가장 낮은 담벼락 일등석에 그녀가 있다. 먹던 밥도 마다한 채 숟가락을 던지고 소란의 방향을 잡아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뛰쳐나간다. 속속 모여드는 구경꾼에게 묻지도 않은 사건의 전모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다음 날 빨래터에 가면 현실감 나는 그녀의 재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빨래는 뒷전이고 빨랫방망이가 떠내려가거나 말거나 치맛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열연을 했다. 밥상을 뒤엎기 전과 후의 배경에 대해서도 재연 배우가 되어 다양한 손짓과 실감 나는 표정으로 연기한다. 동네 싸움의 계보는 그녀의 손바닥 정보망 안에 담겨 있다.
야매 서리꾼이다. 그녀는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일행을 동반하여 공범자로 만든다. 유월이면 뒷산 뽕나무밭의 오디가 검은빛을 띤 자주색으로 먹음직스럽게 매달렸다. 오디를 서리할 때면 양은 주전자를 준비한다. 뚜껑은 자칫 소리가 나거나 날아갈 수 있으니 증거인멸을 위해 집에 두어야 한다고 비법을 전수한다. 그녀가 정해준 밭고랑으로 들어가서 오디를 딴다. 반은 입으로 반은 주전자로 들어가고 입과 손은 굴뚝 청소부마냥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러다 그녀의 ‘뛰어!’ 소리가 들리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을 쳐야 한다. 같은 방향으로 달릴 때도 있고 ‘헤쳐모여’를 할 때도 있다. 밭 주인의 고함소리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해지고 숨이 턱까지 찰 무렵이면 저수지 둑방에 도착한다. 입 주변에 퍼런 얼룩을 묻히고 껑충거리는 그녀를 지켜보는 눈들이 혀를 찬다. 오디는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가고 주전자에는 몇 알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부인회장이다. 군청에 볼일이 있으면 자진해서 마을의 일거리를 거들었다. 서류에도 밝고 행정 업무도 곧잘 해내었다.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마을 기금도 척척 받아왔다. 발걸음 끊긴 그녀 집에 이웃들의 방문이 잦아졌다. 김치나 떡과 그녀가 좋아하는 풀빵을 사서 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꽃밭에서 캐놓은 달리아 구근을 얻어가고 도회지로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를 작성해 갔다. 그렇게 뒷담화의 주인공은 마을의 일꾼이 되었다. 산아제한 프로그램부터 코스모스길 조성이나 농한기 온천여행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러나 공직을 수행하면서도 싸움 구경에는 여전히 일등이고 한 움큼씩 없어지는 오디가 그녀의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둘도 없는 친구다. 장난을 칠 때는 의기투합이 잘되는 절친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매번 눈치 싸움을 하는 닭 다리의 선점은 물론 배달음식을 시킬 때도 그녀의 메뉴가 오늘의 메뉴로 통일된다. 오일장에 가서도 여전히 명태대가리전이 최고라며 시식을 강요하고 옷이나 신발도 그녀의 취향이 일 순위다. 사소한 말에도 눈물을 보이며 한번 삐치면 오래도록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나 대처가 그리워지면 함께 시내로 나가 양장점 옷을 맞춰 입고 영화관을 누비곤 했다. 군중 속에서 그녀는 활기가 넘쳤으며 자유스러웠다. 물론 우리의 모의가 가족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이 또한 동네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그런 그녀가 낯선 사람이 되었다. 늦은 밤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병원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버스를 탔는데 집을 못 찾겠다고 한다. 익숙한 동네가 낯선 장소가 되어 혼란스럽게 했다. 그녀의 어눌한 발음이 엉성하고 맥이 없다. 택시를 탈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영하의 매서운 날씨에 태순 씨가 헤매고 있다. 팔순의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그녀, 엄마라는 이름자에 마음이 푹 꺼진다.
첫댓글 대단한 반전이네요. 그녀가 설마 어머니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김보성 작가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프로작가의 신인상 당선을 크게 축하드립니다.
김보성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앞으로 카페에서도 자주 뵙고 싶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할게요~~~*
축하드립니다.^^
김보성 선생님, 탄탄한 글 실력을 갖추었으니
행보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한편의 반전 드라마네요. 그녀, 태순씨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