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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버지 집의 아버지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그거.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잃어버렸다 찾은 그 아들,
그리고 집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그 자기가 한 일로 아버지를 탄핵하는 그 두 아들로 보여주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 17절 보세요.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중간생략)
17절에 보면 세상이 돼지우리라는 것을 자각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품 군들을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품군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미스디오스>가 양식을 관장하는 종을 말해요. 양식을 가진 종.
드디어 아버지의 아들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양식을 갖고 사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삶인지를 깨닫고 있는 거예요.
돼지우리에서, 이 세상에서요.
거기서 양식이라고 번역이 된 <알토스>가 떡이에요. 떡. 성소안의 진설병을 가리키는 떡, <알토스>에요.
그게 뭐에요? 만나. 하늘의 만나. 떡. 말씀. 우리의 진짜 양식. 아버지의 떡. 아버지의 양식이에요. 그게.
그 떡이 풍족한 일꾼들이 아버지 집의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아 그게 진짜 행복한 거고 걱정할 게 없는 삶이구나. 그 품군들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거예요. 이제. 지금.
그런데 자신은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서 돼지가 되어서 돼지들과 경쟁하면서 돼지처럼 살고 있어요.
그걸 자각하고 알아가는 걸,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 내 육이 옛 사람이 죽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돼지구나. 부정한 자구나. 이거 아는 거예요. 그게 죽는 거예요.
자신의 행위와 소유와 업적들이 전부 돼지 똥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때, 그 돼지우리 안에 돼지 똥밖에 뭐가 있어요?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하고 돼지 똥, 이부자리가 있겠어요? 가구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부 돼지 똥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배설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똥이라는 단어에요.
우리는 그걸 알게 될 때 우리가 입고 있는 아담이라는 옷을 조금씩 벗게 되는 거예요.
어 이건 신뢰할 게 아니네. 사랑할 게 아니네. 이렇게.
그래서 17절이 <아폴로미>라는 단어로 끝나는 거예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그러잖아요.
그 단어가 완전히 파괴하다. 멸망하다. 라는 뜻이에요.
아들이 자신의 실체와 세상의 실체를 깨닫게 되자 그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는 뜻이에요. 죽음인 거죠. 자기 부정인 것이에요. 그것이.
18절이 어떻게 시작하죠? 내가 일어나. 라고 한글 개역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아니스테미 >라는 단어에요.
그 단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다. 라고 할 때, 부활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란 말이에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곳만 찾아드릴게요.
마가복음 12장 25절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
이 단어가 똑같은 단어에요.
내가 이제 죽었으니 살아나서 아버지의 양식으로 가야지.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그 아들은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세상과 간음을 하며 부정한 돼지들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다가 그 세상에서 죽고 아버지 집에 대해 다시 살아나게 된 거예요.
잘 보시면 둘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라는 말이에요.
내가 인생의 과녁을 잘못 잡았다. <하마르티아>거든요.
정말 자기를 살리는 참 양식은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는 없다. 라는 것을 안 거예요.
세상에는 모든 게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더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물론 진리가 들어있지만, 그걸 표피적으로 보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추구하며 살 때 그게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소유, 관계, 선, 악, 모든 게 다 돼지들의 자기 자존심 살리기의 쟁탈전에 쓰이는 돼지 먹이에 불과하더라는 거죠.
그 아들이 그렇게 자기를 살리는 양식은 아버지 집의 그 양식, <알토스>, 생명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를 그 양식 맡은 품군으로 써 달라고 애원을 해요.
' 자기 것 갖고 나가서 세상에서 돼지처럼 사는 아들보다 아버지의 것인 생명의 떡으로 진짜 풍성한 아버지의 집 삶, 그 삶을 동경하게 된 거예요.
시편 기자 말로 바꾸면 아버지의 떡이 있는 곳이라면 성전 마당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습니다. 라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반가이 맞으시고 잔치를 벌이시는데, 소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죠.
소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형으로서의 존재라고 그랬습니다.
<알레프>라는 단어가 <엘>이라는 단어 맨 앞 자가 <알레프>고 아담도 <알레프>로 시작해요. 소도...
이 세 단어가 다 알레프라는 단어 안에 들어가 있거든요.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되자 가짜 하나님으로서의 소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거예요.
율법으로서의 예수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죽지 않으, 소가 죽지 않으면 진짜 진리 하나님이 여러분과 연합할 수가 없어요.
그냥 타자로 존재하면서 섬김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그러면 나는 거기에 구속되어 있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구속이 아니라 꽁꽁 묶여 있는 구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 잔치는 소의 모양으로 오시는 예수의 제물 되심으로 완료가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가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율법은 껍데기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담겨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큰 아들을 한번 보죠.
누가복음 15장 27절 보세요.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간음이에요.)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큰 아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어요?
29절을 보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는 자로 자기를 인식하고 있어요. 나는 아버지의 명을 율법을 어긴 적이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이 전부 이 얘기 하죠? 나 다 지켰는데요. 그러잖아요.
아버지 집인 예루살렘도 떠난 적이 없어요. 성전. 아버지 집이잖아요. 그게.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게. 누구 이야기죠? 하나님이 장자라고 부르셨던 구약의 묶여 있는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큰 아들이에요. 장자에요.
그러한 율법주의자들은 반드시 보상을 바라고 행위를 내어 놓습니다.
아버지가 좋아서 아버지가 사랑스러워서 아버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왜? 은혜가 뭔지를 몰라요. 나가 본적이 없어요.
나의 유익을 위해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아버지로부터 어떤 걸 받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의 수고와 노력이 자기에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그 자들은 아버지를 탄핵해요.
당신이 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큰 아들이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뭘 근거로? 내가 한 옳은 행위로.
나는 아버지 말을 한 번도 어긴 적도 없고 집도 떠난 적이 없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그런다니까요
이게 율법주의란 말이에요. 그가 한 행위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잘한 거죠?
율법 잘 지켰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는데 그걸로 자기 의를 쌓고 있단 말이에요.
아버지는 그걸 악하다. 라고 한다니까요.
(중간 생략)
그러나 인간들의 그런 행위들은 결국 자기의 의 쌓기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것임을 이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는 거예요.폭로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28절에 그 장자가 노했다. 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 단어가 올기조 인데요.
산상수훈에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면치 못한다. 의 그 노하다 랑 똑같은 단어에요.
지금 큰 아들이 심판을 면치 못하는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형제에게 노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 놈은 간음하고 온 놈인데 부정한 돼지우리에서 가서 창기들과 간음하고 온 놈인데
어떻게 그 놈에게는 이렇게 잘 해 주고, 나에게 어떤 보상도 안 해줍니까? 노했단 말이에요. 올기조.
하나님은 형제에 대하여 그렇게 노하는 자는 심판 받는다. 그랬다니까요.
그건 세리와 창기를 향해서, 난 저들과 같이 더럽게 살지 않은 깨끗한 자입니다. 참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했던 자기 의를 자랑했던 그런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부정한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 하시고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죽어야할 형제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저런 놈이 거저 용서를 받아야 되냐는 거예요.
이건 십자가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게 형제에게 노하는 거예요. 올기조.
둘은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가 자기 동생을 뭐라고 부르면서 뭐를 말해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자.
그런데 그 간음한 자를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하는 게 가당합니까? 그런단 말이에요.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그래요?
네가 진짜 나와 함께 있는 자라면 내 것이 다 네 건데,... 품군들은, 종들은 그 내 것으로 저렇게 풍요롭게 사는데...
너는 진짜 네가 나를 섬기려고 여기 붙어있던 거라면... 그 내 것이 다 네 거고 저 종들이 누리는 그걸로 너도 풍요로울 텐데.
너는 그걸 지금 누리지 못하고 네 동생이 가지고 나간 그거,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구나.
그러니까 이 큰 아들은 진짜 하늘의 풍요,
하늘의 양식이 뭔지도 모르고, 말씀이 뭔지도 모르고,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무엇이 자기를 살리는지도 모르고, 뭔가 얻어내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죽어라고 일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속으로 아버지가 미웠던 거라니까요. 왜 나만 일을 해야 돼.
그러니까 팡! 터져 버리니까 아버지를 막 탄핵하는 거예요.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하나님은 그 따위 행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세요.
정말 아버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 곁에 붙어서 그걸 풍성히 누리고 있었다면, 그까짓 동생이 갖고 나간 거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니까, 돼지나라 돼지먹이니까, 돼지 똥에 불과한 거니까 넌 관심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가 그렇게 그걸 갖고 나가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건 세상과의 간음밖에 없는데, 그걸 갖고 왜 네가 분개를 하니? 그거에요.
율법주의자들에게 그거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장남은 자기 행위 속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가리켜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그래요.
예수죠?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가 이 돼지우리의 세상에 부정한 자로 오셔서 부정한 자가 되어 죽으셨다니까요.
그리고 아버지에 대하여 살았단 말이에요.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6장의 초입 부분이 다 이 얘기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말을 억지로 듣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서 돼지우리 같은 세상을 살아보며, 역시 아버지 집의 양식이 최고의 양식이며, 거기에만 풍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아버지에 대해 다시 사는 아들을 보는 것이다. 라는 그 말이에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찾았음으로 내가 기쁘다. 그랬잖아요. 아버지가....
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거 알아달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들을 창조해 내었는지를 아는 아들.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아는 아들,
그게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이지 아버지의 말을 율법적으로 잘 듣고 겉만 번드르르한 행위를 내어 놓으면서 그 옳은 행위로 아버지를 탄핵하는 그런 아들은 심판에 합당할 자일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심판의 근거인 올기조 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