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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서구 대저1동 낙동강 제방에 세워진 금수현 선생의 '그네' 노래비. 제방 아래 도로 건너편에 그의 생가터가 있다. 그는 어릴 적 낙동강을 벗하며 음악적 감각을 키웠다. 박창희 기자 |
낙동강변에서 정미소를 하던
금수현의 아버지는 기가 막혔다
"뭐? 풍각쟁이가 되겠다고?"
그의 꾸지람이 음악에 미친 젊은이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일본 유학 중 옥살이까지 한 그는
고향 부산에 돌아와 음악교사로 일하던 중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성을 순한글로 바꾸는 것으로
그는 해방의 감격을 표현했다
김수현은 금수현이 됐고
아들 김난새는 금난새가 됐다
#1
금수현 선생의 생전 모습. |
칠백리 푸른 낙동강물이 흘러내려 이곳에서 음악처럼 감돌아나가는
사덕리 대저보통학교에 하교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책보를 챙겨 우르르 교실 밖을 나갔다.
둘은 매일 방과 후에 남아 평양에서 온 김춘수 여선생님의 특별 노래지도를 받아 실력이 점점 높아졌다.
두 개의 교실을 턴 임시강당은 학생과 학부모들로 만원이었다.
촌극과 몇 개의 프로그램이 있은 뒤 두 소년 소녀가 무대에 섰다.
소년은 무대 위에서 가슴이 뛰었다.
선생님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소년 소녀는 아름다운 화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졌다.
학예회가 끝난 뒤 소년과 소녀는 긴 낙동강 둑을 함께 거닐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 2
장손 김수현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 즈음 가세도 아버지는 오직 아들 김수현의 취업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베토벤과 모짜르트 전기를 읽었고, 음정에 관한 코뤼분겐을 사서 독보연습을 했다.
스승도 없이 음악책을 구해 혼자서 깨쳐나가는 길이 어려웠지만
장차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리고 동경의 음악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학교로부터 도항증까지 얻은 뒤 단단한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동경음악학원에 입학하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먼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1300리를 흘러 내려 온 물소리가 웅장한 교향곡 같았다.
한때 그는 친구들과 낙동강변 농촌마을 돌며 기타를 연주하며 농촌계몽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동경의 동양음악학원 성악과에 합격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와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현은 신문배달과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조달했고, 외로울 때는 고국에서 가져온 기타를 쳤다.
그가 동양음악학원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태우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 일본 경시청 소속의 특별고등계 형사가 찾아왔다.
불안한 소식을 듣고 있던 차에 특고형사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체포돼 오오모리 경찰 유치장에 들어갔다.
주고 받으며 독립을 모의했지? 과거에도 네 놈들이 농촌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주의자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어울려 다니면서 사상활동을 한 것을 다 알고 있다."
주고 받았느냐. 너도 그와 똑같은 놈이다."
수현이 온몸에 가짓빛 멍이 든 채로 감방에 들어와 누워있는데 깊은 밤 작은 창문 밖 어디에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쇼팽의 군대 폴로네이즈였다.
폴란드의 독립군이 러시아가 점령한 조국을 향해 진격하는 노래를 듣는 순간, 그는 흐느껴 울었다.
저런 곡을 쓰리라."
# 3
금수현 선생의 아들인 마에스트로 금난새 씨. |
일 년간 일본 송죽회사 가극부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뒤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음악교사가 되어 교육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여고 학예회에서 처음으로 독창, 합창, 발레, 연극이 들어가는
음악극을 상연했는데, 교장에서부터 학생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호응이 대단했다.
교두(교장)는 '우리 여고에 음악천재가 있다'라고 선전하며 다녔다.
김수현은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작가 김말봉의 딸 전혜금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고뇌하는 그의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다.
그는 학교 동산에 있는 큰 소나무를 보고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이고 홀로 노래를 부르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의 집에는 고성능 라디오가 있었는데 사이판 미군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여자 아나운서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하여 수십만 명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8월 15일 사이판 방송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본명은 김수현(金守賢)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金寧 金氏)였으나 한자를 버리고
순 한글 이름인 '금수현'으로 개명한 것이다.
너무 많아서 저는 순 한글인 금 씨로 바꿨지요. 앞으로 저를 꼭 금수현으로 불러주세요."
음악의 뜻을 이어 마에스트로가 된 아들 '금난새'는 대한민국 호적에 처음으로 등재된 순 한글이름이었다.
해방 후 금수현은 경남여고에서 교감으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모 김말봉이 교감사택으로 찾아와 말했다.
'그네' 곡은 음악주보에 실려 서울로 악보가 갔고, 사람들 사이에 점점 인기를 얻더니
마침내 전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 가곡이 되었다.
이후 그는 우리 음악사에 남는 아리아인 '심봉사의 슬픔', 기악곡 '새벽의 바다', 오페라 '장보고'를
작곡했으며, 문교부 편수관이 되어 음악용어를 제정하고 표준 음악교과서를 펴냈다.
최초로 '월간음악' 잡지를 창간하고 한국작곡가협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하는 등
한국 음악의 발전에 큰 나무가 되었다.
# 4
독일 베를린에서 전화가 한통 왔다.
"아버지, 저 난새예요. 카라얀 국제콩쿨대회에서 동상으로 입상했어요."
"아, 축하한다. 장하다, 내 아들."
아버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국 음악인이 이뤄낸 최초의 쾌거였다.
그는 기쁨에 겨워 고향 낙동강변 대저마을 고향집을 찾아 바로 앞마당인 낙동강변 둑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낙동강은 여전히 마을 감싸듯이 흘러 태평양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어릴 때 이곳에서 소녀와 함께 불렀던 이중창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낙동강변의 마을을 돌며 연주하던 기타소리도 들렸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음악학원으로 떠나기 전 낙동강 물소리를 벗 삼아 기타를 치던 장면도 떠올랐다.
한 줄기 샘에서 시작한 한국 음악도 이 낙동강처럼 흐르고 흘러 세계의 바다를 뒤덮을 것이다.'
김하기 소설가
■ 강인길 강서구청장 인터뷰
- 대저에 만들 '금수현 음악거리'… 금 선생의 고향인 강서가 핵심 콘텐츠를 갖게 되는 것
부산 강서구 대저1동에 '금수현 음악거리'를 추진하면서
전문가 얘기를 듣고 아이디어를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금수현 음악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낙동강 정기를 먹고 자란
선생의 음악정신과 문화적 자산을 계승해 지역 콘텐츠로 만드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강 구청장을 만나 추진 과정과 계획을 들어봤다.
대저1동 구청사 주변은 아직도 1970~80년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다 그린벨트가 풀려 도시재생을 논의하게 됐고, 핵심 아이템으로 금수현 선생을 주목한 것이다.
낙후돼 있었던 게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로 다가온 셈이다."
1구간은 옛 구포교~대상초등학교 간 642m, 2구간은 도시철도 강서구청역~강서고교 간 450m이다.
이곳에 경관 개선, 전통시장 재현 및 다목적 음악당을 세우게 된다."
음악당이 들어설 한국농어촌공사 부지 매입이 무리없이 이뤄지고 있다. 의회도 협조해줄 것으로 믿는다."
금수현 음악당이 들어설 대저1동 한국농어촌공사 부지. |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돼 있다."
높이면서 확고한 지역 콘텐츠가 되도록 해 놓을 생각이다. 지역 변화를 위한 문화사업 및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강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