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전군(麻田郡)에서 죽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치제(致祭)하기를,
“하늘땅과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자는 만세토록 다함이 없는 제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경의 선세(先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제도와 문물을 500년을 이어왔으니, 그 공덕이 백성에게 미친 것이 깊다. 그러므로 마땅히 오래도록 다함이 없는 제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망하고 흥하는 것은 변함없는 하늘의 도리이다. 전조(前朝) 말기에 이르러 정치력을 상실하고 백성을 원망으로 시름하게 하더니 결국 선세의 사당으로 하여금 제사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부덕한 내가 하늘의 은총을 받았기에 혁명한 초기에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경에게 작읍(爵邑)을 봉하여 선세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 것은, 실로 삼대의 예를 따른 것이다. 앞으로 선대의 예물을 가다듬어서 신중을 기하고 효성을 다하여 나라와 함께 그 행복을 누리고자 하였는데, 몇 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하늘이 가만두지 않으시니 참으로 애통하다. 부음(訃音)을 듣고 난 후로 몹시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유사하게 명하여 예장(禮葬)을 치르게 하고 영구(靈柩) 앞에 치전(致奠)을 하게 하니, 경이 혼매하지 않다면 나의 지극한 심정을 체득하기 바라노라.”
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를 귀의군(歸義君)에 습봉(襲封)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근처 고을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고려 태조(高麗太祖) 신성왕(神聖王)의 사당을 마전(麻田)에 건립하게 하였다.
○ 경상 전라도 도안무사(都安撫使) 박자안(朴子安)이 항왜(降倭)를 응접하여 군사 기밀에 실책을 범한 일로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다. 이서(移書)하여 주벌을 가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왜적들에게 관계된다 하여 비밀에 부치고 선포하지 않아 외부인은 알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박실(朴實)이 우리 태종의 잠저로 찾아갔는데, 때마침 여러 종친들이 찾아오자 태종이 문에 나와 영접을 하였다. 박실이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아비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자, 태종이 불쌍하게 여기고서 여러 종친들과 함께 그의 사형(死刑)을 용서해달라고 청하고자 하였다. 종친들이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비밀스런 일인데 상이 만일 어디에서 알았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그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
하고, 즉시 대궐에 나아가 내관 조순(曺恂)으로 하여금 계청하게 하니, 조순이 아뢰기를,
“이는 비밀스런 일인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사람을 처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국가의 큰 일인데 외부인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순이 들어가 아뢰자, 상이 이에 깨닫고 즉시 박자안의 사형을 용서해 주게 하였다. 역마(驛馬)를 보내 명을 전하니, 자안이 막 사형을 당할 찰나에 목숨을 구하였다.
박실(朴實)은 본래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태종이 그가 아비 구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는데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 전라도 수군 만호 최원충(崔原忠)이 왜선 1척을 포획하여 병장(兵仗)을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최원충이 배 1척을 모두 포획했다고 한다면 어찌 사로잡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친종호군(親從護軍)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이 배를 조사하게 하였더니, 이 배는 과연 사신가는 배였다. 그리고 판전농시사 김정경(金鼎卿)을 파견하여 이르기를,
“최원충이 사자(使者)을 죽이고 그 예물을 탈취하여 휘하의 사람들과 나누어 가졌으니, 사형을 받아도 남는 죄가 있다. 너는 김첨과 함께 법에 따라 신문해서 처형하여 대중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도당(都堂)에 명하기를,
“불씨(佛氏)의 도(道)는 마땅히 청정과욕(淸淨寡欲)으로 종지(宗旨)를 삼아야 할 터인데, 지금 사원(寺院)의 주지(住持)라고 하는 자들이 산업(産業)을 경영하기에 힘쓰고 있으며, 심지어 이른바 색계(色戒)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그들이 죽고 나면 그 제자들이 사사(寺社)와 노비(奴婢)들을 법손(法孫)이 대(代)를 이어 전수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심지어 서로 송사(訟事)를 하기까지 한다.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그 폐단을 혁파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사로 하여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칭하고, 전문(箋文)을 바치면서 왜국에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섬라국(暹羅國)의 왕도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였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평양(平壤) 이북은 모두 야인(野人)의 사냥하는 곳이었다. 고려가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 의주(義州)부터 양덕(陽德)까지 가로질러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으나, 생활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까지 하였다. 또 남쪽 지역은 왜구가 날뛰었다. 이리하여 동서 수천 리와 연해(沿海) 수백 리가 성곽은 불에 타고 들녘은 백골이 널려 있어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변(安邊) 이북은 대부분 여진(女眞)에게 점거되어 정령(政令)이 미치지 않았다. 예종(睿宗)이 장수를 보내 깊숙이 들어가서 승첩하여 공을 세우고 성읍(城邑)을 세웠으나 얼마 후에 다시 빼앗겼다.
상이 즉위한 이후에 성교(聲敎)가 먼 곳까지 미치니 백성들은 비로소 생업에 안정을 찾게 되고 전야(田野)는 날로 개간되었으며 인구도 날로 증가하였다. 야인(野人)의 추장이 모두 잠저를 섬기면서 동서로 정벌할 경우에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상이 즉위한 후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관직을 적당히 주어서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여진(女眞)을 안집시키게 하니,
피발(
被髮)하던 풍습이 모두 관디를 착용하고 금수와 같은 행동을 바꾸어 예의의 가르침을 익혔으며,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하는 것도 다 같은 편호(編戶)에 들었다. 그리고 추장(酋長)에게 부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모두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 공주(孔州) 이북에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과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학교를 세워 경서(經書)를 가르치니, 문무(文武)에 의한 정치가 다 실현되었고 1천여 리나 되는 땅이 모두 조선(朝鮮)의 영토가 되었다.
풍습이 다른 강 건너 지역들이 다투어 의(義)를 사모하여 직접 와서 조회하는 자도 있고, 자제를 보내는 자도 있고, 벼슬 받기를 요청하는 자도 있고, 내지로 이주하는 자도 있었으며, 기르는 말이 좋은 망아지를 낳으면 모두 자기들이 소유하지 않고 다투어 진상하였다. 강 근처에 거주하는 자들이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었을 경우 관청에서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 감옥에 가두거나 곤장을 때려도 감히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또 변장이 사냥할 때면 모두 삼군(三軍)에 소속되기를 자원하여 짐승을 잡으면 관청에 헌납하였으며, 법률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과 차이가 없었다.
○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아뢰기를,
“한(漢) 나라 군정(軍政)은 처음에 우격(羽檄)을 사용하여 천하의 병사를 소집하였고 뒤에는 호부(虎符)를 사용하여 군국(郡國)의 신의를 규합하였습니다. 교서(膠西)가 멋대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자 궁고(弓高)가 힐문하였고, 엄조(嚴助)가 절(節)을 가지고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자 군수가 거절하였으니, 병사를 소집하는 데에 있어서 치밀성이 이런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사한 마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여씨(呂氏)들의 변(變)과 칠국(七國)의 변란이 갑자기 발생하였으나 대비책이 평소에 갖추어져 있었고,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수년 동안 군사를 연합하였으나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고조(高祖)가 군사를 직접 관여하여 그 문제점을 깊이 연구하여 4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굉장한 규모를 마련한 결과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제도에 따라 유사로 하여금 호부(虎符)를 만들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외의 군사를 징발시킬 일이 있을 경우에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호부로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호부가 없이 군사를 소집할 경우에는 멋대로 징발한 것으로 논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삼아 군현의 지계(地界)를 확정하게 하고 또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도전이 종사관 최긍(崔兢)을 보내 지계를 확정한 일을 아뢰니, 상이 중추원 부사 신극공(辛克恭)을 도선위사(都宣慰使)로 삼아 정도전에게 수서(手書)를 보내면서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그 글에,
“서로 헤어진 지 오래되니 그대 생각 간절하다. 그래서 신 중추(辛中樞)를 보내어 행역(行役)을 물으려 했는데, 최긍이 마침 와서 근황(近況)에 대해 알게 되니 마음이 다소 놓인다. 지금 유의(襦衣) 한 벌을 보내 바람과 이슬을 막게 하니, 봄추위에 몸조심하고 변방의 사업을 잘 마치도록 하라.”
하였다.
첫댓글 남쪽지역 의 동서 수천리 와연해 수백리가 불에 탔다는 본문 구절 이 매우 중요하고 주지승들이 산업을 경영하고 대처승이였다라는 구절도 중요합니다 북방호국불교가 염세 멸업열반 불살생 비폭력 의 자이나교로 전환된 시점이 1397년 이전에 일어난 역사라는 것도 이 글을 통해 얻을 수 있군요 감사합니다
당대의 북방불교 승려들은 대부분 소림사 승려들같이 무술을 연마하여...거의 최 강자들 반열에 든 승려들이 많았단 몽골인들의 말도 있습니다.
그래, 서산대사의 그 승군들이 거세엇던 겁니다.
송도(숭산)의 소림사도...시조가 서남방일 진 몰라도...철저히 이런 류로 불도와 호국을 같이 병행하던 곳이며..
그 변절도 여타 유교학자들의 말노름 보다 심하지 않아...
대륙조선이 타타르여진의 간접통치를 받으면선...복건성에 소림사 대처승(속가제자) 홍 뭐시기가
현 중원과 열도의 범죄조직의 원조인 천지회계열이나 이론상 태평천국을 모방한 삼합회의 근본인 홍방(洪房)을 만들었단 전설을 봐도
국난시마다 정권에 타협치 않고 사찰을 정복자들로 부터 멀리 옮겨서라도 꾸준한 투쟁을 했던 것도
당대의 대륙조선 대륙불교였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