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임택 지음/메디치 2017년판
마을버스 ‘은수’와 지은이의 출람지청 세계여행
1
지은이가 세계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인생 이모작(二毛作)
헤르만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내용처럼 한 번의 인생을 두 번에 걸쳐 사는 것, 세상이라는 굴레에서 살다가 때가 되어 떨치고 나와 자신의 의도한 바를 펼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여행을 ‘5060세대’를 위해 기획했다고 한다. 2030과 같은 젊은 세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이미 자기의 삶의 방식을 분명하게 세우고 뚜렷하게 펼쳐나가는데 비해 과거의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지배되어온 탓에 그럴만한 기회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파악하여 그 길을 열어보고자 시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지은이가 여행길에서 만난 어느 젊은이가 떠오른다. 어렵게 붙은 대학 합격을 포기하고 4년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배낭 여행을 하려고 떠났다는 이야기인데, 떠날 때 비행기 편도 티켓만 준비하고 나머지 비용은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완수한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생을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식에서 과거 세대와는 판이하되 더욱 용기 있고 지혜로운 방식의 소유자가 요즘 세대라는 것을 알고는 신선한 충격에 잠시 빠져든다.
총 677일간의 48개국 방문이라는 여정의 천신만고 끝에 여행을 마친 지은이는 책 말미에 그 여행 결과 ‘도전하는 인생’의 중요성을 깨우쳤는데,
-도전하는 한 언제나 나는 청년입니다.
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여행의 이전과 이후로 삶이 갈렸다며 여행 이후 이전보다 활기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그 소회를 밝혔다.
2
정년퇴임을 앞둔 마을버스 ‘은수’와 50대에 이른 지은이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세계에서의 단순하고 지루한 삶을 벗어나 시골 쥐가 서울로 상경해서 그 발전상에 눈이 휘둥거래진 것처럼,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아프리카를 거쳐 중앙아시아를 돌아오는 긴 여정을 통해 그 일생을 장렬히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더 큰 열정을 품은 청년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출람지청(出藍之靑)
이 책에서 지은이는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 여행에서 인생을 느끼고자 했다. 고금의 모든 문학작품이나 종교에서 다루고 언급하듯 ‘인생은 한편으로 여행’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인생에서 주연인 인간은 잠시 삶에서 머물다가 때가 되면 덧없이 떠나는 ‘나그네’라고 비유했다. 지은이는 이제 진정 나그네가 되어 여행에서 인생을 찾는 ‘역설적’인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 노정에서 과감없이 드러나는 인생의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추리고 정리하면 대강 다음과 같겠다.
3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누군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를 만날지 알 수 없으므로 늘 깨어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을버스 ‘은수’는 지은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9년 6개월 동안 시민을 실어 나르던 마을버스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바로 폐차되었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6개월 전에 지은이를 만남으로서 ‘인생 이모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 행운은 그 직전까지의 살아냈던 삶의 스케일을 능가한 나머지 ‘모든 삶의 정수는 인생의 황혼기에 나타난다’라는 신조어를 만들게끔 한다.
여행 중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자동차가 고장 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거나, 낯선 나라의 도둑들에게 돈이 든 지갑과 카메라가 든 배낭 혹은 스마트폰까지 강탈당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개인사에서 일어나는 흔한 사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행과 인생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여겨진다.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도 병약해져 하던 일을 멈추고 병원 신세를 지거나 별별 사기사건에 휘말려 재산을 잃거나 분실하는 일도 더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그때 저는 겁에 질려있는 당신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지은이가 파나마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던 중 국경에서 차량진입 허가를 맡지 못했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던 어느 외국인이 한 말이다. 지은이는 이 사람을 천사(天使)라고 보았는데, ‘우연이나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며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Bonus)라는 생활신념을 지은이 자신에게 굳히게 만든다. 자신이 여행이라는 세계일주 중에 최선을 다한 결과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천사와 같은 이들이 나타나 도와준다는 것이다.
4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귀중한 물건들을 잃어버려 여행에 큰 타격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게다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실제로 여행을 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짐들을 가지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본문 중에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재삼 깨닫게 된다. 우리네 삶이란 생명을 얻어 태어나서 죽음을 만날 때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숙명이다. 그 숙명의 노정에서 나 자신 외에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할까. 불필요한 것에 마음을 뺏김으로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불러들이는, 그래서 본문의 내용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짐들을 가지고 그 무게에 지금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나 자신과 주변에서 목도할 수 있다.
-아마 청년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이후 나의 여행을 몰라보게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본문 중에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거액의 현금과 카메라가 든 배낭을 도둑맞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유럽 여행에 합류했던 그의 아들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아직 은수가 멀쩡하고 아버지가 건강하게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세요? 여행에 무엇이 더 필요해요?” 이 말에 아버지인 지은이는 힘을 얻는다. 아들은 지은이 자신보다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불쑥 어느 순간 해주는 것에 감동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 만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지불식간에 한 말들이 여행의 타성에 젖어 판단력이 제때에 서지 않던 지은이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영감을 준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런 말로 여행을 종결한다.
-내 여행의 목표는 오직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