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라면 추억은 말라붙어 불로 녹여도 소용없는 고약 같은 것일까 한 30년 이전으로 거슬러 내려가 추억의 횡성 '약속'다방으로 가본다 사실 나는 체질로 보나 당시 친구들의 성향으로 보나 다방 보다는 경양식 집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어쩌다 한번씩 출입을 했던 그 다방이란 곳에 가보고 싶다 원주의 이사벨이나 양지다방 이나 희다방그런 곳이 아니라 횡성 '약속'다방말이다 그래서 근사한 미팅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음악다방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아마 분위기로는 농촌 드라마인 '전원일기'의 20년 전 무대 쯤 될 것 같은데 어쩌다 한번씩 친구 녀석을 따라 드나들었던 그 다방은 참 편안했다 요즘 카페나 커피숍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여유 같은 것이 있었고 만만했다 당시 다방에 가면 무상으로 분냄새를 맡는 재미도 얼마간 있긴 있었다 딱히 앉으란 말은 없었지만 우리보다 족히 대여섯은 연상인 마담이든 서울 어디서 온 신출내기 아가씨든 서스럼없이 제 자리처럼 턱 앉는다 그러나 "야, 너 여기 왜 앉아!"라고 부라리며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놀곳이 마땅치 않던 7-80년대의 시골 한량들은 대낮부터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읍면소재지의 젊은이들은 다방에 가서 차 한잔 시켜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벼를 수매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다방으로 몰려들어 서로 자기가 사겠다는 정겨운 풍경이 테이블마다 요란하다 다방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약속 장소로 통하고 약속을 정하기 가장 수월한 장소다 혼기가 꽉 찬 선남선녀들이 넥타이로 목을 조르고 때깔 좋은 옷 골라 입고 선보러 나오는 곳도 다방이었다 그 때 그 다방에서는 차만 마시지 않았다 삶의 결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애환과 조각을 타서 마셨다 맨발에 슬리퍼 질질 끌고 나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흙 뭍은 채 일하다 장화신고 나온 사람, 고추방아 찧으러 경운기 통통거리며 시오리를 달려 온 사람으로 읍내 '약속다방'은 늘 북적댄다 간혹 농약치다 나온 사람도 있고 그놈의 농사 갑자기 신물이나 나온 사람도 있다 마실 나온 사람들의 행색이 가지가지인 것은 다방이 서민들의 생활 터전에서 잠시 쉬어가는 정거장 구실을 톡톡히 해낸 탓이리라 청년회 얘기보다 수매값이 어떻고 융자금이 올해 얼마나 배정됐다는 소식이 더 관심을 끈다 어디 마을은 새로 이장이 누가 뽑혔고 또 어느 마을 누구네 셋째 아들이 이번 어느대학에 들어갔다는 정보도 끼어있다 어느날 없던 수족관이 다방 한가운데 버젖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당시 도회 다방에 가면 수족관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 산소가 뿌글뿌글 거품을 연신 뿜어대는 금붕어 수족관 옆은 말하자면 귀빈석에 해당한다 차 나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수족관을 쳐다보는 것도 다방에서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아리랑'이나 '비사표' 사각 성냥통을 열어 찐한 황과 인 냄새가 다방 전체에 풍기도록 성냥을 확 그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금붕어 입모양을 쳐다보다가 실증나면 성냥 알갱이로 무료한 탑을 쌓기도 한다 다방의 색채는 늘 침침한 갈색으로 기억된다 탁자와 의자가 그렇고 물컵과 찻잔도 갈색이다 벽과 천장도 갈색 나무 무늬였던 것 같고 커피색도 갈색이다 갈색 아닌 것은 립크루즈 붉게 바른 다방 아가씨 입술과 햇볕을 덜 보아 그런 것인지 허여물건한 종아리 살갗 뿐 다방에 온 남정네들 얼굴 색도 대부분 짙은 갈색에 가까웠다 오늘 문득 그 침침한 갈색 무늬 사이로 계란 노른자의 짙은 노랑색이 달처럼 떠올랐다 현길이의 야릇한 미소 한모금으로 모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가 주문하는 갈색 커피에는 노랗게 부풀어오른 작은 달이 하나씩 당당히 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약속다방'을 추억하며 왜 우리 커피잔에 계란 노른자를 특별히 빠트려 주었는지 그게 새삼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