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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쩌런이라는 차이나타운
앞선 글에서 티엔하우라는 절을 들를 때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시장을 들른 후 또 티엔하우라는 사원이다.>라고 명기 한 바 있다. 그러면서 나는 사원보다 먼저 들른 시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는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할 얘기가 넘쳐 따로 취급하는 것이 맞겠다 싶어 뒤로 미루어 둔 것이다. 그 글에서 말 한대로 티엔하우는 차이나타운이라는 쩌런 지역 한복판에 있다. 이번의 화두는 바로 차이나타운의 쩌런이라는 동네의 화교들에 대해서다.
우리가 묵은 호텔이 1군인데 쩌런(Chợ Lớn)은 5군, 6군, 10군 그리고 11군의 일부에 속하니 중심가로부터는 외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쩌런은 위치는 그럴지는 몰라도 정치 선상에서는 결코 외곽은 아니었다. 그 중심에 빙떠이(Bình Tây) 시장이 있다. 우리가 들른 곳은 바로 그 시장이다. 호찌민시에 갈 때 쩌런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면 뭔가 상당히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다. 프랑스풍의 멋진 가로수 길 사이로 중국풍 가옥들과 프랑스식 건축물들이 절묘하게 배열된 그곳은 호찌민시의 어느 구역보다 독특하고 매혹적이라 했다.
베트남에 하나밖에 없는 차이나타운 쩌런은 ‘큰 시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쩌(Chợ)’가 ‘시장’을 뜻하고 ‘런(Lớn)’이 ‘큰’을 뜻한다. 베트남 사람은 이 차이나타운을 쩌런(Chợ Lớn)이라 부르지만 현지 화교들은 타이넌이라 부른다. 타이넌은 둑 혹은 제방을 뜻하는 중국어 티안(堤岸)의 광동어 발음이다. 이곳 화교들은 대부분 광동인(廣東人),중국 방언 중 월(粤, Yue)방언에 속하는 광동어(廣東語)를 쓰는 사람 차오저우인(潮州人)중국 방언 중 민(閩, Min)방언을 쓰는 사람이다. 이곳은 화교들의 거점으로 남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메콩델타지역에서 수송되어 오는 쌀 및 기타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각종 약재, 옷감 등이 모이는 물류의 중심지이다.
1군 벤탄(Bến Thành) 시장에서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거리를 따라 5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바로 이곳에 이른다. 최근 이곳은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의 투자로 더욱 활기를 띠고 있으며 특히 많은 중국과 타이완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쩌런은 18세기 후반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1778년 비엔화시(Biên Hòa)호찌민시에서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에 살고 있던 화교들은 현재의 쩌런 구역으로 피난을 와야 했다. 그들이 응웬 왕조(Nguyễn, 1802~1945)의 선조인 추아 응웬(Chúa Nguyễn, 1558~1775)들을 도와주었고 그러자 반란군 지도자 떠이선(Tây Sơn, 1771~1802)의 의군(義軍)이 그들에게 복수를 했기 때문이다.
4년 후인 1782년 그들은 다시 떠이선 군대에 학살을 당했는데 그 결과 1만여 명의 화교들이 죽었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해석은 여지금도 여러 갈래로 정확한 것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떠이선 군대의 학살 후 화교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재건해야 했다. 그들은 강을 따라 높은 둑을 쌓고 이 새로운 거류지를 타이넌이라 불렀다. 이후 쩌런은 점점 확대되어, 1930년 쯤에는 지금의 응웬반끄(Nguyễn Văn Cừ)길에서 사이공과 인접하게 될 정도로 규모가 카졌다.
쩌런 주변에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유명한 성당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짜땀대성당(Nhà Thờ Cha Tam)이다. 오래된 짜땀 대성당은 호찌민시 5군 혹락(Học Lạc) 거리에 위치한다. 이 성당은 사이공대교구에 의해 1900년~1902년에 지어졌는데 연한 노란빛과 흰빛이 특징이고, 윗부분에 있는 탑에 기묘한 상이 있다. 성당은 천장이 높고 둥근 건축물이다. 마리아 상은 성당 앞 작은 동굴에 서 있다. 베트남 통일 전 여기서 남베트남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3년 무력정변이 일어났을 때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응오 딩 지엠(Ngô Đình Diệm, 1901~1963)과 그의 동생 응오 딩 뉴(Ngô Đình Nhu, 1924~1963)가 이 성당에 있었다. 그들은 한밤에 암살을 당할 뻔하다가 구출되었으나 사이공 중심지로 돌아가는 길에 살해당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정문에서 가까운 제2 묘역.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사병들의 묘역인 이곳에 장군 무덤이 하나 있다.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지난 2013년 타계한 그는 유언으로 사병들과 함께 묻히겠다고 했다. 26.4㎡(8평)가 주어지는 장군묘역이 아닌 3.3㎡(1평)의 사병묘역을 원한 것이다. 베트남전 영웅인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5·16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정치권으로 진출하지 않고 군으로 복귀했다. 박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 선포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 탓에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중장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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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에서 어떻게든 승리해서 민주주의 위대함을 전세계에 보여주라고 채명신 장군에게 격려문을 보냈었다. 이에 대해 채장군은 월남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이에 놀란 박대통령은 채장군을 소환하고 독대를 한다. 이후 박대통령은 승리하라는 명령 대신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월남 야전지휘관에게 다시 하달한다. 승리가 아닌 생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채 장군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자유베트남이 패망한 것은 부패를 틈탄 내부 공산세력의 발호 때문이었다. 내부가 썩은 국가는 외부의 어떤 도움에도 결국 망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트남은 당시 전시체제라 불안정했고 이를 통제할 공권력도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가 일어났고 정치인, 사회지도자, 언론인등이 좌익진영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나중에는 남베트남 언론에서 당시 월맹(북베트남)을 판하는 기사나 좌익진영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인들은 내부 권력싸움만 벌였다. 포플리즘 발언, 정치싸움, 전쟁 중인데도 쿠테타는 반복 돼 대통령은 수시로 교체되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분할통치 시에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극치를 이루었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와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베트남 사람들은 가난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변질된 개인주의까지 사회에 풍미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많이 가지려는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부패는 모든 사회계층에 만연되어 그 사례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남베트남 항공사 사장 구엔 탄 트룽(Nguyen Tan Trung)은 티우(Thieu) 대통령의 친구였고 티우의 딸이 그의 며느리였다. 도쿄,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꼬냑, 담배, 가전제품 등의 사치품을 가득 실은 남베트남 항공사 항공기가 비엔 호아(Bien Hoa)의 공군기지에 먼저 착륙하여 승객들이 창문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짐을 하역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으로 날아갔다.
이와 같은 많은 물품을 구매하는데 소요되는 달러를 국내에서 모두 바꿀 수는 없었다. 홍콩에는 남베트남 피아스타를 다른 은행보다 좋은 조건으로 달러로 환전해 주는 은행이 있었다. 이 은행은 중국이 운영하였고 이 피아스타는 북베트남을 거쳐 남베트남 내 베트콩들에게 들어갔다. 그들은 암시장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였고 기업을 인수하여 이익을 남겨 다시 베트콩 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전장에서 소총부터 포병화기의 탄피, 파괴된 탱크, 항공기, 트럭 등의 고철은 굉장한 이권이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국제 철강가격은 계속 오름세에 있었다. 미국도 이 고철은 통제하여 본국으로 수송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헬기가 이를 즉각 후송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남베트남군이 수집하는 고철은 군용차로 항구로 운반되어 공해상에서 거래되었다. 이 이권에는 리롱탄(Ly Long Than)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리롱탄은 사이공 실업계의 거물이며 그의 부인은 티우의 부인과 의자매였으며 남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려면 필히 알아야 할 인물로 통하였었다.
생명을 걸고 전투를 하여야 하는 적과 장비와 물자를 거래하는 한심한 일도 일어났다. 1973년에 티우는 구엔 빈 기(Nguyen Vinh Nghi)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제4군단장에 보직시켰다. 제4군단 지역에서 베트콩에게 계속 밀리자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서 원인을 조사한 결과 25,000정의 소총과 8,000대의 무전기가 기가 재직하는 동안 베트콩들과 거래된 사실이 드러났다. 가공인물을 날조하여 병력에 포함시키거나 병적만 올려놓고 본인은 부대를 떠나 자기 집에 있는 유령군인도 생겨났고 고급장교의 사택에서 일을 보거나, 부업장소에서 일하거나, 군 예술대 등의 일을 하는 꽃군인도 생겨났다.
경제장관 팜킴곡(Pham Kim Ngoc)은 대만에 8백만 달러의 현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민담당 부서의 뇌물은 유명하여 1966년도에 10,000달러면 병역을 면제받고 해외유학을 갈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이든 어떤 직위에 있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찰의 묵인 하에 약국이나 바, 기타 유흥업소에서 미군과 남베트남 인에게 마약밀매가 공공연하게 성행하였다. 매관매직도 빼놓을 수 없다. 성장(省長) 중에 가장 고가는 메콩 델타 지역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차우 둑(Chau Duc) 성장으로 8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소가 부족하여 캄보디아에서 들여오고 있었는데 그곳을 통과하는 소에 두당 얼마씩 상납 받으면 두 달이면 본전을 뽑고 나머지 기간 동안 거두어들이는 것은 순이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매관매직 중 가장 고가로 최고 황금의 직책은 다름 아닌 차이나타운인 쩌런 (촐론(Cholon)) 지구 경찰서장으로 1970년도에 1300만 피아스타, 미화로 13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 미화 13만 달러 상상이 가는가. 왜 그 자리가 그렇게 대단했던 것일까. 부정과 부패는 남 베트남인들의 생활방식이 됐을 뿐만 아니라 생존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은 불평과 불만, 상호불신을 초래하게 되고 빈부의 차와 연계되어 베트콩들의 선전이 그럴듯하게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화교들은 이런 불확실한 정세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야말로 눈부시게 활동을 했다. 마약, 매춘 도박 등등 가리지 않고 남베트남 재화를 쓸어 담았다. 당시 파병 지휘관들은 화교들 때문 베트콩이 2배가 더 늘어났다고 공공연하게 말을 했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수탈은 오히려 편했다. 정치권 혼란을 부추기며 때로는 베트콩에 협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협정으로 휴전이 되었다고 하나 남베트남 국민들은 이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온다고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혼란은 가중되었다. 남베트남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가 없어졌다. 그렇게 풍성하게 지원되었던 물자도 끊어졌다. 미군이 철수하자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실직되었다. 오일쇼크로 유가가 4배나 뛰었다. 어민들은 고기를 잡아 봐도 배의 기름 값도 안 되었고 미국이 준 경운기, 트랙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물가가 65%나 뛰었다. 그래도 북베트남보다 물자는 풍성하였고 생활은 윤택하였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군복, 군화와 양말, 철모를 착용하였지만 베트콩들은 폐타이어를 잘라 손으로 만든 샌달을 신었고, 군복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수는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1973년 한국군도 모두 철수를 했다. 비행장에서 돈 보따리를 들고 데리고 가라고 애걸복걸 하는 사람들, 그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철수부대, 그들은 화교들이었다. 월남은 2년 후 알다시피 공산화가 되고 그들은 남겨졌다. 그들에게 지옥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16. 화교와 중월 전쟁
베트남 화교사회는 Cantonese들이 주축을 이룬다. 최초의 대규모 중국인 이주는「퀸」왕조의 첫 번째 중국인 황제가 현재의 北베트남 지역을 정복했던 BC 3세기경이었다. 그 후 10세기동안 계속된 중국의 식민지 기간 동안,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이주민들을 받았으며 이러한 추세는 20세기까지 계속되어 1923 - 1951년간에도 약 120만 명의 중국인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했다.
그런 그들의 경제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974년 北베트남 정부는 南베트남에 있는 화교들이 식품, 섬유, 화학, 금속, 기계, 전기 산업의 80%를 지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南베트남 화교들은 도매업과 수출입무익에서 독점권을 가졌으며, 소매업의 50%이상을 지배했고 대기업 60개중 42개를 소유했다. 통일 후 이를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1975년 공산주의의 승리 이후 많은 南베트남지역의 화교기업가들은 매판자본가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재산은 몰수 되고 베트남 국적을 얻기 위한 화교들의 노력과 新사업분야에의 참여에 새로운 제약이 가해졌다.
1978-79년 동안 행해진「사회주의자로의 전환」캠페인은 화교(「Hoa」)공동체의 독립적 사업과 사회적 활동을 막았으며 사실상 모든 사업체를 폐쇄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베트남 관계 악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악화된 관계는 1979년의 중국국경침입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입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계속되는 화교의 脫베트남 추세는 베트남 내 중국인수를 급격히 줄어들게 했다. 1978년 초 약 23만 명의 화교들이 베트남을 떠나 중국으로 입국했으며, 또 다른 22만 명은 배편으로 동남아를 향해 떠났다.
베트남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한 1979년 화교의 인구는 87만정도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 화교의 절반가량인 80만 명이 베트남 난민에 합류해 베트남을 떠난 것이 되며, 이는 전체 베트남 난민 160만 명 중에서 절반을 베트남 화교가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일공산 정권의 탄압, 이로부터 자유를 찾아 베트남을 떠나 망망대해를 헤매는 소형목선을 탄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그러니까 바로 화교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중국에서도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아무튼 쩌런에 화교들은 전쟁의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한다. 1978년 중월 전쟁이 터지기 전의 당시의 신문보도를 보면 왜 중월 전쟁이 터졌으며 그 원인 제공은 바로 쩌런 지역의 화교들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어보자.
<中共-베트남 간의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를 몰아 온 베트남 거주 화교를 둘러싼 분쟁은 뿌리가 깊다. 베트남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지난 2천 여년에 걸친 적대와 불신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는 기원전 214년부터 서기 1420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중국이 베트남을 직접 지배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베트남의 화교 추방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中共-베트남 관계는 국교 단절 내지는 국지적인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中共은 베트남 국경지대에 지난 수개월 동안 병력을 집결, 국경지대 군사력을 일층 강화시키고 있고 이에 맞서 베트남 측도 全軍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한편, 1백만 정규군을 보강하기 위해 5백만 인원의 민병대 모집에 나섬으로써 양국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中共 부수상 등소평(鄧小平)은 최근 베트남이 화교를 계속 추방할 경우, 가혹한 보복 조치를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中共은 베트남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한 데 이어, 베트남 내 20여개 건설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던 1천여 명의 기술자를 철수시켰고, 베트남에서 추방된 화교는 이미 10만 5천명을 돌파, 앞으로도 30만 내지 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中共 측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등소평은 '베트남의 그 같은 무법적인 태도를 취한 이면에는 국제적인 요소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베트남이 소련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시사해 주목을 끌고 있다. 베트남-캄보디아 분쟁 당시 소련과 中共이 각각 배후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지원한 것과 관련, 이번 中共-베트남 관계의 악화도 이같은 中蘇대립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베트남의 비상령 발동과 때를 맞추어 베트남을 지지하는 소련이 南支那海에서 대규모 기동훈련을 개시함으로써, 中共을 더욱 자극했다.
현재 베트남에 거주하는 화교는 약 150만 명으로, 지난 78년 3월 하순부터 이들이 대대로 살아온 생활 터전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본국의 광서성(廣西省) 및 운남성(雲南省) 등지로 집단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대이동은 지금 현재도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유례없는 화교들의 대이동에 대해 中共은 베트남 당국이 탄압과 학대를 가함으로써 화교들을 강제 추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반해, 베트남은 中共의 주장은 날조된 것으로 화교들이 헛소문을 믿고 불법적으로 베트남을 떠나고 있다는 식으로 맞서고 있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中共-베트남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왔는데,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에서 中共의 캄보디아 지원으로 이러한 관계 악화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베트남 화교들의 집단 출국 사태가 유발되었다. 집단 출국의 직접 동기는 지난 3월부터 발효된 新경제정책에 따른 개인사업의 폐지 정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베트남 당국은 지난 3월 24일, 화교들에 의해 오랫동안 장악되어 온 이른바 '부르주아 상업'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화교들에게도 일반 베트남 도시민들과 더불어 시골의 新경제 개발지역으로 강제 이주, 노동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다. 뒤이어 개인 상품 등의 재산을 강제로 압수했는데, 이에 반발한 일부 화교들이 사이공 등지에서 데모를 벌이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베트남'의 재건을 위해 시골로 이주하여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국외로 떠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을 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당국은 개인 상업의 금지 조치는 화교들뿐만 아니라, 모든 베트남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여기에 해당되는 피해자의 90% 이상이 화교들이다. 中共은 베트남 당국의 이같은 사기업 국유화 조치에 반발한 화교 중 상당수가 피살, 혹은 체포되었다고 비난하면서 화교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는데, 北京의 외교 관측통들은 이미 수많은 화교들이 캄보디아 국경지대의 新경제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번 中共-베트남 관계 악화를 초래한 화교 문제에 대해, 中共은 특히 동남아 각국의 중국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 中共은 이미 동남아 각국과 화교들에 대한 법적지위, 즉 동남아 각국이 화교들의 귀화를 강요하지 않으며 그들의 법적지위를 보장한다는 협정을 맺어 왔다.
만일 이번 베트남과의 화교 분쟁에서 中共이 그 보호자 노릇을 하는데 실패한다면, 中共은 非공산권 뿐만 아니라 공산권 內의 화교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 현재 동남아에는 약 1천 4백 만 명의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非공산 지역의 분포 상황을 보면 말레이시아에 4백만, 태국에 3백만, 인도네시아에 3백만, 필리핀에 2백만, 싱가포르에 150만, 버마에 50만 명이 각각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이 귀화했으나 정작 동화는 거부하고 있으며, 理財에 밝아 각국의 商權을 장악하고 있다.
소수집단의 상권 장악으로 동남아 각국에서 이들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베트남의 경우, 사이공 市의 촐론(쩌런)가에만 화교가 1백 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소유기업체만 3만개에 이르는 등, 남베트남 패망 이전까지 현지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은 베트남이 적화된 후 베트남 거주 화교들의 국적선택의 자유 및 이들의 이중국적 금지 등의 협상을 벌여왔는데, 베트남은 지난 1955년에 조인된 中共-베트남 간 협정으로 베트남 내 화교들이 당시의 월맹 시민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가 부여됐으며, 남베트남 거주 화교들의 태반이 이미 베트남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지적, 화교 문제 분쟁을 양국간 협상으로 타결하자고 요구해왔다.中共은 이번 화교 분쟁이 전쟁 상태로 발전할 경우, 소련의 베트남 지원을 위한 개입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는 피하려 하겠지만, 홍콩의 아시아 문제 전문가들은 좀처럼 사태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결국 전쟁을 한다. 이를 중·월 전쟁이라고 한다. 1978년 초부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분쟁이 일어난 데 이어 5월에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의 대량 추방을 둘러싸고 중공·베트남 공산정권이 대립하였으며, 1978년 말에는 중국 윈난성[雲南省] 및 광시성[廣西省]의 국경지대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였다. 중공측은 이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었는데,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은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였다. 중공 당국은 이것을 자위반격(自衛反擊)의 한정전쟁(限定戰爭)이라고 발표하였다.
캄보디아에 많은 병력을 보내고 있는 베트남도 이에 응전, 베트남 북서부의 지방도시 및 요충지대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원래 중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고, 그것을 소련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 비난하며, 소련·베트남의 ‘대소패권주의(大小覇權主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중공-베트남 전쟁은 중·소 대립의 축도(縮圖)라고도 일컬어졌다.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겪었으나 국경 부근의 베트남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방도시를 제압한 다음, 3월 5일 자위반격의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명분으로 철수를 개시, 3월 6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부터 중공 ·베트남은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주장하는 중공과 이것을 거부하는 베트남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 교섭의 주목적인 국경선 확정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국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이 전쟁 이후 베트남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국제문제화 하였다. 양국은 1988년 1월 국경전쟁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南沙群島]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양국 분쟁은 1989년 9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지금 순항중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 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남지나해에 잠자고 있는 거대한 자원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지나해의 영토를 둘러싼 소규모 전투는 중국과 베트남사이에서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베트남은 몇 년 전부터 군사력 특히 해양 전력의 강화에 임하고 있다. 우선 항공 전력의 근대화로서 베트남 공군은 러시아로부터 스호이 27 전투기를 12기를 구입했다. 거기에 계속해, 보다 강력한 스호이 30 MK2 전투기 24기를 구입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해군 역시, 러시아로부터 킬로 636형 잠수함 2척을 구입하고, 게파르드 3.9 프리게이트 2척을 구입하고 그 외에도 8척의 소형 정을 구입했다. 양국의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온 적대감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쩌런에 화교들이 유대인을 닮았다 싶다. 스페인이 이슬람으로부터 다시 기독교로 회복이 된 후 스페인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대거 추방했었다. 유럽게 가보면 알지만 오래된 왕궁이나 역사적 장소를 가면 대개 그 근처에 유대인 마을이 존재한다. 프라하도 스페인의 코르도바 등등 어디를 가든 그렇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이재에 밝아 왕족의 회계관리나 의사등 역할을 해 돈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인플레가 극심해지자 잘 사는 이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고 있지 않은가. 광동 인들은 어디를 가나 알아준다. 등소평은 당시 화교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시골로 추방을 당할 처지에 이르자 분개했었다. 지금도그 때처럼 민족적 의식이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민족은 바로 또 역사를 의미한다.
우리는 쩌런의 빙떠이 시장에서 자유시간을 갖았다. 나는 모카 커피를 갈아 봉지에 담았다. 밀봉까지 해주는 센스, 가격으로야 엄청 싼데 과연 그 특유의 맛을 내줄지는 잘 모르겠다. 일행들은 캐쉬너트와 악세서리를 샀다. 버섯이 넘쳐나는데 도시 알 수가 없어서 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 시절 이 시장은 저 아래 메콩델타로부터 큰 바다에 이르는 수 만 가지 한약재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다. 지금도 여전히 방대하다 할 것이지만 나는 암만해도 그 시절만큼은 명성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싶다. 화교들, 그들을 쫓을 재간은 이 세상 어느 천지에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