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망의 등장 王莽 登場
투후 김일제의 사후 死後, 70여 년이 경과 되었다.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이 투후 직을 역임할 시, 한나라(漢)는 황제들의 수명이 짧아 황권 黃權이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어린 황제들이 황위에 앉아 있으니 황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조용히 나타난 실력자가 있으니, 왕망(王莽)이다
왕망은 중국 역사서에서는 '찬탈자 簒奪者'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의 이복동생, 즉 고모가 한나라의 황후가 되면서 그 힘을 빌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후, 한의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 후,
기원 9년.
‘신 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역성혁명 易姓革命이다.
황제가 ‘유씨’ 劉氏에서 ‘왕씨’ 王氏로 바뀐 것이다.
대륙의 중원에 ‘한’ 漢 나라가 사라지고 ‘신’ 新 나라가 들어선 것이다.
그가 황제로 재위한 동안의 자료는 빈약한데, 그가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왕망은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다.
화폐를 개혁하고 서민을 위하여 정전법 井田法을 시행했으며, 노예거래를 정지시켰다.
정전법 井田法 :
고대 중국의 하 夏. 은 殷. 주 周 시대의 토지제도.
사방 1리 里의 땅을 ‘井’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여덟 농가에게 나누어 맡기고, 그 중앙의 땅은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음.
(가구당 경작 면적은 약 5천 평, 가량으로 추정됨.)
그는 유능한 정치가로서 독실한 유학자 儒學者였으며 법을 어겼다고 하여 아들과 손자를 처형할 정도로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의 대외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만 아니었더라면 그가 세운 신나라는 한동안 더 지속 될 수도 있었다.
황하가 범람하는 등 여러 번에 걸친 수해와 인구감소· 기근· 전염병 등으로 사회불안이 증가하면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그의 제국도 몰락했다.
수 차례에 걸친 수해로 백성들의 불만이 증폭되자 농민 봉기가 터지면서 사람들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농민 봉기는 그 규모가 점차 커졌으며, 이러한 농민군의 하나인 적미군 赤眉軍은
서기 18년,
규모가 커져 왕망의 관군을 격파했다.
수도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기 25년 10월 4일.
반란군은 수도의 동쪽 성벽을 뚫고 침공해왔다.
몇 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반란군들은 저녁 무렵 성벽에서 약 15리 떨어진 황궁에 도착했다.
그다음 날인 10월 5일 아침,
장안의 백성들마저 반란군에 가세하여 황궁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제왕의 인장(印章)을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 황궁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그 다음 날, 10월 6일 새벽에 그는 전차(戰車)로 미앙궁(未央宮)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1,000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들과 함께 마지막 사투 死鬪를 벌였다.
그들은 화살촉이 다 떨어질 때까지 수비 했고, 그 후에는 단검을 뽑아 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오후 늦게 반란군이 미앙궁으로 몰려들었고, 왕망은 측근과 함께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4. 왕망과 투후와의 관계
왕망은 투후 김당과는 이종 사촌지간이다.
어머니들이 한 자매이다.
이종사촌 姨從四寸 :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유전인자 遺傳因子는 부모와 형제 간이 가장 유사하다.
부모 형제 다음으로 유사한 군집체 群集體는 이종사촌이다.
친가 親家의 사촌 四寸은 이종육촌 姨從六村 다음 차례다.
* ‘이종육촌’이란 없는 단어라, 필자가 임의로 표현하는 단어다. 이 한 단면만 봐도 유교 사회에서는 외가 外家 쪽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친가 親家는 종형제 從兄弟, 재종형제 再從兄弟, 삼종형제 三從兄弟, 그렇게 관계를 호칭한다. 그 다음, 촌수 寸數가 더 멀어지면, 열촌, 열 두촌, ..., 끝없이 촌수가 이어지다가 드디어는 일가 一家, 종씨 宗氏라는 용어까지 동원하여 상호 관계를 들먹이는데, 외가 쪽은 사촌이 끝이다. 더 이상은 호칭 呼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 사회에서는 외가 쪽은 이종사촌, 더 이상은 만날 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인자는 친족보다 외가 쪽이 더 닮아있다.
어린애를 보고, ‘외탁’을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부계 父系의 친가 親家보다, 모계 母系의 외가 外家 쪽을 많이 닮았다는 뜻이다.
만약, 불운 不運하게 불치 不治의 병에 걸려 신체 어느 부위의 줄기세포가 필요하게 되어, 자신과 가장 유사한 유인인자를 찾으려면, 부모형제 외에는 친족 親族보다는 외가 外家쪽에서 먼저 찾아보는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체격이나 신체 등의 외형 外形과 성격 性格도 사촌보다는 이종사촌끼리 더 닮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투나 생활 관습은 외가 쪽보다는 사촌이나 친족이 더 유사하다.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주 만나고, 서로 가까운 지역에서 생활하니까 그렇다.
인류 진화 과정의 초기에는 모계사회 母系社會가 형성되었고, 오랜 기간을 이어져 왔었는데, 그런 연유다.
오랜 인류 역사 중에 부계 父系 사회가 형성된 시기는 불과 오 천년이 채 안된다.
일백 만 년 중에 겨우 오 천년이라~, 잔돈이나 우수리에 불과한 시간이다.
왕망과 김당.
둘은 이종사촌이라,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며 학문도 같이 배우며, 호연지기 浩然知己를 키운 가까운 사이라 성인이 된 후 조정에 진출하고서도 서로가 인척이자 정치적인 동지로서의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왕망이 역성혁명 易姓革命으로 전한 前漢을 무너뜨리고, 신 新을 건국하는데 투후 김당이 일등 공신인 것은 불문가지 不問可知다.
따라서,
김당 투후의 세력이 30여 년간 한 漢과 신 新의 황궁에서 요직 要職을 차지하고 위세를 떨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한 신나라가 몰락하니, 오랫동안 신나라 권력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던 김씨들과 김당 투후로써는 뒷감당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