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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꼭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거나 온전히 믿지 못하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과거 육체의 타락한 모습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교감이 없이 나 스스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자체가 교만이요 무지한 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웃이 혹 아직 교만하고 무지하여 육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여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몰랐었을 때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해서 육체의 죄성과 악성 그리고 독성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 여전히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이 싸우게 됩니다(롬7장23절). 성도에게 있어서의 죄성은, 말씀과 성령께서 붙잡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지 않는 것뿐입니다. 말씀과 성령께서 나를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언제든지 육체의 법에 따르게 되어 있고 범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롬7장). 그래서 내 형제를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며 우리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내가 죄인임을 밝혀주는 거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지, 성경은 외우거나 읽거나 그냥 공부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공부나 연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만큼 큰 죄인인가를 알아가는 수단입니다. 죄인임을 깨닫는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크게 보이고 긍휼을 구하며 매일매일 주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는 주께 가까이 하지 않고 교만하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말뿐인 성도, 집사, 장로, 목사가 되고 맙니다. 말씀으로 나 자신이 죄인임을 매일매일 깨닫는 자가 진정 ‘복’있는 자요, 은혜와 사랑을 느끼는 자요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
26장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을 그 자손에게 이루어 주시려고 이삭에게 계승하시고, 그리고 그를 보호하여 복을 받게 하시는 내용인데, 1절부터 5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아비의 언약을 계승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도 흉년이 들어 이삭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1절).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고 하십니다.
당시 애굽은 넓은 평지여서 농사하기에 좋고 살기에도 좋은 땅이었고, 가나안 땅은 산악지였을 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기에는 힘든 땅과 기후 여건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첫 흉년 때에 아브라함은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고, 당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고 많은 재물을 바로로부터 얻었습니다(창12:10,20).
흉년과 기근은 인간의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먹는 것과 관계되는데, 이로 인해 먹는 것이 끊기므로 먹을 것이 풍부한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언약 백성에게 흉년과 기근을 주실까요?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언약 자손에게 어려움을 주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하시는 과정이며 섭리입니다. 즉,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오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지시하신 땅에 거주하라고 하시며 그 땅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복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3절). 이는 복의 계승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삭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시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4~5절)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삭이 약속의 땅에 거주하면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시며 이 모든 땅을 이삭의 자손들에게 주리니 이삭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4절). 이유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다고 하십니다(5절).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이삭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거주하는 것이 이삭의 의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신가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의 순종에 의한 복과 이삭과의 연결성입니다. 즉 무엇으로 연결되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이 두 질문의 답이 해결되어야만 본문 해석이 올바르게 되고 또한 앞으로의 내용 전개에서도 일관성있고 직선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첫째, 이삭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거주하는 것이 이삭의 의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신가입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머물며 가축과 재물 그리고 평안의 복을 누린 것이 아브라함의 능력이었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인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하나님 스스로 지키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그리고 풍성한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으로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성취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믿게 되었고 그리고 여호와께서 믿게 하시니 그가 순종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거주하게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순종에 의한 복과 이삭과의 연결성입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의지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죽은 몸에서 불가능한 잉태를 가능하게 해주심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순종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을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계승되게 하시며 또한 야곱으로 이어지도록 하셔서 열조의 조상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 세우실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6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이삭과 리브가가 도리어 그랄 왕에게 보호를 받는 내용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경외하는 것을 날마다 보고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랄에서 거주합니다(6절). 그러나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하는 중에 그곳 사람들의 아내에 대한 물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내 리브가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입니다(7절). 그러다가 이삭이 그랄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더니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보게 됩니다(8절).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지난 밤에 본 것을 말할 때에 이삭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리브가로 인해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서였다고 변명을 하고(9절), 이를 들은 아비멜렉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느니라”고 하고서는(10절), 백성들에게 이삭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고 명합니다(11절).
이삭의 범죄에도 아비멜렉은 이삭을 보호합니다. 이삭은 여호와의 언약을 간직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불신앙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비멜렉은 이삭을 보호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창20:3,21:22 참조).
12절부터 22절까지는 이삭이 복을 받아 그랄을 떠나 르호붓에 거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므로 그 땅에서 백배의 소출을 얻게 되고 거부가 됩니다(12,13절). 이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겪었던 사건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왕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으나 바로에게서 많은 재물을 받아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과 이삭이 애굽이나 그랄에서 범죄에도 불구하고 거부가 되며 보호를 받게 될까요?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삶은 자신들의 뜻과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복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의 삶은 마찬가지입니다.
거부가 된 이삭은 그 땅의 사람들로부터 시기심을 일으켰고 이에 우물 사건으로 다툼이 일어납니다(14,15절). 이에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떠나기를 원했고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16,17절)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18절).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 땅의 원주민들로부터 시기심을 일으켰고 이 시기심은 바로 이삭이 가지고 있던 우물을 막고 흙으로 매우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아비멜렉이 중재함으로 이삭은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류합니다. 이삭은 그의 종들로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는데(19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며 자신들의 것이라고 반복하지만(20,21절),
마침내 이삭이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절)고 고백합니다.
이는, 계속되는 다툼으로 우물을 얻지 못하다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물도 주시고 지경도 넓게 해주셔서 번성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세우신 언약에 근거하여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이 여호와께 언약을 받고 단을 쌓는 내용입니다.
이삭이 거기를 떠나 브엘세바로 갑니다(23절). 이 브엘세바는 그랄에서 동남쪽에 있는 지역으로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맹세한 우물이 있는 곳인데(창21:32), 그 밤에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르시기를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24절).
브엘세바로 이동한 이삭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에게 추방을 당하여 새로운 지역 브엘세바로 올라온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이같이 자신을 소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브엘세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을 호통치며 서로 맹세까지 하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을 보호하며 언약을 이룬 장소인데 그것을 기억하신다는 뜻이며, 그래서 아브라함을 보호하신 것처럼 이삭도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이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하나님 자신의 소개는 이삭으로 하여금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브엘세바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삭에게 언약을 하시는 것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이삭에게 언약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번성하게 하신다고 언약을 하셨으니까 반드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이 번성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아브라함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더 나아가서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말씀으로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신 여호와께서 스스로 그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삭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즉 언약대로 이루시는 믿음에 의한 제단이며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우물을 팝니다(25절).
26절부터 33절까지는 이삭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를 위한 조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때에 아브람함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며 복주시는 것을 보고 확인한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친구까지 데리고 와서 이삭을 찾아오는데(26절), 이삭은 그들에게 자신을 미워하여 추방시켜 놓고서 어찌하여 왔느냐며 합니다(27절).
이들은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며 평화 협정 제의를 합니다(28,29절). 한 나라의 왕이 한 사람의 개인에게 찾아와 굽히며 하는 제안이며 약자와 강자가 바뀌었습니다. 이삭이 강자이며 이삭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군대장관과 친구까지 대동한 아비멜렉의 화친 요청을 수락한 이삭은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서(30절) 맹세한 후에 아비멜렉은 평안히 돌아갑니다(31절). 자신들이 온 목적, 즉 이삭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므로 평안히 돌아간 것입니다. 그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그들이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 나왔다고 이삭에게 보고를 합니다(32절). 이에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라고 불렀으니 그러므로 그 성읍의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라고 합니다(33절).
34절과 35절 말씀은 에서의 아내 얻음과 이로 인한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의 내용입니다.
왜 근심이 되었는지 앞으로의 역사에서 말씀하시고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얻은 아내는 헷 족속인데 이 족속은 노아의 자손 가운데서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낳은 아들 헷의 후손을 말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창9:25). 그러한 후손이 헷 족속인데, 그 족속의 딸을 에서가 아내로 취한 것은 그가 언약 자손의 유업을 계승받을 수 없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일에 에서의 후손은 에돔 족속을 이루어서 이스라엘 족속을 괴롭히는 자가 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