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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건강 가정 1 - 탕자 집이 잔치 가정으로(눅 15;11-32. 2016.5.1)
탕자 집이 잔치 가정으로
눅 15;11-32.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에 비상이 걸린 가정 실종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현대 사회 문제 연구소에서 10대 소년 소녀들의 의식 구조를 조사하여 발표한 기사가 있습니다.
제1질문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답 나는 공부의 노예입니다.
제2질문 가정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답 숨이 막히는 곳입니다.
제3질문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답 전쟁이라도 나서 싹 다 타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제4질문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답 이중인격자입니다.
제5질문 학교 선생님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답 모두 이중인겨자입니다.
작년 초등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한 학생이 쓴 시입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
학원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먹어
눈깔을 씹어 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 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이 시가 표현의 자유를 넘었다는 분쟁을 일으킨 시입니다. 끔찍하다 못 해 전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날 가정을 대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탕자의 집은 두 가지 안 좋은 것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1. 아픔이 있는 가정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왜 나갔는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다 챙겨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즐기고 싶어서 나갔습니다. 또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형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어머니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감싸주는 어머니가 없는 데 형은 항상 꾸중만 합니다. 못 살게 굴었습니다.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부르고 안에서는 내밀었습니다. 오늘 날 가정이 그렇습니다. 밖에는 좋은 것이 많고 가정에 들어오면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탕자가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위기가 다가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구 문제가 위기라고 합니다. 식량 위기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하자원 고갈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 공해로 지구는 50년을 견디지 못 할 것일가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핵무기 위기를 말하며 지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가정위기입니다.”
탕자의 가정에 어머니 이야기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가출하였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 자체가 아픔이 있는 가정입니다. 감싸주고 가출을 못 하게 하고 사랑으로 이끌어줄 어머니가 없습니다. 탕자의 가정은 어머니가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픔이 없는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큰 아픔이냐 작은 아픔이냐의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고 크건 가정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사냥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사냥하는 사이에 조금 떨어져 있는 아들을 맹수가 공격하여 죽였습니다. 죽은 아들 시신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며 기절할 아내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둑어둑할 때에 돌아와 시신을 밖에 두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맛있는 짐승을 사냥하여 왔는 데 요리하는 조건이 있다네요. 동네에 나가서 아픔이 없는 집 냄비를 빌려 와요. 그런 냄비에 요리하여야 맛이 있다니요.”
아내는 동네 집집을 돌면서 아픔이 없는 집을 찾아 다녔습니다. 아내는 지친 몸, 빈 손으로 집으로 와서 남편에게 푸념하며 말했습니다.
“아픔이 없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냄비를 빌려 오지 못 하였어요.”
그 때 남편은 아들 시신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 하여 아들이 맹수에 물려 죽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픔이 없는 집은 이 세상에 한 가정도 없다는 교훈입니다. 탕자의 가정도 어머니가 없는 아픔, 탕자가 속썩이는 아픔, 집 나가지 않은 큰 아들도 아버지를 괴롭히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없습니다. 탕자가 나갔습니다.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고 대들고 있습니다. 탕자의 가정은 아픔이 있는 가정입니다.
2. 탕자가 있는 가정
탕자의 가정은 아픔이 있었고 탕자가 있는 가정입니다. 이스라엘 율법은 분명합니다. 아들이 둘일 경우에는 재산의 3분의 2를 큰 아들에게 주고, 둘째 아들에게는 3분의 1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자기에게 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방탕하였습니다. 허랑방탕하였습니다. 낭비하였습니다. 다 없앴습니다. 돈도 없는 데 흉년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이었습니다. 눈위에 서리가 내렸습니다. 탕자도 아픔이 가중되고 있었고, 아버지도 날이 갈 수록 상처가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몸에 중심은 어디입니까?
심장입니까? 배꼽입니까? 눈입니까? 입입니까? 탈무드는 말합니다. 아픈 부분이 중심입니다. 모든 신경이 아픈 곳으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목사입니까? 장로입니까? 돈많은 사람입니까? 말 잘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아픈 성도가 중심입니다. 그 분을 위하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어머니입니까? 큰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탕자가 중심입니다. 가정 식구 가운데 한 명이 병원에 입원하면 입원한 식구가 중심입니다. 한 식구가 교도소에 들어가면 온 식구의 관심은 그에게 쏠리게 됩니다.
탕자의 가정은 두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아픔과 탕자가 생긴 아픔입니다. 상처 투성이 가정입니다. 현대 가정도 그렇습니다.
회복이 있는 가정
아버지는 가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준비하여 놓고 탕자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그 즉석에서 갑자기 제일 좋은 옷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탕자가 돌아 오자 금은방으로 가서 가락지를 사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오자 말자 가락지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가락지는 끼울 수 없습니다. 큰 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울 수 없습니다. 가락지는 손가락에 꼭 맞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락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는 신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탕자 아들의 발 크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가락지 같습니다. 작은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습니다. 큰 신발을 거치럭이며 끌고 다닐 수 없습니다. 신은 발에 꼭 맞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탕자 아들의 발 크기에 맞추어 신발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탕자가 돌아 오자 말자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씻긴 후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새로 신겼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갑자기 살진 송아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탕자 아들이 돌아 올 줄 믿고 송아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잔치할 송아지입니다. 살이 포동포동 찌도록 잘 기르고 있는 분위기를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고 준비하고 있었던 아버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가정에 가정이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고 준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가정은 회복됩니다.
라합 가정
라합 가정은 파괴되어 있는 가정입니다. 라합은 술집 여자입니다. 기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녀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 가정에 이런 여자가 생겼다면 이미 아픔이 있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있어서 정상적인 가정은 아닙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 성안에서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술마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군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들어 왔을 때 가장 가장하기 좋은 곳이 술집이었습니다. 술집에 앉아서 여리고 성 여론을 들으며 정탐하기 좋았습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의 집에 숨었습니다. 정탐군 스파이가 여리고 성에 들어 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라합의 집에 군사들이 와서 정탐군을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라합이 이 때 정탐군을 숨겨주면서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는 홍해를 가르고 온 것,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전쟁에 이긴 것을 다 알고 있노라. 여리고 사람들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이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간담이 녹고 있노라. 마음도 녹았고 정신을 잃었노라. 이 땅은 당신들의 땅이 될 것을 믿나이다.”
라합 가정은 파괴된 가정이었지만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점령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라합 가정만 모두 살았습니다.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 2;18)
가족 전체가 회복되었습니다. 후에 라합은 이스라엘 남자 살몬과 결혼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왔습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5여자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하의 가문이 최고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기생의 가문이 예수님 족보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가정의 회복을 믿고 준비하고 기다린 라합 가정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탕자가 가정을 그리워 하게 된 동기
탕자가 집으로 돌아 오게 된 동기가 본문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가정이 어떤 가정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갑을이 없는 가정
탕자가 집을 나가서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허랑방탕하였습니다. 게다가 흉년이 들었습니다.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기르며 주염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돼지 주인에 붙어 살았습니다. 상하 관계, 갑을 관계로 살면서 가정이 그리웠습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4-15)
세상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갑을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그런 속에서 탕자는 붙어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무 차별이 없는 가정이 그리웠습니다.
어느 가정에 4형제인 데 3형제가 서울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그 실력에 모자라서 다른 대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집안에서 무시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중에 외톨이가 되어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영국 여왕이 집으로 돌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남편이 문앞에서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여왕입니다.”
다시 남편이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영국 왕입니다.”
남편은 다시 물었습니다.
“누구십니까?”
여왕은 눈치를 채고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입니다.”
그 때 문을 열었습니다. 국가의 여왕이라도 가정으로 돌아 오면 아내입니다.
2. 주는 자가 있는 가정
탕자가 집을 그리워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가정은 주는 자가 있습니다. 조건없이 주는 자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물건을 사고 팔지 않습니다. 돈을 주면서 받으면서 차용증서가 없습니다. 탕자는 이렇게 한탄을 합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무조건 채워줌이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3. 휴식이 있는 가정
탕자는 쉬고 싶었습니다. 편안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세상은 전쟁터같습니다. 피곤합니다. 지치기 쉬운 광야입니다. 사기꾼들이 날뛰고 있고, 생존경쟁에서 지면 죽기에 분주한 곳이 세상입니다. 마음도, 몸도 피곤한 곳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가정이 그런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스트레스가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어떤 직장인은 일감을 결코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철저히 회사에서만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 와서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합니다. 집안에서까지 직장일의 스트레스를 나누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에는 책이 들여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책을 빼앗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안방은 도서실이 아니예요. 안 방에 들어 올 때는 책을 두고 들어오세요. 안방은 쉬기만 하는 곳이예요.”
탕자는 휴식이 있는 곳을 그리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정으로 들어 왔습니다.
4. 품꾼처럼 사는 가정
탕자가 집을 나갈 때는 그 집에 아들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당당한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떠나 살면서 보니 죄를 지은 것을 느꼈습니다. 아들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품꾼의 신분으로 가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8-19)
품꾼은 섬기기만 합니다. 대우만 받으려던 탕자가 이제는 품꿈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서로 섬기려는 품꿈만 있는 가정이 그리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정을 그리워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된 동기가 바로 원한때문이었습니다. 쿠르트 교수가 <유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명 학살하게 된 동기를 명백하게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유대인에 대한 원한 때문입니다.
(1) 어머니와 유대인의 관계입니다.
히틀러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습니다. 어머니 클라크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날마다 집에 와서 어머니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히틀러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치료하던 의사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의사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원한이 사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미술 선생님과 관계입니다.
히틀러는 처음에는 미술가가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일류 미술가를 뺨칠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 몇 점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엔나로 가서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1907년 히틀러는 미술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불합격하였습니다. 이듬해 재시험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불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합격시킨 시험관 7명중에 4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을 증오하고 있었는 데 그 미움의 불씨에 휘발유를 끼어얹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를 낙방시킨 유대인은 보복을 받으리라.”
(3) 연애 관계입니다.
비엔나에서 공부하는 동안 히틀러는 속옷 모델을 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시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유치하다고 비웃었습니다. 히틀러는 그 여자를 심하게 폭행을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사업가 청년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유대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원한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 놈 목을 졸라야지.”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 말자 원한을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무서운 민족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역사는 묘한 것입니다. 가정 파괴가 대학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서 소련 사람 2000만을 학살하였습니다.
미국 사람 350만을 죽였습니다.
유대인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폴란드 사람 300만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 500만도 죽였습니다. 모두 5천만명을 죽였습니다. 끔찍합니다. 가정 교육이 없이 가정이 삐뚜루된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큰 골칫거리입니다.
키플링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오! 어머니! 오! 어머니!
만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하면
우리 어머니께서도 그 밑에 계셨을 거야. 아멘.
시인 릴케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가슴속 작은 고동소리까지도 들으시네.”
자기 중심적이 되어 품꾼이 되기 싫다는 것이 현대 가정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내가 남편을 청산가리를 타서 먹여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음료수를 갖다 준 이는 어린 자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요즈음 가정입니다.
달팽이중에 어떤 달팽이는 자기 안에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달팽이는 자기 어머니를 뜯어 먹으며 자랍니다. 자녀에게 몸을 주는 어머니 달팽이입니다.
어느 가정에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을 의사만드느라고 논밭을 팔았습니다. 미국 유학가서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하여 조금 남은 땅도 다 팔아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가 잘 살고 있습니다. 셋째 아들은 해외 파견근무하러 나갔습니다. 빈 털털이가 된 부모는 이 집 저 집 셋방살이하면서 종이를 주워 근근히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늘의 가정입니다.
막스 베버 독일 신학자는 로마 제국이 멸망된 이유중에 하나를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노인을 학대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외쳤습니다.
“노인들을 다리위에서 떨미어 죽여 버려라.”
그 사회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센 머리 앞에 머리를 숙이고 산 이스라엘은 축복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삐둘어진 둥지에서는 온전한 달걀을 기대할 수 없다.”
서양의 속담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돌아 오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