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118호(2023.11)와 "그리운 금강산"으로 간다.
그리운 금강산
- 고성 금강산 화암사, 신선대
차용국
일주문 현판에 하얀 글씨로 ‘금강산 화암사金剛山禾巖寺라고 쓰여있다. 동행한 지인이 여기가 금강산 남쪽 끝자락이며, 설악산 북쪽 끝자락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끝자락’이란 말에 순간 멈칫했다.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나온 반사적 반응이다. 언어는 사람의 몸과 정신을 아우르는 것이어서,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상을 표상表象한다. 몸이 감지하고 반응하는 무의식의 언술에 비친 빛과 어둠의 2중주二重奏는 애잔하다.
무의식에서 자라는 경계의 언어 ‘끝자락’에는 골 깊은 절망과 분노가 어려 있다. 그 소리가 언제 우리 몸에 들어와 발아해서 똬리를 틀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괜히 먼 역사를 뒤적여 답변을 찾아내려고 애쓸 일은 아닐 듯싶다. 대략 75년 전, 한반도 허리를 두 동강이로 싹둑 베어버린 칼자국이 붉은 선을 그어 길을 막아버린 때라고 말하면 경솔한 걸까?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서 실체가 없는 관념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어를 싫어해서 금강산이든 설악산이든 ‘끝자락’에 서 있고 싶지 않다. 나는 에둘러서 ‘끝자락’을 ‘첫자락’으로 바꿨다. 여기가 금강산 남쪽 ‘첫자락’이며, 설악산 북쪽 ‘첫자락’이라고. 지금 금강산과 설악산 경계에 서 있고, 첫발을 떼서 금강산 ‘첫자락’으로 들어간다고.
가을이면, 일주문에서 화암사에 이르는 길과 신선대(성인대)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단풍이 빼어나 찾아오는 산객으로 북적거리는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절에 화암사는 청단풍을 배경으로 고요하다. 지금 화암사는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일주문과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남아서 풍경과 설화와 전설이 더해진 정취를 느끼기에 손색遜色 없다.
신라시대(769년, 혜공왕 5년) 진표율사眞表律使가 화엄사華嚴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 고찰古刹은 여러 번 화재로 자리를 옮겨가며 다시 짓기를 거듭했다.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로, 다시 화암사禾巖寺로 바꾸었다. 사찰의 전언에 따르면, 이삭수穗 자 변으로 쓰는 벼화禾 자는 불화火 자와 동음이며, 또한 이삭수穗 자는 물수水 자와 동음이므로 물水로써 불火을 막는다는 뜻으로 화암사禾巖寺라 부른다고 한다. 얼른 들어서 이해될 만큼 쉽지는 않다. 5번 정도의 화재를 겪었던 선례에 비추어 화재로부터 사찰을 보호하려는 염원의 발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듯싶다. 남은 궁금증은 신선대 능선을 오르며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암봉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할 듯싶다. 그들이 전하는 설화와 전설을 통해 그 사연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니.
신선대 능선은 일주문과 화암사 사이의 산길이다. 잠깐 올랐을까 싶은데 큰 바위가 시야를 꽉 채운다. 타원형의 커다란 바위 위에 다른 바위가 상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얹혀 있다. 사람들은 달걀 같다고도 하고, 왕관을 쓴 모습 같다고도 하며, 볏가리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바위는 제자리에서 제모습 그대로 서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은 다 다르다.
사람의 눈은 마음과 연결되어서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이 연합하여 만들어 낸 연상聯想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연상은 하나의 관념이나 대상이 다른 관념이나 대상으로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개별적인 심리 현상이다. 어찌 내가 보고 믿는 것만 진실이고, 남이 보고 믿는 것은 다 거짓일 수 있으랴. 그래도 개별 연상이 모여 집단 인식과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니, 이 바위를 화암禾岩 또는 수穗바위(쌀바위)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듯싶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 밑에 위치한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이 시주를 청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스님 두 분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 때 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얘기하자, 잠에서 깬 스님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수바위에 올라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신기하게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고 그 이후로는 식량 걱정 없이 편안히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화암사를 찾게 된 한 객승이 화암사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아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 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에 다음 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을 흔들었더니 쌀이 나왔던 구멍에서 피가 나왔고 객승의 욕심에 산신의 노여움 때문인지 그 후로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현지 수바위(쌀바위) 안내표지문
수바위 전설은 표면적으로 사람의 덧없는 과욕을 경계하는 교훈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듯싶다. 이 바위 윗면에는 물이 고여있는 둘레 5미터 정도의 웅덩이가 있다. 가뭄이 들 때, 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온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군은 이 바위가 볏가리처럼 보여 엄청 많은 병력이 지키는 곳이라며 물러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더하여 수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길 옆에 여러 바위를 겹겹으로 쌓아 올린 듯한 바위를 볼 수 있다. ‘시루떡바위’라 한다. 이 바위를 바라보면서 시루떡을 생각하고 상상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그들의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금강산 첫자락에서 터를 일구고 신선대를 오르내리며 자연의 풍경마다 쌀米을 연상하며 살아낸 그들은.
신선대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한쪽에 구조 헬기장을 갖추고 있는 널찍한 평지다. 연못 있는 천상의 정원에 기묘한 바위를 조화롭게 배치한 낙원처럼 보인다. 너럭바위로 불리는 평평한 바위 위에 욕조 크기의 웅덩이가 2개 있고, 바위에 새겨진 고랑을 따라 물이 흘러 고여있다. 천상의 선녀들이 달 밝은 밤에 찾아와 이 고인물로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은 퍽 낭만적으로 들리고, 또 하나의 전설이 인간적인 염원의 울림으로 전해진다.
아주 먼 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일명 신선대(神仙臺) 성인 바위는 앞으로 올 어진 이가 탈 말바위를 거쳐 토성면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황산에서 맥의 끝을 맺는다. 아주 먼 옛날 조씨 성을 가진 나그네가 모닥불을 피우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모닥불에 굽고 있던 조약돌을 호랑이 입에다 집어넣었고 이에 호랑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뒹굴다 돌만 뱉어 버리고 죽으니 뱉어 버린 돌의 흔적 일부가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훗날 죽은 호랑이는 토성면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성황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현지 신선대(성인대) 안내표지문
신선대 거북이를 닮은 바위는 미시령을 향해 기어가는 형상이라고 하니 거북이 머리 방향으로 시선을 쭉 뻗어나가면 미시령에 닿을 것이다. 정상부 남쪽에 있는 두 개의 입석은 촛대를 닮았다고도 하고, 성인이 서 있는 모습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시선은 남쪽을 멀리 본다. 흐린 날 정상에서 사람의 시선은 두꺼운 구름을 젖히며 밖으로 내달리지 못한다. 동행한 지인이 맑은 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울산바위 풍경이 일품이라고 귀띔한다. 어찌하랴, 지금 그 일품 풍경을 볼 수 없으니.
나는 금강산 첫자락 신선대에 올라 그간의 금강산에 대한 오해를 풀며 사죄한다. 나는 잡봉 많은 바위산을 좋아하지 않아서 1만 2천 봉이라는 금강산 봉우리 숫자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갈 수 없는 산을 향한 자기합리화 ‘심뽀’와 현장에 가서 직접 살펴보지 않고 섣불리 단정해서 설레발친 무지의 언행이었다.
신선대 능선은 각지지 않아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찾아온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민중의 삶과 친밀하다. 간혹 선녀와 신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민중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서정의 울림에 가깝다. 금강산은 선계仙界의 풍경으로 인간을 품은 산이다. 그리운 금강산이여! 첫자락이 이리 아름다운데 저 1만 2천 봉이 펼쳐내는 신비는 어떠합니까? 한반도 허리를 예리하게 잘라버린 저 붉은 칼자국을 어찌해야 합니까?
아, 그리운 금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