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73)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9장 여섯을 하나로 (4)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상부(相府)를 뛰쳐나와 여점으로 돌아온 장의(張儀)는 눈을 휘둥그레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거처하던 방 안의 물건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여점(旅店) 주인을 불러 물었다.
"어째서 내 짐을 모두 내놓았는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선생께서 옛 친구인 재상을 만났으니 이제부터는 공관에 사시게 될 것이요, 나라에서도 선생을 귀빈(貴賓)으로 대접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옮기기 편리하도록 짐을 미리 내놓은 것입니다."
장의(張儀)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네. 이거나 받으시게.“
장의는 빌려 입은 옷을 벗어 여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은 영문을 알지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장의(張儀)는 자리에 주저앉아 지난날 소진(蘇秦)과 더불어 함께 공부하던 일부터 오늘 상부(相府)에 들어가 모욕을 당한 일까지 소상히 들려주고 나서 탄식을 했다.
"그 친구가 그토록 변했을 줄은 정말 몰랐네. 이제 나는 소진(蘇秦)이라는 이름을 잊기로 했네.“
여점 주인이 생각에 잠겼다가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소진 재상께서 비록 거만하게 굴었더라도 워낙 지위가 높으니 선생이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선생에게 황금 1일(鎰)을 주었다는 것은 옛 친구에 대한 정이 그대로임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선생은 그것을 받아 그간 밀린 방값을 치를 생각은 하지 않고 왜 내던졌소?
참 딱도 하오. 대관절 방값은 어찌 치르실 작정이시오?"
장의(張儀)는 갑자기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나 분한 김에 황금을 팽개치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대에게 미안하구려.
내가 위(魏)나라로 돌아가 나중에 방값을 보내주면 안 될까?“
"그렇게는 곤란합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장의와 여점 주인이 방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바깥에서 어떤 사람이 장의(張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가생이었다.
가생(賈生)은 장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바쁜 일이 있어 그간 선생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간 선생께서는 소(蘇) 재상을 만나셨는지요?"
소진 얘기가 나오자 장의(張儀)는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주먹을 들어 탁자를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그놈 얘기는 다시 꺼내지도 마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은 재상과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분이 아니십니까?"
곁에서 여점(旅店) 주인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려주고 나서 말했다.
"지금 장의(張儀) 선생은 우리 여점에 외상값만 잔뜩 밀려 있소.
그뿐만이 아닙니다. 돌아갈 여비조차 없습니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가생(賈生)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장의(張儀) 선생이 이곳으로 오신 것은 내 책임도 있습니다.
나는 호의에서 선생을 조(趙)나라로 오시게 한 것인데, 이처럼 곤경에 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
"여보시오, 주인. 그간 선생이 진 외상값은 내가 모두 갚아드리겠소.
그리고 위(魏)나라로 돌아가실 여비도 내가 마련해 드리겠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가생의 말에 여점(旅店) 주인은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선생의 근심은 덜어졌습니다. 마음 놓으시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나 하십시오.“
그러나 장의(張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소. 위(魏)나라로 가지 않겠소."
가생(賈生)이 물었다.
"위(魏)나라로 가시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기왕이면 가장 큰 나라인 진(秦)나라로 갈까 하오. 다만 진나라로 갈 여비와 거기서 머물 노자가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오."
"선생께서 진(秦)나라로 가고 싶으시다니, 거기에 혹 아는 분이라도 있습니까?“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 어찌 그곳에 머물 노자를 걱정하리오.
다만 진나라는 강대국이라 천행으로 내가 그곳에 등용된다면 언제고 조(趙)나라를 쳐서 소진(蘇秦)에게 복수할 생각이오.
그래서 진나라로 가려는 것이오."
별안간 가생(賈生)이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께서 그러한 뜻을 품은 것은 제가 알 바 아니나, 마침 저도 진(秦)나라로 갈 일이 있으니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거기서 머물며 쓸 비용도 제가 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생의 말을 들은 장의(張儀) 역시 몹시 기뻐했다.
"세상에 그대와 같이 후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소진(蘇秦)은 부끄러워 자진이라도 해야 할 것이오.“
후원자를 만난 장의는 자청해서 가생과 결의 형제를 맺었다.
그 날로 두 사람은 수레를 타고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향해 떠났다.
함양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모든 것을 가생(賈生)이 돌봐주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의상과 신발, 심지어는 시종까지 제공받았다.
무엇이든 장의(張儀)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생은 만사 제쳐두고 구해주었다.
"저는 장사꾼입니다. 선생께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시고 아무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가생(賈生)은 진나라 고관대작들과도 접촉했다.
많은 황금을 뇌물로 바치고 장의에 대해 선전했다.
가생의 이러한 노력은 곧 효과를 거두었다.
그 무렵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소진을 등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소진(蘇秦)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에서 동시에 높은 벼슬을 얻을 줄이야.'
진(秦)나라 대신들은 진혜문왕의 이러한 마음을 짐작하고 앞을 다투어 장의(張儀)를 천거했다.
- 소진(蘇秦)과 동학인 장의라는 선비가 지금 함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 번 불러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이에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장의를 궁으로 불러 접견했다.
장의의 견식(見識)은 지난날 들어보았던 소진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조리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의의 언변에 빨려 들어갔다.
사흘 낮과 사흘 밤에 걸쳐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었다.
- 장의(張儀)야말로 과인이 기다리던 사람이다.
진혜문왕은 그 날로 객경(客卿) 벼슬을 내리고 나라 정책의 고문역을 맡게 했다.
이로써 장의(張儀)는 오랜 시련과 고난을 딛고 진(秦)나라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가 진혜문왕이 하사한 커다란 저택으로 이사한 날 저녁이었다.
'이제 소진(蘇秦)에게 복수할 일만 남았다.'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가생(賈生)이 들어왔다.
장의 앞에서 예(禮)를 올리더니 느닷없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저는 이제 조(趙)나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안녕히 계십시오."
장의(張儀)가 놀라 가생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나는 원래 곤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오로지 그대의 힘으로 오늘의 자리를 얻게 되었소.
장차 그대에게 은혜를 갚으려는데, 어째서 갑자기 떠난다는 말씀을 하는 게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가생(賈生)의 말이 더욱 장의를 놀라게 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선생을 속였습니다.
이름도 가생이 아니라 가사인(賈舍人)입니다.
오늘날 선생께서 이 자리에 오르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蘇) 재상 덕분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이름이야 어찌됐든 그대가 나를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은 것은 사실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소진(蘇秦)을 내세우는 것이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원래 상인이 아니옵고 소진 재상을 모시는 가신입니다.
소(蘇) 재상께서는 일찍이 진(秦)나라에서 벼슬자리를 거절당한 후 장차 여섯 나라를 합종(合縱)시켜 진나라에 대항할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진(蘇秦)이 합종을 성공시키기 전에 진(秦)나라가 주변국에 대해 무력 침공을 계획했다.
만일 진나라가 조(趙)나라를 치면 합종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처지에 빠졌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장의였다.
"선생에게 진(秦)나라 정권을 잡으시게 한 후 진나라의 무력 침공 계획을 연기시키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