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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4) 인간 생명은 시작부터 하느님 계획
교회는 태아 생명 존중, 노년을 위엄있고 존경받는 시기로 바라봐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시작하며
'로열 베이비', 영국 왕실의 아기가 지난 7월 22일 최고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온 집안과 영국시민, 심지어는 미국인들도 기뻐했답니다. 이미 입덧 때부터, 그리고 임신 6개월 때 산 파란색 유모차를 통한 아기 성별 추측 기사에다 합성된 아기 얼굴 예측 사진까지 나돌아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네 처지에서 참 반가웠습니다. 잘 자라나 세상 공동선에 크게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봉사자 : 태중 아기의 법적 지위는 어떻게 되나요?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 생활을 지배하기에 중요한 것임에도, 안타깝게도 법은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기본법인 형법은 '모든 낙태'를 '범죄'로, 특별법인 모자보건법은 '거의 무제한적 낙태'를 '합법'으로 규정합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사람'이려면 임부의 진통이 있어야 하고 태아의 신체 일부가 노출되어야 하기에 태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민법상으로는 엄연히 '상속권'도 보장받고 있습니다. 결국 태아에 대한 피해보상은, 거칠게 말하자면 변호사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렇지만,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에게 <<모든 사람들의 생명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느님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44항 §3). 신약의 계시는 더 극적입니다.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그들의 태중에 있던 두 아기들의 만남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지니고 있는 인격적 가치가 찬미됩니다>>(45항 §1).
♂♀생명봉사자 : 노년의 생명과 고통은 어떻게 평가되는지요?
성경의 계시가 노년의 처지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훌렁' 내다버리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서가 놓여 있는 문화적, 종교적 배경은 그러한 유혹들에 물들지 않은 것입니다>>(46항 §1). 오히려 <<노년은 위엄을 지닌 시기이며 주위의 존경을 받는 시기입니다(2마카 6,23 참조)>>(46항 §2).
병자들의 치유이적을 봤을 때 예수님은 육체의 병과 고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육체적 생명이 절대적 선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더 큰 선을 위해서 그 생명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47항 §2). 요한 세례자도, 스테파노 부제도 그랬지만 특히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당신 자신을 성부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개인적 이익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살인하지 못한다"(탈출 20,13; 신명 5,17)고 하지만, 동시에 "새 마음"(에제 36,25-26; 예레 31,34 참조)을 언급합니다. <<이 "새 마음"은 생명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참된 의미, 말하자면 생명은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온전히 실현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고 성취하게 해줄 것>>(49항 §2)입니다. 그것은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의 "새로운 법"이고, "성령의 법"이며 <<벗을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요한 15,13 참조)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49항 §3)인 것입니다. 그것의 가장 결정적 행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인데, 교황님은 '숨 거두신 것'이기보다는 '성령을 주신 것'이라고도 해석해주십니다. <<숨을 "거둔다"는 것은… 또한 "성령(숨)을 내어주심"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51항 §2).
마무리하며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제멋대로의 결단에 의해 지난 4월에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고 엄마가 됐다."
임박한 '로열 베이비 탄생'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외신이 일본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 안도 미키의 '조용한 출산'을 전하며 한 말입니다.
"제멋대로의 결단"이란 표현은 현역 운동선수로서 아버지를 밝힐 수 없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의 결단"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책임있는 부모의식'(responsible parenthood)를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5) 인간 생명의 신성불가침 확인
정당방위 정당한 전쟁은 더 큰 피해 막고 생명 보호 위해 가능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들어가며
필자는 체력 증진과 정신적 휴식과 협동심을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도 등산하지만 영적 기도를 위해 일부러 혼자도 갑니다. 쾌적한 날도 있지만 수풀에 갇혀 기진하기도 합니다. 발목은 삐고 물은 다 떨어지고 어둠마저 내리는데 산길까지 없어지면 심각해집니다. 자신의 미련함에 대한 후회와 동료의 무모함에 대한 원망이 밀려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이때 누군가 남겨둔 허름한 안내팻말 하나라도 나타나면 '이젠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새 힘이 솟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고 눈에 잘 띄지도 않던 나무 쪼가리 하나가 바로 '구원'이고 '복음'인 셈이지요.
♂♀생명봉사자 : '계명'에 대해 우리 신자들은 부담감을 느끼고 비신자들 일부는 거부감마저 느끼는데, '신법'(神法)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까요?
생계의 어려움과 가치의 혼란으로 지치고 지친 우리에게, 계명(Commandment)은 예수님께서 인간적 두려움으로 갈등하는 가운데 임종 직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하신 '유언'(Testament)이지요. 계명은 그분의 완전하고도 배타적인 십자가를 통해 그리고 인류의 임상실습을 통해 검증된 '사랑 어린 이정표'입니다. 물(??)이 흘러가는(去) 것과 같은 <<하느님의 법(法)>>, 즉 계명은 사람을 향한 당신 사랑의 표현이었고 복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그분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계명은 언제나 인간의 성장과 기쁨을 위한 선물입니다.… 실제로 "복음" 그 자체, 즉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52항 §2).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그 계명이 "살인하지 못한다"(탈출 20,13; 신명 5,17)는 법을 제시한다(53항 §1 참조)고 하시면서 인간 생명의 '신성불가침성'을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당신 모상대로 비슷하게 만드신(창세 1,26-28 참조) 인간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은 신성불가침한 성격을 받았으며, 이 성격은 창조주의 불가침성을 반영합니다>>(53항 §3).
특히 '무고한 생명'에 대한 불가침 선언이야말로 교회 교도권의 사명이라고 장황하게 확인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부여하신 권위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주교들과의 일치 안에서, 무고한 인간을 직접,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은 언제나 지극히 부도덕한 행위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57항 §4).
♂♀생명봉사자 : 비록 '살인금지'가 엄중해도 부당한 공격자에게 앉아서 맞아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정당방어'는 해야 합니다. 앞선 호들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그러나 정당방어는 가해자를 살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살인을 막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극히 제한적으로 사형이 용인될 수 있는 것도 정당방위에 근거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 즉 다른 방법으로는 사회를 보호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형벌제도를 꾸준히 개선한 결과 그러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56항 §2).
♂♀생명봉사자 : 그렇다면 '정당한 전쟁'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정당한 전쟁'에 대한 조건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할 것, 둘째로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할 것, 셋째로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될 것, 넷째로 무력 사용으로 제거돼야 할 재난보다 더 큰 재난과 폐해가 초래되지 않아야 할 것 등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09항 참조).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6) 일만 보 양보해도 생명권은 지켜야
태아 생명과 온전성 존중, 바른 도덕성 양심은 교육 계발 필요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들어가며
낙태 논쟁과 관련해 '강간 후 임신'에 대한 어떤 비유입니다. 한 여성이 길을 가다가 어떤 공격을 받고 실신했는데 눈을 떠 보니 자신의 몸이 웬 낯선 환자와 호스로 연결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피를 주게돼 있었습니다. 자신의 혈액만이 그 환자에게 꼭 맞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불의한 침략자'이니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해 호스 연결을 끊어야 할까요? '무죄한 생명'이니 우선은 유지해야 할까요?
♂♀생명봉사자 : 우리나라 낙태 현상은 한창때보다 진정되지 않았나요?
얼핏 보면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착시 효과일 수 있습니다. 일단은 출산율 자체가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들은 이미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둘째, 일부 피임약은 낙태 효과를 내고 있지만 통계에는 잡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궁에 착상하지 않았지만 수정된 것은 이미 생명입니다. <<고의적 낙태는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든지, 수정(受精)에서 출생에 이르는 인간 존재의 출발 단계에서 의도적이고 직접적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58항 §2).
♂♀생명봉사자 : 태아는 그렇지만, 배아(수정란)에도 생명권을 보장해야 하는지요?
낙태죄에 대해 교회가 그 임신 기간에 따라 보속 부과에 차등을 둔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이미 회개한 신자들의 선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노 교부는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살인이 금지되었고, 피가 인간으로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동안에라도, 자궁 안의 배아를 파괴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출생을 막는 것은 살인을 앞당기는 것이고, 이미 태어난 영혼을 제거하는 것 또는 그것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모든 열매는 이미 그 씨앗 안에 있듯이 사람이 될 자는 이미 사람이다"(졸고 '생명복제와 가톨릭교회의 윤리'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41호).
그리고 인간 배아의 인격권에 대해 일만 걸음을 양보하더라도, 그의 생명권(生命權)에 대해 사회적 통념이나 시민법으로 그 존재를 부정할 권위 또는 권한은 그 어떤 위대한 인물, 국가, 사회 어디에도 없습니다(1987년 「생명의 선물」 3장 참조). 그래서 태아의 산전 진단과 유전자 치료에 관해서도 교회는 명백하게 선언합니다. <<태아의 생명과 그 온전성을 존중하며 태아에게 과도한 위험성이 없고, 오히려 그 개체의 건강 증진과 생존과 치료를 위해 하는 의학적 시술은 합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험 재료로 쓰려고 태아를 만들어내는 일은 부도덕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75항).
♂♀생명봉사자 : 나름 다 판단하고 사는데 인간의 도덕적 판단력에 대해 교회는 왜 문제를 삼을까요?
인간 이성을 교회는 신뢰합니다. <<인간은 이성으로 창조주께서 정한 사물들의 질서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은 의지로 스스로 참된 선을 향해 나아갈 능력이 있다>>(같은 책 1704항). <<도덕적 양심은 이성의 판단으로서, 이로써 인간은 자기가 하려는 행위, 하고 있는 행위, 이미 행한 구체적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알 수 있다>>(같은 책 1778항).
그러나 그 양심은 교육과 계발이 필요하다고도 가르칩니다. <<양심은 교육받아야 하고 도덕적 판단은 계발되어야 한다.… 부정적 영향을 받기 쉽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며 권위 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도록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 교육이 필요하다>>(같은 책 1783항). 그 책임도 강조합니다. <<도덕적 양심이 무지에 머물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무지와 잘못이 항상 죄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같은 책 1801항).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7)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천부인권' 먼저
낙태는 개인의 문제 아닌 사회의 문제임 인식해야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 생명봉사자 : '강간 후 임신'의 경우에는 교회에서도 낙태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수의 자식까지 낳을 수는 없잖아요?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낙태를 법으로 금지시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조차도 이 경우의 낙태는 예외적으로 허용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모자보건법 제14조 ① 3호 참조).
다시 질문해봅니다. 그렇다면 그 임신된 태아가 성폭행을 저질렀는가? 천 걸음을 양보해서 그 태아가 범죄의 결과물이라고는 해도, 국가가 '무죄한 생명'인 태아에게는 일종의 사형인 낙태를 허용해도 되는가? 아무 죄 없는 제3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닌가?
기껏 고생하고는 진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부역하게 됩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의지로 참된 선을 향해 갈 수는 있지만 그 도덕적 양심은 교육되고 계발돼야 한다는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특히 생명의 문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천부인권' 문제이지요.
♀ 생명봉사자 : 세상은 낙태 책임을 여자에게만 뒤집어씌우지 않나요? 교회도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이해는 할까요?
'이해'는 해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있지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또한 현실을 모르고 호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더 중요한 가치들, 즉 산모 자신의 건강이나 다른 가족들의 생활 수준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내려질 때, 대개 그것은 어머니에게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결정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58항 §4).
그런 이유로 낙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단언하십니다. <<낙태는 개인들의 책임을 넘어서는 것이며, 개인들에게 가해지는 해악을 넘어서는 것이고, 분명한 사회적 차원을 띠는 것입니다>>(59항 §2).
그리고 임부 이외의 책임자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십니다. 첫째가 아기의 아버지요, 둘째가 가족과 친구들이며, 셋째가 의사와 간호사입니다(59항 §1). 넷째가 낙태법의 입법자들이요, 다섯째가 낙태를 조장한 보건센터의 행정 담당자들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책임이 있는 이들>>인 여섯째가 성에 대한 자유방임적 태도와 모성 존중의 결핍이 확산되도록 조장한 사람들이고, 일곱째가 가족들에게 재정적ㆍ교육적 도움을 주어야 하는 가정 정책과 사회 정책을 보장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마지막으로 여덟째가 세계적으로 낙태 입법과 확산을 위한 체계적 캠페인을 벌리는 국제기구, 재단, 단체들을 끌어들이는 음모의 조직망입니다. 바로 낙태의 <<죄의 구조>>이지요(59항 §2).
나가며
1994년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 병사에 의해 '강간 후 임신'한 어느 보스니아 수녀가 수녀원을 떠나면서 자신의 장상에게 보낸 사연입니다.
"…그분은 제가 분명하고 고귀한 것으로 생각했던 삶의 계획을 파괴하셨고 이제 제가 발견할 필요가 있는 새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엄마라면 아이는 당연히 제 것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설령 제가 이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에게 사랑만을 가르칠 것입니다. 폭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이는 저와 더불어 용서야말로 유일하게 인류에게 영예를 주는 위대한 것이라는 점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자식이 아니라 '내 아이'요, '국가의 자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8) '살인 금지'는 태아에게도 적용
배아, 태아에 생명의 필연적 연속, 일체성이 엄존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들어가며
미혼모 쉼터 마리아의 집을 운영하는 착한목자수녀회 소속이면서 '틴스타'를 이끌었고, 필자와 함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에서도 봉사하신 수녀님의 말입니다.
"아이를 낳아 입양을 보내는 미혼모들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입양 간 아이가 후에 자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형편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자신이 키울 수는 없지만 낙태보다는 생명을 선택했기에 평생 품어야 하는 아픔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선택한 생명으로 인해 평생 품어야 하는 아픔이 어찌 미혼모들에게만 있겠습니까. 장애나 난치병을 타고난 생명, 지지리도 못난 자신을 닮은 그런 생명을 선택했기에 평생 품고 가야 하는 생모들의 삶이라고 거저먹기는 아닐 것입니다. '가슴으로 낳은' 양모들의 아픔은 그야말로 거룩한 훈장이지요.
♀ 생명봉사자 : 초음파로 초기 태아의 모습을 종종 보는데 아직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외모지상주의 때문일까요?
인간 생명의 첫 순간에 대한 논쟁이 되겠습니다만, 수정 후 어떤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특정한 발달 단계나 상태에 도달해야만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발달주의적 생각들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 첫째가 태아 스스로 자궁 밖에서 자생력(自生力)을 가지지 못할 때는 모체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는 것, 둘째는 인간다운 특징인 두뇌가 형성돼야 인간으로 간주되며 두뇌 활동이 끝난 뇌사(腦死)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 셋째는 자궁 착상에 성공한 순간부터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부시대에 태아의 몸에 언제 영혼이 들어가서 사람이 되는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남아는 수정 후 40일, 여아는 80일에야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선 호에서 언급했듯이 이 모두는 교회의 교리도 생물학적 진실도 아닙니다. 배아의 모든 발달 단계와 단계 사이에는 생명의 필연적인 연속성(連續性)과 일체성(一體性)이 엄존합니다(졸고, '생명복제', 「생명공학과 가톨릭윤리」 311-354쪽 참조). <<현대의 유전학은 첫 순간부터 이 살아있는 존재가 무엇이 될 것인지에 관한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60항 §1).
♂♀ 생명봉사자 : 성경에는 고의적 낙태에 대한 언급은 없던데요, 교회는 어떻게 단죄했나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점도 언급하십니다. <<성서 본문들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아기의 인간 존재에 대한 지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볼 때 "살인하지 못한다"는 하느님의 계명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61항 §1).
그리고 교회 규정을 소개해주십니다. <<1917년의 교회법전은 낙태를 파문의 벌로 다스렸습니다. 개정된 교회법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낙태를 주선하여 그 효과를 얻는 자는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고 규정합니다>>(62항 §2).
나가며
앞서 언급한 마리아의 집에 10년 전 미국으로 입양 간 입양아들이 모국방문 길에 찾아와, 출산을 기다리던 예비 미혼모와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예비 미혼모 한 명이 자신은 곧 아기를 외국으로 보낼 예정인데, 커서 엄마를 미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며 입양아로서 만약 친모를 만나면 뭐라고 말하겠느냐고 질문했더니,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입양아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엄마를 만나면 '고맙습니다' 할 거예요. 저를 기르실 수는 없었지만 제가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요. 그리고 꼭 안아드릴 거예요.“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19) 생명권이 수단 · 도구 돼선 안돼
인공수정시 채취된 잉여배아가 연구에 허용되는 현실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 생명 봉사자 : 의학 발전을 위해 인체 실험도 하고 임상 실습도 하는데, 배아 실험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험과 실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정적 효과에 비해 긍정적 효과가 더 커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권에 있어서 누구를 위해 또 다른 누가 수단이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 배자에 대해 행해지는 최근의 조작 형태들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배자(胚子)에 대한 살해를 수반합니다>>(63항 §1). 그래서 배아 실험은 안 됩니다.
♂♀ 생명 봉사자 : 배아의 발생은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요? 배아, 배반포, 성체줄기세포 등은 무슨 뜻인지요?
배아 실험의 부도덕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참에 배아의 발생 단계와 그 명칭들을 보겠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지면 접합체(zygote)가 되고, 약 15시간 후부터 2배포기가 되고 4배포기, 8배포기로 계속 세포 분열을 해나가는데, 수정 후 8주까지를 배아(embryo) 시기, 출산 직전까지를 태아(fetus) 시기라고 부릅니다.
수정 후 3일쯤에 상실배(morula)라 불리는 뽕나무 열매와 같은 모양의 세포 덩어리 단계를 지나 5일쯤에는 주머니와 같은 배반포(blastocyst) 단계가 되는데, 그 안에 30~40개의 내세포괴(inner cell mass)가 형성됩니다. 이때는 자궁벽에 착상해 임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내세포괴가 바로 신체의 뼈, 심장, 피부 등으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stem cell)들인데, 이를 뽑아내 배양해서 각각의 줄기세포주(colony)를 만들면 필요한 장기와 조직으로 계속 분화시킬 수 있습니다. 14일째에는 외부에 원시선(primitive streak)이 나타나는데, 초기 형태의 장기가 이미 발현된 단계이기에 배아 실험을 합법화한 나라들조차도 이 단계에서는 규제를 합니다.
배아 실험이 비윤리적인 이유는 소위 배아줄기세포 연구 또는 배아줄기세포 추출이 그 배아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심장, 뼈, 피부 등의 원천들을 제거하는 것이요, 그래서 배아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정 단계를 거치지 않은, 태아의 탯줄 혈액이나 성인의 지방(脂肪) 조직 등에 존재하는 성체(成體)줄기를 이용하는 성체줄기세포도 있는데 교회는 이것을 이용하도록 권고합니다.
♂♀ 생명 봉사자 : '잉여배아'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는 그것을 배아 실험에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나요?
난임(難姙) 부부가 인공수정을 원할 때 난자 채취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한꺼번에 여러 난자를 수정시켜 여러 개의 배아 표본을 준비합니다. 배아 한 개의 착상 성공률은 고작 9.6% 정도이고, 배아 네 개를 동시에 쓸 경우에도 30.6% 정도입니다. 쌍둥이 최고 기록인 2009년 미국의 여덟 쌍둥이는 이렇게 '다태아 임신'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통상 발육 상태가 좋은 태아를 남기고 나머지는 낙태시키며, 나머지 표본 배아는 폐기 또는 연구나 기증의 목적으로 냉동 보관하게 되는데 이를 잉여배아 또는 잔여배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2008년 12월 6일 시행)에서 잔여배아 연구를 허용합니다. 법 조항은 이렇습니다. '제17조(잔여배아의 연구) 제16조의 규정에 의한 배아의 보존 기간이 경과된 잔여배아는 발생학적으로 원시선이 나타나기 전까지에 한하여 체외에서 다음 각 호의 1의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동 법 제6조에 의거해 설치된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연구 심의를 요청받은 경우에 한해 심의하는데, 절차적인 하자만 없으면 허용해야 합니다. 규정된 조건만 지키면 마음대로 잉여배아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보존기간 5년이 지난 냉동 잉여배아를 연구, 실험, 조작 및 폐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딱딱한 내용이었습니다만, 생명 봉사자분들께는 요긴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음에는 태아 진단을 다루려는데, 더 딱딱할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청합니다.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20) 과도한 의학적 치료 중단, 안락사 아냐
의도적 안락사는 하느님 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 생명봉사자 : 태아진단이 왜 문제가 되는지요? 태아와 임부에게 필요하지 않나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기에 문제입니다. 태아의 기형을 어느 정도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문제는 치료 방법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태아진단의 윤리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아기와 어머니에게 부적절한 위험을 가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이 초기 치료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일 때, 그리고 나아가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사실을 알고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일 때, 이러한 기술은 윤리적으로 정당합니다>>(63항 §3).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체적 안녕의 범위에서만 '정상'(正常)으로 간주하는 그릇된 가치관 속에서 '우생학적 낙태'를 위한 사전 조사용으로 남용되고 있음도 지적하십니다. <<선택적인 낙태를 받아들이는 우생학적 의도로 이 기술들이 이용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63항 §3).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는 아기들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강한 지지를 보내는 것도 교황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교회는 장애나 질병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기들을 입양을 통해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든 가정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63항 §4).
♂♀ 생명봉사자 : 고통스럽더라도 고의적으로 안락사를 시킬 수는 없겠지만,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를 많이 쓰다가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임종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불가피한 경우입니다. 안락사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죽게 하려는 어떤 행위를 하거나 또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의향과 사용된 방법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됩니다(65항 §1 참조). 안락사는 '과도한 의학적 치료'의 중단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큰 부담이 되는 생명의 연장밖에 보장하지 못하는 종류의 치료행위들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65항 §2). 즉 자연사를 택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의식적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진통제에 의한 치료를 그만두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기에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의식이 흐려지고 생명이 단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마약류를 사용해서 고통을 없애는 것은 합법적인 것입니다>>(65항 §3). 실제로 말기환자에게 통증 완화가 안 될 때 진통제의 강도를 높일 수가 있는데, 그러면 호흡곤란이 와서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안락사의 의향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황님은 또 단언하십니다. <<가톨릭교회의 주교들과 일치하여, 본인은 안락사가 하느님 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임을 확인하는 바입니다>>(65항 §4).
♂♀ 생명봉사자 : 삼년 전 동반 자살한 '행복전도사' 최 아무개 부부의 사연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700가지나 되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유서를 남겼다는데….
먼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방송 출연이 잦고 인기를 먹고 사는 스타 강사였기에 과장할 소지는 분명히 있었겠지만, 또 다른 정신적 집착에 매였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동반 자살은 동시에 둘이 자살한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는 부인을 살해한 남편의 단독 자살인 셈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명백히 언급하십니다. <<자살을 범하려는 다른 사람의 의향에 동조하여 이른바 '자살 방조'(assisted suicide)를 통해 자살을 행하도록 돕는 것은, 비록 요청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불의한 일에 협조한 것이며, 때로는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66항 §2). "제발 죽여 달라!"고 외치는 것은 "제발 좀 어떻게 해달라!"는 강력한 호소인 셈이지요.
게다가 배우자는 그렇게 데려가도 되는 자기 소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속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남겨진 자녀들의 평생 처지를 위해 기도하며 다시금 삼가 명복을 빕니다.
[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21) '과반수'보다 자연법, 공동선 존중
민주주의 다수 결정으로도 변경할 수 없는 가치 · 윤리 있어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
♂♀ 생명봉사자 :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법은 따라야 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각자의 양심을 존중하자며 다수로 국법을 정해버리는 '윤리적 상대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보호해야 할 절대적 가치가 다수에 의해 부정되는 모순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현대 문화의 대부분을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주의를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상대주의만이 관용, 사람들 간의 상호 존경, 다수 결정의 수용 등을 보장해주는 반면에, 도덕적 규범들은 권위주의와 불용으로 이끌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70항 §1). 그래서 덧붙이십니다. <<민주주의를 우상화하여 도덕성의 대체물로 만들거나, 또는 비도덕성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70항 §4). 이미 아홉 번째 글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의 모순'은 <<민주주의의 법칙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투표의 결과에 의해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법률적 허용이 이루어질 때>>(20항 §2) 발생합니다. <<이는 참된 자유의 죽음입니다>>(20항 §4).
사실 우리는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된 국법이 폭력의 형태로 변질됐던 여러 사례들을 알고 있고 또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들어선 나치 정권과, 가까이는 우리나라의 독재 정권이 그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하지만 때로는 '법은 가깝고 도덕은 멀다'고 하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오늘날의 침해들이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특성들 중의 하나는 법적인 정당화를 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68항 §1). 그리고 <<어떤 극단적인 경우들에는 시민들에게 낙태와 안락사의 권리까지도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68항 §2).
♂♀ 생명봉사자 : 그러면 국법의 역할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공동선의 보장입니다. <<국법의 능력 범위란 국민들의 기초적인 권리들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평화와 공중도덕을 증진시킴으로써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입니다>>(71항 §3). 그러므로 과반수보다는 '자연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선' 등과 같은 가치는 틀림없이 기본적인 것이고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의 토대는 과반수의 의견으로 변경할 수 있는 임시적이고 변경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 마음속에 자연법으로 새겨져 있는 객관적인 도덕률의 승인만이 국법 자체의 의무적인 기준점입니다.>>(70항 §4-§5).
♂♀ 생명봉사자 : 공동선은 무엇인가요? 단체의 선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개인들의 선도, 특정 단체의 선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공동선(common good)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 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사목헌장」 26항 §1)인데, 교황님은 당신의 선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인용하심으로써 공동선과 인간의 권리와 의무와의 동질성을 재확인하십니다. <<현대에서 공동선의 실현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함으로써 드러난다>>(71항 §4).
그렇게 보면 공동선의 내용이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인권'(human rights)에 해당하는데, 굳이 공동선이란 단어를 쓰는 이유는 남의 기본 권리가 나에게는 기본 의무가 되는 쌍방성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 공동선의 보장을 위해서만 국가는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인간 권리의 침범할 수 없는 국면을 보호하고, 그 의무들을 완수하는 것은 모든 공권력의 본질적인 의무이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행위가 인권을 무시하거나 침범하게 되면, 그 직무 수행에 실패하는 것이며 그런 잘못된 법령은 구속력을 상실하게 된다.>>(71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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