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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창조성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박방희의 유고시집 {누란의 미녀} 시 세계
권온
누란의 미녀는 박방희의 마지막 시집이다. 다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인은 더 이상 새로운 시를 생산할 수 없다. 1946년에 태어나서 1985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2022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을 되새기는 일은 경건한 마음을 동반한다. 박방희의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에는 ‘영(靈)’ 또는 ‘영혼’이 있다. 그가 ‘영’이나 ‘영혼’에 주목하는 이유는 ‘죽음’의 임박 또는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노년에 들어선 시인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시로써 표현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자신의 소멸을 강하게 예감하는 박방희는 코로나 바이러스나 문인수 시인 등을 도입함으로써 죽음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최후의 순간까지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시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삶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나날의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응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눈을 크게 뜨고, 박방희의 인생 76년을 그득하게 담은 시집을 읽어 볼 일이다.
몸은 죽어 누천년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이승과 저승에 籍을 두고 영혼은 암흑 속에서 더욱 형형하여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보라, 저 모습이 죽은 사자의 얼굴인가? 입가에 감도는 미소며 온화한 표정
生과 死의 절체절명적인 순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저 모습은 죽음도 감히 침범 못 하는 경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하의 어둠 속에서도 시공을 넘나들며
아득한 과거와 현세와 미래를 오가는 누란의 그녀가
지금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다
―「누란樓蘭의 미녀」 부분
‘미라’는 썩지 않고 건조되어 원래 상태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를 가리킨다. 박방희는 1980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누란에서 발견된 유럽 인종 여성 미라에 주목한다. 시인은 누란의 미녀로 알려져 있는 이 미라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박방희는 누란의 미녀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며 온화한 표정”은 “죽은 사자의 얼굴”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저 모습”에 깊이 감동한다.
이 시는 대조적인 공간 구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몸’계열과 ‘영혼(靈)’계열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몸’과 ‘이승’과 ‘生’이 연결되고, ‘영혼(靈)’과 ‘저승’과 ‘死’가 연결된다. 시인은 누란의 미녀가 몸 계열과 영혼 계열을 아우르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그녀가 위치한다고 이해한다. 박방희에 의하면 누란의 미녀는 生과 死의 경계에 있다. 또한 이 시에는 “과거와 현세와 미래” 등 시간 또는 세월의 흐름이 내재한다. 시인은 누란의 미녀가 “시공을 넘나들며”, “지금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靈의 세계”에 위치하는 “영혼”의 소유자이다. 우리는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삶과 긴밀하게 결속된 죽음으로서 해석하는 박방희의 시를 ‘영(靈)의 시’ 또는 ‘영혼의 시’로 일컫고 싶다.
반달 같은 얼굴들, 아니 온달같이 합장한 마음들
福券을 산다는 것은 언젠가 한 번은 다가올 행운에 기대 希望을 사는 것이고 꿈을 사는 것이다
이 땅의 백성들만큼 행운이 절실한 국민이 없다 줄선 사람들 모습에 각인된 구구절절한 사연들, 모두 행운을 기원하며 주말을 기다린다 이건 신앙 이전의 종교이자 애국이고 진통제이고 마약이고 구원이다 오늘의 시름과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만병통치 처방전이고 또 한 판의 굿이다
馬券도 아니고 株券도 아니고 福券이라니 얼마나 福된 것이냐!
그건 福을 누릴 권리이자, 복을 살 권리고 복을 꿈꿀 권리이다
―「福券」 부분
이번 시는 “福券”을 다룬다. 많은 사람들 또는 “반달 같은 얼굴들”이 복권을 산다. 시인은 그들이 “福券을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박방희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언젠가 한 번은 다가올 행운에 기대 希望을 사는 것이고 꿈을 사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이 땅의 백성들”이 힘든 ‘주중’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복권을 살 수 있는 “주말”이 있기 때문이다.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복권은 “종교”, “진통제”, “마약”, “구원”, “처방전”, “굿” 등에 해당한다. 시인은 복권의 ‘복(福)’에 주목한다. “이 땅의” 평범한 이들에게 복권은 “福을 누릴 권리이자, 복을 살 권리고 복을 꿈꿀 권리”이다. 그는 우리가 “한 주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福된 것”으로서의 복권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행운”이자 ‘희망’이며 ‘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박방희의 조언을 수용하여 “복권 가게 앞에 흐린 얼굴로 줄선 사람들 비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는 십 년 만의 휴가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내습으로 강제 격리되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휴가가 길어지면서
못질된 집 안에서도 차츰 비어가는 것이 있다
냉장고가 비어가고
얼마 안 남은 통장도 비어가
차츰 생활이 비며 삶도 비어
코로나 바이러스 휴가가
더러는 영원한 휴가가 되기도 하였다
―「휴가」 전문
‘휴가’는 일정한 기간 동안 쉬는 일을 뜻한다. 여기에서 ‘일정한 기간’이라는 부분에 주목할 수 있다. 휴가는 본래 일시적인 쉼이나 휴식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심각한 변수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사람들이 “강제 격리되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경우가 많다. 곧 다수의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쉬거나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휴가”로 내몰린다. 우리가 휴가를 달콤하게 여기는 까닭은 제한된 기간 동안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가가 무제한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되돌아갈 본업의 상실을 의미하고 이는 심각한 경제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이 시의 표현대로 “냉장고가 비어가고 얼마 안 남은 통장도 비어가 차츰 생활이 비며 삶도 비어”버린다면 인간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이 땅의 국민들이 강제적이고 영원한 휴가가 아닌 일정하고 일시적이며 자유로운 휴가를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발발 이후 확진자 0
영이라는 숫자가 이처럼 반가울 수가
죽은 조상 만난 듯이 반가운 0
제발 0이 이어지기를
다가오는 날마다 0이어서
영원히 영영이기를
0이 이토록 귀한 줄 모르고 살았네
0은 靈이 되거늘
없으면 위험한 몸 아니 죽은 몸
영이야말로 알맹이
0에게 두 손 모으며
0을 두 팔로 받아 안는다
백보다 천보다 만보다 0인 것을
영이 우주이고 우주가 0인 것을
그래서 空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의 시초이고 출처이고 끝인 것을
모든 것의 알인 영
0에서 태어나
비로소 시작할 수 있으니…….
―「오늘 확진자는 0이었다」 전문
박방희가 이 시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0”이다. 그가 포착한 ‘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시인에게 0 또는 “영”은 “靈”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죽은 몸”이나 “죽은 조상”과 관련되는 어떤 “알맹이” 또는 “알”이다. 박방희는 이제 0이 “모든 것의 시초이고 출처이고 끝인 것을” 깨닫는다. 그가 0을 향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게 된 이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시대의 화두 때문이다. “오늘 확진자는 0이었다”라는 감격적인 사실 앞에서 시인은 “0에게 두 손 모으며 0을 두 팔로 받아 안는다” 그에게 0은 “영원히” 머물러있기를 바라는 절대적인 “우주”가 된다. 박방희는 “0이 이토록 귀한 줄 모르고 살았네”라는 성찰에 다다른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추구하는 핵심 메시지에는 ‘영혼’이 위치한다. 이 시는 앞에서 다룬 「누란의 미녀」와 함께 ‘영혼 불멸설’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손 아무개라는 교수 출신 정치인
‘저녁이 있는 삶’을 들고 나와 주목받은 게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저녁이 있는 삶은 아득히 잊히고
그 역시 몽니를 부리다가 어느새 손절되었다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
저녁이 있는 삶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
삶이여, 바라건대
아침이 있는 삶을 다오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장
어디든 일하러 갈 수 있는 일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아침이 있는 삶을 다오!
―「아침이 있는 삶」 전문
시(詩)를 쓰는 이로서의 시인(詩人)은 언어에 민감하다. 시인은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일에 유독 예민한 촉수를 드러내기도 한다. 박방희는 이 시에서 한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용어인 “저녁이 있는 삶”을 도입한다. 그가 보기에 ‘저녁이 있는 삶’은 이제 “아득히 잊히고” 있다. 시인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에 그러한 삶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는 기존의 저녁이 있는 삶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발견한다. 박방희가 주목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아침이 있는 삶”이다. 아침이 있는 삶이란 “가족의 배웅”, “출근”, “직장”, “일터”, “잘 다녀오라는 인사” 등을 포괄한다. 시인이 판단하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의 사람들은 ‘아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닌 ‘아침이 있는 삶’이다. ‘생계’나 ‘생존’과 관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침이 있는 삶을 향한 시인의 호소는 시의적절한 네이밍으로 판단된다.
대체로 모든 죽음은 뜻밖의 죽음이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고
예외적이고
또 결정적인 것이니
자고나면 몇 사람이 죽고 또 뜻밖의 누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이제 죽음도 새삼스럽지 않은, 참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인이나 심지어 가까운 인척이 죽었다고 해도 그런가 할 뿐,
―「죽음, 또는 죽었다는 말」 부분
박방희의 이번 시집은 ‘죽음’ 또는 ‘소멸’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나 천착의 소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 시대 이후에 죽음의 양상이 바뀌었음을 발견한다. 시인이 보기에 무릇 죽음이란 “뜻밖의 죽음”이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며, “예외적이고 또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각각의 죽음은 제 몫의 가치를 갖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서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 모든 게 변했다. “자고나면 몇 사람이 죽고 또 뜻밖의 누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상황에서 죽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참 일상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죽음, 또는 죽었다는 말”이 일상화된 안타까운 현실을 환기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당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한 줄기 위로 위로 오르는
화장장의 저 연기는 누구의 몸인가
죽는다는 것은 가벼워짐이고
가벼워지지 않고는
세상을 떠날 수 없음인가
연기가 되어 병 속으로 드는 거인처럼
연기를 잡으면
본래의 몸을 잡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緣起로 태어나 생을 演技하다
한줌 煙氣로 사라질 뿐이다
하늘로 흩어지면서
神만이 아는 문자로
생의 내력을 보여주는 연기
죽는다는 것은
발길이 끝나면 지워지는 길처럼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지는 일
사라짐으로써 아름다운 연기
길은 宇宙로 열려 있다는 듯
마지막 행로를 표시하며
자꾸만 위로 위로 오른다
―「연기煙氣」 전문
박방희는 이번 시에서도 언어에 집중하는 언어 장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것은 어느 “화장장”의 “연기”이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의 궤적을 관찰하면서 “누구의 몸”을 떠올리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한다. 박방희는 연기를 복합적으로 파악한다. 연기는 첫째, ‘煙氣’이고, 둘째, ‘緣起’이며, 셋째, ‘演技’이다. 인간의 몸이 불에 탈 때 발생하는 기체로서의 연기는 “본래의 몸”에 내재하는 “생의 내력”을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연에 따른 결과로서의 연기에 의해 태어났다. 또한 인간은 배우가 되어서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을 일생 동안 연기한다. 시인은 화장장의 연기로 마감되는 인간의 생을 “神”이나 “宇宙”와 연결한다. 사람의 삶은 육체의 소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욱 크고 높으며 넓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언젠가 “사라짐으로써 아름다운 연기”로 거듭날 것이다.
그는 곧잘 고치 속 애벌레처럼
스스로 몸을 작게 만들었다
서 있을 때도 굽은 어깨 죽지 밑으로
아랫몸을 말아 넣었다
그는 벽과 친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벽을 등지고 앉아
자신을 벽 속으로 우겨 넣었다
종종 구석에서 그를 찾아낼 때면
웅크린 구석에 묻히듯 안겨 있었다
그럴 때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의자에서는 몸을 의자에 맞춰
완벽한 합일을 이루어 냈다
여럿이 둘러앉은 자리에서도
자그마한 그를 찾아내기란 쉬웠다
벽을 둘러보면 양각되거나
반쯤 들어가 음각된 그가 있었다
마치 벽이 두런두런 얘기하듯 했다
이제 뚜껑을 닫고 관 속으로 들어간
시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는 사라지고 일생도 끝난 것이라지만
그의 시가 회자되고 추억되는 한
일생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가끔 구석에서 그를 끄집어내고
벽속에서 일으켜 세우기도 하므로
나는 그가 관이 아니라
수많은 벽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다
―「벽 속의 시인―고 문인수 시인을 생각하며」 전문
박방희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동료 시인으로서 문인수가 있다. 박방희와 문인수는 고향(경상북도 성주)이 같고, 출생 시기(1946년과 1945년)도 비슷하며, 시인으로서의 출발 시기(1985년)도 겹치는 등 공통점이 매우 많다. 이런 까닭에 박방희가 문인수를 특별한 동료이자 친구로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박방희가 이해하는 문인수는 “고치 속 애벌레” 같았다. 문인수는 “벽과 친했”고, “자신을 벽 속으로 우겨 넣었다” 또한 그는 “웅크린 구석에 묻히듯 안겨 있었”고, “몸을 의자에 맞춰 완벽한 합일을 이루어 냈다” 요컨대 문인수 시인은 ‘벽’이나 ‘구석’ 또는 ‘의자’ 등 다양한 대상 속에 자신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박방희는 다양한 사물 뒤에 스스로를 감추려고 노력했던 문인수가 “아주 편안해 보였다”라고 진단한다. 박방희는 “이제 뚜껑을 닫고 관 속으로 들어간” 문인수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의 시가 회자되고 추억되는 한 일생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인수는 박방희가 “수많은 벽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일상의 다양한 순간마다, 도처의 벽을 만날 때마다 “벽 속의 시인”으로서의 문인수와 만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보여주는 이
안 보이는 것을 보여주고
못 보던 것을 보여주고
없던 것까지 보여주는
詩人은 示人인데
볼 것 없는 거나 봬주고
세상의 眞境은커녕
가슴의 진경도 아닌
제 화장한 얼굴이나
봬주려 애쓰다니
불쌍타, 시인이여
屍人이 되려는가?
뭔가 좀 신선한 것
볼 만한 것을 보여주게나
詩人은 視人이고 示人 아니던가!
―「시인」 전문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박방희에 의하면 ‘시인’은 “詩人”이자 “示人”이며 “視人”이고 “屍人”일 수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인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이”이다. 곧 시인은 “안 보이는 것”과 “못 보는 것”과 “없던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평범한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인은 남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언가를 특별한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박방희가 보기에 언젠가부터 진정한 시인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眞境”을 제시해야 할 시인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제 “가슴의 진경”을 제시할 수 있는 시인도 찾기 힘든 시대가 도래하였다. 박방희가 보기에 “제 화장한 얼굴이나 봬주려 애쓰”는 이는 시인이 아니다. 그런 자는 詩人이 아닌 屍人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통해서 많은 독자들이 “뭔가 좀 신선한 것 볼만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시인을 찾는 여정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십대는 몸이 무거우니 봄도 무겁다 신길역을 통과하는 오후 3시50분, 가까스로 전철에 올라 조심스레 하중荷重을 내려놓는다 저맘때면 輕은 없고 重만 있어 세상사 모두가 근심스럽다 이루지 못한 꿈들과 지고 온 무게로 비틀거리며, 그는 지금 생의 어느 굽이쯤에 도달한 것일까 피기 시작하는 검버섯과 주름진 목살을 늘어뜨리고 쏟아지는 잠 속에 깜박 졸다 깰 때마다 눈을 뜨고 두리번거린다 한때는 그의 영혼도 깃털처럼 가벼웠으리라 체불된 욕망과 무효 된 꿈으로 지구만큼 무거워진 그가 일어선다 무거운 生, 또 어디에 가서 부려놓을까 하루하루가 낯선 오십 대, 문이 열리자 쫓기듯 또 다른 플랫폼으로 발을 내민다
―「무거운 오십 대」 전문
시인은 “오십 대”에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오십 대’에 속하는 사람들의 핵심 속성은 형용사 “무겁다”와 강하게 결속된다. 박방희에 의하면 오십 대는 “세상사 모두가 근심스”러울 ‘나이’이다. 오십 대 중에는 “이루지 못한 꿈들과 지고 온 무게로 비틀거리”는 경우가 많다. “저맘때면 輕은 없고 重만 있어”, 부담스러운 “하중荷重”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이 파악하는 오십 대는 “무거운” 나이를 대표한다. 오십 대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오롯이 밀려오는 시기이고, 그동안 추구하던 인생의 성패가 판가름나는 시기이다. 이 시는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곧 “오후 3시50분”에 담긴 ‘시간’과 “신길역”에 담긴 ‘공간’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박방희는 이번 시에서 ‘무거우니’, ‘무겁다’, ‘荷重’, ‘重’, ‘무게’, ‘무거워진’, ‘무거운’ 등 ‘무겁다’ 관련 표현들을 반복하면서 변주한다. 반복과 변주는 시와 예술은 물론이고 문화와 삶에 있어서도 본질에 가까울 수 있다. 이 시는 지금, 오십대에 속하는 이들과 언젠가 오십대에 도달할 이들에게 은근한 힘을 제공한다.
오늘 문득 보니 빈손이다
비어서 환한 손
쓸쓸한 듯한 그 환한 손에
고요가 와서 숨 쉬고
비로소 한 생이 빈손 안에서 오롯하다
내 안에서 움터 세상을 향해 뻗은 손
이제 갑년으로 돌아와 펼쳐보는 손
고사리 같은 새순이 갈퀴가 되고
산지사방 퍼지는 그물손이 되었네
쥘수록 더 허전했던 손
끝내 그림자만 잡고 있던 손
움켜잡은 것 없어 놓아버리니
비로소 온전히 가득한 손
빈손이 받아 안는 푸른 허공
빈손에 나비같이 내려앉는 우주
비어서 받을 수 있고 받칠 수 있는
고요함으로
충만한 손
―「손」 전문
만약 인간에게 손이 없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인간에게 손은 매우 긴요하다. 손이 있기에 물건을 들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으며, 글을 쓸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에 많은 것을 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이 많은 것을 쥐기를 원한다. 손은 인간의 요구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써의 기능을 담당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인간은 늘 내뻗은 손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움켜잡기를 원한다.
박방희는 “이제 갑년으로 돌아와”, 손을 “펼쳐”본다. “고사리 같은 새순”을 닮았던 유년의 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갈퀴”가 되고 또 “그물손”이 되어서 확장되었을 것이다. 시인이 일생을 되돌아보는 노년의 시기에 손을 바라보니 “빈손”이었다. ‘빈손’은 “환한 손”이고 “고요가 와서 숨 쉬”는 손이며 “한 생이”, “오롯”한 손이다. 그는 “움켜잡은 것 없이 놓아 버리니 비로소 온전히 가득한 손”임을 깨닫는다. 박방희에 의하면 빈손은 “푸른 허공”이나 “우주”와 연결되는 “고요함으로 충만한 손”이다. 요컨대 텅 빔으로써 가득 찬다는 역설의 논리를 보여주는 개성적인 은유이자 상징이 바로 빈손이다.
박방희의 유고 시집 누란의 미녀를 점검하였다. 11편의 시를 중심으로 파악한 이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핵심어는 ‘영(靈)’ 또는 ‘영혼’이다.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에 의하면 “삶을 매혹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영혼의 끊임없는 창조성이다.(What keeps life fascinating is the constant creativity of the soul.)” 시인이 ‘영’ 또는 ‘영혼’을 노래한 이유는 삶의 마감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몸’ 또는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원했을 테다. 디팩 초프라는 삶을 매혹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요건으로서 영혼의 창조성을 생각했지만, 필자는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영혼의 창조성은 삶은 물론이고 죽음 이후의 상황에도 꼭 필요하다.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창조성을 지닌 영혼이 지속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 될 것인가. 영혼의 창조성이 언제까지나 시인에게도 또 우리들 모두에게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박방희가 쏘아올린 영혼을 위한 노래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좋은 글 모셔갑니다.
고 박방희 시인과 불교아동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했기에
불교아동문학회 케페에 게제, 홍보 코져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