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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기 목사
오늘은 우리 성도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사랑하던 분들을 교회로 모시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시고 온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 가지고 싶은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제가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부터 출발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어 전 세계 경제가 거의 공황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문에 “편두통보다 심한 펀드통! 약이 없다.”라는 제목의 뉴스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리나라 펀드 가입 숫자가 2400여만 계좌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펀드 공화국’으로 불렸는데, 요즘 펀드 가입자들은 반 토막 난 펀드 때문에 ‘펀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밤사이에 미국 증시가 폭락했을까 봐 “아침이 무섭다”는 투자자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가 극도로 침체되어, 쉽사리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습니다. “과연 취직을 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영영 취직을 못하고 영구적인 실직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진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장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아이들 공부를 시키고, 결혼을 시킬 수 있을지, 그러고 언제 노후 대책을 할 수 있을지 계산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온통 경제 문제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지난 20일에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정00라는 30대 남자가 “세상이 나를 무시한다. 살기가 싫다.”며 자신이 거주하던 고시원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6명이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어이없고 끔찍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나와 내 가족들이 언제 어디서 이런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보편적인 현상, 두려움!
여러분!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우스개로 하는 말에 아이큐가 90이하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걱정도 없답니다. 그러나 오히려 똑똑한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걱정도 많고, 두려움도 많은 법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저럴 것이다. 저러니까 이럴 것이다.” 미리 추측을 하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은 우리를 안심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나 조건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곤충을 두려워해서 바퀴벌레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쥐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뱀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두운 밤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합니다.
예화) 프로그램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4층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다 보니까, 어떤 운전자가 자가용을 몰고 일정한 장소를 지나가기만 하면, 차에 장착된 도난 방지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다른 차는 안 그러는데, 유독 그 차량만 그럽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운전자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무당에게 물어보았더니, 무당이 하는 말이 “죽은 당신 큰 아버지가 당신에게 원한을 품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자기가 해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적을 태워 마시면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부적을 태워서 물에 타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장소만 지나면 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겁니다. 주인공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인해서 어두워졌습니다.
방송 제작진들이 “이건 전파 장애가 아닌가?” 추측을 하고, 전파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전파연구소에서 나와 그 지역을 조사해 보니, 그 지역에는 큰 송전탑이 산에 높이 서 있는 관계로 강한 전자파가 다른 곳보다 더 많이 잡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차에 붙어 있는 경보 장치를 떼어가지고 연구소에 가서 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해 보니까, 이 경보장치 한 부분이 고장이 나서 이상 전파에 오작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경보장치를 수리하고 나니까 아무 이상이 없는 겁니다. 그제야 주인공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인생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그 마음속에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새삼 느껴보았습니다.
두려움의 원인
두려움은 무지 곧 지식의 부족에서 옵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옛날 사람들은 개기일식 현상을 불길한 징조라고 보고, 크게 두려워했었습니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도는 가운데, 일식까지 일어나면 온 나라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현대인들은 개기일식 현상을 보고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풍성해진 현대인들이 두려워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지식의 부족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뭐가 뭔지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몸은 아픈데,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탈이 나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습니다. 지식의 양은 수백, 수천, 수만 배로 커졌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날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지식을 우리는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배운다고 해도 결코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분야 외에 다른 분야의 일을 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처음 보는 기계를 다루려고 하면 두려움이 오고, 낯선 곳에 가거나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도 두렵습니다. 왜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밤새 안녕’이라고 하루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20일에 일어난 고시원 방화 살인 사건으로 숨진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 동포들이었습니다. 사망자들의 부모 형제들이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조국 땅에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내일 일을 모르는 게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일 겁니다. 죽음을 왜 두려워합니까?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뒤에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고, 죽음이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임을 알고 있는 성숙한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두려움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슈퍼맨이라는 영화를 다 보았거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슈퍼맨에게는 보통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난제들이 난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보통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문제들이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멋지게 뽐내는 기회가 됩니다.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처럼 우리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할 수만 있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삶에서 부딪쳐 오는 난제들은 한바탕의 신나는 놀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한 번 쯤은 슈퍼맨의 환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어릴 적에는 눈짓 하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부모님들을 꼼짝 못하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한 바탕 퍼질러 앉아서 울어 제치면 만사 오케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지구를 자기중심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환상은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여기 모인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으며, 단 한 사람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른 사람은커녕 자기 자신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자신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내일 어떤 두려운 일이 발생할지? 그리고 그런 두려운 일이 발생하면 자신은 도무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움이 주는 것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주는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완전히 나쁜 열매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건전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건전한 두려움은 우리를 조심하게 하고, 위험을 대비케 합니다. 예컨대,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건전한 두려움입니다. 법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켜야 사회 질서가 확립되고, 또 벌금을 물게 하거나, 자신을 감옥에 보내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됩니다. 또 위험한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의 안전과 건강을 보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두려움은 해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쥐는 고양이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쥐가 가까이서 고양이를 만나게 되면, 달아나지를 못합니다. 고양이를 본 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쓰고 엉금엉금 기어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쥐가 고양이를 보면 잡히기 전에 벌써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쥐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사지가 마비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흐릅니다. 심장에 큰 쇼크가 와서 졸도를 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사태 판단을 제대로 못합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서커스단에서 줄을 잘 타는 사람이 줄을 잘 타다가도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며, 두려운 생각이 들게 되면, 그 순간 줄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링에 오른 복싱 선수가 상대방 선수의 눈빛에 기가 꺾이며 두려운 마음이 들어오면 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각종 신경성 질병을 불러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근심과 염려 그리고 불안 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필경은 신경 계통의 질병, 소화기 계통의 병, 심장 계통의 병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화) 어떤 여자가 남편과 두 번째 사별하고 한 믿음직한 남자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새로 결혼한 남편은 착한 사람이어서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에 겨워야 할 부인은 점점 몸이 약해지고 얼굴마저 날이 갈수록 핼쑥해져만 가는 겁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물었습니다. “어디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 거요?” 그러자 부인은 단지 마음의 병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진실하고 착한 남편은 자신이 잘못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어떻게 더 사랑해주면 되겠느냐?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하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하나요?”
이 부인은 과거에 이미 두 번이나 남편과 사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세 번째 남편도 또 죽으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두려워진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끌어다가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Anticipatory anxiety(예기 불안)’이'라고 불렀습니다. 예기 불안은 일종의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이 병은 남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잘 걸리기 쉽습니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이런저런 지식을 근거로 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를 미리 걱정하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걱정 근심, 불안과 두려움은 미래를 가불하여 사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런 예기 불안에 떨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
두려움은 보편적인 질병과 같은 현상인데, 이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있습니까? 신경 정신과 계통의 약들이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는 약은 없습니다. 술에 만취하거나 마약에 취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담해집니다. 그러나 그게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할 길이 세상에 없기에 두려움에 대해서 눈을 감으려는 사람들도 많고, 술이나 마약이나 오락이나 스포츠와 같은 것에 몰입함으로 두려움을 맞서지 않고 회피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할 진정한 해결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두려움에 대한 완전하고 확실한 해결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서 굳세게 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도와주시고, 붙잡아주신다.”는 말의 의미를 풍성히 이해할 때에 우리는 넉넉히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질그릇처럼 쉽게 깨어지고 부서지는 존재입니다. 또 우리 인생들은 풀과 같고 안개와 같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인간은 갈대와 같은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단 생각할 줄 아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종이는 약합니다. 그러나 종이를 나무에 붙이면 나무만큼 강해지고, 시멘트벽에 붙이면 시멘트벽만큼 강해지고, 강철판에 붙이면 강철판만큼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연약한 종잇장과 같은 우리 인생들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믿음으로 접붙이면, 우리는 하나님만큼 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난 너무 의지가 약해. 난 너무 몸이 약해. 난 너무 마음이 약해. 난 너무 정에 약해. 난 저 사람이 너무 두려워.” 이런 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 약속대로 자신을 굳세게 해 주실 것을 요구하십시오. 굳세고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시56:3,4절). 14, 15절에 보면 지렁이처럼 연약한 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가 되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모저모로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부모형제를 의지해 보지만, 큰 도움이 못될 때가 더 많습니다. 서로 도와주려고 하다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쳐서 함께 무너지고 형제간의 의만 상한 적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친구 빚보증 서 주다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헛것입니다.
성경 시편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했습니다(시145:3,4절).
그 대신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146:5).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고(시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렘33:2,3절).
예화) 전 단국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장충식씨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단국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28년째 되었을 때, 정치권에 잘못 보여 총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후임 총장서리한테 교직원 월급이 26억 원이 모자란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병원을 세운다고 했다가 자금난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돈을 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분 마음속에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안 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번 하나님께 기도해보자!”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한때 금산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려고 했던 그분은 교회에 나가본 적도 없고 기도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무실 문을 잠그고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잘못입니다. 제가 욕심을 부려 병원을 세우려다가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 자금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그분은 난생 처음으로 한없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정말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26억원이 하루 만에 마련되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집에 있던 불상과 불경을 다 버리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도 숱한 고난이 있었고 자금 압박이 계속되었습니다. 매일 죽을 맛이었지만 어려움이 심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신기한 일은 그처럼 매일 자금압박에 시달렸지만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감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자신의 교만도 회개했습니다. 총장직에서 물러나자 그 동안 측근으로 있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처음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나 그 상처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결국 얼마 후에 그분은 다시 단국대 이사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말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죄인들이라서 수 없이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잡아줄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내가 잘 나갈 때는 옆에 친구도 많지만, 내가 넘어지면 다 외면하는 게 세상인심입니다. 한두 번 잡아주는 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끝까지 붙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힘들 때는 한두 번 붙잡아주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넘어질 때에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라고 고백했습니다(시94:18).
주님께서 한 번 우리를 붙잡으시면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히13:5).
이 약속을 믿은 성도들은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고동락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었을 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수준에서 먹고 마시고 어울려 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환난과 고통을 겪어 보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소외, 멸
시천대를 당해 보셨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 죄 값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사55:5,6절).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며,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라!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굳세게 해 주시고, 붙잡아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시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도 인격적인 분이기에 우리를 강제하시지 않고, 우리의 인격에 호소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십니다(계3:20).
문을 두드리신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와 함께 하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굳세게 해 주고, 너를 붙잡아 주고 싶구나. 그래서 네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구나. 그러니 네가 나를 너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고 마음속에 모시겠느냐? 네가 그렇게 결정하고 나를 영접하면 내가 네 마음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고, 굳세게 해 주시고,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걱정 근심에 매여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염려 근심이 밀려들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 즉시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속에 강 같은 평안이 흘러넘치게 하시고, 샘솟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내가 함께 하며 도와줄 터이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