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인생무상
주님의시선
인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들로 인해 인생의 평안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본문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잇다.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깨달은 전도자는 그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이다(전1:2).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물질에 대해서도 전도자는 헛되다고 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는 물질이나 지혜나 쾌락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때 주어진다고 한다.
1. 만물이 헛됨(전1:1-1:11)
저자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한다(전1:2). 전도자는 인생을 자연 현상에다 비유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의 경험으로 바라볼 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되고 악한 일을 하는 삶들은 언제나 망하게 된다는 사고 방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정식은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그리고 주어진 시간 속에 갇혀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삶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가?
1)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
인간은 정해진 이치(히9:27)에 따라 오는 죽음으로 인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인생의 허무감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창3:6-9).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세대는 가고 다음 세대는 오지만 땅에는 변함이 없다(전1:4). 이것은 간접적으로 고등한 인간이 땅보다도 못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도자는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면서 태양과 바람에 비유를 하였다(전1:5,6). 하지만 이러한 것은 곧 식어지고 잔잔해지게 된다. 바로 인생도 이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한다(전1:7,8). 다라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으며, 인생에는 죽음이라는 끝이 있는 것이다.
2) 인간 삶의 영속성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인해 끝없이 만족을 누리며 살고 싶지(전1:3),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쌓아올린 무수한 업적도 죽음과 함께 땅속에 매장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세상의 일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참삶의 가치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명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다.
2. 지혜도 헛됨(전1:12-2:17).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리며,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말미암아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가?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지혜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얻은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지혜는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1)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음
지혜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히9:27). 물론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남들보다 좀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나(전1:13,14), 결국은 세월이 흐른 뒤 그것은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인간의 전존재에 대해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된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지혜와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깊은 근심과 고통 속으로 끌고 간다. 즉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끝없는 문제의 심연을 이끌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자는 그 지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딤후3:15-17),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여야 할 것이다(욥36:26).
2) 겸손한 인생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이처럼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 일수록 겸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전1:15). 그 한계를 깨달을 때 인간은 삶의 참된 방향을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혜와 겸손은 병행되어야 하지만 현실을 볼 때 역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지혜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인생무상(전2:18-26)
전도자는 인간의 지혜로 삶의 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다른 방향으로 시각을 돌린다. 철학적으로 인생의 규명에 실패하자 이제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참된 삶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재물들과 세계적인 명성들(왕상 10:6,7)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결과를 낳게 하는가?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1) 심령으로 낙을 누려야 함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들의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재물을 쌓아놓는다(전2:3-5).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오는 웃음과 육체적으로 느끼는 쾌락은 미친 것이며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전2:2).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해 보아도 그것이 결코 인생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죽음은 인생이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물어 버리고 만다.
2)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
인간의 욕심은 인생의 즐거움과 여유를 앗아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필요한 사랑과 봉사와 교제의 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려는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된 인생의 가치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만이 인생의 최대 목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은 헛되다. 인간들이 맛볼 수 있는 물질적, 육체적, 영적인 참된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약1:17). 이 세상이 주는 것은 유한하여 결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죽음 뒤에 오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본문 해설
1. 대자연의 허무함(전1:4-11)
본 서에서는 자연계의 단조로운 활동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거나 잠깐 동안 존재하였다 사라지는 등의 모습을 통해 대자연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대조는 인간의 한계와 연약한 인간의 삶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수고를 하지만 결국 그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감을 보여 주고 있으며,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된 자연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것은 모든 대자연이 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대 자연의 아름다움도 인간이 죄로 더러워지자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부정적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만물이 새롭게 되어진다는 것을 기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
2. 불교의 허무사상
1) 존재론적 염세주의
불교에서는 윤생의 원리에 의해 사람이 태어나 죽은 후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사람이 고통받고 번뇌하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해방되는 것을 '열반'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간이 깨닫는 존재는 모두 허무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불교의 염세주의는 존재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윤생은 따지고 보면 두려운 법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 부모가 자기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 있으며, 어떤 것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한다.
2) 지식론적 염세주의
불교에서는 허망한 세상 속에서 건짐받기 위해 참선에 힘쓴다. 참선이라 함은 정신통일을 하여 잡념을 물리치는 것을 말하며, 이런 참선을 공부하는 데에는 논리적 사색 등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기독교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불교는 인간의 힘으로 정신 통일을 하여 종교적인 목표 지점에 도달 할 수 있는 반면에,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의 마음 자체만을 인정하는 불교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도 불교와 기독교는 극과 극을 달리며, 더불어 불교의 사상이 허무함을 알 수 있다.
3. 인간 수고의 헛됨(전2:18-23)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인간이 수고한 노동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이 이 땅에서 수고하며 노동하여도 그 수고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후대로 넘어가며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고 결과적으로 슬픔만을 가져옴을 전도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전2:21-23).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인간이 죄로 이해 비참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축복의 시대에는 인간이 수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예언했듯이 우리의 삶이 지금은 고되고 수고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그리스도로 인해 평안함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4. 최선의 삶(전2:24-26)
본 단락에서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의 허무한 삶에 관한 내용과는 대조적인 인생의 낙관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준 사명을 성실하게 잘 감당할 때 그 속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외부적인 환경을 통해 만족함이나 행복을 얻을 수 없으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허무에 관한 대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허무했던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와 참 기쁨과 평안을 얻으므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5. 에피쿠로스주의(Epicurean-ism)
에피쿠로스주의는 행복을 최고라고 일컫는 일명 '쾌락주의'를 말한다. 그들은 선을 쾌락으로 보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선과 동일시하는 것을 그들의 윤리학으로 삼았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은 생활 양식이었으며, 이 철학을 자연학과 윤리학의 목적과 수단을 찾는 실마리로 삼았다. 그러므로 쾌락주의자들은 고통을 비난하고 심리학적인 쾌락을 주장했으며 선과 쾌락을 동일시하였다.
출처: 주님의 시선 글쓴이: jua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