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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
- 신진식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여기저기서 시집이 많이 배달되어온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등단한 지가 약 35년 정도 되었고, 또 문학평론가이기 때문에 증정 받는 시집도 많다. 문인들이 보내는 증정도서는 일종의 ‘책 빚’에 대한 부채 갚기에 해당한다. 출판기념회 이틀 전, 신진식의 시집을 받았다. 맨 처음에 실린 시부터 먼저 보았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시를 읽었다. 그 다음에 눈여겨본 시가 표제시 <이럴 줄 알았으면>이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표제시를 골라 읽었다. 서너 편 정도 보니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었다. 사실 제목만 봐도 대충 시집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신진식 시인의 시집해설 부탁을 받고, 사실 제가 이분의 시적 역량을 모르는 상태라, 이분의 시가 문학적 성취에 대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대해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기우는 시집을 받게 되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을 그가 화두로 내던졌기 때문에 일단 그의 시적 작업에 신뢰성을 가지게 되었다. 가정법 과거에서 귀결절이 생략된, 조건절 <이럴 줄 알았으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메시지, 시적 진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시들은 읽어보지 않아도 시의 깊이를 속단할 수 있었는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는 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가 숨쉬고 있었다. 토포필리아적 향토애와 희망의 노래도 저항의식 못지않게 수놓아져 있다.
II. 신진식의 작품세계
본래 시는, 자동화 습관화된 지각을 지연시켜, 세계를 자아화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문학적 성취는 다음 네 가지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비가시성의 가시화 즉, 예술적 차원이다. 두 번째는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냐, 문학 본질적 차원이다. 세 번째 관점은 시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냐, 시학적 차원이다. 마지막 관점은 주변부 타자의 담론인가, 즉 작가의식 차원이다. 시인은 쉬운 시에 대한 시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가 부르는 메시지>에서 ‘고급스러운 시어를 꼭 찾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나열로 인하여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를 가끔 보게 된다.’고 하면서 난해시를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에는 메타포의 원리에 의한 간접적인 정서 표현보다 직설적인 날것의 감정 표출이 우세하다.
시집은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제목이 <한 줄의 시>다. 제2부는 <마음과 글>, 제3부는 <산다는 것>, 제4부는 <풀잎이 되어라>, 제5부는 <시가 부르는 메시지>로 되어 있다. 왜 시인은 <한 줄의 시>를 제1부에 먼저 놓았을까를 생각했다. 한 줄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한 줄의 시는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줄의 시는 ‘문단 의장’을 의미하는 역설적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짧은 문장에 깊은 뜻을 담아야 좋은 시가 된다는 시인의 시론이다. 시집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부산 좋아라>에는 시인의 이런 시론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봄이면 진달래 벚꽃
여름에는 밤나무와 편백숲
가을이면 떡갈나무 억새
겨울이면 산등성이에 피는 눈꽃
금정산 샛길 몇백 갈래
가도가도 낯설고 새로운 길
산이 많아 녹색에 마음 녹이고
바다가 있어 넓은 생각 세상 품으니
갈매기도 풍요롭게
끼억끼억
-<부산 좋아라>, 전문
무엇보다도 이 시집은, 지식인의 전형을 창조해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한국적인 사유 체계에 맞는 귀납법적 추론에 의해 직조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제일 처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산 좋아라>라는 시가 그 예이며, <부산 좋아라>라는 제목은 ‘아이 좋아라’라는 감탄사형의 구도에 들어앉은 까닭으로 ‘부산이 좋아라’처럼 부산이란 명사에 조사 ‘이’가 붙는 통사적 구조보다 ‘부산 좋아라’가 훨씬 더 시인의 토포필리아적 향토애를 강하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압권은 마지막 연 ‘갈매기도 풍요롭게/ 끼억끼억’이다. 갈매기는 물론 부산 시조라는 건 다 안다.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풍요롭게 끼억끼억’이다. ‘끼억끼억’은 의성어로 표층구조에서 청각이미지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끼억끼억’은 ‘기억’memory이라는 단어로 이화되면서 담론층에서 영적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순질이화를 통해 이미지를 변주하고, 시어를 변용하고 다의어로 전환하는 능력은 신진식 시인의 시적 역량을 가늠하게 한다고 하겠다.
모든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첫 문장 쓰기라고 알려져 있고, 대부분의 시인은 도입부에 사활을 거는데, 신진식 시인은 도입부가 아니라 결말부에 승부를 거는 화룡점정의 기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다른 시인과 차별화되는 시적 기법이다. 수필과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컨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을 정도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건다.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문학의 멋과 묘미는 치환에 있다. 신진식은 이런 ‘발단의 예술’이라 불려 온 시를 ‘종결의 문학’으로 치환시킨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 알파와 오메가다’를 ‘모든 글은 마지막 문장이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말이다. 문학의 본질이 ‘이것’을 ‘저것’으로 변환하여 생성시키는 데 있다는 것과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귀납적이라는 것을 시인이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입추 새벽
쓰르라미 교향악단이
열심히 아주 부드럽게
연주를 합니다.
연주곡명은
“일어나라”
그대여 일어나라
시민이여 일어나라
우리나라 일어나라
쓰르라미는
열심히 아주 성실히 목청껏 연주하고
무대에서 죽어갑니다.
그래도 아직
풍성한 녹색 잎새들이 있어
그네들은 행복합니다.
쓰르라미는
죽는 줄도 모르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변해가는
인간들을 깨우치게 하려 합니다.
맴~~맴~~
쓰르리~~쓰르리
- <쓰르라미>, 전문
다음으로 신진식 시인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시인은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 없다고 한다. 시인은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달과 별과 하늘만 노래할 것인가>라는 산문을 보면,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시인은 이 부서진 세상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진식의 시는 현실인식에 대한 치열성을 드러내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쓰르라미>라는 시에는 시인의 이런 저항의식이 잘 드러난다. ‘“일어나라”, 그대여 일어나라, 시민이여 일어나라, 우리나라 일어나라’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신진식 시인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기도 하다. 죽음도 불사할 의식은 작가정신을 표상한다.
새벽별 바라보며 지난 일 생각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많이 베풀 걸
많이많이 비워 버릴 걸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남은 게 뭐야 남은 게 뭐야
뒤돌아보면 아쉬움뿐인데
이제부터라도 베풀고 만나보고
잘살아 봐야지
후회한들 무엇하나
행복 찾아 달려갈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둥근 달 바라보며 지난 일 생각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많이 만나볼 걸
많이많이 사랑할 걸
바쁘게도 살아왔는데
남은 게 뭐야 남은 게 뭐야
뒤돌아보면 아쉬움뿐인데
오늘부터라도 나누고 사랑하고
잘살아 봐야지
새로운 세상 더 좋은 세상
힘차게 살아갈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 <이럴 줄 알았으면> , 전문
그렇다면 신진식 시인이 바라는, 한 줄 시의 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많이 베풀 걸, 많이많이 비워버릴 걸’이란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고 보는 게 우주 인식의 원리다. 시인은 가정법 과거의 조건절, 단 한 줄을 화두로 던지며, 우리에게 진리를 찾아보라고 한다. 삶의 반성적 성찰이란 사유를 모든 시에 뿌리고 모방론에서 말하는 ‘적격’ 즉 성실성으로, 불굴의 저항정신을 정직하게 담아내었다. 시인이 계속해서 한 시 안에 일곱 번이나 ‘이럴 줄 알았으면’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것의 함의를 포착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불확실성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움은 여기저기
구석구석 숨겨져 있다
지나쳐 버린 여행의 추억
지나간 세월
스쳐 간 사람들
그리움을 한장 한장
끄집어내 본다
못 이룬 사랑도 켜켜이 쌓여 있다
오늘은 다섯 장이나 보았다.
쌓아 놓았던 그리움을
매일매일 한 장씩 펼쳐 봐야겠다
- <그리움>, 전문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이 시집 한 권을 권한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 <그리움>은 비가시성의 관념인 ‘그리움’을 구체어로 가시화하면서,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시인은 ‘못다 이룬 사랑을 오늘 하루 동안에 다섯 장이나 본다. 그리고는 쌓아놓았던 그리움을 매일매일 한 장씩 펼쳐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신진식 시인의 시어 배치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전체 시가 현실인식의 치열성을 보이면서도 방법론과 기교의 다양한 층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이런 경우 시가 현실과 지나치게 밀착됨으로써 현실과 예술의 미적 거리 조정에 실패하여 결국 미학성은 배제되고 현실만 생경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진식의 시는 제재통찰이라는 심층구조 없이 표층과 담론층이란 이중구조에서 탄생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현실감각과 관련 있는 표층구조와 메시지의 함축과 관련이 있는 담론구조가 현실참여 의지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는 장점이 있다.
모진 세월 지나간 자리
조선 팔도 피난민
아우성이 묻어있는
보도블록을 바라보며
붉어진 눈시울 명상 속에 스민다
전쟁 그리고
화재 또 화재
타다 남은 양은냄비
숟가락 젓가락
한 개라도 더 건지려고
씻고 털고 문지르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뒷골목 선술집엔
탄식 소리가 회오리친다.
시껄벅적 시장터
서구식 재벌들이 폭격에 맞아
Q 마트 X 마트 이름도 생소한 곳으로
아줌마네들 몰려가네
그래도 원망 마라
이 자리에는 천 년 세세 이어갈
정도 있고 이웃도 있고
아이의 웃음소리
팽이처럼 맴돌고 있잖니.
- <국제시장>, 전문
시적 화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시각 중심주의’ 시대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시인은 <국제시장>을 통해 말한다. 시인은 모진 세월 지나간 자리, 국제시장에 서서 아우성이 몰려 있는 보도블록을 바라보며 ‘붉어진 눈시울/ 명상 속에 스민다’고 하면서 ‘그래도 원망마라/ 이 자리에는 천 년 세세 이어갈/ 정도 있고 이웃도 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팽이처럼 맴돌고 있잖니’하고 희망의 시학을 전개한다. 물질주의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시인은 시각 중심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 특히 청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신진식의 시에는 ‘구호’와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현상학적 지향을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시인의 저항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III. 로그아웃
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시집이란 이름 하에 제5부, <시가 부르는 메시지>란 짧은 산문을 싣고, ‘별과 달 하늘만 노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부제로 달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몇 편의 산문을 통해 적어도 시인이라면 작가정신으로서 시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아야 하고,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는 현실의 왜곡상을 폭로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도가 드러나 있다. 시적 형상화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어,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이다. 작가정신이 넘치는 까닭이다.
아마도 아직은 흥분 상태일 것이다. 이들 시가 완성품이라 생각하지 말고, 시간 날 때, 이들 시와 객관적인 거리를 가지길 바란다. 조금이라도 냉정해지면, 결함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집에 산문을 싣는 이런 식의 편집이 바람직하다고는 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시대와 역사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시를 주변부 타자의 담론으로 가져가려는 시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시집해설을 마친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 드러나고 있는 신진식 시인의 촛불, 등불, 그리고 횃불로서의 선구자적 작가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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